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을 생산하는 생산 조건들

10월 21일이 무슨 날일까요? 사람들은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을 읊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SF 팬들은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드로이드가 10월 21일로 시간 여행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SF 팬들은 10월 21일이 '드로이드의 날'이라고 주장할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10월 21일은 누군가의 생일일 수 있습니다. 10월 21일은 아야세 에리의 생일입니다. 그래서 아야세 에리를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생일 선물들을 사고, 생일 케이크들을 사고, 인증샷들을 찍습니다. 달력 날짜가 10월 21일이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은 아야세 에리에게 환호들을 보냅니다.

문제는 아야세 에리가 허구적인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야세 에리는 <러브 라이브>의 등장인물입니다. <러브 라이브>는 아이돌 프로젝트입니다. <러브 라이브> 팬들은 리듬 게임들이나 애니메이션들로 아이돌 스타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야세 에리는 뮤즈라는 아이돌 걸 그룹에 속했습니다. 아야세 에리는 진짜 인간이 아닙니다. 아야세 에리는 캐릭터입니다. 캐릭터를 위해, 허구적인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야세 에리를 위해 <러브 라이브> 팬들은 생일 선물들을 사고, 생일 케이크들을 사고, 인증샷들을 찍습니다. 어떤 팬은 직접 맛있는 초코 케이크를 만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팬들이 맛있는 초코 케이크를 만든다고 해도, 아야세 에리는 한 입조차 먹지 못합니다. 아야세 에리가 허구적인 등장인물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야세 에리가 초코 케이크를 먹지 못함에도, <러브 라이브> 팬들은 초코 케이크들을 만들고 인증샷들을 찍습니다. 이런 행위에 가치가 있나요? 아야세가 케이크를 먹지 못함에도, 왜 <러브 라이브> 팬들이 케이크를 만들어야 하나요? 하지만 <러브 라이브> 팬들은 이게 <러브 라이브>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말할 겁니다. <러브 라이브> 팬들은 노래를 듣거나, 리듬 게임을 플레이거나, 애니메이션을 시청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허구적인 등장인물을 진짜 등장인물이라고 간주하고 아야세를 위해 케이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러브 라이브> 팬들이 미치광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허구적인 등장인물을 위해 팬들이 케이크를 만들기 때문에, 아야세가 한 입조차 먹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러브 라이브> 팬들이 미치광이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역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플레이할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이 허구임에도, 이런 사람들 역시 소설에 빠지고 안타까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즐거워할 겁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자살 열풍을 일으키는 것처럼, 사람들은 허구에 푹 빠질 수 있습니다.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는 도시 전설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애절하다고 해도, 청춘들은 자살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베르테르 효과는 창작물이 허구임에도 인간이 창작물에 푹 빠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소설을 읽거나 만화를 보거나 영화를 관람하거나 TV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즐거워합니다. 사람들은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허구에 감성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허구에 감성을 이입할 수 있다면, 왜 허구를 위해 우리가 다른 행위들을 시도하지 말아야 합니까?

사람들이 허구를 향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허구를 향해 생일 케이크를 내밀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동안, 독자가 샤를로테를 그저 허구에 불과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것처럼, 생일 케이크를 만들고 인증샷들을 찍는 동안, <러브 라이브> 팬들은 아야세 에리가 그저 허구에 불과하지 않다고 간주합니다. 양쪽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독자가 샤를로테를 바라볼 때, <러브 라이브> 팬은 아야세 에리를 바라봅니다. 사실 <러브 라이브> 팬들은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아야세 에리가 진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아이돌 프로젝트를 즐길 뿐입니다.

<러브 라이브> 팬들은 아야세 에리가 허구적인 등장인물이라고 인식합니다. <러브 라이브> 팬들이 생일 초코 케이크를 만들 때, 사실 아야세 에리를 위해 팬들은 초코 케이크를 만들지 않습니다. 아이돌 프로젝트를 즐기기 위해 그들은 생일 케이크를 만듭니다. <러브 라이브> 팬들이 생일 케이크를 만들 때, 독자들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을 때, 양쪽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습니다. 양쪽 모두 허구가 현실이 아니라고 인식합니다. 현실 속에서 양쪽 모두 허구에 감정을 이입하고 허구를 즐깁니다. 하지만 괴테 독자들은 별로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반면, <러브 라이브> 팬들은 미치광이라고 비난을 받을지 모릅니다. <러브 라이브> 팬들이 생일 케이크와 함께 인증샷들을 찍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게 미친 짓거리라고 말할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왜 괴테 독자들이 비난을 받지 않음에도, <러브 라이브> 팬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나요? 양쪽 모두 그저 허구를 즐길 뿐임에도, 괴테 독자들은 낭만적이고 고급스러운 문학 취향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러브 라이브> 팬들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씹덕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분명히 <러브 라이브>에는 씹덕 요소가 있습니다. <러브 라이브>는 성 상품들을 양산합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가 결합할 때,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언제나 성 상품들을 양산합니다. 씹덕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래서 <러브 라이브>가 씹덕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나요?

