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태학 SF들과 자연을 돌보는 여자들 본문
[생태학 SF들이 환경 오염들을 이야기한다면, 기후 정의는 여자 권리에 주목해야 할 겁니다.]
셸리 스트리비는 산 디에고 캘리포니아 대학의 문학 및 소수 민족 연구자입니다. 문학 연구자와 소수 민족 연구자로서 셸리 스트리비는 생태 유토피아가 오직 백인 남자만을 반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은 상류층 백인 남자를 반영합니다. 메리 셸리가 SF 장르를 열어젖혔음에도, 여전히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은 백인 남자 중심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19세기 서구에서 문학 작가들은 남자들이었고 여자들은 쉽게 철학이나 문학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여자 철학자들이나 여자 작가들은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주류가 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SF 장르에서도 여자 작가들은 남자 작가들과 대등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유럽 태생입니다. 다른 지역들이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꿈꾸지 못하는 동안 서구 작가들은 꾸준히 사이언티픽 로망스들과 SF 소설들을 썼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은 백인 남자를 반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이 백인 남자를 반영하기 때문에, 생태 유토피아들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셸리 스트리비는 이런 상황을 우려하고 생태 유토피아가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생태 유토피아에서 다양성이 중요할까요? 생태 유토피아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비판합니다. 생태 유토피아는 기후 정의를 주장합니다. 기후 정의는 부유한 북반구가 환경 오염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 북반구(유럽과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는 막대한 온실 가스를 뿜었습니다. 남반구(인도를 비롯해 이른바 제3세계들)가 빈곤과 식민지 수탈에 허덕일 때, 북반구 유럽과 미국은 신나게 식민지들을 수탈했고 온실 가스를 뿜었고 부를 축적했습니다. 제3세계는 기후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싶다고 해도, 제3세계에는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수많은 흑인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가난합니다. 그들에게는 대형 산업 공장들이 없고, 그들은 기후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반면, 미국의 소수 백인들에게는 엄청난 부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전체의 다수 흑인들보다 미국의 소수 백인들은 훨씬 심각하게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할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가 행성적인 재난이 된다면, 남반구 가난한 양민들은 커다란 피해를 입을 겁니다. 온실 가스를 뿜지 못했음에도, 대형 공장을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제3세계의 가난한 양민들은 커다란 피해를 받아야 합니다. 이건 범죄입니다. 그래서 인류 사회에는 기후 정의가 필요합니다. 부유한 북반구는 환경 오염들을 떠맡아야 합니다.
게다가 기후 변화가 영향을 미칠 때,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훨씬 불리할 겁니다.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들은 억지로 돌봄 노동들을 맡아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적극적인 남성과 수동적인 여성을 구분하고 여자들을 돌봄 노동들로 밀어넣습니다. 돌봄 노동 없이 인류 문명이 이어지지 못함에도,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들을 개무시합니다.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돌봄 노동들은 개인화되고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돌봄 노동들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고 사회화가 되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이런 돌봄 노동들에 얽매여야 합니다. 여자들은 쉽게 아이들과 노인들과 병자들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재난이 닥쳤을 때, 여자들은 쉽게 피하지 못하고 피해를 감당해야 합니다. 기후 정의는 비단 북반구와 남반구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언급합니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남성과 (수동적이고 조신한) 여성이라는 편견은 사라져야 하고, 여자들과 남자들은 함께 돌봄 노동들을 맡아야 합니다. 돌봄 노동들은 사회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그걸 허락하지 않고, 여전히 여자들은 억압을 받습니다. 남자들이 '중요한' 산업 노동들에 참가할 때, 여자들은 '부차적인' 돌봄 노동들을 억지로 맡습니다. 기후 정의는 이런 상황을 비판하고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후 정의가 제3세계와 여자들을 주장한다면, 생태 유토피아 역시 제3세계와 여자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셸리 스트리비는 생태 유토피아가 백인 남자 중심주의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건 생태 유토피아가 백인 남자를 외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백인 남자는 무조건 지배 계급이 아닙니다. 서구에는 가난한 백인 남자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가부장적인 남자를 선호합니다. '여성적인 남자'는 '계집애 같은 찌질한 남자'가 되고, 가부장 문화는 여성적인 남자를 개무시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성적인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자들은 여성적인 남자를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헐뜯습니다.
