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이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본문
로봇 공학(robotics)은 일상적인 용어입니다. 로봇 공학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사람들은 로봇 공학이 어색하지 않은 용어라고 생각할 겁니다. 누군가가 로봇 공학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자동화 기계나 실험적인 인간형 로봇을 머릿속에 떠올리겠죠. 다들 이게 자연 과학 용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로봇 공학은 자연 과학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로봇 공학은 일상적인 용어가 아니었죠. 이건 SF 용어였습니다. 이건 아이작 아시모프가 만든 신조어입니다. 재미있게도 아이작 아시모프 역시 자신이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로봇 공학을 언급했을 때,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 공학이라는 용어가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시모프가 로봇 공학을 언급할 때까지, 아무도 로봇 공학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봇 공학은 신조어가 되었습니다. 가끔 SF 작가들은 신조어를 만듭니다. 어떤 것은 일상적인 용어가 되고, 어떤 것은 그저 SF 용어로서 남습니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아주 일상적인 용어입니다. 21세기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게 SF 용어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인터넷 서핑과 온라인 게임 플레이가 일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설 <뉴로맨서>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을 쉽게 상상하지 못했죠.
종종 SF 작가들은 시대를 앞지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 하인들을 상상했고, 윌리엄 깁슨은 가상 공간을 상상했습니다. 수많은 SF 작가들은 시대를 앞질러야 하고, 그래서 그들은 온갖 신조어들을 만듭니다. 시대를 앞지를 때, SF 작가들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야 합니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킬 때, 이미 존재하는 단어들은 충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로봇을 제조하는 공학을 설명하기 원했을 때, 아이작 아시모프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수많은 SF 작가들은 꾸준히 신조어들을 생산합니다. 그래서 풍자 SF 소설들은 의도적으로 어렵고 괴상한 신조어들을 남발합니다. 이건 SF 작가들이 신조어들을 양산한다는 상황을 풍자합니다.
신조어를 만들 때, SF 작가들은 현실을 뛰어넘고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SF 작가들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 못하겠죠. 그래서 주류 문학 작가들보다 SF 작가들은 훨씬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주류 문학보다 SF 소설들에게 창의적이고 독특한 발상은 꽤나 중요합니다. 심지어 SF 소설은 오직 창의적이고 독특한 발상만으로 호평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필력이나 주제가 다소 떨어진다고 해도, SF 소설이 아주 창의적인 발상을 내놓는다면, SF 독자들은 그 소설을 칭찬할 겁니다.
주류 문학 작가들은 시대를 앞지르지 않습니다. 소설들을 쓸 때, 그들은 오직 현실(과 과거)만을 반영합니다. 반면, SF 작가들은 시대를 앞지릅니다. SF 작가들은 현실을 돌아보고 동시에 미래를 전망하고 가능성을 예상합니다. 주류 문학 작가와 SF 작가는 똑같이 소설 속의 세상을 창조합니다. 양쪽 모두 창조신이 될 수 있죠. 하지만 SF 작가는 소설 속의 세상에 가능성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주류 문학 작가는 가능성을 집어넣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류 문학 작가보다 SF 작가는 훨씬 독창적인 창조신이 될 수 있을 겁니다. SF 작가는 신조어를 집어넣을 수 있고 심지어 언어를 새로 만들 수 있죠.
문제는 소설이 텍스트 매체라는 사실입니다. 주류 문학과 SF 소설 모두 텍스트 매체입니다. 소설은 텍스트를 떠나지 못합니다. 작가가 소설을 쓰고 싶다면, 작가는 글자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글자들 없이 소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구전 소설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도, 작가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는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에 언어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이 과테말라 사람에게 '자연(しぜん)'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과테말라 사람은 그걸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과테말라 사람들이 일본어를 사용하자고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합의할 때, 언어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합의한다고 해도, 사람들보다 언어는 먼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들은 글자들을 이용해 소설을 씁니다. 하지만 소설 작가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글자들은 존재했습니다. 공지영은 유명한 소설 작가입니다. 공지영은 글자들을 이용해 소설을 씁니다. 하지만 공지영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글자들(한국어와 한글)은 존재했습니다. 공지영보다 한국어와 한글은 우선합니다. 소설 작가보다 언어와 텍스트는 우선하고, 따라서 소설보다 글자들은 우선합니다. 소설 작가에게 글자들은 선배입니다. 글자들은 먼저 나타났습니다. 소설 작가는 자신이 글자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현실은 그게 아닙니다.
