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페르디도 기차역>의 이종족 연인, 린과 아이작 본문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단순한 스팀펑크 판타지가 아니라 수많은 유사 인간들을 뒤섞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들과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숱한 유사 인간 종족들을 선보이는 것처럼,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역시 다양한 유사 인간 종족들을 선보입니다. 유사 인간(휴머노이드)이라는 표현은 다소 인간 중심적입니다. 이건 다른 종족들을 차별하는 표현입니다. 가상의 19세기 산업 도시에서 그들은 서로 뒤섞이고, 당연히 이건 숱한 갈등들과 차별들과 오해들을 부릅니다. 인간들은 보디야노이 같은 양서류 인간 종족을 차별하고, 군사 정부는 그걸 부추깁니다.
심지어 이건 파업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 파업 파괴자들은 보디야노이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합니다. 인간들은 사막 가루다들을 몰아세우고, 조직 폭력배처럼 뒷골목에서 가루다들은 위계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캑터케이 선인장 종족들은 자신들만의 도시 온실을 세우고, 다른 종족들은 온실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장면들은 현실 속의 온갖 차별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 종족이 비인간 종족을 차별할 때, 독자들은 인종 차별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구태여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본격적인 SF 소설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상을 찬미하거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원형적인 SF 소설들은 외계인들을 이용했습니다.
외계인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들은 머나먼 곳에서 왔습니다. 출신 지역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문화, 다른 사회, 다른 성향을 선보입니다. 당연히 외모 역시 다릅니다. 어쩌면 문화와 사회와 성향보다 외모는 훨씬 커다란 차이점일지 모릅니다.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고, 외계인을 바라볼 때, 인간은 다른 어떤 것보다 외모를 살필지 모릅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유사 인간 종족들은 외계인들이 아닙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는 외계인들이 있으나, 양서류 종족이나 조류 종족이나 선인장 종족이나 곤충 종족은 외계인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질적인 외모와 문화와 사회는 얼마든지 차이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들 때문에 인간들은 그들을 차별합니다. 차이가 차별로 무조건 이어질 이유는 없습니다. 차이는 차별이 아니죠. 하지만 억압적인 수직 구조는 차이를 차별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피부가 검기 때문에 백인들은 흑인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차별합니다. SF 소설 속에서 인간이 외계인이나 유사 인간 종족을 차별한다면, 독자는 그걸 현실 속의 차별과 연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SF 소설은 아주 훌륭한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온갖 비유들을 볼 수 있겠죠.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하나의 커다란 비유입니다. 인간 파업 파괴자들이 보디야노이 파업 노동자들을 폭행할 때, 이건 커다란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상의 19세기 산업 도시에는 오직 파업만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애틋한 연애 역시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 아이작은 린이라는 여자를 사귑니다. 린과 아이작은 연인입니다. 문제는 두 사람의 종족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작은 인간입니다. 린은 곤충 종족 케프리입니다. 린의 몸은 인간이나, 머리는 딱정벌레입니다. 몸이 인간이기 때문에, 린은 아이작과 섹스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은 린의 젖가슴을 애무하거나 빨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 그런 묘사는 없으나, 독자는 린과 아이작이 애무할 거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독자가 상상한다고 해도, 린과 아이작은 키스하지 못할 겁니다. 애무는 가능하다고 해도, 키스는 불가능합니다. 린의 머리가 딱정벌레이기 때문에, 린은 아이작과 키스하지 못합니다. 린이 아이작과 키스한다면, 딱정벌레 구기는 아이작의 입술을 물어뜯을 겁니다. 서구 문화에서 키스는 가장 기본적인 애정 표현이나, 린과 아이작은 키스하지 못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린과 아이작은 꽤나 불행한 연인입니다. 두 사람은 키스 없는 연인입니다. 어머, 세상에, 키스 없는 연인이라니….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키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키스가 중요할까요? 키스는 그저 문화적인 관습에 불과합니다. 입이 있는 이유는 키스 때문이 아닙니다. 키스가 그저 문화적인 관습에 불과하다면, 연인이 키스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불행이 아닐 겁니다. 두 연인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다른 애정 행위들이 가능하다면, 키스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만약 인간 여자가 성기 없는 유사 인간 종족 남자와 사귄다면, 두 연인은 '정상적으로' 섹스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두 연인은 다른 방법으로 애무하고, 오르가즘을 느끼고, 절정에 도달하고, 쾌락을 즐길 수 있겠죠.