백인 남자들이 가난하거나 백인 남자들이 이른바 초식남이 될 때, 백인 남자들 역시 얼마든지 피해자가 될지 모르고, 기후 정의는 이런 백인 남자 피해자들을 변호해야 합니다. 문제는 19세기 이후 인류 문명에서 전반적으로 제3세계와 여자들이 훨씬 많은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유럽 중심주의는 꽤나 지배적인 편견이고, 심지어 숱한 지식인들 역시 유럽 중심주의를 숭배합니다.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백인들이 뛰어나다고 숭배합니다. 숱한 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인종 차별론자들입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남자들은 지배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자들에게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자지 대신 보지가 있기 때문에. 두 젖가슴이 있기 때문에. 그저 그것들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양쯔충은 코라존에게 자연 친화적인 측면을 부여하나, 이건 여자 권리로 직접 이어지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 경제는 얼마든지 백인 남자들을 무시하고 착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훨씬 많은 피해자들은 제3세계와 여자들입니다. 그래서 생태 유토피아는 제3세계와 여자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사이언스 픽션들은 백인 남자를 반영하나, 제3세계와 여자들은 늘어나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여자들(특히, 비서구 여자들)이 자연 환경과 교감할 때, 여기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 겁니다. 비단 생태 유토피아만 아니라 환경 아포칼립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여자들이 자연 환경과 교감한다고 해도, 이건 무조건 기후 정의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기후 정의를 말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들은 여자들과 환경 오염을 이야기할 수 있으나, 거꾸로 여자들이 자연을 돌본다고 해도, 그건 무조건 기후 정의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여자들이 자연 환경과 교감하는 사례들은 적지 않으나, 그것들은 무조건 기후 정의를 상징하지 못합니다. 새시 로이드가 쓴 소설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주인공 여자 고등학생은 환경 오염들을 걱정하고 여자 권리를 인식합니다. 비디오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에서 테라 살붐의 대표 비비안은 젊은 여자이고 녹색 정치를 주장합니다.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이나 생태 유토피아 게임은 기후 정의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선샤인>에서 여자 우주 승무원 코라존이 식물 구역을 돌볼 때, 이게 기후 정의를 상징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선샤인>은 환경 오염들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선샤인>에서 우주선 이카루스에는 산소 정원이 있습니다. 녹색 식물들은 산소를 뿜고, 코라존은 녹색 식물들을 돌봅니다. 어쩌면 이건 에코 페미니즘을 가리킬지 모릅니다. 코라존을 연기한 배우 양쯔충(양자경)은 산소 정원에 어떤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양쯔충은 아시아 여자이고, 코라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양쯔충이 코라존에게 자연 친화적인 측면을 부여한다고 설명합니다. 코라존은 아시아 출신 여자이고 서구 백인 남자가 아닙니다. 고향에서 코라존은 유기적인 것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코라존은 자연 친화적이고, 코라존에게는 어느 정도 대지모신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코라존이 우주선 속의 산소 정원을 돌볼 때, 그건 에코 페미니즘을 가리키거나 대지모신을 가리킬지 모릅니다. 반다나 시바가 대지모신을 중시하는 것처럼, 어머니 자연은 에코 페미니즘이나 생태 사회주의로 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머니 자연이 그저 비유적인 의미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런 비유는 에코 페미니즘이나 생태 사회주의를 직접 가리킬 수 있어요. 돌봄 노동들을 개무시하는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 경제에게는 어머니 자연을 언급할 자격이 없습니다.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 경제가 어머니 자연을 언급한다면, 그건 어머니 자연을 모욕하는 언급일 겁니다.
