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트리피드의 날> - 사회 전복과 새로운 질서, 묘한 우월감 본문
흔히 SF 소설은 가상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외계 행성은 가상 세계의 대표적인 상징이죠. 외계 행성 이외에 사이버 공간, 초거대 우주선, 지구 공동, 해저 도시, 극지의 유적, 미래 도시 등은 독자에게 현실에서 비롯했지만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현실과 인연이 있지만) 현실과 전혀 다른 법칙이 그 세계를 지배합니다. 그건 과학적 법칙일 수도 있고, 사회적 법칙일 수도 있습니다. 모름지기 좋은 SF 소설은 그 두 가지를 전부 말해야 하겠죠.
만약 우주 승무원들이 초거대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으로 떠난다고 가정하죠. 그렇다면 창작가는 어떻게 그 우주선이 생겼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생존 장치를 구비했는지 설명해야 할 겁니다. 또한 창작가는 어떻게 승무원들이 살아가는지, 어떤 법칙과 윤리가 우주선 사회를 통치하는지, 승무원들은 어떤 철학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지 설명해야 할 겁니다. 종종 작가들은 과학적 법칙과 사회적 법칙 중 하나에 몰두하곤 하고, <트리피드의 날>은 이 중에서 사회적 법칙에 보다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트리피드의 날>은 너무 유명한 소설이죠. 줄거리를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장님 아포칼립스 중에서 아마 가장 유명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죄다 장님이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멀쩡히 앞을 보지만,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차라리 귀가 멀거나 냄새를 못 맡거나 벙어리가 되었다면 훨씬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하필 눈이 멀었죠. 허버트 웰즈가 일찍이 쓴 소설처럼 사람은 지극히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사실 시각이 우리 인간의 전부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눈에 의지하고, 앞이 안 보이면 크게 절망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앞을 못 봅니다. 당연히 엄청난 충돌과 혼란이 발생하겠죠. 게다가 존 윈덤은 사람들이 시력을 잃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소설 시작부터 이미 재앙이 전세계적으로 퍼졌고, 사회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독자는 (두 눈이 멀쩡한) 주인공과 함께 적막한 아수라장을 들어가고, 온갖 모험을 겪습니다. 당연히 이 와중에서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문제들이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따라 붙습니다. 그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겠죠.
"만약 내가 저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읽는 독자는 자주 이런 물음에 부딪히곤 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그 어떤 SF 장르보다 독자에게 저렇게 물어보곤 합니다. 아마 문명 사회가 붕괴했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가 가장 극대화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 사회의 질서가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회 질서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어느 정도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들만 지켜주죠.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겁니다. 어른이 아이를 학대하고, 장애인이나 여자가 차별을 당하고, 노동자가 임금을 못 받죠. 동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감옥 같은 닭장에 갇힌 닭들을 보세요. 어디 내부의 문제만 존재하겠어요. 강대국의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내부 문제를 외부로 방출하기도 하죠. 강대국은 개발도상국에게 자유 경쟁 시장을 강요하고, 개발도상국은 강대국의 모순을 떠안고, 가난한 후진국 농민들은 빚더미에 몰리거나 자살하죠.
사회 질서는 수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한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줍니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까닭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겠죠.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야 값싼 공산품이 나오고, 닭들이 감옥 속에서 살아야 닭고기가 대량 생산될 수 있겠죠. 하지만 사회 질서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문명 사회가 붕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착취의 범주가 훨씬 넓어질 겁니다. 더 이상 일부 사람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겁니다.
그 질서는 이전 문명 사회에 비하면 혼란처럼 보이겠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질서입니다. 어차피 혼란은 어디에나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그걸 질서라고 생각할 따름이죠.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면, 이전 세계의 사고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 헛갈릴 겁니다. 이미 이전 세계의 질서는 새로운 세계에 걸맞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이전 세계의 질서에 따라 행동할 겁니다. 소설을 읽는 독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독자도 여전히 현실의 법칙을 따를 테니까요. 하지만 소설 속의 상황은 그렇지 않고, 독자는 매번 선택해야 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느 사회학자의 연설일 겁니다. 이 사회학자는 생존자들에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다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무너졌고, 따라서 이전 세상의 도덕, 윤리, 철학, 사상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는 여전히 빛을 발하지만, 그래도 상당수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사회학자는 자신이 역사를 살펴본 후 각 시대마다 나름대로 법규와 윤리를 고수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세상이 무너졌기 때문에 새로운 법규와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종교마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합니다. 생존자들이 아무리 신에게 기도해도 신이 직접 강림할 리 없으니까요. 아마 존 윈덤은 소설의 주제를 이 사회학자의 연설에 맡긴 듯합니다. 당연히 반발이 따르죠. 누군가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특히 종교 신념이 투철한 사람이라면, 그 질서를 따르느니 차라리 순교가 낫다고 생각하겠죠.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하게 반응하고, 그런 반응들은 다양하게 어울리거나 엇갈립니다. 이것들은 때로 엄청난 비극으로 번지고, 독자의 마음 속까지 흔듭니다.
