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영화관 옆 책방>과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본문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의 한 장면. 이런 사이버펑크 도시는 인류 문명의 전부가 아닙니다.]
※ [영화관 옆 책방] 1회 블레이드 러너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링크: https://youtu.be/Pe8cCub3gQE
유튜브 채널 <영화관 옆 책방>은 소설과 영화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진행자는 김겨울님과 거의없다님입니다.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유튜버로서 두 진행자는 영화와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설명합니다. 가령,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입니다. 따라서 <영화관 옆 책방>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와 <블레이드 러너>에게 무슨 차이점들과 공통점들과 특징들이 있는지 살필 수 있겠죠. <영화관 옆 책방>은 그런 내용들을 다룹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이야기할 때,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이 중요하게 언급한 것들 중에서 하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두 진행자는 이 소설이 인간의 본질을 깊게 고찰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비단 겨울님과 거의없다님 이외에 많은 사람들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인간의 본질을 고찰한다고 평가합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인조인간 사냥꾼입니다. 인조인간들이 인간들 사이에 섞일 때, 인조인간 사냥꾼은 인조인간을 선별하고 처치합니다. 사냥꾼으로서 소설 주인공은 인간과 인조인간을 구분해야 합니다. 인조인간이라는 거울이 있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은 인간을 훨씬 깊게 고민할 수 있죠.
소설 속에서 인조인간은 일종의 거울입니다. 만약 거울이 있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필 때, 우리는 우리를 훨씬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겠죠. 우리가 인간을 고찰할 때, 인간과 대조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을 훨씬 제대로 고찰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겠죠.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훨씬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장르 소설들은 그런 비교 대상을 건넬 수 있습니다.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칼 헬턴트가 엘프와 인간으로서 이루릴과 후치를 바라본 것처럼, 인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판타지 소설은 엘프 같은 유사 인간 종족을 건넬 수 있죠.
사이언스 픽션에서 외계인, 로봇, 돌연변이는 이런 역할들을 맡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 역시 마찬가지죠. 소설 속에서 인조인간들은 인간과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종종 어떤 인간들은 인조인간들보다 못하죠. 인조인간은 인간보다 훨씬 풍부한 감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 주인공은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조인간인지 헛갈리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소설 주인공이 인조인간인지 의심합니다. 이건 인조인간 사냥꾼이 인간이 아니라 인조인간일지 모르는 상황이죠. 사실 필립 딕 소설들에서 이런 상황은 드물지 않습니다. 여러 필립 딕 소설들은 정체성이 혼란스럽다고 말하고, 소설 주인공들은 "내가 누구지?"라고 묻습니다.
소설 <화성의 타임슬립>이나 <죽음의 미로>, <유빅>, <두 번째 변종>, <우리라구요!>, <사기꾼 로봇>은 이런 정체성 혼란을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비단 이런 소설들 이외에 필립 딕은 전반적으로 "내가 누구지?"라는 물음을 혼란스럽게 집어넣습니다. 독자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닐지 모릅니다. 인간은 다른 무엇일지 모릅니다. 인간은 외계인이나 로봇이나 돌연변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은 필립 딕 소설들을 장악합니다.
소설 등장인물들과 독자들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열심히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독자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특징은 다른 많은 SF 소설들, 만화들, 게임들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가령, 비디오 게임 <소마>는 서두에서 필립 딕을 인용합니다. 게임을 시작한 이후, 얼마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누구인지 헛갈립니다. "내가 누구지? 내가 인간일까? 왜 다들 내가 로봇이라고 생각하지? 왜 내가 로봇이지? 잠깐, 왜 나에게 기계 팔이 있지? 분명히 나는 인간이야. 하지만 이 기계 팔은…. 이런, 맙소사! 내가 정말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야?"
그래서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인간의 본질을 고찰한다고 설명했을 겁니다. 인간과 인조인간을 비교할 때, 독자들은 인간이 누구인지 훨씬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인간의 본질을 고찰한다고 평가할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무슨 인간'을 이야기할까요? 고대 혈거인은 인간입니다. 중세 농노는 인간입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인간입니다. 아프리카 밀림의 원주민은 인간입니다. 고대 혈거인, 중세 농노, 북아메리카 인디언, 밀림 원주민은 모두 인간이죠.