하지만 양쯔충이 코라존에게 어머니 자연을 부여한다고 해도, <선샤인>은 생태 유토피아나 환경 아포칼립스가 아닙니다. <선샤인>은 우주 탐사 영화이고, 그래서 양쯔충이 코라존을 자연 친화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양쯔충은 코라존을 독특하게 해석했고, 코라존은 인상적인 등장인물이나, 관객들은 코라존과 어머니 자연과 기후 정의를 제대로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반면, 소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훨씬 그럴 수 있겠죠. 소설 속에서 주인공 여자 고등학생 로라에게는 대지모신이나 어머니 자연 같은 측면들이 없습니다. 여자 고등학생은 신비롭지 않고 자연 친화적이지 않습니다. 코라존과 달리, 로라는 어머니 자연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제3세계와 여자 권리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특히, 속편 <식수 전쟁 2017>에서 로라는 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고난을 겪고, 이 소설은 제3세계 문제를 직접 묘사합니다. 제목처럼, <카본 다이어리 2015>는 기후 정의를 직접 언급하고 어떻게 기후 변화가 사회를 파괴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경쾌하고 어둡지 않으나, 환경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여자 권리와 제3세계 문제에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로서 <카본 다이어리 2015>는 백인 남자 중심주의를 깨뜨리고 싶어합니다. 그 노력이 치열하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이 소설은 그걸 시도합니다.
<선샤인>의 코라존보다 <카본 다이어리 2015>의 로라는 훨씬 직접적으로 기후 정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비록 자연 친화적인 측면과 어머니 자연이 없다고 해도, 코라존보다 로라는 훨씬 낫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여자들이 자연 환경과 교감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걸 무조건 기후 정의와 연결한다면, 그건 착각이 될 겁니다. 코라존과 로라처럼, 어떤 여자 등장인물은 그러지 못하고, 어떤 여자 등장인물은 그럴 수 있습니다. 어드벤처 게임 <스테이시스>는 존 마라첵이라는 등장인물을 보여줍니다. 어떤 정체 불명의 우주선에서 존 마라첵은 깨어나고 우주선을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우주선에는 역겹고 기괴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존 마라첵을 죽이기 원하고, 존 마라첵은 괴물들을 피해야 합니다. <스테이시스>는 을씨년스러운 영화 <에일리언>이나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 <선샤인> 역시 을씨년스러운 우주선을 묘사하고, 따라서 <스테이시스>와 <선샤인>은 서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리고 <선샤인>에 코라존이 있는 것처럼, <스테이시스>에는 테아가 있습니다. 괴물들을 회피하고 우주선을 돌아다니는 동안 존 마라첵은 테아를 만납니다. 테아는 식물 재배 구역을 돌보는 식물학자입니다. <스테이시스> 역시 우주선 안에 산소 정원이 있다고 설정했습니다.
[테아는 싱그럽고 생태적인 녹색 자연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테아는 그저 그럴 뿐입니다.]
여러 관점들에서 코라존과 테아는 닮았습니다. 양쪽 모두 우주 승무원이고, 여자이고, 산소 정원을 담당합니다. 코라존과 테아는 녹색 자연을 좋아합니다. 테아는 자신이 싱그러운 산소 정원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테아가 에코 페미니즘이나 어머니 자연이나 기후 정의를 가리킬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스테이시스>가 기후 정의를 직접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테이시스>는 그릇된 유전 공학을 질타하고 과학 기술 상품화를 비판하나, 그건 제3세계 문제와 여자 권리와 돌봄 노동 사회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테아가 인상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우주선 속에서 녹색 정원을 담당하는 여자 승무원은 독특한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테아가 독특하다고 해도, 테아는 <카본 다이어리 2015>의 로라가 아닙니다. 테아보다 로라는 훨씬 기후 정의를 직접 가리킬 수 있습니다. 로라가 식물학자가 아니라고 해도, 로라가 싱그러운 산소 정원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카본 다이어리 2015>가 전반적으로 제3세계 문제와 여자 권리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여자 등장인물이 자연을 돌본다고 해도, 창작물이 기후 정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자연과 교감하는 여자는 그저 독특한 등장인물에 불과합니다. 코라존과 테아는 기후 정의에 닿지 못합니다.
줄리 버타그나가 쓴 <태양이 없는 땅>은 어떨까요? 이 소설은 기후 변화 때문에 육지들이 물에 잠겼다고 묘사합니다. <태양이 없는 땅>은 환경 아포칼립스이고 기후 정의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가 인류 문명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이 소설은 제3세계 문제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제3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는 부유한 공중 도시가 있습니다. 섬 사람들은 공중 도시에 들어가기 원하나, 공중 도시 사람들은 섬 사람들을 밀어냅니다. 공중 도시 주변에서 섬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보트 피플이 됩니다.
