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노동자의 날과 소유 문제 본문
오늘은 노동자의 날입니다. 하지만 어떤 달력에는 근로자의 날이라고 박혀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을 노동자의 날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이라고 부를 겁니다. 어떤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노동자라는 단어가 나쁘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선생님들은 근로자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 다들 노동자라는 단어를 부정할까요? 이게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하는 과정일까요?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 계급에게 주목했기 때문에 남한 지배 계급이 근로자라는 단어를 일부러 퍼뜨렸을까요?
상황은 반대이나, 윗동네 북한 역시 비슷한 문제를 드러냅니다. 북한은 노동이라는 단어를 꽤나 좋아합니다. 한때 사회주의 혁명을 거친 국가로서 북한은 노동자들을 중시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정말 북한이 노동자들을 중시하나요? 어떤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이 삐뚤어지고 비정상적인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북한이 완전한 노동자 국가가 아니나, 언젠가 노동자 국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품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정말 북한이 삐뚤어진 노동자 국가일까요? 왜 노동자들이 고생하는 국가를 구태여 삐뚤어진 노동자 국가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실 노동자라는 단어는 임금 노동자를 가리킵니다. 자주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까먹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까먹는다고 해도, 노동자는 임금 노동자입니다. 우리는 중세 농노나 흑인 노예를 노동자라고 부르지 않아요.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의 임금 노동자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죠. 임금 노동자는 중세 농노나 흑인 노예보다 훨씬 자유로운 존재이나, 근본적으로 노동자와 농노와 노예는 서로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중세 농노는 귀족을 섬기고, 흑인 노예는 백인 주인을 섬기고, 임금 노동자는 자본가를 섬기죠.
자본가가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임금을 깎거나 비정규직으로 만든다면, 노동자는 그런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취직 문제나 실업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번집니다. 하지만 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복종해야 하나요? 무슨 이유 때문에?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복종해야 하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나요? 중세 농노가 귀족을 섬기고, 흑인 노예가 백인 주인을 섬겨야 하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나요? 아니, 없습니다. 그것처럼 임금 노동자가 자본가를 섬겨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임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자본가가 생산 수단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는 공장, 사무실, 농장, 토지, 삼림, 하천 같은 생산 수단을 차지했어요. 왜 자본가가 생산 수단을 차지했을까요? 과거에 귀족들은 자신들이 고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지를 차지했고, 농노들을 부려먹었습니다. 과거에 백인들은 자신들이 태생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고, 흑인 노예들을 부려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그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자본가들은 뭐라고 주장할까요? 사실 자본가들은 그런 이유나 주장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습니다.
설사 자본가가 이유를 주장한다고 해도, 자본가는 자신이 성실하기 때문에 생산 수단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말할 겁니다. 그건 헛소리입니다. 19세기에 살인적인 환경에서 아동 노동자들은 12시간 넘게 일해야 했습니다. 아동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노동을 감당해야 했으나, 그들은 아무 이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성인 노동자들 역시 12시간 넘게 일해야 했고, 온갖 위험하고 불결한 작업 환경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 노동자들이 막대한 보상을 받았을까요? 그런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자본가들이 생산 수단을 차지했을까요? 자본주의 체계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권력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는 권력자였고, 쉽게 공유지를 뺏을 수 있었습니다. 인클로저 사태는 대표적인 사례죠. 이런 사태들이 계속 벌어졌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막대한 생산 수단을 차지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을 부려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따라서 자본가에게는 생산 수단을 차지할 마땅한 권리가 없습니다. 자본가들은 생산 수단을 만들지 않았어요. 자본가는 생산 수단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토지나 하천이나 삼림은 그 자체로서 존재합니다. 기름진 토지와 맑은 하천과 풍성한 삼림을 만든 요소는 생명의 역사와 생물 다양성입니다. 광대한 농장이나 거대한 공장은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그것들은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직접 땀을 흘리고 만든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이런 것들을 절대 내놓기 원하지 않아요. 더욱 큰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오직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생산 수단을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은 생산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와 자본가들은 그걸 막죠. 대규모 환경 오염 역시 여기에서 비롯하는 문제고요.
무엇이 해답일까요? 당연히 노동자들은 생산 수단을 차지해야 하고, 자신들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윤이나 자본가가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위해 노동자들은 노동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걸 가로막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사람들은 노동자가 자본가나 정치인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죠. 사람들은 주인과 노예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노예 근성이 깨질 때, 노동자의 날은 정말 노동자의 날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