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이언스 픽션과 시(詩)가 어울릴 수 있는가 본문
SF 문학을 이야기할 때, 흔히 사람들은 소설들과 희곡들과 시나리오들을 언급합니다. 소설과 희곡과 시나리오 중에서 소설은 가장 유명하죠. 사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는 소설에서 비롯했고 희곡과 시나리오보다 소설로서 SF 문학은 가장 유명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SF 시(詩)들이 없는지 묻습니다. 소설들이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SF 시들을 제대로 연상하지 못하죠. 사람들이 SF 문학을 언급할 때, 시나리오나 희곡이나 소설과 달리, 시는 거의 끼어들지 못합니다. SF 문학 세상에서 시는 희귀 종자와 비슷하죠.
사실 SF 시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SF 시들을 읽고 싶다면, SF 잡지들에서 독자들은 여러 시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소설 모음집 <곰과 함께>에는 SF 시가 있죠. 그렇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SF 시들을 언급하지 않아요. 왜 소설과 달리, 시가 SF 문학 세상에 쉽게 들어오지 못할까요? 왜 사람들이 SF 시들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요? 어쩌면 시라는 문학 형식은 사이언스 픽션과 별로 어울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여기에 대답하고 싶다면,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죠. 왜 작가들이 SF 소설들을 쓸까요? 왜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가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을 썼을까요?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계몽주의와 19세기 근대적인 진보에서 비롯했습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긍정합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서로 다른 성향을 드러냈으나, 공통적으로 계몽주의는 신을 밀어내고 인간의 이성을 긍정합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고 이성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과 <해저 2만리>와 <타임 머신>에는 신이 없죠. 인간은 인조인간을 만들고, 만능 잠수함을 만들고, 시간 여행 장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생명 창조는 신에 근접하는 행위죠.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 이후, 다양한 문학들은 인간 이성을 긍정합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인간 이성을 긍정하는 유일한 문학이 아닙니다. 심지어 아주 단순한 21세기 인터넷 연애 소설조차 신보다 인간 이성에 관심을 기울이겠죠.
이런 인터넷 연애 소설과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똑같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겠죠. 인터넷 연애 소설과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똑같이 인간 이성을 중시한다고 해도,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연애 소설보다 훨씬 멀리 내다봅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세상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진보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언급하고 세상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바뀐다고 전망합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든, 새로운 생물종이 진화하든, 세상은 바뀔 겁니다.
인터넷 연애 소설은 이런 변화를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니, 주류 문학과 다른 장르 소설들은 이런 변화를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주류 문학과 다른 장르 소설들에게 세상은 고정적입니다. 설사 공산주의와 진화 이론을 인정한다고 해도, 주류 문학과 다른 장르 소설들은 어떻게 그런 것들이 세상을 바꾸는지 절대 이야기하지 않죠. 이건 사이언티픽 로망스와 다른 문학들이 드러내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진보, 혁명, 진화는 세상을 바꿉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모든 것을 보살피기 때문에 변화는 없을 겁니다. 더 이상 신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적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전망할 수 있죠.
이런 이성적인 전망은 계몽주의에서 비롯했습니다. 공산주의와 진화 이론 모두 계몽주의에서 비롯했죠. 그래서 공산주의와 진화 이론 모두 과학을 중시합니다. 공산주의는 논리적인 이론이 되기 원합니다. 진화 이론은 실증적인 자연 과학이죠. 하지만 이런 이성, 논리, 과학은 시(詩)와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시는 운율과 심상을 중시합니다. 이성, 논리, 과학은 운율과 심상을 깨뜨리고 무너뜨릴지 모르죠. 운율과 심상을 자아내기 위해 시는 단어들을 선택하고 배치합니다. 심지어 운율을 유지하기 위해 시는 단어들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성과 논리와 과학에게 이건 반칙이죠.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이건 윤동주가 쓴 <또 다른 고향>의 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는 뒷이야기가 있죠. 이 구절을 썼을 때, 윤동주는 '풍화 작용'이라는 용어를 쓰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윤동주가 풍화 작용을 싫어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풍화 작용은 너무 과학적인 단어이고, 그래서 윤동주는 풍화 작용을 싫어했을지 모릅니다. 윤동주에게는 풍화 작용을 싫어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죠. 시인들은 과학적인 단어, 이성적인 단어, 논리적인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게 운율과 심상을 망치기 때문이죠. 시가 거센 느낌을 풍기든, 약한 느낌을 풍기든, 과학과 이성과 논리는 시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문학 시간에 학생들이 배우는 수많은 시들에는 과학과 이성과 논리가 없죠.