소설 작가는 글자들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글자들이 있기 때문에 소설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는 글자들에게 종속됩니다. 글자들이 먼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설 작가가 이런 관계를 깨뜨리고 싶다면, 소설 작가는 완전히 새로운 글자들을 이용해 소설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 작가 이외에 아무도 그런 소설을 읽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그런 글자들을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설 <크툴루의 부름>에서 광신도들이 "이아, 이아, 크툴루 파탄!"이라고 외쳤을 때,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이외에 아무도 '파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 영어에 '파탄'이 없기 때문이죠. 영어권 사람들은 '파탄'을 사용하자고 합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소설 작가들은 언어에 종속됩니다. 소설 작가들은 이런 관계를 깨뜨리지 못합니다.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소설 작가는 이런 관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소설 작가가 이런 관계를 깨뜨리기 원한다고 해도, 소설 작가가 새로운 언어를 이용한다면, 아무도 그런 소설을 읽지 못할 겁니다. 제임스 조이스처럼 어떤 작가들은 새로운 실험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실험적입니다. 그건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피네간의 경야>를 쉽게 읽는 독자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피네간의 경야>가 난해하고 실험적이라고 말할 겁니다. 적어도 댄 브라운 소설을 설렁설렁 읽는 것처럼 <피네간의 경야>를 설렁설렁 읽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공지영이 글을 쓸 때, 공지영은 한글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소설 작가들에게 이건 숙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게 '언어의 물질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작가보다 언어는 먼저 존재했고, 그래서 언어에게는 물질성이 있습니다. 소설 작가는 언어의 물질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소설 작가는 창조신입니다. 소설 작가는 허구를 만듭니다. 하지만 소설 작가가 허구를 만든다고 해도, 소설 작가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언어는 이미 존재하고, 그래서 소설 작가는 창조하지 못합니다. 소설 창작은 진정한 창조가 아니죠. 소설 작가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언어)을 빌릴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 작가는 창조신보다 노련한 장인에 가깝습니다. 장인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 수 있으나, 진흙을 직접 창조하지 못합니다.
노엄 촘스키는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말들을 구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어제 남친이랑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유명한 맛집에 갔어."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 때,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이 문장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20년 전이나 30년 전의 사람들 역시 이 문장을 알아듣지 못할지 모릅니다. '남친'이나 '맛집'은 유행어입니다. 30년 전에 사람들은 남자 연인을 남친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남친은 대중적이지 않았습니다. 맛집이라는 단어는 존재했으나, 20년 전에는 파워 블로거들이 맛집들을 소개하지 않았죠.
