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세상…숲> - 기득권의 폭력과 파생적인 폭력의 차이 본문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애스시 사람들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소설 속에서 지구 인류는 자원을 무분별하게 소모한 나머지 더 이상 충분히 나무를 벨 수 없었습니다. 인류는 목재를 얻기 위해 다른 행성을 침공했고, 그 행성은 바로 애스시였죠. 하지만 이 행성에는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인류는 그들의 보금자리를 처들어가고 숲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마저 노예로 삼습니다.
본래 애스시 사람들은 폭력을 모르고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는 그들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노예 통제는 영원히 이어지지 못합니다. 생존에 위협을 느낀 애스시 사람들은 인류에게 항거하기 시작했고, 끝내 독립 혁명으로 발전합니다. 사실 이것 자체는 뻔하고 뻔한 줄거리입니다. 강대국의 침략, 약소국의 저항, 독립 혁명은 딱히 특별하지 않은 플롯입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줄거리 자체 때문은 아닐 겁니다. 폭력을 몰랐던 애스시 사람은 이제 폭력을 깨달았고,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 어슐라 르 귄은 이 소설에서 침략자와 원주민을 단순하게 구분합니다. 침략자들은 극악무도하게 보입니다. 그 중에 원주민을 이해하고 강압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으나, 어쨌든 침략자들은 악당입니다. 원주민들은 선하고 평화롭게 보입니다. 아마 이런 단순한 구분법에 불만을 품는 독자도 있을 겁니다. 침략자들과 원주민들의 관계를 좀 더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겠으나, 르 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르 귄이 그걸 몰랐기 때문일까요. 그럴 필력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작가의 속내를 알 바 없으나, 아마 그런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르 귄은 대립 구도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대신 다른 주제를 강조하기 원했겠죠. 그건 선하고 평화로운 애스시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애스시 사람들은 독립 혁명을 거치는 동안 폭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폭력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애스시 사람들은 예전부터 항복한 상대를 보살폈으나, 그런 관습은 깨졌습니다. 애스시 사람들은 상대를 죽일 수 있습니다. 행성이 침공을 받기 전에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애스시 사람들도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누군들 폭력을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침략자들은 원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했고, 원주민들은 폭력을 휘둘러야 했습니다. 그들이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침략자들은 계속 나무를 무분별하게 가져갔을 테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렸을 테니까요. 다른 방법이 없었죠. 약자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합니다. 싸우지 않는다면, 목숨을 건질 수 없습니다.
원주민들이 평화적으로 좋은 말로 설득해도 아무 의미가 없겠죠. 오히려 원주민들이 평화적으로 나올수록 침략자들은 좋아할 겁니다. 귀찮게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요. 애초에 평화적인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면,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행성을 침공하지 않았겠죠. 비록 깨달음은 늦었지만, 어쨌든 원주민들은 투쟁만이 살길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좋든 싫든 싸워야 합니다. 폭력이 필요합니다. 애스시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결코 반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변화를 돌이키지 못합니다.
이제 그들은 폭력이 무엇인지 알았고, 자기네들끼리 엄청나게 싸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생물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를지 모릅니다. 소설은 그런 미래까지 묘사하지 않으나, 그런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겠죠. 어슐라 르 귄은 이 책에서 폭력의 변화를 강조했고, 따라서 어떻게 폭력이 애스시 사람들을 바꿀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른 침략자들이 애스시의 자원을 노리고 계속 침공한다면, 애스시 사람들도 거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계속 폭력을 휘두르겠죠.
