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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홍수> - 생태주의적 생존자의 각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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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 생태주의적 생존자의 각성

OneTiger 2017. 2. 17. 12:10

소설 <홍수>는 디스토피아인 동시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뒤섞였다고 할까요. 결과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깝지만, 그 본질은 디스토피아와 많이 닮았죠. 일반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재난 이후를 주목합니다. 거대한 재난이 벌어지고, 인류 문명이 망하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온갖 아귀다툼과 비극이 벌어지죠. 대부분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런 모습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홍수>는 재난 이후만큼 재난 이전에도 주목합니다. 이 소설의 거대한 재난은 이미 한창 깽판을 치는 산업 자본주의 속에서 도사렸기 때문입니다. 산업주의는 수많은 병폐를 낳았고, 사람들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병폐에 저항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저항의 결과가 인류 문명의 붕괴로 이어졌으니까요. 어쩌면 이걸 그저 참혹하다고만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지옥 같은 문명이라면 응당 망해야 할 테니까요. 어쨌든 인류 문명이 건재했을 때도 아귀다툼은 치열했습니다.



그러니까 <홍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재난 이전의 디스토피아, 재난 이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어느 쪽이든 살기 힘듭니다.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에서 자연히 소설 주인공은 생존자로 변모하고 격렬한 싸움 속에서 살아남습니다. 대부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주인공은 생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고, 그런 결과로 (주인공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생존자로 변모합니다.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이나 제임스 발라드의 <크리스털 세계>처럼 수동적이고 망연자실한 생존자도 있고, 로저 젤라즈니의 <지옥의 질주>나 할란 엘리슨의 <소년과 개>처럼 약탈자들을 상대로 무쌍을 펼치는 생존자도 있죠. 주인공이 어느 쪽이든, 혹독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과정은 독자의 심금을 울립니다. 이런 재미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눈을 뗄 수 없죠. <홍수>의 주인공은 두 명인데, 토비와 렌입니다. 토비와 렌은 한때 어떤 종교 단체에 속했지만, 모종의 사건 덕분에 헤어집니다. 그 이후 거대한 재난이 인류 사회를 휩쓸고, 두 사람은 각기 자신만의 방법대로 살아남습니다.



토비와 렌이 몸 담았던 종교 단체는 흔히 '정원사들'이라고 불립니다. 이들이 정원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들 생태주의적 농업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 단체의 신념은 다소 과장된 생태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중이지만, 정원사들은 한쪽 구석으로 조용히 물러나고 자신들만의 쉼터를 가꿉니다. 이들은 자본주의 산업이 집어삼키지 않은 구역, 볼품없고 초라하고 추레한 구역을 자신들의 주거지로 삼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작은 농장을 꾸리고 오손도손 살아갑니다.


물론 볼품없고 초라하고 추레한 구역에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 수 없겠죠. 이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최대한 재활용합니다. 재활용은 정원사들의 신념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자원을 별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재활용 없이 정원사들의 삶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원사들은 자신들의 대변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거름으로 활용하죠. 남들이 버린 쓰레기도 일일이 긁어 모읍니다. 다시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허름한 옷을 입고, 모든 것을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근검절약과 청빈과 재활용만이 이들의 삶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정원사들은 모든 생명들을 동등하게 바라봅니다. 인간, 동물, 식물, 미생물까지 각자 자연에서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고 믿습니다. 정원사들도 자신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고, 따라서 누군가 해를 끼친다면, 정원사들은 그걸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원사들이 일상적인 폭력을 휘두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들은 최대한 싸움과 폭력과 죽음을 피하고 싶어하고, 상대의 공격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거나 무마시킵니다. 이들은 해충을 봐도 죽이는 대신 내쫓습니다.


당연히 정원사들은 (이름답게) 채식주의자입니다. 때때로 피치 못할 상황에서 고기를 먹지만, 어지간하면 채식을 고수합니다. 고기를 먹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할 테고, 그 동물은 고통을 받을 테니까요. 게다가 이들은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들의 종교는 사실 종교보다 삶의 방법론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재활용과 지속 가능성과 생명의 평등을 강조하는 삶. 유기적이고 고요하고 치유적인 삶.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강요하지 않고, 모든 것을 품으려고 합니다.



토비와 렌은 이런 종교 집단에서 일정 기간을 보냅니다. 렌은 어린 시절에 정원사들 틈에서 자랐고, 토비는 지도자들과 함께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적극적으로 꾸립니다. 하지만 토비와 렌 모두 이 종교 단체에 가입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렌은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원사들과 함께 살아갔을 뿐입니다. 토비는 집을 잃은 노숙자였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정원사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입니다.