사실 언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언어 역시 바뀝니다.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은 서로 대화할 수 있으나, 몇몇 부분에서 양쪽은 이질감을 느낄 겁니다. 가슴 아픈 분단의 역사가 길기 때문입니다. 2018년 북한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이후로 날아간다면, 500년 이후의 한국에서 북한 사람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500년 이후 북한과 남한은 아예 사라질지 모릅니다. 북한과 남한이 사라진다면, 한국어 역시 사어가 되겠죠. 언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는 언어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언어가 고정적이지 않다고 해도, 소설 작가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합의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만장일치는 드뭅니다. 특히, 근대 국민 국가에서 만장일치는 훨씬 드물 겁니다. 몇 천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똑같이 합의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완벽하고 완전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는 사회적인 합의이나, 이건 완벽하고 완전한 합의가 아닙니다. 따라서 소설 작가는 언어에게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언어가 완벽한 합의가 아니라면, 소설 작가는 빈틈을 찾아내고 거기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언어가 완벽한 합의라면, 유행어는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절대적인 법칙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어에게서 살짝 벗어나고 유행어를 만들 수 있겠죠.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장식 아래에서 남친♥과 키스했지롱~." 카톡에서 이렇게 누군가가 자랑할 때, '남자 친구'가 절대적인 약속이라면, 사람들은 함부로 남자 친구를 '남친♥'이라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약속은 없고, 사람들은 남자 친구를 얼마든지 남친♥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한때 이른바 '귀여니 소설들'은 꽤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소설들은 언어 파괴 행위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런 소설들을 별로 문제 없이 읽을 수 있었죠. 언어가 절대적인 약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여니 소설들처럼, 언제든 사람들은 사회적인 합의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언어가 뚝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언어가 완벽한 형태로 나타났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언어가 민족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인은 자랑스러운 한국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삐뚤어진 애국심에 불과하겠죠. 트와이스 사나는 이른바 김사나라고 불립니다. 일본 사람임에도 사나가 한국어에 능숙하기 때문이죠. '골룡' 같은 (귀여운) 실수는 없지 않으나, 사나는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합니다. 가끔 사나는 일본어를 잊어버리고 한국어를 말합니다. 한국어가 자랑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나가 한국 사회에 밀접하기 때문에 사나는 그저 한국어를 친숙하게 말했을 뿐입니다. 언어는 사회 및 문화에 밀접하고, 언어를 사용할 때, 사람들은 그 언어가 속한 사회 및 문화를 받아들입니다. 사회 및 문화가 바뀐다면, 언어는 바뀔 수 있습니다. 사나가 아이돌 가수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완전히 돌아간다면, 사나는 한국어를 완전히 잊을지 모릅니다. 언어는 완벽하고 완전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어 유희를 구사할 수 있죠.
이선이 쓴 소설 <행성 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에서 어떤 등장인물은 자신의 나이가 48살이라고 말합니다. "내 나이는 사십 팔이야. 사~십팔." 이게 욕설일까요, 아니면 숫자를 가리킬까요. 이렇게 사람들은 언어가 포괄하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살짝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언어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소설 작가는 언어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겠죠. 아무리 귀여니가 이모티콘들을 남발한다고 해도, 결국 한국어라는 거대한 범주는 귀여니를 장악합니다. 귀여니는 거기에서 달아나지 못하죠. SF 작가는 어떨까요. 셋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SF 작가들은 훨씬 독창적인 창조신이 될 수 있습니다. SF 작가들은 시대를 앞지르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작가가 언어의 물질성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SF 작가가 언어의 물질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로봇 공학(robotics)이라고 언급했을 때, 아이작 아시모프는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났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짧은 일탈 행위에 불과할 겁니다. SF 작가들은 신조어들을 남발할 수 있으나, 언어의 물질성을 기반에 깔아야 합니다. 언어의 물질성은 토대입니다. 신조어들은 상부 구조입니다. 토대 위에 상부 구조가 존재하는 것처럼, 언어의 물질성 위에 신조어들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이미 존재하는 미국 영어를 동원하지 않았다면, 로봇 공학은 의미가 없는 신조어가 되었을 겁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 스타 스폰의 언어로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런 소설을 읽지 못하겠죠.
SF 작가들은 시대를 앞지를 수 있으나, 토대 위에서 시대를 앞지를 수 있습니다. 시대를 앞지른다는 행위는 토대가 되지 못합니다. 언어의 물질성 위에서 SF 작가들은 시대를 앞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SF 작가들이 정말 시대를 앞지르고 싶다면,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건 불가능할 것 같고, 따라서 SF 작가들은 계속 사회적으로 합의된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500년 이후에 SF 작가들이 소설을 쓴다고 해도, 여전히 SF 작가들은 '500년 이후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합의한 언어'를 이용해야 할 겁니다. 물론 SF 작가가 구태여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없을지 모릅니다.
