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비평가라는 아주 특별한 그림자 본문
작가라는 단어는 온갖 무게들과 꼬리표들과 압박들을 짊어졌습니다. 흔히 우리는 작가가 굶주리는 직업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작가들이 슬럼프를 겪는다고 말합니다. 작가는 고뇌하는 예술가이고, 자신의 세상을 펼쳐보이고, 유일무이한 뭔가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꽤나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레 미제라블>은 오직 빅토르 위고만이 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프랑스 6월 공화주의 혁명을 소설로 쓸 수 있겠으나, 그건 <레 미제라블>이 되지 못하죠.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작가는 혼자 유일무이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화가, 조각가, 작곡가, 영화 감독 같은 예술가들 역시 작가와 비슷한 위상을 점유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영역은 오직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죠. 어떤 예술은 텍스트 작품보다 훨씬 파급력이 크고요. 여기에서 제가 구태여 다른 예술가들이나 전문가들이 아니라 작가를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가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글을 씁니다. 그리고 글은 꽤나 저렴한 매체입니다. 종이와 연필을 갖춘다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글자가 기호이기 때문에 글을 쓰기 위해 특별한 재주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글자는 사회 전반의 약속입니다. 여기에 특별한 재주는 끼어들지 못하죠.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는 저렴하고 기초적입니다. 종이와 연필은 비싸지 않습니다. 종이와 연필은 아이맥스 촬영 카메라가 아닙니다. 글자는 사회 전반의 약속이고 기호입니다. 누구나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덧셈과 뺄셈에는 재주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재주가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숱한 사람들은 작가를 꿈꿉니다. 글을 쓰는 행위가 저렴하고 기초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쉽게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소설 작가는 더욱 매력적입니다. 소설 작가는 자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종이와 연필과 상상력이 있다면, 소설 작가는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신으로서 소설 작가는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 피조물들(등장인물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들이 그 소설을 좋아한다면, 그 소설은 생명력을 얻을 테고, 작가는 정말 신이 되었다는 쾌락을 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그렇게 소설 작가 지맹생들이 많을 겁니다. 소설 작가는 유일무이한 뭔가를 생산합니다. 그건 작가의 세상이고, 작가는 신이 됩니다. 신이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소설 작가는 아주 저렴하게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글자를 쓸 수 있고, 종이와 연필과 상상력을 갖출 수 있다면, 소설 작가는 신이 될 수 있어요. 흠, 정말 소설 작가가 매력적이지 않나요?
물론 글을 쓰는 행위와 글을 멋지게 쓰는 행위는 다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을 멋지게 쓰는 행위는 특별한 재주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능력이 태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가들은 노력으로 필력과 문체를 만듭니다. 하지만 저는 필력과 문체가 태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 생각은 틀릴지 모르죠. 중요한 것은 글을 멋지게 쓰는 행위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소설 창작은 훨씬 특별한 수준에 들어가야 합니다. 21세기 초반 국내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글을 씁니다. 온갖 커뮤니티 사이트들, 개인 홈페이지들, 블로그들, 트위터들, 인터넷 소설 플랫폼들에서 사람들은 글을 쓰고 쓰고 쓰고 또 씁니다. (이 블로그 역시 그런 것들 중 하나이고요.)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정말 특별한 소설을 쓰고 주목을 받기 원한다면, 그건 꽤나 만만하지 않은 작업일 겁니다. 그래서 작가는 어렵고 힘든 직업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소설 창작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 그게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작가는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 창조신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는 아주 저렴하게 창조신이 되는 방법입니다. 소설 작가가 아주 저렴하게 창조신이 될 수 있다면, 왜 사람들이 소설 창작을 마다하겠어요? 다들 창조신이 되기 원합니다. 다들 창조신을 부러워하죠.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작가가 진정한 창조신이 되기 원한다면, 소설은 인기를 끌어야 합니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소설(속의 세상)은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작가는 진정한 창조신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누구나 창조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희귀할 겁니다. 다들 자신들의 세상이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기 원하겠죠. 그래서 작가는 독자와 떨어지지 못합니다. 독자가 있기 때문에 창조신으로서 작가 역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유일무이한 뭔가를 생산하나,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유일무이함은 의미를 잃습니다.
