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19세기 진보와 소프트 SF 장르 본문
19세기 유럽 문명은 근대적인 진보를 만들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는 19세기 유럽에서 비롯했죠. 왜냐하면 19세기 유럽이 산업 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산업 자본주의가 엄청난 식량들과 재화들과 인구들을 생산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바꿨고, 유럽 사람들은 세상이 급격하게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산량은 늘어나고, 자유와 평등은 넓어집니다. 게다가 진화 이론을 비롯해 과학 이론들은 종교와 미신을 밀어냅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인간이 (마법이 아니라) 과학을 이용해 해저로 내려가거나 우주로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까마득한 선사 시대와 공룡들을 뒤돌아볼 수 있었고, 세계화된 지구를 고려할 수 있었고, 외계 문명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한편에서 사람들이 진화 이론을 떠들 때,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은 영혼과 유령을 소환하는 중이었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과학적인 추론을 상징하는 작가이나, 말년에 코난 도일은 요정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은 당장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산업 자본주의가 놀라운 생산량을 자랑한다고 해도, 진보는 세상을 당장 밀어붙이지 못해요.
하지만 19세기 진보는 세상을 밀어붙이는 중이었습니다. 진보는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고, 세상은 계속 앞으로 나갑니다. 세상은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은 계속 앞으로 나가고 멈추지 않아요. 세상은 고정적이지 않죠. 진화 이론은 자연 생태계가 끊임없이 바뀌었다고 증명했고 앞으로 끊임없이 바뀐다고 증명했습니다. 이건 진화 역사가 진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꽤나 흔한 오해죠. 분명히 기나긴 진화는 풍성한 생물 다양성을 보장합니다. 풍성한 생물 다양성을 논의할 때, 과학자들은 진화 이론을 빠뜨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화는 진보가 아니죠. 인류 문명은 진보할 수 있으나, 자연 생태계는 진보하지 않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진화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진보와 진화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양쪽은 세상(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인류 문명은 계속 앞으로 나갈 테고, 자연 생태계는 번성과 붕괴와 다양성을 반복할 겁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에게 이런 관념은 꽤나 커다란 충격이었을지 모릅니다. 인간은 100년을 살지 못합니다. 특히, 과거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했어요. 게다가 고대와 중세 사람들은 심해나 우주로 논리적인 시선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리는 절대적인 진리였죠. 그래서 계몽주의 시대 이전에 사람들은 세상이 고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이런 사고 방식은 강력합니다.
하지만 19세기 근대적인 진보와 진화 이론을 비롯해 과학 이론들은 이런 사고 방식을 타파합니다. 지구가 나타났을 때, 5대양 6대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각은 계속 이동합니다. 지구가 나타났을 때, 포유동물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공룡들이 살았고, 인류는 멸종할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은 심해와 우주를 바라볼 수 있고 전세계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19세기 유럽 소설들에는 인도 사람들이나 동아시아 사람들이 (비하적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진화와 진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찰스 다윈은 많은 비난들을 받았습니다.
반면, 어떤 지식인들은 <종의 기원>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죠.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런 지식인들 중에서 하나였습니다. <종의 기원>은 세상이 고정적이지 않고 계속 바뀐다고 말합니다.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썼고, <공산당 선언> 역시 세상이 진보한다고 선언합니다. 이건 <종의 기원>과 <공산당 선언>이 똑같이 변화를 주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오해했습니다. 카를 카우츠키 같은 사람은 <종의 기원>과 <공산당 선언>이 똑같다고 착각했고 다윈 지지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넘어갔죠. 사실 오늘날에도 이런 오해는 심합니다. 사람들은 진화가 진보라고 착각해요. 사람들은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보했다고 착각하죠.
하지만 똑같이 변화를 말한다고 해도, 진화와 진보는 다릅니다. 어쩌면 학교 교육은 진화와 진보를 훨씬 자세히 가르쳐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학교 교육이 그럴 수 있을지 그건 의문입니다. 진보를 가르치고 싶다면, 학교 교육은 산업 자본주의를 자세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걸 위해 학교 선생님들은 얼마나 산업 자본주의가 폭력적인지 말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사회에서 그게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설사 학교 교육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자세히 알아야 할 겁니다. 문명과 자연을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진보와 진화를 알아야 하고, <공산당 선언>이나 <종의 기원>은 좋은 출발점이 되겠죠. (슬프게도 어떤 과학자들은 오늘날 생물학과 학생들이 이런 고전을 멀리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19세기 유럽에서 <공산당 선언>과 <종의 기원> 이외에, 진보 사상과 과학 이론 이외에, 다른 문화 현상 역시 세상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깨달았습니다. 그 문화 현상은 사이언티픽 로망스입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가 고정적이지 않다고 주장해요. <타임 머신>은 그걸 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공산당 선언>과 <종의 기원>처럼, <타임 머신>은 필수적인 고전일지 모릅니다. (허버트 웰즈는 좀 천재가 아닐지.)
