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쏘아올린 불꽃>과 노리미치의 시점 본문
[이 애니메이션은 두 연인을 이야기하나, 나즈나의 시점보다 노리미치의 시점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애니메이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는 타임 슬립을 가미하는 연애 이야기입니다. 두 고등학생 나즈나와 노리미치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특히, 나즈나는 노리미치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댑니다. 노리미치는 나즈나에게 그저 희미한 동경을 품었을 뿐이나, 나즈나는 노리미치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시도하기 원합니다. 노리미치는 저도 모르게 상황에 이끌리고 나즈나와 함께 도망칩니다. 만약 상황이 다급하지 않았다면, 노리미치가 나즈나와 함께 도망쳤을까요? 그걸 확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즈나가 도망치자고 말했을 때, 노리미치는 영문을 알지 못했고 꽤나 당황했습니다. 나즈나는 도망치자고 계속 눈치를 주었으나, 노리미치는 나즈나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나즈나는 노리미치에게 계속 이렇게 저렇게 신호들을 보내나, 노리미치는 왜 그렇게 나즈나가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노리미치는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쏘아올린 불꽃>이 연애 이야기라고 해도, 이 애니메이션 속에서 애정 표현은 다소 일방적입니다. 노리미치는 무덤덤하고 상황에 끌려가나, 나즈나는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게다가 가끔 나즈나는 노골적으로 노리미치를 유혹하는 것 같습니다. 정거장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노리미치에게 사복 차림을 보여줄 때, 전철에서 함께 살자고 권유할 때, 해변에서 수영할 때, 나즈나는 육체적인 접촉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암시가 나즈나를 성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즈나가 사복을 갈아입을 때, 천천히 카메라는 나즈나의 몸을 훑어봅니다. 구태여 그렇게 훑어볼 필요가 없음에도, 천천히 카메라는 나즈나를 훑어봅니다. 해변에서 나즈나가 겉옷을 벗을 때, 카메라는 다시 나즈나를 훑어봅니다. 비단 이런 장면들만 아니라 여러 장면들에서 <쏘아올린 불꽃>은 나즈나를 훑어봅니다.
이런 시선은 가부장적인 편견이고 폭력일지 모릅니다. 사실 <쏘아올린 불꽃>에는 성 희롱들이 있습니다. 남학생들은 여자 선생님의 가슴이 크다고 공개적으로 떠듭니다. 아무도 이런 행위를 탓하거나 말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여학생들 역시 이런 행위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노리미치 역시 이런 성 희롱을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노리미치는 성 희롱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으나, 성 희롱을 말리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쏘아올린 불꽃>은 이런 성 희롱들을 청춘의 낭만으로 포장합니다. 하지만 이건 청춘의 낭만이 아니라 범죄입니다. <쏘아올린 불꽃>에는 가부장적인 편견과 폭력이 있습니다.
<쏘아올린 불꽃>이 나즈나를 보여줄 때, 이런 시선 역시 가부장적인 편견과 폭력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나즈나가 노리미치에게 육체적인 접촉을 암시한다고 해도, 구태여 카메라가 나즈나의 몸을 훑어볼 이유는 없습니다. 나즈나와 달리, <쏘아올린 불꽃>은 노리미치의 몸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노리미치가 무슨 짓을 하든, 카메라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몇몇 장면에서 천천히 카메라는 나즈나를 훑어보나, 카메라는 노리미치에게 똑같이 렌즈를 들이대지 않습니다. <쏘아올린 불꽃>은 나즈나를 남자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남성 판타지를 자극하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관객들은 이런 장면들이 꽤나 불쾌하다고 느낄 겁니다. 물론 이런 장면들은 노리미치의 심리를 대변하는지 모릅니다. <쏘아올린 불꽃>에서 노리미치와 나즈나는 모두 주인공이나, 전반적으로 나즈나의 시선보다 노리미치의 시선은 훨씬 주도적입니다. 노리미치가 회상하는 장면에서 <쏘아올린 불꽃>은 시작합니다. 노리미치는 시간대를 거스를 수 있습니다. <쏘아올린 불꽃>은 타임 슬립 이야기고, 당연히 타임 슬립 이야기에서 시간 여행자는 주도적인 시선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나즈나에게는 타임 슬립 능력(물품)이 없고, 그래서 나즈나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시선을 많이 드러내지 못합니다.