네, 섬 사람들은 정말 보트 피플입니다. 이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육지들이 물에 잠겼기 때문에, 공중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 섬 사람들은 보트 피플이 되어야 합니다. <태양이 없는 땅>이 제3세계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섬 사람들과 (현실 속의) 보트 피플을 쉽게 연결할 수 있겠죠. 게다가 공중 도시 지하에는 이른바 야만인들이 삽니다. 부유한 공중 도시에는 문명인들이 있고, 지하에는 야만인들이 있죠. 하지만 야만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자연 친화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 마라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이 무조건 적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도시 문명인들과 지하 야만인들은 효과적인 비유입니다. 소설 <타임 머신>이 엘로이와 몰록을 대조한 것처럼, <태양이 없는 땅>은 도시 문명인들과 지하 야만인들을 대조합니다. 그리고 <태양이 없는 땅>은 도시 문명인들보다 지하 야만인들을 훨씬 친근하게 바라봅니다. 마라는 야만인들과 어울리나, 도시 문명인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마라는 소녀입니다. 소녀로서 마라는 가부장적인 문화를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공중 도시 지하를 돌아다니는 동안, 마라는 어떤 무너진 도서관에 들어갑니다. 무너진 도서관에서 마라는 여러 백인 남자 위인들을 쳐다봅니다.
마라는 왜 위인들이 백인 남자들이고 왜 여자들이 없는지 궁금하다고 느낍니다. 위인들 중에는 카를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다른 위인들보다 카를 마르크스는 공유 사회를 추구했으나, 결국 카를 마르크스 역시 상류층 백인 남자라는 한계를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여자 권리를 어느 정도 주장하나, 카를 마르크스는 여자 권리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카를 마르크스 이후, 유럽과 러시아 공산주의는 세계 여성의 날을 제창하나,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속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여자 권리를 억압했습니다. 공산주의, 세계 여성의 날, 기후 정의는 꽤나 복잡한 관계를 맺었어요.
소설 <태양이 없는 땅>은 어떻게 공산주의, 세계 여성의 날, 기후 정의가 관계들을 맺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없는 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이런 것들에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은 소녀 주인공과 기후 변화와 보트 피플과 야만인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에코 페미니즘이나 기후 변화를 어느 정도 자각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소설은 마음을 울리고 동시에 머리를 자극해야 합니다. <태양이 없는 땅>을 읽은 이후, 독자들이 에코 페미니즘과 기후 정의를 바라볼 수 있다면, 이건 환경 아포칼립스가 마음을 울리고 머리를 자극하는 사례가 될 겁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머지드>는 <태양이 없는 땅>과 많이 비슷합니다. 제목처럼, <서브머지드>는 도시가 물에 잠겼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브머지드>는 몇몇 단서를 암시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무분별한 산업 발전이 환경 오염들을 일으켰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는 땅>처럼, <서브머지드>에서 게임 주인공 소녀는 보트를 타고 폐허를 돌아다닙니다. 게다가 게임 주인공 소녀는 유럽 백인이나 미국 백인이 아니라 제3세계 원주민에 가깝습니다. 게임 제작진 어퍼컷 게임즈가 이걸 의식했을까요? 기후 정의를 비유하기 위해 어퍼컷 게임즈가 제3세계 원주민 소녀를 제시했을까요? 그건 분명하지 않습니다.
[미쿠는 마라와 비슷할까요? 아니면 제3세계 소녀와 환경 아포칼립스는 그저 우연에 불과할까요?]
<태양이 없는 땅>과 달리, <서브머지드>는 제3세계 난민들과 여자 권리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서브머지드>에서 소녀 미쿠는 그저 쪽배를 타고 폐허를 돌아다닐 뿐입니다. 양쯔충이 코라존에게 어머니 자연을 부여한 것처럼, 어쩌면 어퍼컷 게임즈는 쪽배 소녀 미쿠에게 에코 페미니즘을 부여하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코라존이 어머니 자연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미쿠 역시 에코 페미니즘을 직접 가리키지 못합니다. 미쿠가 무조건 에코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고 게임 플레이어가 해석한다면, 그건 지나친 해석일지 모릅니다.