게다가 <타임 머신>은 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를 함께 바라봅니다. <공산당 선언>은 자연 생태계보다 인류 문명에 치중하죠. <종의 기원>은 인류 문명보다 자연 생태계에 치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명과 자연을 함께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연 없이 문명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만약 자연이 '어머니 자연'이라면, 인류 문명은 아기입니다. 아기가 젖을 빠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어머니 자연의 젖을 빨아야 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비유적인 표현이나, 어머니 자연 없이 인류 문명은 먹고 살지 못합니다. 동시에 인류 문명은 자연 생태계에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그건 부정적인 영향이 될지 모르고, 그건 인류 문명에 다시 피해를 입힐지 모릅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함부로 깨문다면, 어머니는 젖을 먹이지 못할 테고, 아기는 굶어죽겠죠. 이건 그저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하나, 어느 정도 상황을 상징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를 함께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진보와 진화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타임 머신>을 비롯해 사이언티픽 로망스들, SF 소설들은 문명과 자연이 상호 작용하는 변증법적인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때, 이런 시각은 미궁에 빠질지 모릅니다. <어둠의 왼손>은 가장 유명한 SF 소설들 중에서 하나일 겁니다. 많은 SF 독자들은 <어둠의 왼손>을 호평하죠. 조안나 러스처럼 어떤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은 <어둠의 왼손>을 매섭게 질타합니다. 사실 그런 질타는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어둠의 왼손>은 가장 유명한 SF 소설들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이 SF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다고 해도, 많은 작가들과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죠. 하지만 동시에 <어둠의 왼손>은 소프트 SF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자연 과학을 엄중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비단 이 소설만 아니라 어슐라 르 귄은 전반적으로 소프트 SF 작가에 속합니다. 몇몇 소설에서 어슐라 르 귄은 엄중한 상상력을 보여주나, 전반적으로 어슐라 르 귄은 자연 과학을 가볍게 다루죠. 앤서블은 재미있는 장난감이나, 하드 SF 설정으로서 앤서블은 실격일 겁니다. 이런 소프트 SF 소설들은 많은 논란들을 일으킵니다. 소프트 SF 소설들이 정말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SF 작가가 마법을 과학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SF 설정이 되는가? 우리가 어디까지 SF 설정이라고 인정해야 하는가? 마법사와 다르지 않은 초능력자가 SF 설정이 될 수 있는가?
쥘 베른은 허버트 웰즈를 깐 적이 있습니다. 허버트 웰즈가 자연 과학을 가볍게 다뤘기 때문입니다. 웰즈가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소설을 썼을 때, 쥘 베른은 그게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되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사회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자신이 자연 과학을 가볍게 다뤘다고 변호했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자연 과학이 가벼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쥘 베른은 그게 아니라고 판단했죠. 하지만 나중에 쥘 베른 역시 까임을 당합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쥘 베른이 달을 향해 대포를 쐈다고 비웃습니다. 뭐,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자연 과학을 엄중하게 다루느라 애썼습니다. 하지만 보그다노프는 20세기 초반 작가였고 시대적인 한계를 넘지 못했어요.
<붉은 별>에 나오는 우주선이나 외계 공룡은 별로 엄중한 상상이 아니죠. 게다가 <붉은 별> 역시 자연 과학보다 사회 과학에 다소 치우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20세기 후반 작가들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를 다시 깔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SF 작가들은 서로 까고, 까고, 까고, 다시 깔 수 있겠죠. 하지만 SF 작가들이 계속 까고 까고 까고 다시 까야 할까요? 이런 비판들에는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비판은 더 나은 문화를 형성할 수 있죠. 하지만 종종 소프트 SF 소설과 하드 SF 소설을 가르는 논란들은 오리무중에 빠질지 모릅니다. 이게 너무 복잡한 논의이기 때문에 종종 SF 팬들은 아예 논의를 포기합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여기에서 나는 나가야 해!"
