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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들> - 종말 문학으로 향하는 친절한 길잡이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들> - 종말 문학으로 향하는 친절한 길잡이

OneTiger 2017. 3. 15. 20:00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SF 개론서입니다. 고장원님이 쓰시는 'SF 가이드 총서' 중에 하나죠.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또 다른 명칭은 포스트 홀로코스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종말 문학, 재난 소설이라고 불립니다.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 허버트 웰즈의 <별>,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월터 밀러의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등등이 이 장르에 속합니다.


운석 충돌, 핵전쟁, 전염병, 기후 변화 등으로 인류 문명이 멸망하고,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여주죠. 하지만 똑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해도 다양한 종류가 있고, 각 창작물들이 걸어온 역사는 서로 다릅니다. 운석이 충돌하는 소설과 전염병이 번지는 소설은 주제, 분위기, 연출, 줄거리 측면에서 다를 수 밖에 없겠죠.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는 인류 문명이 멸망하는 다양한 이유를 살펴보고, 작가와 독자가 그런 재앙에서 어떤 주제나 사상, 감성을 뽑아내고 느끼는지 분석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멸망 원인과 재앙의 종류에 따라 창작물들을 분류합니다. 우선 멸망 원인을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으로 나눕니다. 외부 요인은 인류 문명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뜻합니다. 인류는 자신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외부의 압력 때문에 멸망합니다. 운석이 충돌하거나 외계인이 침공하거나 빙하기가 찾아오거나 태양계의 질서가 바뀌거나 등등…. 이런 재앙들은 인간들이 초래하지 않았으나, 결국 인류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별>처럼 혜성이 지구로 날아온다면, 당연히 외부 효과라고 할 수 있죠. 인간들은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천문적인 재앙이 나타났으니까요.


반면, 내부 요인은 자업자득에 가깝습니다. 인간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고, 이게 부메랑 효과처럼 인류에게 돌아옵니다. 강대국들이 전면 핵전쟁을 벌이거나, 치명적인 개조 바이러스를 퍼뜨리거나,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등등…. 이런 소재들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봐야 한다고 외칩니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은 핵전쟁 이야기이기 때문에 핵무기나 핵 폐기물의 위험 등을 경고하기에 적합합니다.



물론 외부 요인을 다루는 책이라고 해서 인류 사회의 모순이나 속내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전설의 밤>은 천문학적 현상과 인류 사회의 모순이 잘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이 소설에서 재앙의 원인은 분명히 '외부'에서 왔습니다. 이 재앙은 인류가 손댈 수 없는, 우주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 현상은 거대한 운석이나 무시무시한 외계인이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이 현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엄청난 파국을 맞이합니다.


사실 인류는 얼마든지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 심리의 부조리나 사회적 한계 때문에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말죠. 폴 앤더슨의 <뇌파>도 그렇습니다. 태양계의 질서가 바뀌고, 덕분에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똑똑해졌습니다. 이건 분명히 외부적인 요인입니다. 하지만 그런 외부적 요인이 사회적인 한계를 초월한다면, 외부 원인으로 내부적인 모순을 고찰했다고 할 수 있겠죠. 칼로 무를 자르는 것과 달리 어떤 창작물이 반드시 하나의 속성에만 얽매인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인류 사회의 모순을 고찰하고 싶다면, 외부 원인보다 내부 원인이 더욱 적절한 소재일 겁니다. 김영래의 <씨앗>은 인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결국 인류 그 자체에게 피해를 준다고 말하는 사례입니다. 배경 설정은 거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까운 디스토피아입니다. 생태계가 너무 붕괴했기 때문에 사실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아포칼립스라고 해도 되겠죠. 산천은 황폐해지고, 해일이 기승을 부리고, 식수조차 모자라고, 물고기도 떠나가고, 삶의 기반이 되는 자연 환경 자체가 점점 사라집니다.


이른바 제3세계는 다양하고 풍부한 원시 밀림을 보유했으나, 강대국들은 이를 노리고 제3세계를 수탈합니다. 세계적인 종자 은행들은 이런 생물 다양성을 자기네 밑천으로 삼고, 밑바닥 사람들은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요. 소설 화자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재앙이 터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강대국들이 무분별하게 자연 환경을 뒤바꿨기 때문에, 그런 필연적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살기 위해 죽도록 발버둥친다고 비판하죠.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이런 내부적인 요인과 환경 오염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운석 충돌이나 태양계 변화보다 훨씬 실감이 납니다.



