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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혁명하는 여자들> - 성 평등 장르 문학의 다양함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혁명하는 여자들> - 성 평등 장르 문학의 다양함

OneTiger 2017. 2. 21. 20:24

<혁명하는 여자들>은 단편 소설 모음집입니다. 제목처럼 성 평등에 관련된 작품들만 모였습니다. 모두 15개 소설이 있는데, 영어 판본에는 좀 더 많은 소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아작 출판사는 그 중에서 좀 더 SF에 가까운 작품들만 골랐고, 이미 번역 출판된 소설을 뺐다고 합니다. 그래서 <혁명하는 여자들>이 나왔는데….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구석이 많더군요. 저는 뭔가 SF 소설을 읽고 싶었거든요. 전형적인 SF 소설이요.


그런데 이 모음집의 소설들은 대부분 풍자 소설에 가깝습니다. SF 설정을 살짝 가미했지만, 대부분 풍자 성격이 짙습니다. 애초에 작가들이 성 평등을 부각하기 원했기 때문에 그 점에만 치중한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설정을 짜고 그 설정에 의거해 사건을 전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풍자와 해학, 상징이 점거합니다. 언어 유희가 남발하는가 하면, 의식의 흐름만으로 사건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중간 관리자를 위한 안정화 전략>이나 <숙모들>, <식물의 잠>, <시공간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 등은 정말 전형적인 SF 소설을 훌쩍 넘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소설들의 가치를 폄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취향, 그러니까 계속 언급했던 '전형적인 SF 소설'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가령, 저는 제임스 팁트리의 <휴스턴, 들리는가?> 같은 작품을 좋아합니다. 하드 SF 설정과 성 평등 주제가 서로 균형을 이루었죠. 이런 소설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혁명하는 여자들>의 작품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고 인상적인 소설들도 꼽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늑대 여자>,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공포>, <바닷가 집>이 마음에 들었어요.


<가슴 이야기>는 굉장히 독특했고, <무척추동물의 사랑과 성>도 기억에 남습니다. 일단 <늑대 여자>는 말 그대로 여자 늑대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 여자는 늑대인간답게 일반 사람과 다릅니다. 인간과 늑대로 변하는데, 문제는 자신이 이걸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일정 기간이 되면, 주인공은 며칠 동안 늑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문명 사회와 쉽게 어울리지 못해요. 하지만 어느 날 이 비밀을 이해해주는 인간 남자를 만나고, 늑대 여자는 그 남자와 아주 열정적이고 깊은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에 빠진 늑대 여자는 세상 모든 것들을 천국처럼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곁에 있다면, 모든 게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어떤 장애도 헤처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늑대 여자는 몰랐습니다. 자신이 늑대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주인공은 그저 평범한 여자가 아니고, 언제나 풍성한 머리카락, 미끈한 피부,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길고 유연한 허리와 다리를 뽐냅니다. 늑대 여자는 이런 외모를 당연히 여겼고, 남자의 사랑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외모에 변화가 생겼을 때…. 늑대 여자는 진실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고, 그 순간 멈출 사이도 없이 미친 듯이 밑바닥을 향해 추락합니다. 소설 전반부의 사랑과 행복, 소설 후반부의 추락과 비참함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군요. 산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런 구조 때문에 비극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주인공 늑대가 남자에게 붙들리고 개처럼 온순하게 행동할 때, 결정적인 상징을 드러내죠.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는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고 유토피아일 겁니다. 어떤 풍파가 세상에 밀어닥쳤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고, 그 덕분에 새로운 세상이 등장했기 때문에 유토피아입니다. 아무래도 세상이 한 번 망하면, 그 다음에 새로운 세상이 나타날 수 있고, 그래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유토피아로 연결되기 쉽죠. 그렇게 등장한 세상은 현재 사회와 전혀 다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어요.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편의상 A 사회와 B 사회로 부르겠습니다. 아마 다른 사회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설에서는 저 두 사회만 등장합니다. 인간들은 A 사회와 B 사회의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두 사회의 갈등이나 침공입니다. A 사회는 자꾸 B 사회에게 자신들과 함께 하자고 권유합니다. B 사회는 싫다고 말합니다. B 사회는 A 사회에게 너희들이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너희가 없으면 훨씬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A 사회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B 사회와 합치고 싶어합니다.



