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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소설은 설명보다 반영을 추구한다

OneTiger 2019. 8. 31. 22:37

소설은 허구이고 창작물입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연극, 영화, 게임 같은 것들은 허구이고 창작물입니다. 이런 것들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왜 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나요? 소설과 철학이 똑같은 주제를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철학보다 소설이 훨씬 친숙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래학 서적과 사이버펑크 영화가 똑같이 암울한 미래를 그린다고 해도, 사람들은 미래학 서적보다 사이버펑크 영화를 시청하고 싶어합니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으나, 이야기를 전개하거나 좋아하는 등장인물을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은 게임 규칙을 비틀거나 무시합니다.


소설, 만화, 연극, 영화와 달리, 게임에서 이야기보다 규칙은 훨씬 중요하나, 그렇다고 해도 게임에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종 어드벤처 게임들에서 규칙처럼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어드벤처 게임 이외에 전략 게임이나 경영 게임, 액션 게임, 사격 게임에서도 이야기는 규칙을 뒷받침하고 게임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심지어 <매스 이펙트 3> 엔딩이 불타는 화제가 된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야기에 크게 열중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왜 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나요? 이 세상에 온갖 미래학 서적들이 있음에도, 왜 우리가 구태여 SF 소설들을 읽나요?



창작물이 허구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창작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엄중하게 과학 기술을 고증한다고 해도, 하드 SF 소설은 허구입니다. 하드 SF 소설은 진짜가 아닙니다. 반면, 미래학 서적은 훨씬 '진짜'에 가깝습니다. SF 작가가 과학 고증을 무시한다고 해도, 독자는 SF 작가를 비판하지 못합니다. SF 작가가 엉터리 이론을 설명한다고 해도, 독자는 SF 작가가 거짓말한다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소설 <쿼런틴>에서 그렉 이건이 엉터리 양자 역학 이론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독자는 그렉 이건이 거짓말한다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소설이 허구이고, 소설에게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쿼런틴>이 양자 역학을 잘못 설명한다고 지적할 수 있으나, 독자는 <쿼런틴>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허구는 명제가 아닙니다. 독자는 허구를 이용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창작물이 허구이고 수많은 해석들을 낳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창작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창작물은 지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독자가 SF 소설들을 읽는다면, 독자는 어느 정도 과학 지식들을 쌓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독자가 정말 과학 지식을 원한다면, 독자는 SF 소설보다 과학 논문을 읽어야 할 겁니다.



만약 독자가 미래학 서적보다 SF 소설을 원한다면,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무리 창작물이 허구라고 해도, 창작물을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창작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훨씬 많을 겁니다. 왜 사람들이 창작물들을 좋아하나요? 미래학 서적과 SF 소설이 똑같은 주제를 다룰 수 있고, 심지어 미래학 서적이 훨씬 과학 기술을 충실하게 고증함에도, 왜 사람들이 구태여 SF 소설을 읽나요? 미래학 서적 속에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왜 SF 독자들이 미래학 서적 속의 이야기보다 SF 소설 속의 이야기를 원하나요? 이런 허구에 무슨 장점들이 있나요? 여기에는 여러 대답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관계 역시 대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등장인물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SF 소설 역시 소설이고, SF 소설 역시 등장인물을 내세웁니다. SF 소설은 개인보다 사회, 문명, 자연, 우주를 훨씬 중시하나, 이건 SF 소설 속에 등장인물이 완전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SF 소설이 사회, 문명, 자연, 우주를 논의한다고 해도,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SF 소설은 등장인물을 내세웁니다. 어슐라 르 귄이 쓴 <빼앗긴 자들>은 이른바 사회학 SF 소설이나, <빼앗긴 자들>은 진짜 사회학 서적이 아닙니다. <빼앗긴 자들>과 달리, 진짜 사회학 서적은 등장인물들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진짜 사회학 서적은 소설 시점을 이용해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빼앗긴 자들>은 소설입니다.



소설이 등장인물 심리를 묘사하거나 등장인물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독자는 등장인물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독자는 등장인물과 똑같은 공동체에 속하고, 공동체 속에서 독자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 서적 역시 인간 심리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심리학 서적은 허구적인 장치들을 동원하지 못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붉은 장미처럼 이웃집 영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심리학 서적은 이런 문장을 서술하지 못합니다. 심리학 서적은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사랑을 느끼는지 오직 설명할 뿐입니다.