그래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고대 혈거인, 중세 농노, 북아메리카 인디언, 밀림 원주민을 이야기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소설에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밀림 원주민이 드러내는 가치관이 나오지 않아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사고하는 여러 가치들, 토지 공유, 숙의 민주주의, 자연과의 조화 같은 사상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고찰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고대 혈거인의 본질, 중세 농노의 본질, 아프리카 밀림 원주민의 본질을 고찰하지 않습니다.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인간의 본질 운운했으나, 그건 아닙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인간의 본질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그것들 중에서 제한적인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뭘까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무슨 본질을 선택했을까요? 그건 자본주의 사회 속의 인간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가 아주 극단적으로 지구를 망쳤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까운 디스토피아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이런 시대를 살아갑니다.
소설 주인공이 드러내는 인간의 본질은 무제한적인 본질이 아닙니다. 그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형성된 본질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본질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잘못이겠죠. 본질은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정수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본질은 본질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인간의 경향은 계속 바뀝니다. 고대 혈거인부터 중세 농노, 계몽주의 상인, 근대 시민, 미래 현상금 사냥꾼까지, 인간의 경향은 계속 바뀝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고정적이지 않은 본질은 본질이 아니겠죠.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인간의 본질 운운했으나, 그건 오류입니다.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인간의 본질이 고정적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왜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이 인간의 본질이 고정적이라고 착각했을까요? 두 진행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초역사적이지 않습니다. 고대 인류 문명이 자본주의 사회였을까요? 당연히 그건 아닙니다. 고대 인류 문명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없었고 당연히 자본주의적인 인간의 본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아주 당연하다고 착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대 인류 문명부터 현대 인류 문명까지 인류 문명이 무조건 자본주의라고 착각합니다. 심지어 역사학자들조차 인류 문명이 무조건 자본주의라고 상정합니다.
그래서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인간의 본질 운운했을 겁니다. 두 진행자가 다른 인간 유형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오직 자본주의 사회만이 유일한 인류 문명이고, 오직 자본주의적인 인간만이 유일한 인간 유형이기 때문에.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밀림 원주민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밀림 원주민이 자유주의적인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죠.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에게 인간은 오직 자유주의적인 인간일 뿐입니다. 두 진행자는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인간을 인간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안타깝게도 두 진행자는 인종 차별론자입니다.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오직 자본주의적인 인간만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규정했습니다.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토지 공유와 숙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이 인간의 본질을 운운하고 싶었다면, 두 진행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해야 했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다른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훨씬 그렇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엄청나게 화려한 메트로폴리스 야경을 보여줍니다. 재벌들은 떵떵거리고 하층민들은 죽어나갑니다. 이건 자본주의 사회가 드러내는 고질병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나, 아주 심각한 양극화를 일으키죠. 하지만 겨울님과 거의없다님은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평가할 때, 우리는 인간을 둘러싼 사회 구조를 살펴야 합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보여주는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는 영원불멸하고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인류 문명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인류 문명들 역시 많습니다. 다른 SF 소설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훨씬 다양한 인류 문명들을 구경할 수 있겠죠. 고정적인 인류 사회, 고정적인 인간의 본질은 없습니다. 우리가 오직 자본주의 시장 경제만이 인류 문명이고 오직 자유주의적인 인간만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저도 모르게 인종 차별론자가 될 겁니다. 이 세상에서 숱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인종 차별론자가 됩니다. 그래서 인종 차별은 여전히 수많은 약자들을 괴롭힙니다.
게다가 <영화관 옆 책방>은 사이버펑크를 제대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사이버펑크가 뭘까요? 소설 <리포맨>이 디스토피아일까요, 아니면 사이버펑크일까요? 비디오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이 디스토피아일까요, 아니면 사이버펑크일까요? 이런 물음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디스토피아와 사이버펑크를 헛갈릴지 모릅니다. 사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소설 <리포맨>과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은 사이버펑크입니다. 동시에 소설 <리포맨>과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은 디스토피아입니다. <리포맨>과 <새틀라이트 레인>은 디스토피아이고 동시에 사이버펑크이나, 양쪽은 디스토피아보다 사이버펑크에 가깝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디스토피아와 사이버펑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왜 <새틀라이트 레인>이 사이버펑크에 가까운지 대답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꽤나 많을 겁니다. SF 장르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니, 심지어 SF 장르에 친숙한 사람들조차 왜 디스토피아와 사이버펑크가 다른지 쉽게 대답하지 못하겠죠. <블레이드 러너>를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이 거의없다님은 사이버펑크를 규정했습니다. "인간의 고찰을 포함하는 어긋난 미래 배경의 영화. 그 미래의 도시는 깨끗하지 않다. 이런 것은 사이버펑크이다." 하지만 정말 이게 사이버펑크를 가리킬 수 있을까요? 사이버펑크가 뭘까요?