<쏘아올린 불꽃>에서 노리미치보다 나즈나는 훨씬 적극적입니다. 하지만 타임 슬립 능력(물품)이 있기 때문에, 노리미치는 시간대를 거스르고 다양한 상황들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은 나즈나의 시선보다 노리미치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노리미치의 시선은 사건을 이끕니다. 노리미치 없이, 나즈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쏘아올린 불꽃>은 1인칭 시점이 아니나, 그렇다고 해도 나즈나의 시선보다 노리미치의 시선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건 타임 슬립 이야기에서 무조건 시간 여행자의 시선이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타마라 아일랜드 스톤이 쓴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 소설 화자는 시간 여행자가 아닙니다. 소설 화자는 시간 여행자를 바라봅니다. 시간 여행 능력이 없음에도, 소설 화자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소설 화자에게 시간 여행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설 화자는 시간 여행자가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소설 화자는 이런 상황이 답답하다고 느끼고,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독자들은 조바심이 난다고 느낄 테고,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은 긴장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 시간 여행자가 소설 화자였다면, 느낌은 꽤나 달라졌을 겁니다.
[노리미치가 바라보는 나즈나. 노리미치의 시점 때문에, <쏘아올린 불꽃>은 나즈나를 자세히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를 쓸 때, 작가는 시간 여행자에게 초점을 맞추거나 평범한 등장인물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작가가 시간 여행자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시간 여행자와 함께 독자는 다양한 시간대들을 거스를 테고, 다른 등장인물들보다 독자는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겁니다. NAC가 쓴 <2nd RING>에서 이카리 신지는 시간을 거슬렀고 다른 등장인물들보다 훨씬 많은 정보들을 압니다. 소설 <2nd RING>에서 이카리 신지는 미래를 예언할 수 있습니다. 이카리 신지는 예언자가 되고,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들은 예언자가 될 수 있고, 예언자로서 독자들은 사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만약 작가가 평범한 등장인물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소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처럼, 독자들은 애타게 시간 여행자를 바라봐야 할 겁니다. 소설 화자와 독자들은 똑같이 조바심을 낼 겁니다. "아니, 도대체 이 망할 시간 여행자가 어디로 사라졌지?" 소설 화자는 안타깝게 외칠 테고, 독자들 역시 그럴 겁니다. 이런 조바심은 긴장감을 놓치지 않을 테고, 소설은 훨씬 흥미로워질 겁니다. 아니면 츠츠이 야스타카가 쓴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작가는 시간 여행자의 시점을 이용하고 동시에 시간 여행자를 '상대적으로 평범한 등장인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시간 여행자의 시점. 평범한 등장인물의 시점. 훨씬 복합적인 시점. 무엇이 가장 좋을까요? 정답은 없을 겁니다. 이런 시점들은 서로 다른 분위기들과 재미들을 연출할 겁니다. 작가는 이야기와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시점을 고르고 싶겠으나, 정답은 없을 겁니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이 시간 여행자의 시점을 보여준다고 해도, <너에게 17년>은 재미있을지 모릅니다. <2nd RING>이 이카리 신지의 시점보다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의 시점을 보여준다고 해도, 이건 또 다른 재미가 될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쏘아올린 불꽃>은 시간 여행자의 시점을 골랐고, 시간 여행자 노리미치의 시점은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쏘아올린 불꽃>에서 카메라가 어떤 대상을 묘사하고 바라볼 때, 거기에는 노리미치의 시선이 있습니다. 노리미치가 또 다른 시간대를 거스를 때마다, 애니메이션 그림체는 살짝 바뀝니다. 노리미치가 계속 시간대들을 거스를 때, 색감은 훨씬 옅어집니다. 따라서 노리미치의 시선은 이야기를 전개하고, 카메라가 뭔가를 묘사할 때, 거기에는 노리미치의 시선이 있습니다. 노리미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카메라와 노리미치의 시선은 어느 정도 일치합니다. 이건 노리미치의 시선이 무조건 카메라 렌즈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노리미치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는 어느 정도 비슷해요.