창작물은 열린 세계이고, 소설 독자와 영화 관객과 게임 플레이어는 수많은 해석들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들은 논리적인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해석에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소설 독자와 영화 관객과 게임 플레이어는 '무엇이 논리인가'라고 물을 수 있으나, 논리가 무엇이든, 논리는 존재해야 합니다. <서브머지드>에서 쪽배 소녀 미쿠는 에코 페미니즘을 가리킬 수 있고, 아니면 가리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브머지드>는 유일무이한 환경 아포칼립스가 아닙니다. 여러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기후 정의와 여자 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따라서 게임 플레이어는 <서브머지드>와 <태양이 없는 땅>을 함께 논의할 수 있어요.
창작물을 해석할 때, 종종 사람들은 창작물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창작물 속에서 사람들은 주제와 사상과 의미와 상징을 찾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창작물은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작가가 소설을 쓸 때, 감독이 영화 시나리오를 검토할 때, 게임 제작자가 게임 줄거리를 고민할 때, 그들은 현실을 동원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서브머지드>를 다른 환경 아포칼립스들과 비교하거나 대조할 수 있습니다. <서브머지드>가 에코 페미니즘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여러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있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기후 정의가 중요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다른 환경 아포칼립스들과 <서브머지드>를 비교하고 에코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월-E>에서 이브 역시 그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영화 <선샤인>의 코라존, 게임 <스테이시스>의 테아, 소설 <카본 다이어리 2015>의 로라,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의 비비안, 소설 <태양이 없는 땅>의 마라, 게임 <서브머지드>의 쪽배 소녀 미쿠는 모두 인간입니다. 하지만 왜 오직 인간 여자만 여자 권리를 주장해야 할까요? 애니메이션 <월-E>에서 이브는 여자 로봇입니다. 뭐, 로봇에게 성별은 없을지 모르나, 관객들은 이브가 여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이브는 녹색 식물을 품습니다. 무너진 폐허에서 이브는 녹색 생명을 품는 (비인간) 여자입니다. 이건 꽤나 강렬한 상징입니다.
<월-E>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이브는 여자(로봇)이고 녹색 생명을 품습니다. 동시에 이브는 특별히 자연 친화적이지 않습니다. 이브에게는 어머니 자연이 없습니다. 이브는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이고 녹색 자연 환경에 감탄하지 않습니다. 이브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를 본다고 해도, 이브는 특별하게 감동하지 않을 겁니다. <월-E>는 구태여 제3세계 문제나 여자 권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셸리 스트리비는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백인 남자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월-E>에서 흑인들이나 유색 인종들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이브는 여자(로봇)이나, 이브는 동남 아시아 난민들이나 원주민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주선 선장은 백인 남자입니다. 아무리 이브가 영웅적으로 활약한다고 해도, 결국 우주선 선장은 백인 남자입니다.
관객들이 <월-E>의 이브를 <카본 다이어리 2015>의 로라 및 <태양이 없는 땅>의 마라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서브머지드>에서 미쿠가 에코 페미니즘을 직접 가리키지 않는 것처럼, <월-E>에서 이브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이브는 황량한 폐허에서 녹색 식물을 품는 여자(로봇)이나,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월-E>의 이브보다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씨앗들을 품는 할머니는 훨씬 나을 겁니다. <월-E>를 평가할 때, 관객들이 <태양이 없는 땅>의 마라나 <분노의 도로>의 씨앗 할머니를 함께 비교하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이브와 에코 페미니즘을 쉽게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창작물 속에서 여자가 자연을 돌본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그건 특별히 뭔가를 가리키지 못합니다.
비인간 여자 이브처럼, 사이언스 픽션들은 인간 여자 이외에 다른 여자들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 역시 자연 환경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두 소미인(마이나, 미아나)을 보여줍니다. 마이나와 미아나는 생명, 자연, 치유, 복원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마이나와 미아나는 도시 문명을 거부하고, 첨단 기계와 대립하고,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고지라와 적대하고, 생명을 품을 수 있습니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문명과 자연을 꽤나 피상적으로 구분합니다. 문명과 자연은 악과 선이 아닙니다.