김영랑이 쓴 명랑한 시와 이육사가 쓴 서릿발 같은 시에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아무리 김영랑과 이육사가 대조적인 성향을 드러낸다고 해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와 <절정>은 모두 심상을 중시합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은 새악시, 살포시, 보드레한, 실비단 같은 단어들을 늘어놓습니다. <절정>은 북방, 채찍, 칼날, 강철을 말하죠. 양쪽은 서로 다른 단어들을 늘어놓으나, 이것들은 과학이나 논리와 거리가 멉니다. 이런 시들은 초끈 이론이나 분자 구조나 유전 형질 같은 단어들을 말하지 못하겠죠.
노래 가사들 역시 시들과 비슷합니다. 노래 가사들은 운율과 심상을 중시합니다. 윤건이 부르는 <어쩌다>를 볼까요. "그런 뒤에 돌아서 나 혼자 견딜 이별에 눈물은 네가 되고 내가 되지 항상." 여기에서 윤건이 "네가 되고 내가 되지 항상."을 "네가 되고 내가 되지 언제나."라고 바꾼다면, 느낌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항상'과 '언제나'는 비슷한 뜻입니다. 윤건이 '항상'을 '언제나'로 바꾼다고 해도, 뜻은 바뀌지 않아요. 하지만 '언제나'가 세 음절이기 때문에 '언제나'는 운율을 방해합니다. 여기에서 두 음절짜리 '항상'은 '언제나'보다 낫습니다.
윤건이 부르는 또 다른 노래 <갈색머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흩어진 갈색머리 바람에 젖어", "내 맘 속 널 보내는", "초겨울에 그리움 묻어와", "갈색실 스웨터 보면", "걸음 멈추는 나를" 같은 가사들은 조사들을 빠뜨립니다. 이런 가사들은 흩어진 갈색머리가 바람에 젖거나, 초겨울에 그리움이 묻어나거나, 갈색실 스웨터를 보거나, 걸음을 멈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조사들이 끼어들 때, 조사들이 운율을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건이 '마음'을 '맘'이라고 부를 때, <어쩌다>에서 윤건이 "너의 이야기를 모두 지워가며"가 아니라 "너의 얘길 모두 지워가며"라고 부를 때, 윤건은 운율을 살리기 원했겠죠.
나얼과 윤건이 부르는 다른 노래들처럼, <어쩌다>와 <갈색머리>는 서정적입니다. 하지만 신나고 빠른 댄스곡들 역시 운율을 맞추기 원합니다. 트와이스가 부르는 <티티>에서 "이번에 정말 꼭꼭 내가 먼저 talk talk."는 운율을 맞추는 가사입니다. '꼭꼭'과 'talk talk'는 운율을 맞출 수 있죠. 사실 일상에서 이렇게 우리는 말하지 않습니다. "아, 이번에 나는 정말 그 남자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이건 훨씬 일상적인 문구입니다. 이런 일상적인 문구에는 운율이 없죠. 시인들은 이런 문구를 좋아하지 않을 테고, 작사가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티티>에서 사나가 "나나나나나나나 콧노래가 나오다가 나도 몰래"라고 예쁘게 부를 때, '나'는 연이어 나옵니다. '나'를 이용해 사나는 연이어 운율을 예쁘게 맞출 수 있죠. 이게 의도적인 운율일까요? 아니면 작사가가 우연히 이런 운율을 집어넣었을까요?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산문은 절대 이런 문구를 말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 문구가 영어가 된다면, '나'는 'I'가 되고, 콧노래는 'humming'이 되겠죠. 'I'와 'humming'은 '나나나나나나나'와 운율을 맞추지 못합니다. 이런 번역은 아예 운율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시를 번역할 때, 번역문은 원래 운율을 망칠 수 있죠. 산문에도 이런 위험이 있으나, 시는 훨씬 더합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한시 <금준미주 천인혈>을 읊조렸을 때, 이몽룡은 두 운자 '膏'와 '高'를 맞추기 원했습니다. 운율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에 <금준미주 천인혈>은 멋진 시가 되었죠. 이몽룡은 운율을 맞추는 동시에 탐관오리들을 비판하기 원했어요. 이몽룡은 형식과 내용을 함께 잡았죠. <금준미주 천인혈>은 두 운자를 살리는 동시에 탐관오리들을 열심히 까댑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이건 이몽룡이 노비 해방을 주장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노비들이 개고생한다고 해도, 이몽룡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분 차별 때문에 자신의 연인 성춘향이 개고생했음에도, 이몽룡은 신분 해방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이몽룡은 그저 탐관오리 개인을 비판했을 뿐이죠. 어쨌든 <금준미주 천인혈>은 어떻게 시가 운율을 지킬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산문은 다릅니다. 이성과 논리와 과학을 중시하는 산문은 다릅니다. <공산당 선언>이나 <종의 기원>에는 이런 운율이 없어요. 운율을 위해 시는 논리와 과학을 파괴하거나 우회하기 원하나, <공산당 선언>이나 <종의 기원>에게 그건 아주 위험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을 비롯해 여러 SF 소설들은 <어쩌다>와 <티티>보다 <공산당 선언>과 <종의 기원>에 가깝습니다. SF 소설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원합니다. 운율과 심상은 중요하지 않죠.