흔히 SF 평론가들은 소설 <강철 군화>가 디스토피아 소설의 시초라고 평가합니다. 19세기부터 여러 SF 작가들은 디스토피아 소설들을 썼으나, 그런 디스토피아 소설들보다 <강철 군화>는 자본주의 문제를 훨씬 논리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들은 <강철 군화>가 디스토피아 소설의 시초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브게니 자마친이 쓴 <우리들>을 언급하나, 예브게니 자마친이 <우리들>을 쓰기 전에 이미 잭 런던은 <강철 군화>를 썼습니다. 흔한 디스토피아 소설들과 달리, <강철 군화>는 미래 도시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강철 군화>에는 미래적인 요소들이 거의 없습니다.
비록 <강철 군화>가 미래 세계를 상정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미래 세계를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숱한 디스토피아 소설들과 <강철 군화>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숱한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강철 군화>가 확장한 결과이거나 연장한 결과입니다. 비록 미래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강철 군화>는 숱한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나갈 경로를 제시했죠. 왜냐하면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자본주의 사회가 일으키는 양극화와 각종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강철 군화>는 흔히 독자들이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기대하는 요소들, 거대 도시와 막강한 권력, 비인간적인 삶, 죽어나가는 하층민들을 늘어놓았습니다. 후배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이런 것들을 활용합니다.
하지만 <강철 군화>를 썼을 때, 잭 런던은 첨단 기술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잭 런던이 <강철 군화>를 썼을 때, 컴퓨터, 로봇, 우주선, 인조인간, 개조 수술은 일상적인 소재들이 아니었죠. 게다가 잭 런던은 사이언스 픽션에 친숙하지 않았습니다. 잭 런던은 주류 문학에 가까웠고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났고 이어졌는지 파악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컴퓨터, 로봇, 우주선, 인조인간, 개조 수술을 비롯해 각종 첨단 기술들은 자본주의 사회와 만납니다. 이제 사람들은 인공 지능과 우주선과 인조인간을 꿈꿀 수 있습니다. 디스토피아 소설들 역시 그런 흐름을 반영했어요.
그래서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첨단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억압적인 미래 사회와 접목하고 사이버펑크를 마련합니다. 사이버펑크는 첨단 기술을 강조하는 디스토피아에 가깝습니다. 억압적인 미래 사회가 첨단 기술을 활용할 때, 그 소설은 사이버펑크가 될 수 있겠죠. 제이 레이크가 쓴 소설 <밤의 숲 속에서>는 미래 도시와 심각한 환경 오염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밤의 숲 속에서>는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 소설은 그것보다 생태적인 문화를 강조하죠. 반면, 소설 <리포맨>은 전산화, 개조 수술, 정보 처리 과정을 적극적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리포맨>은 사이버펑크가 될 수 있겠죠.
전산화, 개조 수술, 정보 처리 과정은 인간을 고작 정보 덩어리로 전락시킵니다. 첨단 기술 속에서 인간은 정보 덩어리가 됩니다. 인간은 더 이상 사회 구성원이 아닙니다. 인간은 정보 덩어리가 됩니다. 첨단 기술은 정보를 복제하고 퍼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버펑크 소설들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의심하죠. 사회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의심해야 합니다. 소설 <밤의 숲 속에서>는 이런 정체성 혼란을 말하지 않습니다. 정체성 혼란이 나온다고 해도, 그건 억압적인 권력에서 비롯하는 정체성 혼란입니다. 그건 정보화 기술과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첨단 기술은 일반적인 디스토피아와 사이버펑크를 가르는 가장 커다란 기준들 중에서 하나일 겁니다. <영화관 옆 책방>은 이런 특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거의없다님은 인조인간이나 깨끗하지 않은 거리 따위로 사이버펑크의 특징을 대충 넘어갑니다. 어떤 사이언스 픽션에 인조인간이 나오고 억압적인 미래가 나온다면, 그 사이언스 픽션이 무조건 사이버펑크가 되나요? 1927년 영화 <메트로폴리스>에는 인간형 로봇과 미래 도시와 억압적인 사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메트로폴리스>가 사이버펑크가 되나요? 그건 아니겠죠.