문명과 자연은 변증법적으로 서로 복잡한 영향들을 미칩니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들을 단순히 악과 선으로 치환합니다.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과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피상적으로 흑백 논리를 펼칩니다. 가부장 문화는 단순하게 적극적인 남성과 수동적인 여성을 구분하고, <괴수 행성> 시리즈는 단순하게 악한 문명과 선한 자연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는 지배 계급을 편드나, <괴수 행성> 시리즈는 피지배 계급을 보여줍니다. 적어도 <괴수 행성> 시리즈는 제3세계 여자(소녀와 어머니)에게 주목합니다. 따라서 <괴수 행성> 시리즈는 어느 정도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 겁니다.
[비록 이브가 로봇이라고 해도, 생명을 품는 여자로서 이브는 강렬한 비유가 될 수… 있을까요?]
비디오 게임 <섀도우런: 드래곤 폴> 역시 비인간 여자가 자연 환경과 교감한다고 묘사합니다. 거대한 드래곤 포이어슈윙은 무서운 거대 괴수 같으나, 포이어슈윙은 가이아의 수호자입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 가이아의 수호자는 그저 절망했고 미쳐날뛰었을 뿐입니다. 포이어슈윙이 도시를 불태운다고 해도, 그건 이 거대한 드래곤의 잘못이 아닙니다. 가이아의 수호자로서 포이어슈윙은 어머니 자연을 직접 상징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괴수 행성> 시리즈가 모스라와 두 소미인에게 어머니 자연을 부여하는 것처럼, <섀도우런: 드래곤 폴> 역시 포이어슈윙에게 어머니 자연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모스라와 포이어슈윙은 모두 거대 괴수이고 신성합니다. 모스라와 포이어슈윙은 압도적이고 인류 문명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샤인>의 코라존보다 모스라와 포이어슈윙은 어머니 자연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직접적인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섀도우런: 드래곤 폴>은 산업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류 문명이 악하다고 피상적으로 주장합니다. 이건 심층 생태주의에 가깝고, 에코 페미니즘은 이런 피상적인 시각을 경계합니다. 포이어슈윙이 어머니 자연이라고 해도, 이 거대한 드래곤은 에코 페미니즘으로 직접 이어지지 못해요.
이런 시각이 확장한다면,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중세 판타지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돌보는 여자'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비디오 게임 <네버윈터 나이츠 2>에는 여러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드루이드 엘라니와 레인저 비숍은 모두 자연 신성 계열에 속합니다. 하지만 여자 드루이드 엘라니와 달리, 남자 레인저 비숍은 자연 생태계가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라니는 자신이 자연 생태계를 돌본다고 생각하나, 비숍은 자신이 자연 속에서 은밀한 사냥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레인저 주문들을 외움에도, 비숍은 자연 신성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드루이드와 레인저로서 엘라니와 비숍이 똑같이 자연 신성 계열에 속한다고 해도, 엘라니와 비숍은 서로 대조적입니다.
게임 속에서 노골적으로 비숍은 엘라니를 성 희롱하고, 엘라니는 비숍을 깝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들과 레인저들이 함께 숲을 돌보기 때문에 양쪽은 서로 친하나, 엘라니와 비숍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돌보는 여자' 엘라니가 기후 정의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아무리 하루 종일 엘라니가 신성한 어머니 자연을 떠든다고 해도, <네버윈터 나이츠 2>에는 산업 자본주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엘라니가 '자연을 돌보는 여자'라고 해도, 엘라니는 기후 정의를 가리키지 못합니다. 심지어 엘라니는 비유조차 되지 못해요. <카본 다이어리 2015>의 로라는 다이어 타이거를 부르거나 덩쿨을 조종하지 못하나, 로라는 기후 정의로 직접 이어질 수 있어요.
