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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금성의 약속>과 지식인들의 위상 본문

사회주의/이윤 극대화 비판

<금성의 약속>과 지식인들의 위상

OneTiger 2018. 12. 16. 17:44

천문학자는 천체들을 연구합니다. 따라서 천문학자는 우주를 바라봅니다. 만약 소설 속에 천문학자들이 나온다면, 그 소설 역시 우주를 논의할 테고, 따라서 그 소설이 SF 소설일 가능성은 높겠죠. 하지만 장 피에르 뤼미네가 쓴 <금성의 약속>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장 피에르 뤼미네는 세계적인 천문학자이고, 금성의 약속은 SF 제목 같은 느낌을 풍기나, 이 소설은 SF 장르가 아니에요. <금성의 약속>은 계몽주의 시대 천문학자들을 보여주고 어떻게 그들이 천문학 연구에 매진하는지 묘사합니다. 이 소설은 절대 SF 소설이 아니나, 과학자들이 활약하는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금성의 약속>은 시대극에 가까우나, 시대극과 SF 소설 양쪽에서 과학자들은 서로 비슷한 역할을 맡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우주와 세상과 자연이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과학자들은 훨씬 넓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자연을 넘고 행성을 넘고, 우주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습니다. 암흑 물질 운운하는 과학자는 별로 일상적이지 않겠죠. 계몽주의 천문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존경하나, 갈릴레이가 말하는 수학적이고 우주적인 언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연 과학자들이 훨씬 거시적인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은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는 그저 작고 창백한 푸른 별에 불과하고, 과학자들은 사소한 집착과 다툼을 넘어 광대한 별들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여러 SF 소설들에서 과학자들은 순수하게 연구에 몰두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들은 정치인들, 경영자들, 종교인들과 맞서야 하고, 국제 정세나 경제 문제에 시달려야 합니다. 과학자들은 머나먼 곳을 바라보나, 그들은 일상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금성의 약속> 역시 그걸 구구절절 보여줍니다. 계몽주의 천문학자들은 자연 과학자들입니다. 그들은 과학 분야의 지식인들이죠. 천문학자들은 금성을 연구하고 싶어하나, 사회 분위기와 국제 정세 때문에 그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금성을 관찰하기 위해 해외로 나갈 때, 천문학자들은 숱한 장애들을 겪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들이 합리적인 과학자라고 해도, 아무리 그들이 사회적인 특권과 명성을 누린다고 해도, 결국 그들에게는 실권이 없습니다.


천문학자들은 귀족들이나 왕족들에게 굽신거려야 합니다. 지식인은 특권층이 될 수 있으나, 권력자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천문학자들은 지식을 쌓기 원하나, 귀족들이나 왕족들이 허가하지 않는다면, 천문학자들은 지식을 쌓지 못합니다. <금성의 약속>은 지식인들이 권력자들에게 종속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과학자들의 노고와 애환을 다룹니다. 사실 21세기 초반 역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지식인들은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계몽주의 천문학자들이 귀족들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것처럼, 지식인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식인들은 지식을 생산하나, 그 지식을 허가하는 쪽은 권력자들입니다.



어쩌면 지식인들은 순수한 지식을 생산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지식의 생산자가 아닐지 모릅니다. 공부, 연구, 학문은 정신 노동입니다. 정신 노동은 재화를 생산하지 못해요.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사람들은 육체 노동에 매달려야 합니다. 농민이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노동자가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포도를 먹거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지 못하겠죠. 어떤 사람들은 21세기 오늘날에 육체 노동들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자동 기계화 덕분에 숱한 육체 노동들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보화 혁명을 운운하고 4차 혁명을 운운합니다. 정보화 혁명과 4차 혁명은 육체 노동들을 몰아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정말 육체 노동들이 사라졌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에서 가난한 개발도상국들로 그저 고된 육체 노동들이 옮겼을 뿐이겠죠. 여전히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에서 숱한 약자들은 비정규 노동들에 얽매입니다. 공장에서 사고가 나거나 화재가 났을 때, 비정규 여자 노동자들은 비참한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여전히 플랜테이션 농장들은 환금 작물들을 생산하고, 환금 작물 시장 경제는 숱한 농민들을 착취합니다. 육체 노동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본주의 강대국들에서 시민들이 그걸 파악하지 못할 뿐입니다.