인간 남자가 젖가슴이 없는 유사 인간 종족 여자와 사귄다면, 남자는 절대 젖가슴을 애무하거나 빨지 못할 겁니다. 이건 '정상적인' 애무가 아닙니다. 서구 문화는 여자와 남자가 애무할 때 남자가 여자의 젖가슴을 더듬거나 빨아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건 거의 상식입니다. 이게 상식이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의 젖가슴을 더듬지 못한다면, 그건 '정상적인' 애무가 아닐 겁니다. 인간 남자가 젖가슴이 없는 유사 인간 종족 여자와 사귄다면, 두 연인은 '정상적으로' 애무하지 못할 겁니다. 서구 문화는 두 연인이 비정상적이라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젖가슴 애무가 무조건 정상적인 애무일까요? 누가 그걸 정했습니까?
젖가슴은 수유 기관입니다. 어쩌면 젖가슴은 성적인 신호를 나타낼지 모르나, 분명히 성적인 신호보다 젖가슴은 수유 기관에 가깝습니다. 아니, 수유 기관보다 젖가슴이 성적인 신호에 가깝다고 해도, 왜 무조건 젖가슴 애무가 정상적인 애무가 되어야 할까요?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를 수 있나요? 많은 사람들은 진화와 자연 선택이 기준이라고 말할 겁니다. 정말? 정말 진화와 자연 선택이 모든 것을 좌우하나요? 하지만 젖가슴 애무가 자연 선택인가요? 누가 그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무엇이 자연 선택인가요? 19세기 백인들은 하얀 피부와 까만 피부가 자연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인들은 백인이 흑인을 착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이런 사고 방식은 지배적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에나 대충 자연 선택을 갖다붙이고 그게 과학이라고 포장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에게 억지로 돌봄 노동들을 떠넘길 때, 가부장 문화는 그게 자연 선택이고 과학이라고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맡을 때, 사실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을 차별하고 남자들을 전쟁이나 위험한 작업으로 몰아넣습니다. 21세기 초반에도 우생학은 여전히 지배적인 사고 방식이고 온갖 성 차별들과 성 폭행들을 조장합니다. 사회 구조와 사회 문화는 얼마든지 차별을 진화라고 포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진화가 존재한다고 해도, 왜 우리가 진화를 무조건 따라가야 할까요? 진화가 절대적인 법칙일까요? 우리는 진화를 거부하고 문화를 꾸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화를 거부할 때, 그것 역시 진화가 만든 결과입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이성적이고 지능적인 동물로 진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화 이론을 정립하지 못했을 테고, 우리는 진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건 꽤나 우스꽝스러울 겁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무엇을 거부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바나나나를 먹지 않을 거야! 바나나는 너무 매워! 나는 바나나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나, 나는 바나나가 맵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매운 바나나를 먹지 않을 거야!" 이렇게 옆동네 철수가 주장한다면, 그건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 망상일 겁니다. 바나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철수가 바나나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나중에 우연히 철수가 바나나를 먹는다면, 철수는 바나나를 아주 좋아할지 모릅니다. 아니, 심지어 철수는 자신이 바나나를 먹는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숱한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숱한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학교 교육들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한에서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제대로 만나지 못합니다. 사회 분위기는 무조건 사회주의를 적대합니다. 해방 이후, 남한 사회가 미국을 무조건 따랐기 때문에, 남한 사회는 미국적인 사고 방식이 무조건 옳다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남한 사회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하지 않음에도, 남한 사회는 무조건 사회주의를 거부합니다.
사회주의를 거부할 때,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숱한 남한 사람들은 파리 코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했음에도,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숱한 사람들은 그게 아무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 때, 우리는 거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화 이론을 압니다. 적어도 생물학자들은 어느 정도 진화 이론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능적으로 진화했고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인간적인 문화를 꾸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진화했습니다.