심리학 서적은 등장인물을 내세우지 못하고, 등장인물 심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등장인물 심리를 직접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심리학 서적이 온갖 심리 이론들을 들이댄다고 해도, 심리학 서적에는 사회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적어도 심리학 서적에는 '문학적인 사회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소설을 비롯해 창작물에게만 이런 사회적인 관계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창작물을 원할 겁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추구합니다. 창작물들은 다양하고 수많은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하고, 우리는 다양하고 수많은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건 간접적인 사회 경험이 됩니다.



남자 고등학생이 마스다 미리가 그린 만화 <여자들은 언제나 대단해>를 본다면, 남자 고등학생이 직접 20대 여자 직장인들과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남자 고등학생 독자는 어떻게 20대 여자 직장인들이 느끼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남자 고등학생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압박하고 억누른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건 간접적인 사회 경험이고 새로운 사회적인 관계입니다. 현실 속에서 남자 고등학생은 이런 사회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나, 남자 고등학생 독자가 만화 <여자들은 언제나 대단해>를 보는 동안, 남자 고등학생 독자는 새로운 사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건 창작물이 제시하는 사회적인 관계가 반드시 진짜라는 뜻이 아닙니다. 로맨스 만화는 연애학 서적이 아닙니다. 로맨스 만화가 연인 관계를 제시한다고 해도, 이건 허구입니다. 연애 지식을 쌓기 위해 독자가 로맨스 만화를 본다면, 독자는 영원히 솔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로맨스 만화가 허구적인 연인 관계를 제시한다면, 독자는 허구적인 관계를 현실에 대입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독자는 시험하고 응용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로맨스 만화를 외면한다면, 독자는 아예 시험하지 못할 겁니다. 만화 속의 소개팅 자리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이 머뭇거리며 대화를 시작할 때, 모태 솔로 만화 독자는 이런 상황을 현실에 반영하고 응용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 서적 역시 연애 방법을 조언할 수 있습니다. 로맨스 만화보다 심리학 서적은 훨씬 전문적인 연애 방법을 조언할 겁니다. 야마모리 미카가 그린 만화 <한낮의 유성> 번외편에서 시시오 사츠키는 어떤 로맨스 만화 편집장과 만납니다. 본편 시시오보다 번외편 시시오는 훨씬 어른스럽고, 그래서 본편 시시오보다 번외편 시시오는 훠어어어어어얼씬 멋집니다. 하지만 이런 (본편보다) 멋진 시시오가 다가감에도, 만화 편집장은 자신이 연애의 귀재라고 말합니다. 로맨스 만화 편집장은 온갖 연애 만화들을 봤을 테고 온갖 연인 관계들을 '가상으로' 겪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로맨스 만화 편집장이 온갖 연인 관계들을 겪었다고 해도, 이건 가상 관계, 허구적인 관계입니다. 로맨스 만화 편집장은 심리학 논문을 쓰지 못하고 심리학 박사 학위를 내밀지 못합니다. 만화 편집장은 "어떻게 로맨스 만화들이 연인 심리를 묘사하는가?"라고 논문 주제를 정할 수 있으나, 이런 논문은 심리학보다 문학 비평에 속할 겁니다. 만화 편집장보다 심리학자는 훨씬 낫습니다. 만화 편집장보다 심리학자는 훨씬 전문적입니다. 하지만 심리학자는 오직 설명할 뿐입니다. 심리학자는 현실 그 자체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거대합니다. 심리학자는 모든 현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21세기 심리학이 대단하다고 해도, 21세기 심리학에는 한계가 있고, 21세기 심리학은 왜 이웃집 영희 앞에서 아랫집 수진이 연이어 말을 더듬는지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21세기 심리학이 그걸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이건 틀릴지 모릅니다. 한때 자연 과학자들이 우생학과 플로지스톤을 설명한 것처럼, 21세기 심리학은 엉터리 심리 이론을 설명할지 모릅니다. 여전히 21세기 진화 심리학은 여자가 태생적으로 조신하다고 우생학을 설명합니다. 21세기 진화 심리학처럼, 과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복도에서 이웃집 영희는 창문을 통해 꽃밭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아랫집 수진은 영희와 꽃밭을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수진의 눈동자는 영희와 화사한 꽃송이들을 함께 담았다. 수진은 손을 명치에 얹었고 입을 작게 벌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따스한 공기 속으로 작은 한숨은 희미하게 사라졌다." 이 문구들은 설명이 아닙니다. 이 장면에서 왜 수진이 한숨을 쉬나요? 수진이 영희를 좋아하기 때문에? 수진이 영희와 꽃밭을 번갈아 쳐다보기 때문에, 수진은 꽃송이처럼 영희가 사랑스럽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독자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수진에게는 다른 의도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수진은 창문을 닫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눈치 없이, 영희가 비키지 않았기 때문에, 수진은 한숨을 쉬는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 역시 틀리지 않습니다. 독자는 수진이 꽃송이 같은 영희를 사랑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독자는 수진이 창문을 닫기 원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두 해석은 모두 옳을 수 있습니다. 과학은 이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2+3은 5가 되어야 합니다. 독자가 수학 서적을 '문학적으로'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2+3이 7이라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창문 옆에서 수진이 영희와 꽃밭을 번갈아 쳐다보고 한숨을 쉴 때, 이것들은 반영입니다.