왜 SF 작가가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야 할까요? SF 소설이 전복적이기 때문에? SF 소설이 시대를 뒤집기 때문에? 사실 SF 소설은 전복적이지 않습니다. SF 소설은 그저 전복적인 내용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전복적인 내용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소설은 (전복적이지 않은) 언어의 물질성에 기반해야 합니다. 내용은 전복적일지 모르나, 형식은 별로 전복적이지 않습니다. 소설 <타이거! 타이거!>에서 알프레드 베스터가 보여준 것처럼, SF 작가들은 몇몇 파격적인 형식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언어의 물질성을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이게 모순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내용이 전복적이라면, 형식 역시 전복적이어야 합니다. SF 소설이 전복적인 내용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형식이 전형적(언어의 물질성)이라면, 그건 모순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이게 모순일까요? 설사 이게 모순이 된다고 해도, 이게 정말 문제일까요?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아나레스 사람들은 소유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쓰지 않기 원합니다. 여러 SF 소설들에서 새로운 공동체들은 새로운 언어들을 사용합니다. 그건 언어의 물질성을 완전하게 벗어나는 행위가 아니나, SF 소설들은 시대가 바뀔 때 새로운 언어가 나타나고 사람들이 언어의 물질성에서 살짝 일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SF 작가에게는 몇몇 장점이 있습니다. SF 작가는 언어의 물질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나, 적어도 언어의 물질성을 이용해 언어가 바뀐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SF 작가는 언어가 계속 바뀔 거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SF 작가는 자신이 속한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시대가 바뀌고 언어 역시 바뀔 거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그런 변화들이 이어진다면, 언젠가 소설 역시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게 무슨 모습일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겠으나, 그건 가능할지 모릅니다. SF 소설은 그런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죠.
설사 이게 모순이라고 해도, SF 소설은 이런 모순을 통해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모순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모순을 통해 앞으로 나갑니다. 숱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원합니다. 그런 사회주의자들이 당장 자본주의 사회를 떠나야 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이미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프랑스 공산주의자가 남아메리카 밀림으로 들어가고 인디언들과 어울린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저지른 기후 변화는 남아메리카 밀림과 인디언들에게 영향을 미치겠죠. 캐롤린 머천트가 전세계적인 환경 재앙이라고 말할 때, 아무 이유 없이 캐롤린 머천트는 전세계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겠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건 꽤나 모순적입니다. 하지만 좌파는 이런 모순을 통과해야 합니다. 좌파는 모순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순적인 삶은 좌파의 잘못이 아니죠.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SF 소설이 언어의 물질성을 이용해 언어의 물질성이 사라질 거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모순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소설은 그런 모순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마침내 SF 소설은 언어의 물질성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소설은 절대 언어의 물질성을 떠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소설이 절대 언어의 물질성을 떠나지 못한다면, SF 소설 역시 언어의 물질성을 떠나지 못할 겁니다. 누군가는 SF 소설이 가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복적인) 내용과 (종속적인)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그게 가식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겁니다. 전복과 종속은 서로 반대입니다. SF 소설의 내용은 전복적일 수 있으나, SF 소설의 형식은 종속적입니다. 설사 이게 가식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SF 소설이 드러내는 한계입니다.
SF 소설이 정말 언어의 물질성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싶다면, SF 소설은 소설의 죽음을 예상해야 할지 모릅니다. 소설이 사라질 때, 마침내 소설은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류 문학은 자신이 사라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이 시대를 앞지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SF 소설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게 그저 이야기(내용)에 불과하다고 해도, SF 소설은 시대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고 언어의 물질성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순이 있다고 해도, 시대가 바뀌지 않을 이유는 없겠고, 그걸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