SF 생태주의
작가보다 그리고 소설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하다 본문
가끔 장편 연재 작가들은 너무 천천히 연재를 진행합니다. 스티븐 킹이 쓴 <다크 타워> 시리즈 역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소설 <다크 타워> 시리즈는 판타지, 서부극, 고딕 호러, 사이언스 픽션, 평행 우주와 차원 이동을 버무립니다. 스티븐 킹은 소설 <반지 전쟁>처럼 아주 기나긴 서사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고 <다크 타워> 시리즈가 기나긴 서사시가 되기 원했습니다. 왜 기나긴 서사시가 매력적인가요? <반지 전쟁>을 읽은 이후, 왜 스티븐 킹이 기나긴 서사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장대하고 복잡한 세계 설정 역시 이유가 될 겁니다.
아주 기나긴 서사시에서 소설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장소들을 방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양한 장소들과 다양한 사람들에게는 배경 설정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배경 설정들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이 장소는 다른 장소에 영향을 미치고,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배경 설정들이 얽히고 얽힌다면, 이것들은 아주 장대하고 복잡한 세계 설정이 될 겁니다. 어떻게 작가가 이런 장대하고 복잡한 세계 설정을 보여줄 수 있나요? 세계 설정이 복잡하다면, 작가는 이걸 한 번에 보여주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기나긴 서사시는 중요한 형식이 됩니다.
아주 기나긴 서사시에서 소설 등장인물들은 연이어 여러 장소들을 방문합니다. 독자는 소설 등장인물들과 함께 세계를 여행합니다. 독자가 순차적으로 여행하는 동안, 독자는 순차적으로 배경 지식들을 쌓을 테고, 나중에 이것들은 장대하고 복잡한 세계 설정으로 승화할 겁니다. 소설 <반지 전쟁>은 어떻게 기나긴 서사시가 효과적이고 순차적으로 장대하고 복잡한 세계 설정을 보여주는지 증명했습니다. 비단 <반지 전쟁>만 아니라 수많은 서사 판타지들은 이런 연출 방법을 좋아합니다. 온라인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들은 이런 연출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방대한 세계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끝없는 여정을 떠납니다.
끝없는 여정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방대한 세계를 느낍습니다. 스티븐 킹은 이게 아주 매력적이라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스티븐 킹은 기나긴 서사시, 아주 길고 길다란 서사시를 쓰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스티븐 킹이 너무 천천히 썼기 때문에, <다크 타워> 시리즈는 쉽게 결말을 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노인 독자는 결론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크 타워> 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노인 독자는 고인이 될지 모릅니다. 노인 독자가 고인이 된다면, 노인 독자는 어떻게 <다크 타워> 시리즈가 끝나는지 알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노인 독자는 스티븐 킹에게 결말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 킹은 결말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스티븐 킹 역시 결말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은 결말을 구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작가가 소설을 머릿속에서 구상했다고 해도, 작가가 직접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구상과 집필은 다릅니다. 만약 모든 구상이 모든 집필과 똑같다면, 소설 쓰기는 힘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가 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작가가 손을 움직일 때, 양쪽은 다릅니다. 스티븐 킹이 소설을 직접 쓰기 전에, 스티븐 킹은 무슨 결과가 나타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화가 그저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런 일화에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일화는 작가가 소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작가는 소설을 쓰나, 작가는 신이 아닙니다. 작가가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작가는 알지 못합니다. 만약 <다크 타워> 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어떤 이유 때문에 스티븐 킹이 절필했다면, 스티븐 킹은 어떻게 <다크 타워> 시리즈가 끝나는지 절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교통 사고를 겪은 이후, 스티븐 킹은 자신이 죽기 전에 <다크 타워> 시리즈가 끝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독자들이 결말을 묻는다고 해도, 스티븐 킹은 대답하지 못했을 겁니다. 스티븐 킹이 소설을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이런 사례들을 쉽게 가정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킹이 <다크 타워> 시리즈를 장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작가들 역시 소설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작가는 오직 머리와 손만으로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작가는 현실을 이용해 소설을 써야 합니다. 현실은 소설을 쓰기 위한 재료이고 배경 공간입니다. 흔히 독자들은 초월적인 시공간 속에서 작가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 특정한 시공간, 특정한 현실 속에서 작가는 이것들을 이용해 소설을 씁니다. 아무리 SF 작가가 머나먼 외계 행성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작가는 머나먼 외계 행성으로 떠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SF 작가는 현실을 이용해 머나먼 외계 행성을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작가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다는 사실입니다. 작가는 현실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불완전한 인간 존재로서 작가는 현실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신이 아닙니다. 창조신으로서 작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도, 소설은 현실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소설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도, 작가는 자신이 그걸 썼다고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작가가 어떤 진실을 소설 속에 집어넣었다고 해도, 작가는 그게 진실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진실을 집어넣었다고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반 예프레모프는 과학자이고 동시에 SF 작가입니다. 이반 예프레모프는 어떤 과학 가설을 머릿속에 떠올렸으나, 이게 사실인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이반 예프레모프는 그 과학 가설을 이용해 SF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은 허구입니다. 과학자로서 이반 예프레모프는 과학 가설을 주장하지 못했으나, SF 작가로서 이반 예프레모프는 얼마든지 과학 가설을 이용해 허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반 예프레모프는 그 과학 가설이 옳다고 깨닫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반 예프레모프는 진실을 소설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하지만 이반 예프레모프가 소설 속에 진실을 집어넣었다고 해도, 이반 예프레모프는 그게 진실인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작가가 소설 속에 진실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작가는 진실을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작가는 저도 모르게 거짓을 쓰거나, 진실을 쓰거나, 그저 막연하게 현실을 반영하는지 모릅니다. 1969년 소설 <어둠의 왼손>은 양성 게센 사람들을 이야기하나, 이 소설은 남성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SF 작가이자 비평가이자 전투적인 페미니스트 조안나 러스는 분노했고 소설 <어둠의 왼손>에 여자 등장인물들이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깜짝 놀랐고 나중에 여성 대명사를 집어넣었습니다.
