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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안드로메다 성운> - 우주적 공산주의 확장을 위한 찬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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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 성운> - 우주적 공산주의 확장을 위한 찬가

OneTiger 2017. 3. 10. 20:00

<안드로메다 성운>은 이반 예프레모프가 쓴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소설 속의 인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했고, 모두 잘 먹고 잘 삽니다. 한두 국가가 아니라 전세계가 모두 공산주의 공동체가 되었죠. 더 이상 인종, 국경, 성별, 직업, 빈부 차이는 사람들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인류는 이런 장벽들을 훌쩍 뛰어넘고, 그야말로 인터내셔널하게 연합하고, 인류 그 자체의 번영을 위해 일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공동체를 벗어나기 원하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끼리 자신만의 공동체를 이루지만, 대부분 인류는 국제적인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라고 해서 불만이나 갈등이나 욕구가 없을 리 없죠. (사실 그런 불만이나 갈등이 없다면, 소설을 쓸 이유도 없을 테고요.) 그렇다면 그 욕구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우주 항해입니다. 인류는 이미 지구에서 유토피아를 이룩했으나, 그저 지구에서 번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인류는 더 멀리 나가기 원합니다. 태양계를 넘고, 다른 항성계로 떠나고, 훨씬 깊은 우주로 가기 원합니다.



소설은 이런 인류의 진출, 확장, 우주 항해를 필연적인 역사적 변화로 인식합니다. 등장 인물들, 그러니까 우주선 승무원과 우주 기지 연구원부터 각종 예술가들과 역사학자와 기타 등등 수많은 사람들은 인류의 확장이 필연적이라고 인식합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고, 따라서 고작 지구에만 안주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다른 태양계 행성들을 정복해야 하고, 다른 항성계로 진출해야 하고, 새로운 싹을 틔워야 합니다. 게다가 저 깊고 깊은 우주에는 인류 이외에 다른 문명들도 존재합니다.


이 우주에는 인간 이외에 수많은 지적 존재들이 있고, 그들은 함께 '위대한 원'이라는 연맹에 참가합니다. 이 연맹 안에서 지적 종족들은 서로 문화와 역사와 철학을 주고 받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방적으로 자기네 이야기를 전달할 뿐이고, 실시간으로 소통하지 못합니다. 천문학적인 거리 때문에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다른 외계인들에게 지구 역사를 설명하지만, 그 설명은 몇 백 년 이후에나 도달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외계인들의 역사와 철학 강의는 몇 백 년 이후에 인류에게 도달합니다. 저 먼 곳에 또 다른 문명이 있으나, 그들은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인류는 이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가슴을 두드립니다. 또 다른 문명이 있고, 그들은 번영의 기회를 약속합니다. 만약 위대한 원의 문명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다면, 우주 문명들은 훨씬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겠죠. 이 소설은 그런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장대하게 그립니다. 우주선 항해부터 물리학자들의 치밀한 연구를 거쳐 이제 막 노동의 가치를 깨닫는 젊은 학생까지, 모든 인류가 하나로 화합하고 우주적인 확장에 매진합니다.


작가 이반 예프레모프는 머나먼 항성계부터 지구의 울창한 오지까지 샅샅이 훑어보고, 전 인류가 번영과 확장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는지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물론 이처럼 거대한 우주적 진출을 노래하는 SF 소설은 많을 겁니다. 수많은 작가들이 원대한 꿈과 항해에 찬사를 보내겠죠. 하지만 <안드로메다 성운>이 그런 소설들과 다른 이유는 인류의 우주 진출을 역사적인 발전 단계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했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테고, 우주 항해와 위대한 원은 그런 과정 속에 존재합니다.