한 가지 좀 의아한 것은…. 저자 고장원님이 헨리 왓슨의 <대영 제국의 쇠퇴와 몰락>, 윌리엄 쿡의 <서기 2000년대 이야기들>을 '외부 효과에 따른 멸망'으로 분류했다는 점입니다. 음, 그렇게 볼 여지가 있겠으나, 저는 이게 오히려 '내부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두 소설에서 인류는 대대적인 자연 환경 변화를 꾀합니다. 운하를 건설하거나 기후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 자연 환경이 너무 변했고 인류 사회마저 황폐해집니다.


고장원님은 이게 '자연 변화'라는 외부 원인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인류가 자연을 바꿨다'는 측면에서 내부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헨리 왓슨이나 윌리엄 쿡의 소설은 생태학적 위기 쪽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영 제국의 쇠퇴와 몰락>과 <서기 2000년대 이야기들>이 <씨앗>처럼 생태학적 위기를 경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 두 소설은 자본가들의 업적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고 합니다. 19세기 진보적인 사상의 한계죠. 21세기의 생물 다양성 위기를 보면, 헨리 왓슨이나 윌리엄 쿡보다 윌리엄 모리스 같은 생태 사회주의자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는 재앙의 원인과 사회학적인 결과를 세부적으로 탐구합니다. 사실 이 책만 아니라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설명하는 여러 문헌들은 멸망 원인을 중시합니다. 당장 영어 위키피디아를 찾아봐도 외계인, 천문 현상, 환경 재난, 기술적 오류, 화석 연료, 전염병, 전쟁 등을 이야기하는군요. 사고가 발생하면 그 사고의 원인을 제일 먼저 파악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이 망한다면 그 이유를 우선 설명해야 할 겁니다.


멸망 원인에 따른 분류 방식은 상당히 대중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설명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이런 개론서를 그리 많이 보지 못했으나, 아마 해외의 다른 개론서들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나 싶습니다. 게다가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는 초보자들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해당 장르를 쉽게 설명했기 때문에 이런 접근법이 더욱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이나 주제, 사상, 분위기 등으로 나눌 수 있겠으나, 아무래도 멸망 원인에 따른 분류 방법이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제일 효율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의외로 외계인 침공이나 괴수의 상륙을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주 전쟁>이나 <고지라>처럼 외계인 침공이나 괴수의 상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우주 전쟁> 이후로 숱한 SF 창작물들은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들을 떠들었으니까요. 특히, 뭔가 싸움거리를 찾아야 하는 액션물이나 전쟁물에게 적대적 외계인은 더할 나위 없는 소재일 겁니다. 지구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으로 흉악하고 징그러운 외계인들과 신나게 싸울 수 있으니까요.


허버트 웰즈는 이 소설에서 제국주의 침략을 강조했으나, <우주 전쟁>의 제국주의 비판보다 외계인 침공이라는 소재만 널리 퍼진 것처럼 보일 정도군요. <고지라>는 괴수물이기 때문에 일본 이외에서 그리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 괴수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지대한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대재앙 이후의 세계와 생존자>는 외계인 침략이나 괴수의 습격에 무관심한 듯보입니다. 고지라를 언급하지만,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해요.



어쩌면 외계인 침략이나 괴수의 상륙은 너무 흥미 위주이기 때문에 일부러 제외했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외계인 침략은 액션물이나 전쟁물의 단골 메뉴입니다. SF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외계인 습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문명의 몰락과 사회학적 탐구보다 싸움박질과 액션만 떠올릴 겁니다. 솔직히 SF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좀 더 진지하게 논의하기 위해 일부러 저런 소재들을 우회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고, 제 생각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군요. 게다가 저런 소재들을 논의하고 싶어도 책 한 권이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마 저자는 다양한 내용을 알차게 꾹꾹 담고 싶었겠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을 듯합니다. 그래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살피고 싶다면, 이만한 개론서도 드물 것 같습니다. SF 개론서 자체가 드문 상황에서 이처럼 하위 장르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책도 만나기 쉽지 않죠.



소재 자체가 '멸망'이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 무겁다고 오해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까지 암울한 책은 아닙니다. 소재가 멸망일 뿐입니다. 물론 사회의 혼란상과 밑바닥 사람들의 생존을 다루기 때문에 어조와 분위기는 다소 비판적이고 냉철합니다. 각종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의 분위기가 이 책에도 어쩔 수 없는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책을 모두 읽고 나면, 정말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방법으로 재앙과 혼란을 상상했구나 싶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생태학적 위기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21세기의 생물 다양성 감소를 보면, 현실과 SF 사이가 그만큼 좁아진 것 같아요. (자본가들의 환경 변화를 열렬히 찬양한 SF 작가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좀 아이러니하고….)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관심 분야에 따라 각자 좋아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군요. 책을 읽는 동안 평소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설과 작가도 만나볼 수 있겠고, 이 책을 기점으로 관심 분야를 더욱 폭넓게 탐구할 수 있겠죠. 만약 종말 문학의 세계로 떠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은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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