<스테이시스>의 테아와 <네버윈터 나이츠 2>의 엘라니는 어느 정도 닮았습니다. 양쪽 모두 생태학 전문가이고 식물들을 돌봅니다. 테아와 엘라니는 모두 풍성하고 싱그러운 녹색 자연을 사랑합니다. 테아와 엘라니는 모두 여자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테아와 엘라니는 기후 정의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속에서 여자가 자연을 돌볼 때, 여기에는 어떤 가치가 있으나, 그건 무조건 기후 정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태학 지식 그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드루이드 주문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성별 역시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에서 신의 정원사들은 동물 권리를 중시하고 무분별한 산업 발전을 비판합니다. 심지어 신의 정원사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역행합니다. 신의 정원사들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고, 따라서 그들은 에코 페미니즘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만약 테아가 신의 정원사들을 만난다면, 테아가 정원사들에게 동의할까요? 테아와 정원사들 모두 풍성하고 싱그러운 자연을 예찬합니다. 하지만 풍성하고 싱그러운 자연을 예찬하기 위해 양쪽이 무엇을 할까요? 신의 정원사들처럼, 테아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역행할 수 있을까요? <스테이시스>에서 게임 주인공은 존 마라첵이고, 테아는 제한적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테아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스테이시스>에서 존 마라첵은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존 마라첵을 조종하고 존 마라첵의 시점을 이용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테아의 시점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테아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테아는 제한적인 등장인물이고, 테아를 이용해 논의하기는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선샤인>에 나오는 코라존은 어떨까요? 코라존이 <홍수>에 나오는 신의 정원사들에게 동의할까요? 시릴 콘블루스와 프레드릭 폴은 <우주 상인>을 썼습니다. 소설 <우주 상인>에서 비밀 저항 단체 콘지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 대기업 간부들을 공격합니다.
콘지에는 여자 회원들이 있습니다. 테아가 이런 여자 회원들에게 동의할까요? 코라존이 이런 여자 회원들에게 동의할까요? 아무리 코라존이 자연 친화적이고 어머니 자연적이라고 해도, 코라존이 대기업 간부들을 공격할 수 있을까요? 엘라니는? 엘라니는 아예 대기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없고 대기업이 없습니다. 아무리 엘라니와 콘지 여자 회원이 똑같이 자연 환경을 보호한다고 해도, 엘라니는 콘지 여자 회원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콘지 여자 회원을 이해하고 싶다면, 엘라니는 근대적인 진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는 여자 드루이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막연한 환경 보호를 외칩니다.]
비단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드루이드와 레인저 이외에 여러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는 숱한 자연 신성 계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숲 속을 돌아다니고, 나뭇잎 장식들을 걸치고, 나뭇잎 위장복들을 입고, 야수들을 대동하고, 덩쿨을 조종하거나 곤충 떼를 부르고, 정령들과 대화하거나 나무 귀신들과 손을 잡습니다.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은 정말 로망이고 멋집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연이 뭘까요? 흔히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울창한 숲이 자연인가요? 오직 그것만이 자연인가요? 수많은 사람들은 오직 그것만이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연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인류 문명이 중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층 생태주의부터 파쇼주의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자연 환경이 울창한 녹색 숲이라고 간주하고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략 35억 년 전에 생명체들이 나타난 이후, 자연 생태계는 지속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어떤 고정적이고 특정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대 쥐라기 생태계 역시 자연 환경입니다.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인류 문명이 스테고사우루스를 복원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녹색 나뭇잎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 구조와 지속 가능한 산업과 차별에 저항하는 투쟁입니다. 심층 생태주의와 자유주의와 파쇼주의 모두 이것을 간과합니다. 이런 사상들이 '자연을 돌보는 여자'와 어머니 자연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건 피상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쩌면 <서브머지드>의 미쿠 역시 콘지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공산주의 운동에 동감하는 것처럼, 미쿠 역시 콘지 여자들에게 동감할지 모릅니다. <태양이 없는 땅>의 마라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의 로라는 훨씬 콘지 여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의 비비안은 콘지 여자들을 테라 살붐으로 끌어들이기 원할지 모르죠. 소설 <에코토피아 비긴스>에서 생태주의 정당 여자들이 폭력과 비폭력, 테러와 온건한 저항을 논의하는 것처럼, 비비안과 콘지 여자들은 폭력과 테러를 논의할 수 있을 겁니다.