예프레모프는 소설 후기에서 외계 문명들이 우주에서 서로 만난다면, 그걸 우연적인 사건으로 그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역사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그 발전 도중 각종 외계 문명들도 서로 만난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걸 공산주의 사상의 전형적인 역사 유물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고전적인 공산주의,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은 역사를 선형적으로 바라봅니다. 역사는 노예 제도, 봉건 제도, 자본주의 등을 거치지만, 계속 발달합니다. 퇴보하거나 멈추는 경우는 없습니다. 역사는 고정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바뀝니다.


그 변화의 방향은 진보이며, 그래서 자본주의 발달도 긍정적인 변화의 일부입니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을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인류 문명이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상당히 지배적인 사상이었죠. 물론 이런 사상조차 고정적이지 않았고, 나중에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2단계 혁명 이론이나 뭐 그런 이론들을 개정합니다. 어쨌든 공산주의자들은 역사가 계속 진보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본주의도 바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역사 유물론이 <안드로메다 성운>에 고스란히 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예프레모프는 그런 방식의 선형적인 역사 발전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제가 고전적인 역사 유물론을 설명한 이유는 그런 거대하고 줄기찬 흐름이 이 소설에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상의 내용은 다르지만, 역사 유물론과 <안드로메다 성운>은 역사를 그저 한 순간이나 한 장면만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그 점을 비교하고 싶었습니다. 이 지구 위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은 계속 진화했고, 그 와중에 인류 역사는 진보를 거듭했습니다. (진화 자체가 진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진보를 거급하고 거듭하고 거듭하는 거대한 격변 속에서 마침내 인류는 우주로 도약합니다. 예프레모프는 다른 외계 문명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으나, 어쨌든 인류는 진보의 축적 속에서 우주로 진출합니다. 아마 다른 외계 문명들도 인류와 비슷한 길을 거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길고 축적된 진보 과정은 미지와의 조우로 정점을 찍는 듯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있나요. 진보는 절대 멈출 수 없고, 인류는 위대한 원의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앞을 바라봅니다.



이 소설이 장엄한 이유는 그저 우주 진출만을 칭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설 속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는 역사학자입니다. 사실 이 역사학자의 비중은 다른 인물보다 꽤나 큽니다. 왜 예프레모프는 역사학자를 중요 인물로 설정했을까요. 바로 우주 항해만 단속적으로 노래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소설의 시대 배경은 그리 길지 않지만, 등장 인물의 대화와 토론과 심리를 통해 몇 천 년에 걸친 기나긴 흐름을 나열합니다. 작금의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진보한 결과입니다.


이런 투쟁과 진보는 앞으로 이어질 테고, 그 결과 인류는 더 먼 우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예프레모프의 사상을 잘 모르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 공산주의 특유의 역사 발전론을 떠올렸습니다. 예프레모프가 그런 역사 발전론에 동조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위에서 말했듯 그 거대하고 지속적인 흐름에 감탄했다는 뜻입니다. 아서 클라크 같은 작가도 인류의 장대한 도약을 묘사하지만, 조금 단선적으로 보인다고 할까요. 예프레모프의 서술 방식이 훨씬 진보의 사슬을 제대로 강조하는 듯합니다.



한편으로 예프레모프는 그 진보의 밑바탕이 인간성 변화와 경제 체계라고 말합니다. 역사는 진보하지만, 진보를 위해 두 개의 기둥을 지탱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인간성 변화입니다.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인류 전체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동기를 심어줘야 합니다. 인간은 그 자신만이 오롯한 존재가 아니고, 이 거대하고 줄기찬 역사의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상을 깨달은 인간들은 더 이상 쓸데없는 아집과 욕심 때문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머나먼 우주 진출을 위해 전세계가 대규모 근검 절약에 돌입하기까지 합니다.


소설 속의 공산주의 공동체는 그런 인간성을 양육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며, 작가는 교육, 노동, 예술 부분에서 이런 면모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솔직히 몇몇 부분은 21세기 현대인의 눈에 어긋나는 요소들이지만, 공산주의적 인간은 기본적인 사상 자체가 다르다는 걸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인종과 국경과 성별은 매우 다양하고, 인류 전체가 진정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제일 유쾌했습니다. 다양성과 조화야말로 유토피아의 초석이자 궁극적 목표겠죠.



