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세상 밑 터널>과 생산 중심 자본주의 본문
프레데릭 폴이 쓴 소설 <세상 밑 터널>은 상품 광고로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계속 시끄럽게 상품 광고를 떠들고, 소설 주인공은 그 광경을 희한하게 바라봅니다. 게다가 그 상품 광고는 사람들을 향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상품 광고는 다른 누군가를 향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꽤나 희한한 광경입니다. 사람들에게 상품을 광고할 필요가 없다면, 왜 그렇게 그 사람은 열심히 상품 광고를 떠들까요. 상품을 판매하지 못한다면, 광고는 가치를 잃습니다. 따라서 광고를 본 이후 사람들은 상품을 사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상품을 사든 말든, 광고를 떠드는 사람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아마 SF 설정에 익숙한 독자는 <세상 밑 터널>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SF 설정에 익숙하지 않다고 해도, 독자는 <세상 밑 터널>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할 수 있을지 몰라요. 너무 많은 SF 창작물들이 이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 밑 터널>을 읽지 않은 독자 역시 어느 정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현실과 가상이 희한하게 엇갈리는 설정을 이용한 SF 작가는 프레데릭 폴 이외에 많고 많습니다.
가상 현실, 인조인간, 멸망했으나 멸망하지 않은 세계, 정교한 가짜 세계, 평행 우주. SF 작가들은 이런 소재들을 신나게 썼고, 수많은 SF 소설들은 현실과 가상을 교묘하게 뒤섞습니다. 가상 현실 속에서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정말 현실을 살아간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외계인이 최면을 건다면, 지구인은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진짜 인간이 아니라 인조 인간일지 모릅니다. 진짜 인간이 인조 인간들이 조성한 놀이 공원에 놀러갔다고 가정하죠. 거기에서 진짜 인간은 다른 관광객들을 만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관광객들 역시 인조 인간일지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이미 외계인들은 인간으로 변장하고 지구를 장악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걸 모르고 그저 외계인이 인간이라고 착각할 뿐인지 모르죠. 이런 소설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 순간에 뒤집고 굳건한 믿음을 산산조각으로 부숩니다. 그래서 이런 소재는 많은 인기를 끌고, 누군가는 이런 내용이 너무 진부하다고 비판할지 몰라요. 하지만 SF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발상이나 설정이 아닙니다. 발상과 이어지는 주제 역시 중요해요.
상품 광고를 강조하는 소설로서 <세상 밑 터널>은 자본주의 체계를 풍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이 상품 광고와 대량 소비를 비판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프레데릭 폴은 <우주 상인>을 썼고, 아예 우주적인 광고 회사를 내보냈죠. 저는 <세상 밑 터널>을 읽은 독자가 상품 광고라는 요소를 좀 더 깊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상품 광고가 중요할까요. 왜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상품 광고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프레데릭 폴은 자본주의 체계를 제대로 분석하거나 예측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세상 밑 터널> 같은 소설은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고, 그저 풍자 소설이라는 가치만 남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비일상적인 설정은 우리가 일상을 돌아보도록 유도합니다. 저는 그게 커다란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밑 터널>이 현대적인 시장 경제를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고 해도, 이런 소설은 중요한 화두를 던질 수 있죠. 왜 그렇게 광고가 중요할까요. 수많은 사람들은 대량 소비가 대답이라고 말할 겁니다. 상품 광고가 존재하는 이유는 대량 소비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소비 중심 자본주의 운운하죠. 소스타인 배블런 같은 경제학자는 그런 소비에 주목했고요.
하지만 대량 소비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량 소비는 선척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이건 후천적인 현상입니다. 대량 생산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량 소비 역시 존재할 수 있어요. 게다가 대량 생산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대량 소비는 그걸 따라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대량 생산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으나, 대량 소비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거품들을 터뜨리고, 경제 공황들을 터뜨립니다. 따라서 소비 중심 자본주의는 틀린 표현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생산입니다. 생산이 존재할 때, 소비 역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생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생산이 존재할 때조차 소비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제 공황은 과잉 생산에서 비롯하죠.) 광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광고 역시 존재하지 못합니다. 거대 상품 광고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생산량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죠. 수많은 사람들은 소비 중심 자본주의 운운하고, 마치 소비가 중요한 것처럼 몰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틀리거나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핵심은 소비가 아니라 상품 생산입니다. 우리가 너무 소비에 초점을 맞춘다면, 생산을 담당하는 거대 자본가들을 무시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잘못 분석하게 됩니다.
<세상 밑 터널>을 읽은 독자는 그런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시장을 이끄는 핵심적인 주체가 거대 자본가들임에도 소비 중심 자본주의 분석은 거대 자본가들을 가리고 소비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죠. 이는 <세상 밑 터널>이나 소비 중심 자본주의가 완전히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표면에 머물지 말고, 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소비하지 못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계속 상품들을 생산합니다. 자본주의는 죽은 사람들에게조차 상품을 떠넘기죠. 그건 아주 심각한 비극, 경제 공황을 터뜨리고요. 이런 관점에서 소비 중심 자본주의 분석은 얄팍한 분석일지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