어쩌면 4차 혁명은 꽤나 뚱딴지 같은 소리일지 모릅니다. 4차 혁명이 육체 노동들을 몰아낸다는 사고 방식은 망상일지 모릅니다. 숱한 농민 착취들과 비정규 노동들 없이 현대 문명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현대 문명이 누리는 막대한 부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4차 혁명은 기계 혁명입니다. 하지만 그 기계들이 어디에서 나타나죠? 하늘에서 외계인들이 공짜로 자동화 기계들을 떨구나요? 분명히 자동화 기계는 많은 육체 노동들을 줄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육체 노동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인류 문명은 그저 정신 노동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본주의 강대국들에서도 숱한 육체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정신 노동은 육체 노동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개량 종자나 자동화 기계를 만든다면, 농민과 노동자는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과학 지식은 인류 문명의 빛이 되었고, 엄청난 생산력을 증대시켰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 지식이 발달한다고 해도, 육체 노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재화를 얻지 못합니다. 기계가 완전히 생산을 담당한다면, 그때 육체 노동은 필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상상의 영역입니다. 정말 기계가 완전히 생산을 담당할 수 있을까요? 정말 육체 노동이 절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 올까요? 아무도 그걸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육체 노동은 정신 노동보다 선천적입니다. 육체 노동 없이 정신 노동은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생산적인 영역에 종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삽니다. 심지어 그들은 사회적인 존경을 얻습니다. 왜 생산적인 영역에 종사하지 않음에도, 과학자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요? 누가 과학자들이 먹는 음식을 제공할까요?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과학자들(을 비롯해 지식인들)은 먹고 살지 못할 겁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오직 공부, 연구, 학문에만 치중한다고 가정하죠. 이런 상황에서 인류 문명이 유지될 수 있나요? 아니, 인류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모든 사람이 생산적인 농민들과 노동자들이라면, 인류 문명은 무너지지 않겠으나,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라면, 인류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농민이나 노동자보다 과학자를 존경합니다. 농민이나 노동자는 무시를 받는다고 해도, 과학자는 사회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어쩌면 그들이 권력자들에게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과학자들은 생산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정신적인 결과물을 생산할 뿐입니다. 반면,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재화를 생산하고 문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가 없다고 해도,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스스로 살 수 있습니다. 반면, 누군가가 재화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과학자들은 스스로 살지 못합니다.



누가 과학자들에게 재화를 제공할까요? 그들은 권력자들입니다.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농민들과 노동자들이나, 권력자들은 그것들을 거둬들이고 (사실 착취하고) 그것들을 과학자들을 비롯해 지식인들에게 제공합니다. 권력자들 없이 지식인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금성의 약속>에서 금성을 관찰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은 쩔쩔매야 했습니다. 고작 금성을 연구하기 위해 그들은 쩔쩔매야 했습니다. 만약 지식인들이 권력자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내용을 연구한다면, 권력자들은 지식인들을 그냥 놔두지 않겠죠.


여기에서 지식인들은 갈등할 겁니다. 지식인들은 진리를 연구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진리가 권력자들을 공격한다면, 권력자들은 지식인들을 그냥 놔두지 않겠죠. 지식인들은 권력에 충성해야 할 겁니다. 그건 진리를 배신합니다. 권력자에게 충성하기 위해 지식인들은 진리를 배신해야 합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지식인들은 살아가야 합니다. 지식인들은 권력과 진리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이 됩니다. 지식인들이 균형 감각을 잘못 잡는다면, 그들은 권력자들에게 종속될 테고 권력자들을 위한 정신 노동물을 생산할 겁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사회적인 존경을 얻는지 모릅니다. 진리와 권력자들 사이에서 지식인들이 지배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과거 독재 정권 시절에 김수행 교수가 <자본론>을 가르쳤을 때, 독재 정권은 김수행 교수를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김수행 교수 본인은 그게 '서울대 교수'라는 특권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지식인의 특권은 권력을 넘어 진리와 민중들을 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는 예외적인 사례일지 모릅니다. 사실 서울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서울대는 김수행 교수를 임용하지 않았겠죠. 김수행 교수보다 <금성의 약속>은 훨씬 일반적인 사례일 겁니다. 아무리 우주와 천체와 별들의 시대를 논의한다고 해도, 지식인들은 그저 정신 노동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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