비평 서적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시와 산문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10월 25일 게시글이 언급한 <작가는 지식인인가>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많이 겹치죠.)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시를 춤꾼이라고 묘사합니다. 시는 단어들 그 자체를 다룹니다. 반면, 내용을 전개하기 위해 산문은 글자들을 다룹니다. 그래서 시보다 산문은 훨씬 혁명적일 수 있죠. 나중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이론을 거의 포기합니다. 시 역시 얼마든지 혁명적일 수 있죠. 사실 이육사가 쓴 <절정>은 정말 혁명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완전히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문맥이 어긋나거나 개연성이 사라진다고 해도, 시는 운율을 중시합니다. <티티>에서 사나가 예쁘게 노래부를 때, 운율은 가사 내용보다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공산당 선언>과 <종의 기원>은 절대 이런 것을 말하지 않아요. SF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SF 소설들이 단어들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슐라 르 귄이나 케이트 윌헬름이나 (자신이 SF 작가가 아니라고 우기는) 마가렛 앳우드나 로저 젤라즈니나 윌리엄 깁슨이나 제임스 발라드는 섬세하게 단어들을 이용합니다. 한국어 번역본조차 그런 느낌을 완전히 지우지 않죠. 하지만 SF 세상에서 논리와 과학은 단어들이 풍기는 심상보다 우선합니다. 논리와 심상을 선택해야 할 때, SF 소설들은 심상보다 논리를 선택하겠죠.
윤건이나 사나와 달리, 카를 마르크스는 '마음'을 '맘'이라고 줄이거나 '나나나나나나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 유물 이론을 설명할 때, 이런 운율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이런 언어 유희들은 역사 유물 이론을 망칠지 모릅니다. 사나는 예쁘게 콧노래를 부를 수 있으나, 유물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카를 마르크스는 아주 장황하고 자세한 설명들을 펼쳐야 했습니다. 아무리 <공산당 선언>에 문학적인 표현들(유럽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떠돈다)이 많다고 해도, 그것들은 논리를 위한 표현들입니다.
누군가는 <종의 기원>을 문학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종의 기원>에서 마지막 문구들(찰스 다윈이 신을 언급하지 않은 초판 문구들)은 꽤나 장대한 문학적인 감동을 풍깁니다. 하지만 <종의 기원>을 썼을 때, 찰스 다윈은 문학적인 감동보다 과학에 치중했을 겁니다. 지배적인 종교 세력은 그걸 음해했으나, 결국 <종의 기원>은 과학입니다. SF 소설들은 이런 논리와 과학을 따릅니다. 소설이 문학이기 때문에 SF 소설이 문학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시와 소설이 똑같이 문학이라고 해도, 시와 소설은 다르죠. 산문은 논리적인 내용 전개와 훨씬 잘 어울립니다.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가 <프랑켄슈타인>과 <해저 2만리>와 <타임 머신>을 썼을 때, 그들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기 원했을 겁니다. 인조인간이 말하는 생명 윤리, 네모 선장이 전망하는 해양 문명, 시간 여행자가 사변하는 문명과 진화는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추구합니다. 허버트 웰즈는 메리 셸리보다 후발 주자이고, 그래서 <타임 머신>은 <프랑켄슈타인>보다 훨씬 그런 경향을 많이 드러내죠. 21세기 소설들은 <타임 머신>보다 훨씬 더합니다.
하드 SF 소설 <세븐이브스>에서 방주 우주선 설정을 늘어놓기 위해 아예 일반적인 소설 서술에서 닐 스티븐슨은 벗어납니다. 이런 부분들은 문학보다 과학 논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드 SF 소설이 과학 논문이라고 착각하죠. <쿼런틴>을 포함해 그렉 이건 소설들을 보세요. 분명히 그렉 이건 소설들이 소설이고 문학이라고 해도, 이런 소설들은 이성과 과학과 논리에 수렴하기 원합니다. 아무리 윤건이 서정적으로 노래한다고 해도, 아무리 사나가 예쁘게 콧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SF 소설들은 예쁜 콧노래보다 <종의 기원>을 따라가기 원할 겁니다. 그래서 SF 문학을 언급할 때, 사람들은 시보다 소설을 이야기하겠죠.
물론 이것 이외에 다른 이유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들이 있다고 해도, 이런 이유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겁니다. SF 시와 SF 소설을 파악하고 싶다면, 독자들은 왜 시와 소설이 다른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