그래서 작가와 독자는 언제나 함께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런 작가와 독자가 맺은 관계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지 못할까요? 작가와 독자가 오직 쌍방향 관계를 맺을까요? 그렇지 않겠죠. 우리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비평가를 끼워넣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뭔가를 생산합니다. 작가는 완전한 생산자가 아니나, 뭔가를 생산하죠. 독자는 그걸 소비합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독자는 수동적이고 부차적입니다. 반면, 비평가는 독자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주체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독자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라고 해도, 비평가는 작가보다 앞서지 못합니다. 이건 꽤나 오묘하고 기이한 위치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세상을 만드는 창조신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비평가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비평가가 적극적으로 소설을 비평한다고 해도, 비평가는 부차적입니다. 작가가 뭔가(소설)를 생산하지 않는다면, 비평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소설 작가가 소설을 쓸 때, 비평가는 거기에 참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 없는 비평가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창조신으로서 작가가 자신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오직 비평가는 그 세상을 논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를 <실마릴리온> 같은 신화와 비교한다면, 이는 일루바타르와 멜코르가 맺은 관계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멜코르는 위대하나, 혼자 세상을 만들지 못합니다. 일루바타르가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멜코르는 그저 그 세상에 들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작가는 일루바타르이고, 비평가는 멜코르죠. <실마릴리온>에서 멜코르는 물질 세계를 직접 만들지 못하고, 오직 일부바타르가 만든 것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비평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비평가가 뛰어나다고 해도, 비평가는 직접 세상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작가가 자신의 세상을 만들 때, 비평가는 그저 거기에 개입하고 따질 수 있을 뿐입니다. 작가와 달리, 비평가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죠. 작가는 태양이고, 비평가는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비평가에게는 꼬리표가 달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설 작가는 엄청난 무게와 희망과 좌절을 짊어지는 단어입니다. 소설 작가 지망생 역시 그런 것들을 짊어지죠. 비평가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는 비평가가 되기 쉽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 작가와 소설 비평가가 똑같이 소설을 이용하는 글쟁이임에도, 소설 작가는 엄청난 무게를 짊어지는 반면, 소설 비평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소설 작가와 소설 비평가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릅니다. 소설 작가 지망생과 소설 비평가 지망생은 서로 다른 무게를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소설 비평가를 곁다리라고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유명한 비평가는 신인 작가를 묻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인 작가가 훌륭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유명한 비평가가 그걸 혹평한다면, 독자들은 그 소설을 기피하겠죠. 그래서 혹독한 비평가들은 작가들에게 공공의 적이나 사악한 악마 같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태양이고 비평가들은 그림자입니다. SF 장르 역시 비슷합니다. 그랜드 마스터는 비평가들이 아니라 작가들을 가리킵니다. 휴고 수상식이 열릴 때, 사람들은 무슨 소설이 상을 탔는지 관심을 기울입니다. 비평가들은 주된 관심을 받지 못하죠. SF 장르에서도 작가는 태양이고 비평가는 그림자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소설 작가가 독자들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창조신이라고 일컬을지 모릅니다. 소설 작가는 독자들과 출판 시장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소설 작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거나 자신이 싫어하는 등장인물을 부각해야 할지 모릅니다. 특히, 인터넷 소설 플랫폼에서 독자들은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작가는 실시간으로 거기에 대응해야 합니다. 작가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소설의 조회 숫자는 당장 떨어질 겁니다. 인터넷 소설은 꽤나 특이한 매체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을 만드는 쪽은 소설 작가입니다.
게다가 소설 작가가 어느 정도 경력을 쌓는다면, 작가는 오롯히 자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스티븐 킹이 쓴 <다크 타워>를 보세요. 심지어 <다크 타워>는 스티븐 킹이 쓴 여러 소설들을 종합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거대한 세계를 만드는 기쁨은 마약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천재 작가조차 그런 유혹을 피하지 못했죠. 제약이 있다고 해도, 작가는 창조신이 될 수 있고, 노련한 작가들은 훨씬 유능한 창조신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소설 작가 지망생들은 종이와 연필과 상상력을 이용해 세상을 만드느라 애쓰겠죠.
특히, SF 장르에서 세상을 만드는 행위는 훨씬 특별합니다. 주류 문학 작가들과 달리, SF 작가들은 가상의 세상을 창조합니다. 이런 가상의 세상들에는 독자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그런 세상들이 놀라운 규칙을 선보일 때, SF 독자들은 감탄합니다. 일반적으로 SF 소설들은 시대 배경을 강조하고, 그래서 세상을 만드는 행위는 훨씬 특별해요. 왜 우리가 <링월드>를 좋아할까요? 왜 우리가 <프로스트와 베타>에 감동할까요? 왜 우리가 <익스팬스>에 열광하죠? 이런 소설들이 가상의 세계를 멋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류 문학 작가들보다 SF 작가들은 훨씬 특별한 창조신이 될 수 있어요.
물론 이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어떤 독자들이 테드 창이 쓴 <바빌론의 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독자들이 제대로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독자들은 SF 소설들이 어렵다고 생각하고요. 하드 SF 장르는 훨씬 그렇죠. SF 소설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일상적인 시대를 그리고, 어떻게 그런 시대가 오류 없이 굴러가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소프트 SF 장르는 이런 과정을 무시할 수 있으나, 하드 SF 장르에 가까운 소설들은 그렇지 못하죠. 아무리 소프트 SF 소설들이 늘어난다고 해도, 여전히 SF 장르에서 핵심은 하드 SF 소설들이고요.