진화는 무조건 선이 아닙니다. 진화는 무조건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자연 환경에는 선과 악이 없습니다. 자연 환경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고, 우리는 취사선택할 수 있습니다. 진화 이론을 이용해 우리가 우리를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를 훨씬 자세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발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 이론은 미래를 장악하지 않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출산을 거부하고 인공 자궁을 만들거나 시험관 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공 자궁과 시험관 아기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시험관 아이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뭐가 자연일까요?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 환경에서 진화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능적으로 진화했고 시험관 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왜 이게 자연적이지 않나요? 자연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했고,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시험관 아기를 만들 수 있음에도, 왜 이게 자연스럽지 않나요? 정말 자연스러운 것을 찾고 싶다면, 사람들은 당장 빵을 먹지 말아야 할 겁니다. 자연 환경에는 빵이 없습니다. 자연 환경에는 밀 농장이 없습니다. 자연 환경에는 제분소가 없습니다. 자연 환경에서 이스트들은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지 않고 화덕은 빵을 굽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자연적으로 살고 싶다면, 우리는 당장 제분소들을 때려부숴야 할 겁니다. 우리가 정말 자연적으로 살고 싶다면, 우리는 제빵사들을 처형해야 할 겁니다. 나사렛 출신 예수는 빵이 자신의 살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빵을 축복했어요. 하지만 빵은 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들은 빵을 먹지 않아요. 세상에! 예수는 자연적인 것을 거부하는 못되처먹은 놈팽이였습니다! 서구 문화는 당장 프란체스코 교황을 끌어내리고, 기독교를 짓밟고, 예수를 패대기쳐야 합니다! 왜 고대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을까요? 그들은 자연적인 삶을 추구한 것 같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빵을 엄청나게 싫어한 것 같습니다.
야생 동물들이 빵을 먹지 않기 때문에, 빵은 자연적이지 않고, 따라서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패대기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웃기지 않은 농담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실컷 빵들을 먹을 테고 기독교를 믿을 겁니다.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농민들이 밀 종자들을 '인위적으로 교배'한다는 사실에 눈꼽만큼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밀 종자들이 '인위적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실컷 빵들을 먹을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아무 것에나 자연과 진화와 과학을 갖다붙일 수 있습니다.
키스와 젖가슴 애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키스와 젖가슴 애무는 인위적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인위적이고, 두 연인이 키스하지 않거나 젖가슴을 빨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두 연인이 비정상적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젖가슴 애무가 자연적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만약 젖가슴이 성적인 신호에 가깝다고 해도, 성적인 신호 때문에 젖가슴이 진화했다고 해도, 호모 사피엔스가 무조건 젖가슴을 애무해야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밀 종자들을 인위적으로 교배하고, 인위적으로 빵을 만들고, 인위적으로 빵을 먹는 것처럼, 호모 사피엔스는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애무할 수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어떤 애무를 선택하거나 어떤 애무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키스는 인간이 그저 인위적으로 만든 애정 표현에 불과합니다. 린과 아이작이 키스하지 못한다고 해도, 두 연인은 그저 문화적인 관습을 따르지 않을 뿐입니다. 여자와 여자가 서로 사귄다면, 두 연인은 삽입하지 못할 겁니다. 이게 자연적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왜 애무와 섹스가 무조건 삽입으로 이어져야 합니까? (까놓고 말해서) 보지와 자지가 결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들로 절정에 도달하고 쾌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자연적인 것'을 고릅니다. 이건 웃기는 짓입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자연적인 것'을 고른다면, 그게 정말 자연적일까요?