이 소설이 가리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종속 관계죠. B 사회는 자신들이 A 사회와 합치면, A 사회에게 짓눌릴 거라고 걱정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종속 관계를 걱정하는 시각은 모음집의 다른 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늑대 여자>도 그런 시각을 드러냅니다. 주인공은 늑대지만, 남자와 함께 하기 위해 온순한 개처럼 행동합니다. 남자가 주인이고, 늑대는 남자를 따르는 애완동물에 불과하죠. 이런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거부하는 소설이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아예 인간 세력을 두 개로 나뉘었고,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런 시각, 종속 관계를 거부하는 시각을 성 평등만 아니라 다른 좌파 운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사회주의 운동도 그렇습니다. 왜 그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극심한 가난과 왕따를 참고, 구태여 자유 시장을 거부하겠어요. 자유 시장이 사회주의 정책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짓누를까 걱정하기 때문이죠. 자유 경쟁 시장의 힘이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정책이 버티지 못하고 고사하기 때문이죠. 대기업이 밀고 들어오면, 원주민들의 권리나 삼림의 중요성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원주민이고, 숲이고, 동물이고, 죄다 싹 밀려나겠죠.



아마 이 때문에 수많은 유토피아 소설들, <유토피아>, <붉은 별>, <빼앗긴 자들>은 외딴 섬이나 별에 대안 사회를 세우겠죠. 자유 시장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공동체는 그야말로 쓸려나갈 테니까요. 이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는 이런 종속 관계를 부정하기 위해 독립성을 유지하라고 조언합니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고, 분명히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B 사회의 구성원들은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B 사회가 A 사회와 잘못 연결된다면, 그 다음에 엄청난 파멸이 기다릴 텐데요. 제대로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없겠죠. 투쟁과 독립일 뿐입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말입니다.


아울러 <혁명하는 여자들>에는 이 소설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야기하는 또 다른 소설이 있는데, 바로 <공포>입니다. 바이오펑크 요소가 있으나, 이야기에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공포>는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처럼 새로운 세상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역학 관계와 지배 구조는 서로 다릅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밀어낸 상황입니다.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가 다른 사회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회를 보여줬다면, <공포>는 그런 투쟁과 저항마저 부질없는 사회를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오직 생존을 위해 근근히 살아갈 뿐입니다. 공포 속에서 말입니다. 종속 관계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며, 주인공은 그런 압도적인 현실 속에서 힘겹게 몸부림칩니다.



이처럼 <혁명하는 여자들>에는 저항과 투쟁을 이야기하는 소설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기득권을 타파하고 싶다면, 투쟁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모든 소설들이 저항만을 외치지 않습니다.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제목처럼 좀 더 부드럽고 따스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남극 탐험을 이야기합니다. 평범한 남극 탐험 이야기입니다. 뭐, SF 세계에서 남극은 각종 외계인과 괴물의 고향이지만,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부류가 아닙니다.


주인공 탐험대는 거의 무난하다 싶을 만큼 수월하게 탐험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탐험의 끝은 대부분 정복이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탐험하는 이유는 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유명한 등반가는 그저 산이 존재하기 때문에 산에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탐험은 정복, 학살, 착취, 수탈로 이어지곤 했죠. 원주민들을 죽이고, 숲을 마구잡이로 베고,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그래서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주인공 탐험대는 특별합니다. 정복하지 않으니까.



남극 탐험이라는 거창한 사건과 정복하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개념은 나름대로 잘 어울립니다. 탐험과 정복의 인과 관계를 일부러 엇나가고, 그 결과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비경 탐험을 좋아하기 때문에 꽤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주제와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거기 누구냐>, <광기의 산맥>, <테러 호의 악몽>도 좀 떠오르더군요. <바닷가의 집> 또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임에도)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소재와 내용 전개는 아주 뻔합니다. 예상했던 방식으로 흘러가더군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인조인간, 인조인간을 만든 과학자,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립. 너무 상투적이죠. 하지만 이 소설의 작가는 그런 상투적인 소재에 출산과 양육이라는 소재를 더합니다. 그 결과는 꽤나 따스하고, 소재와 달리 진부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출산이라는 문제는 성 평등 SF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혁명하는 여자들>에 실리지 않았으나, <체체파리의 비법>도 그렇고, 역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임신과 출산, 양육에 민감한가 봅니다.



<가슴 이야기>는 그런 임신, 출산, 양육을 정말 골 때리게 풍자한 작품입니다. 상상 과학은 부족하지만, 풍자만큼은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무척추동물의 사랑과 성>은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들을 연이어 살펴보기 때문에 흥미로웠고요. 이거 다른 소설 모음집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밖에 다른 소설들도 많으나, 개인적인 취향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이런 작품들을 뭐라고 평가하기 어렵군요. 그래도 성 평등 SF 소설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 다양함을 한데 모았기 때문에 이 모음집이 더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소설의 주제를 함축한다면, 역시 맹렬한 투쟁과 바리케이드와 철벽 방어와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이미 기득권의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그런 투쟁과 철벽 방어가 아니라면 살아남기 힘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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