논의들이 복잡하고 골치가 아플 때, 좋은 방법들 중에서 하나는 원점입니다.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뭐가 문제인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SF 소설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인류 문명에서 어떤 문화도 아무 이유 없이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문화적인 현상들에는 기원과 흐름과 계보가 있겠죠. SF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독자들이 원점을 살피고, 기원을 살피고, 흐름을 파악하고, 계보를 그린다면, SF 독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을지 모릅니다. SF 평론가들은 메리 셸리나 쥘 베른이나 허버트 웰즈가 SF 소설들을 정립하거나 본격적으로 썼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메리 셸리나 쥘 베른이나 허버트 웰즈는 19세기 유럽 작가들이죠. 이제까지 이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19세기 유럽은 진보와 진화를 이야기했습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세상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 구조, 사고 방식, 생산량, 대륙 지각, 자연 생태계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철학부터 지질학까지, 인문학에서 자연 과학까지, 19세기 유럽은 도처에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이언티픽 로망스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그런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허버트 웰즈가 <타임 머신>을 썼을까요? 메리 셸리가 <최후의 인간>을 썼을까요? 쥘 베른이 <영원한 아담>을 썼을까요?
진화 이론이나 대륙 이동 이론은 충격적입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이런 충격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여기에 분노했을 테고, 누군가는 이걸 슬퍼했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게 짜릿하다고 느꼈을 테고, 그런 감성은 사이언티픽 로망스로 이어졌을지 모르죠. 결과적으로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미래적인 전망을 이용해 그런 짜릿한 감성을 구현합니다. 하지만 19세기 유럽에서 충격은 비단 진화 이론이나 대륙 이동 이론만이 아니었습니다. <종의 기원>은 엄청난 파장을 미쳤습니다.
동시에 <공산당 선언> 역시 엄청난 파장을 미쳤죠. <종의 기원>은 자연 과학을 들여다보고, <공산당 선언>은 사회 과학을 들여다봅니다. 자연 생태계가 바뀌는 충격처럼, 인류 문명이 바뀌는 충격은 유럽 사회를 강타했을 겁니다. 이제 민중들은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주인입니다. 하녀들은 남자 귀족들의 목을 자르고, 동일 노동과 동일 임금, 투표 권리, 정당 참가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이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자연 과학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사회 과학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날에 SF 소설들은 자연 과학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나타났을 때, 유럽 사회에서 커다란 충격은 오직 자연 과학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회 과학 역시 충격적이었죠. <종의 기원>이 충격적인 것처럼, <공산당 선언> 역시 충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SF 소설들에서 자연 과학처럼 사회 과학은 중요합니다. 자연 과학에 치중하는 것처럼, SF 작가는 사회 과학에 치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SF 소설이 사회 과학에 치중하고, 그 소설이 SF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건 꽤나 이상한 현상일 겁니다.
앤디 위어가 쓴 <마션>을 보세요. <마션>에서 사회 과학은 꽤나 가볍습니다. 엉터리 사회 과학은 자연 과학이 일으키는 감동을 깎아내립니다. 하지만 많은 SF 독자들은 이게 훌륭한 SF 소설이라고 평가합니다. 사회 과학이 엉터리라고 해도, 자연 과학에 치중한다면, 그런 SF 소설은 훌륭한 SF 소설이 될 수 있어요. 반면, 어떤 소설이 사회 과학에 훨씬 치중할 때, SF 독자들은 그런 소설이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의문을 품죠. 하지만 19세기 유럽에서 '고정 관념을 타파하는 충격'은 비단 자연 과학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회 과학 역시 그런 몫을 맡았습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진보적인 사회 과학이나 사상은 19세기 유럽을 강타했다. 진보적인 사회 과학과 사상은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기 원했다. 그래서 이런 흐름은 19세기 유럽을 휩쓸었다. 분명히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거기에 영향을 받았는가? 정확하고 가시적인 상관 관계가 있는가?" 이런 물음은 중요할 겁니다. 메리 셸리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선구적인 페미니스트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 과학이나 사상이 메리 셸리가 쓴 SF 소설들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그런 영향이 가시적일까요? 우리가 상관 관계를 정확히 그릴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운 작업일 겁니다. 그런 영향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진보적인 흐름이 돌풍을 일으켰다면, 문화 예술들이 완전히 그걸 거부할 수 있을까요? 문화 예술들이 진보적인 흐름과 완전히 동떨어질 수 있을까요?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프랑스 대혁명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을까요? 그런 가능성은 낮을 겁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진보적인 흐름이 SF 소설들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런 주장은 완전히 틀리지 않겠죠. SF 소설들이 탄생했을 때, 유럽 사회는 그런 흐름을 겪었습니다.