하지만 그저 인간성에만 매달리면, 반쪽짜리 변화일 겁니다. 경제 체계가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인간성을 양성할 수 있겠어요. 세상이 무분별한 발전과 개발과 생산과 소비로만 가득한데, 공산주의적 인간이 홀로 자랄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어림없는 소리일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폐를 없애고 계획 경제를 시행합니다. 청년들은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다양한 노동에 참여합니다. 어려운 과제들을 시험하고, 자신의 적성을 찾습니다. 노동자들은 위원회에 일자리를 문의하고, 자신의 적성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노동 장소로 달려갑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런 계획 경제로 이행했는지 알 수 없으나, 계획 경제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우주선 개발이고 뭐고 힘들어졌을 겁니다. 자본가들은 여전히 자본만 축적하기 위해 온갖 과다 생산을 일삼았을 테고, 인류 전체가 우주선 개발에 매달리지 못했을 테죠. 이 부분에서 현실의 기후 변화가 생각나더군요. 과학자들은 이상 기후를 막기 위해 전 인류가 단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기업들은 규제 따위 집어치우라고 주장할 뿐이죠. 자본 축적 앞에서는 전 인류의 지구적 프로젝트 따위가 없을 겁니다.



한편으로 좀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는데…. 인류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기후를 엄청나게 바꿨고, 안전을 위해 각종 육식동물들을 없앴습니다. 소설 속에서 등장 인물들은 육식동물을 없앤다고 몇 번씩 강조합니다. 한편으로 괴물을 처치하는 그리스 영웅상을 육식동물을 없애는 공산주의자에 비교합니다. 기후 변화와 야생동물 처치. 뭐, 기술이 발달한다면, 생태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과연 인류가 이렇게까지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설픈 기술력으로 함부로 기후를 바꾸거나 동물들을 멸종시킨다면, 돌이킬 수 없이 생물 다양성이 감소할 겁니다.


번영을 위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생태계를 엄청나게 바꾸면서 번영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과학 기술이 100% 안전을 보장한다면 모르겠지만, 과연 그렇게 완벽을 보장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이 등장할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그런 기술이 있다면, 왜 굳이 생물 다양성을 줄여야 합니까. 거대한 보호 구역을 만들고, 후손들에게 자연 유산을 물려줄 수 있겠죠. 물론 소설 속에서도 보호 구역 이야기가 잠깐 나오지만, 기후 변화와 경관 변화에 비해 보호 구역 이야기는 아주 잠깐만 나올 뿐입니다. 이것도 발전이 최고라는 고전적 공산주의겠으나, 21세기에는 공산주의도 생태학적 시각으로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아쉬웠던 점은…. 우주 탐험이 짧습니다. 이 소설은 우주 탐험으로 시작하는데, 저는 탐험 이야기가 좀 더 길었으면 싶었습니다. 뭐, 사상을 논의하고 그런 것도 재미있지만, 역시 낯선 우주에서 기괴한 생명체들을 만나는 것만큼 재미있지 않겠죠. 작가 본인도 후기에서 모험이나 탐험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밝히지 않았습니까. 소설이 우주 항해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항해가 계속 이어질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외계 생명체도 좀 더 다앙하게 나오고 그 정체와 생태도 확연히 밝혀졌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저는 <별을 쫓는 사람들> 같은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주 항해에 많이 기대했으나, 우주 항해는 (주된 요리가 아니라) 양념이나 후식에 불과했습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주 진출이 공산주의 프로젝트라고 주장하고, 그걸 보조하기 위해 탄트라호를 보여줬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도 우주 항해와 유토피아 사회를 번갈아 묘사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 동안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책장을 덮은 이후, 감동과 함께 후련함도 밀려오더군요. 이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이 소설을 호평했구나, 하고요. 번역자와 출판사에게도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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