정원사들은 생태주의 철학을 복음처럼 전파하지만, 렌은 그냥 어린애이고 별다른 사상이 없습니다. 토비는 이미 머리가 굵은 어른이지만, 정원사들의 철학과 생태주의 사상이 얼마나 유용한지 의문을 품습니다. 특히, 렌보다 토비의 의심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렌은 어린애이기 때문에 애초에 의심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살아갈 뿐이죠. 하지만 토비는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이고, 인생의 쓴맛을 겪어본 어른입니다. 이런 토비에게 정원사들의 철학은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리겠죠. 늑대의 성인 팔리 모왓? 이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어쨌든 토비는 정원사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이들에게 의탁했습니다. 그래서 토비는 정원사들처럼 생태주의 신도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동물들에게 말을 걸고, 육식을 끊고,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바라보기 위해 애쓰고…. 하지만 아무리 토비가 노력해도 생태주의 신념은 그냥 허공을 떠돌 뿐이고,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소설은 내내 토비의 적응과 의심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정원사들은 언제나 토비를 격려하고 받아들이지만, 정작 토비는 그들에게 완전히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저 살기 위해 그들을 도울 뿐입니다. 만약 토비가 다른 곳에 갈 수 있었다면, 동물 권리나 생명의 평등함 따위 진작에 내던졌을 겁니다. 세상이 온통 지옥이기 때문에 토비는 다른 곳에서 정착할 수 없었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정원사들의 믿음을 모방했을 뿐이죠. 토비는 이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정원사들과 합류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어디 그런다고 사상이 저절로 마음 속에 쑥 들어가나요. 어림없죠.



그런데 디스토피아는 언제까지 디스토피아로 머물지 않습니다. 곧이어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바뀌죠. 거대한 재난이 몰아치고, 인류 사회는 순식간에 붕괴합니다. 소설 제목인 '홍수'는 바로 이런 재난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성경>의 홍수가 세상을 휩쓸었듯 거대한 재난은 홍수처럼 산업 자본주의를 휩씁니다. 물론 기독교 <성경>에서 홍수는 정화를 뜻합니다. 홍수가 휩쓸었기 때문에 세상은 보다 깨끗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거대한 재난은 세상을 정화했을까요.


글쎄요…. 그건 독자마다 다르게 생각하겠죠. 작가 마가렛 앳우드도 이런 재난이 세상을 정화할 수 있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작가의 생각이 그럴 수 있으나, 그건 이 소설에서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정말 중요한 점은 토비의 변화입니다. 재난이 인류 사회를 무너뜨렸을 때, 토비는 정원사들과 헤어지고 홀로 아비규환을 헤처나가야 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정원사들의 생태주의 신념을 고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토비가 당장 정원사들처럼 생태주의적 신도로 각성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토비는 재난 이후 분명히 변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를 각성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토비 자신도 어느 정도 깨달았으나, 그런 깨달음은 변신이 아닙니다. 토비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이전의 방식을 응용했을 뿐이고, 자신도 모르게 정원사들의 방식을 모방하고, 그래서 결국 생태주의적 생존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어느 순간 머리를 때리는 번개 같은 각성의 장면 따위는 없습니다.


솔직히 토비는 마지막까지 정원사들의 일원이 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좀 더 멀어졌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점은 토비가 정원사들처럼 행동한다는 점입니다. 농장을 가꾸고,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바라보려고 애쓰고, 심지어 악랄한 범죄자들에게마저 숨통을 열어줍니다. 이건 사상이나 철학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그보다 습관입니다. 토비의 변화는 변화 자체마저 생태주의적인 면모가 있습니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각성의 순간이나 깨달음의 장면이 없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이 소설은 생태주의를 대놓고 주장하지만, 그걸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토비는 정원사들의 신념을 계속 의심하고, 끝내 그들과 함께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 점이 토비라는 인물을 더욱 부각하는 듯합니다. 생태주의를 주장하는 소설은 많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토비는 그걸 의심하는 인물입니다. 거기에 함부로 동화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토비는 (습관적으로) 그 신념을 따라갑니다. 생존을 위해 (되도록이면) 모든 것을 품에 안습니다. 소설 자체는 생태주의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만, 주인공 토비는 그걸 거부하는 동시에 '살기 위해' 따라갑니다. 그래서 토비는 지옥 속에서 살아가지만, 누군가를 죽이기보다 누군가를 치료하고 위로하고 보살펴주는 생존자로 변모합니다. 생태주의적 생존자, 생존자인 동시에 치유사라고 할까요. 아마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 많아도 이런 생존자는 보기 드물 겁니다. 그 점이 퍽 인상적이더군요.



아울러 토비가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은…. 사람이 참 무미건조합니다. 인물 자체가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감상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마 힘겨운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정원사들을 항상 의심하기 때문에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홍수>는 지난한 감상과 슬픔에 빠질 수 있는 책이지만, 주인공 토비가 항상 의심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싸구려 감상이나 슬픔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일정한 강도를 유지하죠. 그 점도 좋았습니다.


만약 토비가 금방 정원사들의 신념에 동화하거나 감상적으로 변했다면, 소설의 풍미가 한층 떨어졌을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홍수>의 전작 <인간 종말 리포트>를 좀 개운하지 않게 읽었습니다. 주인공 눈사람이 너무 과도한 감상에 빠진다고 할까요. 이 눈사람은 <홍수>에도 나오는데, 여전히 변화무쌍하더군요.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눈사람보다 토비가 더 마음에 드네요.



솔직히 저는 생태주의가 산업 자본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태주의는 자본주의와 동떨어지기 원할 뿐이고, 자본주의를 때려잡지 않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 혁명이야말로 자본주의를 뒤엎을 수 있는 대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태주의적 생존자의 매력이 떨어지지 않죠. 토비가 작가의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인지 모르겠으나, 마가렛 앳우드가 꽤나 인상적인 인물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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