창작물에서 시점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문'입니다. 창문에 따라 우리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창문이 빨간색이라면, 우리는 빨간 세상을 바라볼 겁니다. 창문이 녹색이라면, 우리는 녹색 세상을 바라볼 겁니다. 창문이 빨간색과 녹색이라면, 우리는 빨갛고 초록에 물든 세상을 바라볼 겁니다. 창작물에서 시점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후치 네드발이 이루릴 세레니얼을 예쁘다고 묘사할 때, 독자들은 반박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드래곤 위장에서 수소 가스가 터지는 헛소리야! 이루릴 세레니얼은 예쁘지 않아! 이루릴은 그저 평범한 우드 엘프 아가씨에 불과해! 하루 종일 이루릴이 숲 속을 싸돌아다닌다면, 이루릴은 낙엽들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닐 거야. 소설 <반지 원정대>에서 스트라이더를 봐. 스트라이더는 황야를 뒹굴고, 그래서 스트라이더는 지저분해. 다들 스트라이더가 남루하고 추레하다고 말하지. 이루릴 세레니얼 역시 마찬가지야. 우드 엘프로서 하루 종일 이루릴은 숲 속을 싸돌아다닐 거야. 하루 종일 숲 속을 싸돌아다님에도, 이루릴이 예쁠 수 있나?"
이렇게 어떤 독자는 반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는 후치 네드발의 시점을 이용해 <드래곤 라자>를 읽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드 엘프로서 이루릴 세레니얼은 정말 추레할지 모릅니다. 우드 엘프는 하이 엘프와 다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후치는 소설 화자이고, 후치의 시점은 소설 속의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한 유일무이한 창문입니다. 독자는 다른 창문, 다른 시점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후치가 이루릴이 예쁘다고 생각한다면, 독자는 그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창작물에서 시점은 등장인물, 사물, 사건, 배경을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야마모리 미카가 그린 <한낮의 유성>을 볼 때, 어떤 독자들은 마무라 다이키가 정말 멋지다고 말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시시오 사츠키가 정말 멋지다고 말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마무라와 시시오가 모두 멋지다고 말할 겁니다. 만화 <한낮의 유성>에서 사건을 전개하는 시점은 기본적으로 요사노 스즈메의 시점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마무라와 시시오를 볼 때, 독자들은 스즈메의 시점을 이용해 마무라와 시시오를 바라봅니다.
스즈메가 마무라와 시시오를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무라와 시시오는 멋질지 모릅니다. 어쩌면 마무라와 시시오는 별로 잘 생기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물론 가끔 <한낮의 유성>은 스즈메의 시점을 벗어나고 다른 시점들을 보여줍니다. 특히, 번외편에서 '스즈메의 시점이 없음에도' 시시오 사츠키는 정말 멋집니다. (솔직히 본편의 시시오보다 번외편의 시시오가 훨씬 멋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연애 만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얼굴을 붉힐 때, 모에도는 최대치를 때리지 않겠습니까. 마무라는 갭 모에의 현신일지 모릅니다.) 물론 <한낮의 유성>은 만화이고, 만화이기 때문에 <한낮의 유성>은 글자들보다 그림체에 치중합니다.