소설 <영원한 전쟁>에서 주인공이 지구로 돌아갔을 때, 지구 도시는 어지러웠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구 도시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문제와 위험한 첨단 기술들을 보여줍니다. 이런 묘사가 사이버펑크일까요? 거의없다님은 이런 묘사가 사이버펑크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영원한 전쟁>이 미래 도시와 억압적인 사회와 자본주의 문제와 위험한 첨단 기술을 묘사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정보화 과정이 없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거대 도시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문제라고 느끼고 코뮨에서 안락한 느낌을 찾습니다. 코뮨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없죠.
이 부분에서 소설이 지적하는 화제는 인간의 정보화 과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양극화와 경제 공황입니다. 억압적인 미래 도시와 위험한 첨단 기술들을 접한다고 해도, 소설 주인공은 정체성 혼란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경제 공황이 훨씬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죠. 소설 주인공은 "내가 누구지?"라고 묻지 않습니다. 미래 거대 도시가 온갖 첨단 기술들을 늘어놓음에도, <영원한 전쟁>에서 지구 도시는 사이버펑크보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에 훨씬 가깝습니다. <영화관 옆 책방>은 이런 특징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이버펑크가 무엇인지 규정하고 싶었다면, <영화관 옆 책방>은 훨씬 자세히 디스토피아와 사이버펑크를 비교하고 대조해야 했습니다.
물론 장르를 자세하게 규정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누가 장르를 정확히 정의할 수 있겠어요? 심지어 수준 높은 SF 평론가들조차 장르를 완전히 규정하지 못할 겁니다. 저는 사이버펑크가 디스토피아와 첨단 기술(인간의 정보화)을 접목한다고 규정했으나, 제 설명은 틀렸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수많은 사람들은 제 의견에 반박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장르를 규정할 때, 우리는 장르에 무슨 특징이 있는지 자세히 파악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르가 그런 특징을 이용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파악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영화관 옆 책방>은 장르 설명을 대충 넘어갔고 인간의 본질을 운운하는 인종 차별을 저질렀죠.
무엇보다 거의없다님은 사이버펑크가 인간의 고찰을 포함하는 어긋난 미래 배경의 '영화'라고 말했습니다. 영화? 오직 영화만 사이버펑크가 될 수 있나요? 당연히 그건 아닙니다. 오직 영화만이 사이버펑크가 된다는 발언은 너무 커다란 오류입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나오기 전에 이미 SF 소설들은 사이버펑크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사이버펑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존 발리는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을 썼습니다. SF 소설들이 사이버펑크 기반을 마련했음에도, 거의없다님은 SF 소설들을 무시했고 영화를 우대했죠.
왜 소설을 무시하고 영화를 우대하나요? 영화가 사이언스 픽션의 전부인가요? 채널 이름이 영화관 옆 '책방'임에도, 왜 소설을 무시하나요? 왜 사이버펑크를 설명할 때 SF 소설이 아니라 오직 <공각 기동대>와 <매트릭스>만을 언급합니까? 사이버펑크를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면, 채널 이름에 책방이 있는 것처럼, <영화관 옆 책방>은 SF 소설들을 이야기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거의없다님은 소설을 무시했고, 북튜버임에도 겨울님은 소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북튜버가 진행자임에도, <영화관 옆 책방>은 영화를 우대하고 소설을 무시하는 남한 SF 문화의 고질병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SF 소설들을 잘 모릅니다. 제 독서량은 빈약하기 짝이 없고, 그래서 저는 함부로 사이언스 픽션을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남한처럼 SF 문화가 열악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함부로 사이언스 픽션을 설명한다면, 그건 쉽게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이 블로그에서 저는 사이언스 픽션이 어쩌구 떠들었으나, 제 설명에도 숱한 오류들이 있을 겁니다.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소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죠. 사이언스 픽션을 설명하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굵직하고 유명한 소설들을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