어쩌면 누군가는 이걸 폭력의 악순환으로 부를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폭력의 악순환이죠.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괴롭혔고, 원주민들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고, 이제 그들은 싸움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싸움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침략자들이 계속 행성에 간섭할수록 원주민들은 점점 더 과격한 폭력에 빠질지 모릅니다. 이런 현상은 소설 속의 외계 행성만 아니라 실제 지구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벌어지는 중입니다. 내전에 휩싸인 가난한 나라는 처음부터 그렇게 죽자 살자 싸우지 않았을 겁니다. 내전이 그 사람들의 천성은 아닐 겁니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동남 아시아는 극심한 내전이나 반정부 투쟁으로 유명합니다. 누군가는 아프리카의 내전을 보고, "역시 검둥이들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폭력에 심취했을까요. 그 사람들이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AK-47 소총을 들고 태어났을까요. 시간을 좀 더 되돌려보면, 근대에서 벌어진 가장 폭력적인 사건은 제국주의일 겁니다. 식민지 통치죠. 유럽 강대국들은 다른 대륙에 식민지를 세웠고 그 와중에 각종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그건 민족 하나가 죽어나가고 대도시 하나가 수렁에 빠질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수많은 식민지들은 독립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독립은 만능 열쇠가 아니었습니다. 식민지가 독립해도 제국주의 잔재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온갖 부패와 갈등과 빈곤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모든 식민지가 그렇다고 할 수 없겠으나, 식민지 통치는 분명히 세계사에 한 획을 긋는 폭력 현상이었습니다. 식민지 국가들은 산업 시대에 미처 진입하기 전에 강대국의 통치를 받았고 실컷 두들겨 맞았습니다. 뒤늦게 독립했다고 해서 모든 게 원활히 돌아갈 리 없었죠.
게다가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하든 말든, 세계 시장은 이미 강대국들의 자유 시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식민지 국가들은 어수선한 상태에서 이런 자유 시장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어떻게든 자급자족해야 했습니다. 독립 투쟁의 상처를 미처 치료할 시간도 없었겠죠. 독립 투쟁 그 자체만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겁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겠지만, 식민지 국가들도 독립 투쟁 와중에 여러 내분을 겪거나 급진적인 사상에 빠졌겠죠.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프란츠 파농은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에서 어떻게 원주민들이 폭력을 깨닫는지 묘사했습니다. 원주민들은 폭력을 통해서 인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면, 참략자들은 원주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거든요. 장 폴 사르트르는 이 책의 서문을 썼지만, 프란츠 파농은 그 서문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사르트르는 서문에서 원주민들의 폭력을 긍정하는 듯한 분위기를 진하게 풍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 신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표현처럼 식민지 통치는 식민지 사람들의 폭력을 낳았습니다. 파농의 생각이 어떤지 확연히 알 수 없으나, 사르트르는 핵심적인 부분을 꼬집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그저 돌고 도는 악순환으로 봐야 할까요. 이건 처음부터 악순환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아주 거대하고 심각한 폭력을 저질렀고, 그 현상이 다른 폭력을 낳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폭력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면, 그 근원적이고 거대하고 심각한 폭력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할 겁니다. 만약 그 폭력이 여전히 기승을 떨친다면, 당연히 그걸 막아야 할 겁니다. 근원적이고 거대한 폭력을 막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른 파생적인 폭력을 막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이런 거대한 폭력, 기득권은 폭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기득권은 그 폭력을 통해 어떤 이득을 챙길 테니까요. 기득권의 폭력을 없애고 싶다면, 그저 기득권에게 폭력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그 기득권이 설치지 못하도록,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판을 뒤집고 체계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폭력을 완전히 근절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겠죠. 만약 기득권의 체계를 그냥 놔두고 폭력만 비난한다면, 착하게 살라고 하는 설교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관념적인 윤리일 뿐이겠죠.
또한 우리가 파생적인 폭력들을 비판하고 싶다면, 체계를 바꾼 이후에야 비로소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기득권의 압도적인 폭력이 존재하는 이상, 파생적인 폭력은 계속 분출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기득권의 폭력과 파생적인 폭력을 똑같이 비판합니다. 그냥 무조건 폭력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뭐, 말이야 쉽습니다. 누가 말을 못하겠어요. 유치원 학생도 폭력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세상의 폭력은 똑같지 않습니다. 부자와 빈민은 다르고, 남자와 여자는 다르고, 인간과 야생 동물은 다릅니다.
그들이 걸어온 길, 그 역사적인 과정은 다릅니다. 야생 동물은 단 한 번도 핵탄두 같은 광역 병기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여자들의 강간 숫자가 남자들을 압도한 적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본격적인 문명 이후에서는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엄연히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폭력이 똑같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걸 그냥 윤리적인 문제로만 치부하고, 체계를 바꾸지 않습니다. 윤리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죠.
하지만 <세상…숲>은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기득권의 폭력이 파생적인 폭력을 낳는지 보여줍니다. 물론 작가는 그런 파생적인 폭력을 옹호할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저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를 인정한다면, 기득권이 조성한 체계를 그냥 넘어갈 수 없을 테고 판도를 뒤엎는 파격적인 대안이 필요할 겁니다. 적어도 그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