엘라니는 뭐라고 비비안과 콘지 여자들이 떠드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여자가 자연을 돌본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 갈래들로 뻗을 수 있습니다. 환경 오염들을 논의할 때,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여자 권리를 인식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여자들이 자연을 돌본다면, 그건 반가운 현상일 겁니다. 하지만 여자가 자연을 돌본다고 해도, 그것은 단일한 상징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인도 칩코 여자 운동가들은 똑같이 환경 운동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쪽이 환경 운동에 공감한다고 해도, 양쪽은 서로 다른 노선을 지지합니다.
문학 이론부터 생태학 연구까지, 수많은 활동들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수많은 활동들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이데올로기 투쟁 과정입니다. 김윤영이 쓴 <달 위를 걷는 느낌>은 감동적이고 따스합니다. <달 위를 걷는 느낌>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친근하게 바라보고 끔찍한 핵 발전소 사고를 질타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루나라는 여자 아이입니다. 하지만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 되고 사회적인 약자들과 깨끗한 자연 환경을 바라본다고 해도, 이게 여자 권리와 환경 보호로 무조건 이어질 수 있을까요? 환경 아포칼립스가 당파성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환경 아포칼립스가 여자 아이와 자연 환경을 노래한다고 해도, 이건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코이>에서 어떤 소녀가 잉어를 구한 것처럼,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여자가 자연을 돌볼 때, 그건 중요한 장면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늘어나야 합니다. 이런 장면들은 훨씬 많이 늘어나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백인 남자 중심주의에서 빠져나오고 여자들과 비서구 문명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여자들과 비서구 문명을 말한다고 해도, 요동치는 이데올로기 투쟁은 여기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여자가 자연을 돌볼 때, 그건 언제나 똑같은 것을 상징하지 못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나 사상을 고립된 것으로 간주하나, 그건 피상적인 시각입니다. 인류 문명 속에서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동안, 현상들과 사상들은 나타납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여자들이 자연을 돌볼 때, 여자 등장인물들 역시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생태적인 상상력들 속에서 여자들이 똑같이 자연을 돌본다고 해도, 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가리킵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의 로라와 <태양이 없는 땅>의 마라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의 비비안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씨앗 할머니처럼, 어떤 등장인물들은 직접 기후 정의로 이어지거나 여자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서브머지드>의 미쿠와 <월-E>의 이브처럼, 어떤 등장인물들은 다소 애매합니다. <선샤인>의 코라존과 <스테이시스>의 테아처럼, 어떤 등장인물들은 관계가 없습니다. <괴수 행성> 시리즈의 모스라(마이나, 미아나)와 <섀도우런: 드래곤 폴>의 포이어슈윙처럼, 어떤 등장인물들은 피상적인 시각을 드러냅니다. <네버윈터 나이츠 2>의 엘라니는 아예 근대적인 환경 보호를 말하지 못해요.
물론 꽤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해석들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이 게시글은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도 커다란 단점들과 한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월-E>와 <괴수 행성> 시리즈를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할지 모릅니다. 그런 해석들 역시 틀리지 않을 겁니다. <분노의 도로>에 나오는 부발리니 씨앗 할머니보다 <월-E>에 나오는 이브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에 나오는 마이나 및 미아나는 또 다른 것을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창작물들을 해석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요동치는 이데올로기 투쟁 속에서 우리는 해석해야 합니다.
[자연을 이야기할 때,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저항하고 투쟁하는 여자들에게 주목해야 할 겁니다.]
파쇼주의에 물든 여자들이 야생 보호 구역을 설정한다고 해도, 결국 그런 야생 보호 구역은 그저 허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 체계가 사람들을 세뇌하고 짓밟기 때문에, 창작물들 역시 서로 다른 시각들을 드러냅니다. 이성애와 가족을 중시하는 보수 우파가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한다고 해도, 보수 우파는 세계 여성의 날에서 빨간색을 지우느라 애씁니다. 1차원적인 페미니즘은 그걸 따라가고 안락하게 여자의 정체성을 외칩니다. 이런 안락한 페미니즘을 따른다면, 사이언스 픽션 역시 안락한 망상을 꿈꿀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여자들이 자연을 돌볼 때, 우리는 요동치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의식하고 그런 장면들을 바라봐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