하지만 아무리 린과 아이작이 황홀하게 절정에 도달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이런 애무가 역겹다고 느낄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곤충 종족과 애무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린과 아이작이 역겹다고 비난할 겁니다. 그래서 린과 아이작은 연인 관계를 감춥니다. 린과 아이작은 공개적으로 연애하지 못합니다. 거리에서 다정한 연인처럼 린과 아이작이 팔짱을 낀다면, 인간들은 그 장면을 비난할 겁니다. 다른 종족들 역시 그걸 비난할 겁니다. 그래서 린과 아이작은 두 사람이 연인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연인 관계를 밝히지 못합니다. 물론 지인들은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고 짐작합니다. 물증이 없다고 해도, 심증과 눈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심증과 눈치가 있다고 해도,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린과 아이작은 그걸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합니다. 린과 아이작은 비밀 연인입니다. 사내 커플이 몰래 데이트하는 것처럼, 린과 아이작은 몰래 만나고 몰래 데이트하고 몰래 섹스해야 합니다. 종종 린은 이런 비밀스러운 만남이 설레고 두근거리는 연애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연인은 서로 가까워지고 싶어하나, 두 연인이 너무 가깝다면, 두근거리는 심정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두 연인에게 거리는 아주 중요합니다. 너무 가까운 거리와 너무 먼 거리는 모두 연애를 흐트러뜨릴 겁니다.
엠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욕구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욕구를 느낀다면, 누군가는 타인이 되어야 합니다. 린과 아이작은 서로 타인입니다. 두 연인은 서로를 원하는 대로 조종하지 못합니다. 린은 자신의 머리 날개를 파닥거릴 수 있으나, 아이작을 조종하지 못합니다. 만약 린이 아이작을 조종하거나 린과 아이작이 하나가 된다면, 그건 더 이상 연인 관계가 아닐 겁니다. 이게 연인 관계라고 해도, 엠마뉘엘 레비나스는 이런 연인 관계에 욕구가 없다고 말할 겁니다.
린과 아이작 사이에 어떤 거리가 있다면, 거리는 두 사람이 타인이라고 뒷받침할 테고, 이런 거리 때문에 린과 아이작은 계속 서로에게 욕구를 느낄 수 있겠죠. 이렇게 사랑을 느낄 때, 인간은 타인을 바라봐야 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포함한다면, 사랑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타인이 존재하고 인간이 타인을 감싸안을 때, 사랑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자유주의 우파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합니다. 자본주의에게는 타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되어야 하고 화폐의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자본 증식 과정이고, 타인은 상품이 되어야 합니다.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겠습니까. 목수정 작가는 좌파가 여성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성'은 타인을 돌보고 감싸안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랑은 좌파적이고 여성적입니다. 목수정처럼,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 꽤나 좌파적인 감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목수정과 알랭 바디우의 주장이 사실인지 그건 분명하지 않으나, 타인으로서 린과 아이작은 서로를 바라보고 계속 두근거리는 연애 감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속적인 연인 관계를 위해 이런 의식적인 거리 유지는 필수적일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거리 유지가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억압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린은 이런 암묵적인 금기를 깹니다. 린은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에 부딪혔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린은 마음을 치유하고 싶어합니다. 연인이 곁에 있다면, 마음은 따스하게 회복할 수 있겠죠. 그래서 린은 아이작을 찾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지켜봤음에도, 린은 아이작에게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린은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나, 주변 사람들은 여자 친구로서 린이 남자 친구 아이작에게 애정을 갈구한다고 눈치챌 수 있었죠. 아이작은 분노합니다. 이게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종족 차별들이 깽판을 부리는 산업 도시에서 벌레 종족 연인과 인간 종족 연인이 무슨 위험에 처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아이작은 린을 이해합니다. 아이작은 린이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에 부딪혔다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연인을 위로합니다. 사실 린 역시 자신이 아이작을 직접 찾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린 역시 벌레 종족 연인과 인간 종족 연인이 무슨 위험에 처할지 짐작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린은 연인 곁에 있기 원했고 아이작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연인은 훌륭한 치료약이 될 수 있습니다.