나중에 어슐라 르 귄이 <어둠의 왼손>을 고쳤기 때문에, 이제 <어둠의 왼손>은 여자 등장인물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어둠의 왼손>이 바뀌기 전에 어슐라 르 귄이 절필했다면? 어슐라 르 귄이 흥미를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르 귄이 SF 소설들을 쓰지 않았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어슐라 르 귄이 SF 소설들을 쓰지 않았다면? 만약 어슐라 르 귄이 절필했다면, 1969년 소설 <어둠의 왼손>은 바뀌지 않았을 테고, 오늘날에도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어둠의 왼손>을 비판했을 겁니다. 1969년에 어슐라 르 귄이 <어둠의 왼손>을 선보였을 때, 어슐라 르 귄은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조안나 러스 같은 비평가들 덕분에 어슐라 르 귄은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어슐라 르 귄은 소설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이런 사례는 <다크 타워> 일화 및 이반 예프레모프 일화와 다소 다릅니다. 하지만 <다크 타워> 시리즈와 이반 예프레모프 단편 소설과 <어둠의 왼손> 모두 작가가 소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개구리처럼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속편 <잃어버린 세계>는 이런 주장을 뒤집고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속편을 쓸 수 있었고, 그래서 마이클 크라이튼은 주장을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잃어버린 세계>를 쓰기 전에 마이클 크라이튼이 절필했다면? 마이클 크라이튼이 바이오펑크 테크노 스릴러보다 다른 것들에 흥미를 느꼈다면? 속편 <잃어버린 세계>가 없다면,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여전히 개구리가 되어야 합니다. 개구리처럼,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바뀔 수 있습니다. 속편 <잃어버린 세계>에서 고생물학자 리처드 레빈은 앨런 그랜트를 아주 열심히 깝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앨런 그랜트는 주연 고생물학자입니다. 주연 고생물학자로서 앨런 그랜트는 대단한 활약을 펼칩니다. 하지만 속편 <잃어버린 세계>에서 리처드 레빈은 앨런 그랜트를 깝니다. <잃어버린 세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심지어 작가는 전작 주연 등장인물을 열심히 깔 수 있습니다. 소설은 바뀔 수 있습니다. 소설은 작가를 절대적으로 반영하지 않습니다. 소설이 작가를 절대적으로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소설을 해석할 때, 독자는 작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작가보다 소설을 평가하고 소설보다 소설을 둘러싼 현실을 평가해야 합니다.
문학 평론가가 어떤 기발한 해석을 내놓는다면, 어떤 독자들은 그 해석에 반박할 겁니다. "뭐야? 이건 말이 안 돼! 작가는 절대 이걸 의도하지 않았을 거야! 인터뷰에서 작가는 자신이 그걸 의도하지 않았다고 밝혔어! 그래서 이 해석은 틀렸어!" 이렇게 어떤 독자들은 반박할 겁니다. 사실 많은 독자들은 작가를 따르기 원합니다. 문학 강의 수업부터 인터넷 영화 사이트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작가에게 아주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합니다. 분명히 작가는 중요한 평가 기준입니다. 아무리 어슐라 르 귄이 실수했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소설 <어둠의 왼손>이 다카키 마사오 같은 수구 꼴통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가 소설 <어둠의 왼손>이 수구 꼴통들을 옹호한다고 해석한다면, 이건 틀린 해석이 될 겁니다. SF 독자들이 어슐라 르 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해도, <다크 타워> 시리즈와 이반 예프레모프 단편 소설과 소설 <잃어버린 세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작가는 완전한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작가는 저도 모르게 어떤 현실을 소설 속에 집어넣을지 모릅니다. 문학 평론가는 그걸 찾아내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가와 평론가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작가는 쓰고 평론가는 해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