어떤 SF 독자들은 <뒤돌아보며> 같은 소설이 가짜 SF 소설이라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진보는 비단 자연 과학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회 과학 역시 근대적인 진보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사상 역시 근대적인 진보입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근대적인 진보의 산물들입니다. 하지만 어떤 SF 팬들은 근대적인 진보에서 사회 과학을 내쫓고 오직 자연 과학만을 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 과학은 사회 구조에 쉽게 영향을 받겠죠. 현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회 구조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세상이 바뀐다는 사고 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부르주아 경제학은 경제 역사를 지웁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인간이 천성적으로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이라고 간주합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에는 부족 사회나 코뮌이나 공동체 운동이 없습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에는 지배 계급들이 폭력적으로 그런 것들을 짓밟았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자본주의가 영원불멸하다고 주장하기 원합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가 바뀔지 모른다고 상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앞으로 나가는 시각)는 대세가 되지 못하겠죠.
이런 상황에서 사회 과학은 많은 탄압들을 받습니다. 심지어 이런 탄압들은 자연 과학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물학 교과서들은 인류의 탐욕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인류의 탐욕이 아니라 억압적인 계급 구조입니다. 인류가 자연 환경을 가꾸고 싶다면, 인류는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타파해야 하고, 그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너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는 영원불멸해야 합니다. 그래서 생물학 교과서는 계급 구조가 아니라 인류의 탐욕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들 사회가 고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가 바뀐다는 철학은 널리 퍼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SF 소설들 역시 사회 과학을 등한시하고 오직 자연 과학에만 치중하는지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철학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이건 SF 소설들에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죠.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해 공산주의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맞서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들 역시 억압적인 사회를 유지해야 했고 사회가 바뀐다는 철학을 탄압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류 문명은 바뀐다'는 사상임에도, 공산주의 국가들은 그걸 부정했죠. 미국과 유럽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해야 했어요. 비단 자유 방임만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 역시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이다! 따라서 소비에트 연방에서 역사는 멈춘다!"
19세기 이후, 사회는 복잡하게 바뀌었습니다. SF 소설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죠. 이것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진보가 무엇이고, 왜 공산주의가 공산주의이고, 왜 진보가 공산주의가 되는지, 왜 진보가 나타났고 그것이 현대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지, 우리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을 순차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면, 우리는 19세기 유럽으로 돌아가야 할 겁니다. 충격적인 자연 과학과 충격적인 사회 과학이 나타났던 그 시기를 향해. 그런 것들이 함께 존재했기 때문에 SF 소설들은 나타날 수 있었을 겁니다.
SF 소설들은 19세기 근대적인 진보에서 비롯했고, SF 독자들은 그것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허버트 웰즈가 자연 과학을 가볍게 다뤘다고 해도, 그런 소설은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될 수 있을 겁니다. 19세기 유럽을 풍미한 충격이 비단 자연 과학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과학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왼손>이 소프트 SF 소설이라고 해도 <어둠의 왼손>은 당당하게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이 소설이 진보적인 사상(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사상)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어떤 SF 평론가들은 휴고 건즈백 같은 과학 모험 작가들이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망쳤다고 비판합니다. 분명히 메리 셸리나 쥘 베른이나 허버트 웰즈는 자유와 평등이 넓어지는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그들이 진보적이지 않다고 해도, 그들이 쓴 소설들은 그런 잔재들을 보여주죠. (허버트 웰즈는 아예 좌파였습니다.) 하지만 휴고 건즈백은 자연 과학을 이용한 모험을 강조했고, 이런 흐름은 미국 SF 출판 시장으로 크게 퍼집니다. 그래서 SF 소설들은 근대적인 진보에서 사회 과학을 쫓아내고 오직 자연 과학만을 추종하는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영향을 미치기 전에 이미 휴고 건즈백 같은 작가들은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죠. 물론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휴고 건즈백은 진보적인 사상을 등한시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가능성은 없지 않겠죠. SF 독자들이 당장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이런 시각과 방법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대적인 진보를 살피는 관점은 중요할 겁니다. 이게 무조건 옳은 관점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관점은 SF 독자들에게 많은 것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