린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도, 린은 위험을 무릅썼고 아이작을 찾았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자주 연애 소설들은 이런 장면들을 묘사하죠. "눈물에 젖었다면, 다정하게 닦아주고 꼬옥 안아줘. 오직 당신만이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야." 이렇게 <취급 설명서 トリセツ>가 노래하는 것처럼, 연인은 슬픔을 밀어내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고통에 빠졌을 때, 연인은 아주 훌륭한 치료약입니다. 하지만 연인이 훌륭한 치료약이라고 해도, 린은 아이작을 공개적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19세기 스팀펑크 도시에는 발렌타인 데이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발렌타인 데이에 린이 초콜릿 선물을 준다고 해도, 아이작은 친구들에게 그걸 자랑하지 못할 겁니다. 두 연인을 가로막는 제약들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두 연인이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린은 케프리이고, 아이작은 인간입니다. 케프리와 인간이 섹스한다고 해도, 둘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요?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그걸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엘프와 인간이 하프 엘프를 낳는 것처럼, 케프리와 인간은 아기를 낳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린과 아이작은 아기를 낳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이런 이종족 연인들이 아기를 낳지 못한다면, 이종족 연인들이 늘어날 때, 도시 인구는 감소할 겁니다. 시청은 이걸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시청은 인구를 늘리고, 노동자들을 늘리고, 생산량을 늘려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절대 마이너스 성장이나 제로 성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더 많이 생산해야 합니다.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더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원합니다. 게다가 인구가 늘어난다면, 이른바 산업 예비군 역시 늘어날 테고, 자본가 계급은 마음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거나 해고할 수 있을 겁니다.
현실 속에서 국가 정부는 임신이 가능한 여자들을 관리하고 조절하기 원합니다. 가상의 스팀펑크 도시 시청 역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종족 연인들이 늘어난다면, 안정적인 인구 관리는 불가능할 겁니다. 현실 속에서 국가 정부가 동성애 연인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스팀펑크 시청은 이종족 연인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마리 루티는 얼마나 자본주의 사회가 이성애 결혼을 숭배하고 동성애 연인을 힐난하는지 설명합니다. 스팀펑크 도시 역시 다르지 않을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결혼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여유가 있는 이성애 부부에게 결혼은 축복일 겁니다. 하지만 레즈비언 연인에게 결혼이 축복일까요? 가까운 결혼식장에 가보세요. 결혼식장은 온갖 아름다운 결혼 사진들을 늘어놓습니다. 온갖 아름다운 사진들 속에서 연인들은 키스하고, 포옹하고, 춤을 춥니다. 그들은 모두 이성애 부부입니다. 레즈비언 부부는 없을 겁니다. 사회 분위기는 레즈비언 부부를 축복하지 않습니다. 결혼이 정말 축복인가요? 하지만 결혼식장에서 레즈비언 연인은 축복과 함께 결혼하지 못합니다. 이건 이성애 부부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성애 부부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지배 계급입니다.
지배 계급은 오직 이성애 부부만이 신성하다고 우상화합니다. 연인에게 무조건 결혼할 이유가 없음에도, 연인이 무조건 이성애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지배 계급은 결혼과 이성애를 우상화합니다.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은 어떻게 지배 계급이 이성애 부부를 우상화하고 다른 연인들을 차별하는지 고발합니다. 어떤 사회에 자유로운 연애 문화가 있다고 해도, 그 사회가 압박을 받을 때, 자유로운 연애들은 사라질 겁니다. 과거에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자유로운 연애를 옹호했습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과 적백 내전과 2차 세계 대전 속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중산층 가족을 선택했고 자유로운 연애를 버렸습니다.
'악마와 싸우기 위해 인간이 악마가 된다'고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것처럼, 악마와 싸우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악마가 되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2차 세계 대전이 20세기 최고의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2차 세계 대전과 무관하게 존재했고 혼자 타락했다고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M78 성운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혼자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1차 세계 대전과 적백 내전과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것들에 맞서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악마가 되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짓누를 때, 사회주의는 노선에서 탈선하고 자유로운 연애를 버립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입니다.
스팀펑크 도시에서 린과 아이작 역시 폭력과 억압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취급 설명서>가 연인이 치료약이라고 예쁘게 노래한다고 해도, 이런 억압적인 사회에서 연인은 쉽게 치료약이 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양한 연인들을 갈망하기 때문에, 욕구가 솟구치기 때문에, 이런 감성은 억압적인 사회를 거부하고 싸우기 원할지 모릅니다.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은 연애 욕구가 솟구칠 때 사람들이 저항하고 싸우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연애는 치료약이고 동시에 각성제인지 모릅니다. 사랑할 때, 사람들은 각성하고 분노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