심리학은 현상을 설명해야 하고, 그래서 심리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로맨스 만화에는 이런 한계가 없습니다. 로맨스 만화는 일상을 반영합니다. 로맨스 만화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영이 맞든 틀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랫집 수진이 이웃집 영희를 볼 때마다, 아랫집 수진은 마음이 허전하다고 느낍니다. 심리학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나, 로맨스 만화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로맨스 만화 속에 이런 지문들이 있다고 해도, 지문들은 왜 수진이 한숨을 쉬었는지 설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는 왜 수진이 한숨을 쉬었는지 설명해야 하나, 로맨스 만화 작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로맨스 만화가 그저 일상을 반영할 뿐이라고 해도, 왜 수진이 한숨을 쉬었는지 로맨스 만화가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학 평론가들은 이게 훌륭한 연출 방법이라고 칭찬할지 모릅니다. '따스한 공기'와 '희미하게 사라진다'는 대조적입니다. 따스한 공기는 긍정적인 분위기이고, 희미한 소멸은 부정적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따스한 공기 속으로 작은 한숨이 희미하게 사라질 때, 여기에는 참과 거짓이 없습니다. 심리학은 학문이고, 학문은 참과 거짓을 가려야 합니다. 반면, 로맨스 만화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창작물은 설명이 아니고, 그래서 창작물은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자체로서 창작물은 비유인지 모릅니다.



만약 그 자체로서 창작물이 비유라면, 독자는 소설에게서 보편적인 주제를 이끌어낼 겁니다. 조지 엘리엇(메리 앤 에번스)은 19세기 서구 작가이나, 21세기 아프리카 독자는 조지 엘리엇 소설에서 보편적인 주제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21세기 아프리카 사회에 적용할지 모릅니다. 특정한 시대 상황에서 소설은 나타납니다. 특정한 시대 상황과 소설은 완전히 떨어지지 못합니다. 조지 엘리엇 소설은 19세기 서구 사회와 완전히 떨어지지 못합니다. 문학 평론가가 리얼리즘과 낭만주의와 고전주의를 운운하는 동안, 문학 평론가는 19세기 서구 사회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이 비유이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특정한 시대 상황에서 떼어내고 훨씬 보편적인 진리, 도덕, 선행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종종 이런 해석들은 과잉 해석으로 이어지나, 그렇다고 해도 많은 철학자들, 예술가들, 평론가들, 기호학자들, 언어학자들은 소설이 비유라고 (어느 정도) 동의할 겁니다. 이렇게 창작물은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일상을 반영/비유합니다. 이것을 위해 창작물은 시점과 등장인물, 연출 방법 같은 다양한 문학 장치들을 동원합니다. 이렇게 소설을 비롯해 창작물들은 가상의 사회 관계를 제시하고 문학적인 표현을 제시합니다.



이건 사회적인 관계가 반드시 창작물의 미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관계는 미덕이 될 수 있으나, 이건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가난한 여자가 수구 꼴통 재벌 할아버지와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수구 꼴통 재벌 할아버지를 긍정한다면, 이건 미덕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사례들에서 사회적인 관계는 중요한 미덕이 될 수 있습니다. 주류 문학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개인보다 사회를 중시하고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 역시 창작물이고, 창작물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가상의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논문이 아니고 미래학 서적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여러 SF 팬들조차 '창작물로서 사이언스 픽션'을 평가하지 않고 문학 장치들을 평가하지 않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논문 및 미래학 서적과 다릅니다. 미래학 서적과 사이언스 픽션이 비슷한 것 같다고 해도, 적어도 SF 팬들은 문학 장치들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어느 정도 과학 논문 및 미래학 서적과 겹칠 수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다른 미덕이 있습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사변 소설을 쓴다고 해도, 사변 소설 속의 세상이 21세기 산업 사회와 딴판이라고 해도, SF 독자는 사변 소설에서 보편적인 진리, 도덕, 선행을 이끌어내고 현실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과학 고증을 엄중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심지어 하드 SF 소설조차 설명보다 반영,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이 23세기 우주 시대의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엄중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23세기 우주 시대를 떠나고 21세기 자본주의 환경 오염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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