글자들보다 그림은 훨씬 시각적이고, 만화 주인공 스즈메의 시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시점은 존재하고, 독자들이 만화를 볼 때, 독자들은 어느 정도 스즈메의 시점을 이용합니다. 이렇게 <한낮의 유성>에서 독자들은 여러 시점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낮의 유성>의 시점과 <드래곤 라자>의 시점은 크게 다릅니다. <쏘아올린 불꽃>은 어떨까요? 위 문단이 말한 것처럼, <쏘아올린 불꽃>에서 카메라 렌즈와 노리미치의 시점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아아, 마무라의 저 눈빛과 홍조는 정말… 녹아내립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스즈메의 시점이 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천천히 카메라 렌즈가 나즈나의 몸을 훑어볼 때, 여기에도 노리미치의 시선이 있을 겁니다. 노리미치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가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에, 천천히 카메라 렌즈는 나즈나의 몸을 훑어보는지 모릅니다. 나즈나보다 노리미치가 작다고 해도, 노리미치가 무덤덤하게 상황에 끌려간다고 해도, 노리미치는 원기 왕성한 청춘입니다. 또래 소녀가 옷을 갈아입는다면, 노리미치는 평정심을 잃을지 모릅니다. 노리미치는 원기 왕성한 청춘이고, 나즈나를 바라볼 때, 노리미치는 나즈나의 몸을 완전히 거부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노리미치는 저도 모르게 나즈나의 몸을 의식할 테고, 카메라 렌즈는 그걸 반영할 겁니다. 그래서 카메라 렌즈가 나즈나를 비출 때, 카메라 렌즈는 나즈나의 몸을 훑어보는지 모릅니다.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이 아닐 겁니다. 분명히 <쏘아올린 불꽃>에는 가부장적인 편견과 폭력과 성 희롱 범죄가 있으나, 천천히 카메라 렌즈가 나즈나를 훑어볼 때,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보다 원기 왕성한 호기심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이 옳을까요? 아니면 이런 해석이 틀릴까요? 이런 해석에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시나리오 작가는 시점을 고민합니다. 시점에 따라 시나리오는 등장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완전히 다르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 렌즈가 나즈나를 훑어볼 때, 이게 가부장적인 편견일까요, 아니면 노리미치의 원기 왕성한 욕구일까요? 아니면 양쪽 모두?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이런 해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카메라 렌즈가 나즈나의 몸을 훑어볼 때,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노리미치의 욕구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양쪽 모두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다른 어떤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노리미치의 욕구이고, 카메라 렌즈에 가부장적인 편견이 없다고 해도, 어떤 관객들은 이런 장면들(카메라 렌즈가 나즈나를 훑어보는 장면들)이 불쾌하다고 느낄 겁니다. 창작물을 해석할 때 정답이 없음에도, 왜 어떤 관객들은 <쏘아올린 불꽃>이 불쾌하다고 느낄까요? 이유는 '현실'입니다.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가부장 문화는 온갖 폭력들과 차별들을 저지릅니다.
문학 평론에는 정답이 없을지 모르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가부장 문화에게 시달려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가부장 문화는 우리를 세뇌시키고 짓밟습니다. 따라서 <쏘아올린 불꽃>이 불쾌하다면, 관객들은 비단 애니메이션만 아니라 현실 속의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고 타파해야 할 겁니다.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을 비판할 때, 분명히 그런 비판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창작물은 그저 창작물, 픽션일 뿐이나, 창작물은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고, 만화를 보고, 연극을 관람하고,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우리는 이야기를 받아들입니다. '이야기'는 사회적인 관계들을 모방합니다. 이야기는 대리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이 지배적인 관념을 받아들인다면, 관객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대리 체험할 테고, 이런 과정은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할 겁니다.
하지만 창작물은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창작물은 존재합니다. 만약 관객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오직 창작물만 힐난한다면, 현실은 가부장적인 창작물들을 계속 쏟아낼 겁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바꾼다면, 가부장적인 창작물들 역시 사라질 겁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것일 겁니다. 관객들이 오직 창작물만 비난한다면,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겠죠.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쓴 츠츠이 야스타카는 이른바 '혐한'입니다. 그래서 어떤 남한 독자들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아주 미워해요. 하지만 아무리 남한 독자들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미워한다고 해도, 그건 피상적인 시각입니다. 그런 시각은 파쇼주의를 없애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파쇼주의를 용납하고 제국주의로 치닫습니다. 사실 남한 역시 미국 제국주의에 충성합니다. 남한 역시 제3세계 양민들을 학살했고 성 폭행했습니다. 자본주의는 파쇼주의를 용납했고, 세계 대전을 터뜨렸고, 그러는 동안 이른바 혐한들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정말 혐한들을 없애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없애야 할 겁니다. 급진적인 자유주의는 파쇼주의를 싫어하나, 결국 자유주의는 파쇼주의를 막지 못합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이미 인민 전선은 그걸 증명했습니다. 결국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뒷통수를 거하게 때리고 파쇼주의에 붙을 겁니다. 따라서 현실을 바꾸고 싶을 때, 우리는 자유주의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하루 종일 남한 독자들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노려본다고 해도, 그저 남한 독자들의 애꿎은 두 눈만 고생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