저는 이런 부분이야말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재미를 결정한다고 봅니다. 작가는 세상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아주 극단적인 상황으로 밀어넣습니다. 먹을 게 부족하면, 주인공은 사람 고기를 먹어야 할까요. 주인공은 자기 혼자 사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할까요. 누군가 곤경에 처하면, 주인공은 그 사람을 도와야 할까요. 사실 문명 사회가 멀쩡하다면, 저런 물음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사회 질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미 그 사회 질서는 무너졌고, 주인공은 수많은 상황에서 이전 시대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와 자신의 생존을 두고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주인공은 악독하게 변할 테고, 어떤 주인공은 이전 시대처럼 무너지겠죠. <트리피드의 날>의 주인공은 이전 세계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그게 쉽지 않다고 깨닫습니다. 다행히 운도 따랐죠. 이런 선택과 비극의 갈림길이 소설 마지막까지 독자를 잡고 흔듭니다. 소설 속이 아니라도 인류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는 이상, 이런 선택과 비극은 계속 독자들의 선택을 요구하겠죠. 소설 속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그게 직접적으로 드러났을 뿐.
종종 평론가들이 지적하지만, '트리피드'는 재앙의 원인이 아닙니다. 소설 제목은 '트리피드'지만, 트리피드는 대재앙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트리피드는 크툴루가 아닙니다. 그냥 식인 식물에 불과하죠. 이 놈들은 인류 사회를 전복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무너졌고, 게다가 하필 사람들이 앞을 못 보고, 그래서 트리피드는 인류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류 사회는 너무 강대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괴수들은 문명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인류가 개인 화기부터 전략 병기까지 사용하고, 괴수들을 싹쓸이할 테니까요.
<백경>을 보세요. 모비 딕은 엄청난 괴수로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이 놈은 인류 사회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자기한테 덤비는 포경선만 작살낼 뿐이죠. 폭풍이 몰아치지 않았다면,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티-렉스도 사람들을 습격하지 못했을 겁니다. 인류 사회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로섬의 만능 로봇>이나 <도롱뇽과의 전쟁>처럼 지능 있는 종족이 출현해야죠. 하지만 트리피드는 그런 종족이 아니고, 따라서 부수적인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부수적인 위협도 위협이고, 이 놈들 덕분에 소설은 여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다르게 보입니다.
사실 트리피드가 없었더라도 소설은 얼마든지 흥미로웠을 겁니다. 전세계 사람들은 대부분 눈이 멀었고, 오직 주인공만 멀쩡하게 앞을 봅니다. 주인공은 초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주인공 자신이 뛰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보다 나쁜 상황에 처했을 뿐이죠.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앞을 못 보지만, 주인공은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초인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묘한 우월감(?)이야말로 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특징일 겁니다.
주인공은 생존자이지만, 그냥 평범한 생존자가 아니에요. 그야말로 허버트 웰즈의 소설처럼 주인공은 남들과 다릅니다. 주인공이 겪는 고민은 그저 생존자의 고민이 아닙니다. 멸망한 세상 속에서 초인이 겪는 고민…. 대략 그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눈이 먼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자신을 이끌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제발 자신들의 구원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주인공 또한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도와야하는지 고민하죠. 이런 우월감과 고민이 처음부터 끝까지 엄습하고, 희한한 쾌감(?)과 아픔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어떤 평론가는 이 소설을 '안락한 멸망(코시 카타스트로피)'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런 면모도 없지 않습니다. 주인공과 연인이 고급 호텔에서 멋진 식사를 즐기거나 그런 장면이 나오니까요. 하지만 이 소설의 특징은 안락한 멸망보다 위에서 말한 쾌감과 아픔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