물론 하드 SF 소설들 역시 아득한 상상의 날개를 펼칩니다. 하드 SF 장르는 자연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바뀌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하드 SF 장르는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는 현실이 비일상적인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 하드 SF 작가들은 열심히 설명해야 합니다. 거기에 과장이나 비약이나 허풍이 있다고 해도, 하드 SF 작가들은 열심히 근거들을 뿌려야 합니다. 그런 근거들이 어느 분량에 이른다면, SF 독자들은 그게 하드 SF 장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해요. SF 소설을 쓰고 읽는 즐거움들 중 하나는 이런 것이죠.
정말 항성을 둘러싼 초거대 고리 구조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외계인들이 그걸 만들 수 있죠? 외계인들이 그런 자재들을 어디에서 가져오나요? SF 작가들은 여기에 대답하고 세상을 만듭니다. 뭐, 종종 소프트 SF 작가들은 꽤나 편리한 장치를 만듭니다. 여기에 어떤 초현실주의적인 소프트 SF 소설이 있다고 가정하죠. 소설 속에서 외계인들은 지구를 침략했습니다. 지구인들은 외계인들을 물리쳤으나,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첨단 병기들을 완전히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지구에는 외계 병기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병기가 작동하는지 지구인들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SF 소설은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작가는 그걸 설명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초현실주의적인 소설에서 아무도 해답을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작가조차 해답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마음대로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집어넣을 수 있어요. 이는 다소 위험한 설정입니다. 특정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세계는 너무 느슨해집니다. 느슨한 세계를 읽을 때, 독자들 역시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겁니다. 독자들은 탄탄한 세계에서 훨씬 커다란 흥미를 느끼겠죠. <소멸의 땅> 같은 소설은 꽤나 우아하고 신비로우나, <소멸의 땅>은 SF 장르가 자랑하는 핵심 가치에 닿지 못하죠. SF 장르가 자랑하는 핵심 가치에 닿고 싶다면, 작가는 가상의 세상을 논리적으로 구성해야 합니다.
그 덕분에 SF 장르에서 소설 작가들은 비평가들보다 훨씬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창조하는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SF 작가들의 위상은 올라가고, SF 비평가들은 더욱 그림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SF 장르에서 비평가들의 역할이 훨씬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르는 울타리입니다. 누군가가 울타리를 쳤을 때, 장르는 존재합니다. 울타리 치기는 소설 작가보다 소설 비평가에게 어울립니다. 소설들을 분류하고 종합하고 연결하는 행위는 비평가의 몫이죠. 그래서 저는 SF 비평가가 아주 특별한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장르를 분류하기는 까다롭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르를 분류하는 작업이 칼로 물을 베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SF 비평가는 SF 장르에 속하는 소설들을 평가해야 합니다. 하지만 누가 SF 장르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결국 SF 비평가는 무엇이 SF 소설인지 계속 분류하고 규정하고 연결해야 합니다. 그런 작업에는 끝이 없겠죠. 게다가 아무리 SF 비평가가 세심하게 규정한다고 해도, 언제나 예외들이 존재할 겁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 SF 소설인지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할 겁니다. SF 비평가들 역시 마찬가지겠죠.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SF 비평가들은 중요합니다. 장르는 특별한 공식들을 모아놓은 울타리입니다. 따라서 SF 비평가들은 계속 울타리를 관리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비록 그런 작업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도, 그렇게 SF 비평가들이 울타리를 관리할 때, SF 장르는 존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과대평가가 아닐 겁니다. 좋은 SF 소설들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좋은 SF 비평들 역시 중요하죠. 소설이 태양이고 비평이 그림자라고 해도, 비평의 중요성은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 다른 SF 팬들처럼, 저 역시 설정 놀음을 즐깁니다. 종종 저는 이런 설정 놀음을 소설로 연결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는 쉽지 않습니다. 작가는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해야 합니다. 그런 가상의 세계는 스스로 돌아가야 하고, 작가는 그런 설정을 탄탄하게 구비해야 합니다. 특히, SF 장르에서 이는 사이언스 픽션의 핵심 가치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 돌아가는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지 못하겠더군요. 저는 독자적인 세계를 만드는 작업보다 특정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행위가 더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들을 특정한 도구로서 바라봐요. 이는 별로 좋지 않은 시각이죠. 이는 작가에게 가장 나쁜 태도이고, 비평가에게도 적절하지 못한 태도일 겁니다. 사실 소설을 도구로서 취급하는 사람은 오직 저 혼자만이 아닐 겁니다. 이유들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소설을 도구로서 바라볼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소설을 쓰지 못할지 모르죠. 뭐, 아무리 간절하게 원한다고 해도, 누구나 좋은 SF 작가가 되지 못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