어떤 사람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고급스러운 문학 방법이 있다고 말할 겁니다. 애니메이션 <러브 라이브>에는 그게 없습니다. 아야세 에리 카드 그림에는 고급스러운 문학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고전 소설(클래식)이 되고, <러브 라이브>는 하위 문화 애니메이션(서브 컬쳐)가 됩니다. 하지만 아야세 에리 카드 그림에는 그림체가 있습니다. 카드 그림에는 여러 색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그림들을 그릴 수 있습니까? 이렇게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아야세 에리를 그릴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괴테는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괴테에게는 멋진 글솜씨가 있을지 모르나, 괴테는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적어도 괴테는 아야세 에리를 그리지 못할 겁니다. 아야세 에리 그림은 산뜻하고 예쁩니다. 씹덕질을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 그림체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아야세 에리 그림에는 산뜻하고 예쁜 가치가 있습니다. 왜 이런 산뜻하고 예쁜 그림보다 괴테의 글솜씨가 훨씬 고급스럽습니까? 누가 그걸 정했습니까? 왜 문학 평론가들이 산뜻하고 예쁜 그림보다 괴테의 글솜씨를 추켜세웁니까? 왜 그들이 문학 평론가들입니까? 누가 문학 평론가들을 지정했습니까? 누군가가 문학 평론가들을 지정했을 때, 그 사람에게 어떤 절대적이고 무소불위한 권위가 있었습니까? 여전히 그 권위가 유효합니까? 그 권위가 유효하기 때문에, 아야세 에리 그림이 하위 문화가 되어야 합니까?

요한 볼프강 폰 괴테처럼, 고전 문학 작가들은 서구 백인 남자 작가들입니다. 세계 고전 문학들을 둘러본다면, 우리는 빅토르 위고, 오노레 드 발자크, 기 드 모파상,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리앙리 벨 스탕달, 샤를 보들레르,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볼테르,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서구 백인 남자 작가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아망틴 뤼실 오로르 뒤팽(조르주 상드)이나 에밀리 브론테나 제인 오스틴 같은 여자 작가들은 없지 않으나, 이런 여자 작가들조차 서구 문명에 속했습니다. 왜 우리가 서구 작가들을 세계 고전 문학 작가들이라고 말하나요? 유럽이 세계를 대표하지 않음에도, 왜 우리가 서구 고전 문학을 세계 고전 문학이라고 말하나요? 왜 북아메리카 인디언 문학과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 문학이 세계 고전 문학이 되지 못하나요?

"영국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는다." 이건 꽤나 유명한 문구입니다. 사실 이건 왜곡된 문구입니다. 원래 이 문구는 "언젠가 영국은 인도를 잃겠으나, 셰익스피어를 잃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이건 문학이 영원하다고 옹호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도 인민들보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 열등한 인도 갈둥이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생각합니까? 정말 그 자체로서 세계 고전 문학이 세계 고전 문학입니까? 세계 고전 문학에 어떤 절대적이고 무소불위한 영원성이 있습니까? 선험적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 절대적인 위대함이 있습니까? 왜 그 위대함이 존재하나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세계를 장악했기 때문에 우리는 유럽을 숭배하고 유럽 문학을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뷔시의 <달빛>을 들을 때, 우리는 그게 클래식이고 인상주의라고 운운합니다. 하지만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이 훌라를 출 때, 우리는 그게 그저 원시적인 춤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상주의 음악은 고전 예술이 될 수 있으나, 오세아니아 훌라는 예술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문학 사조를 따질 때, 우리는 르네상스, 계몽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형식주의, 모더니즘,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운운합니다. 왜 우리가 이런 문학 사조를 따질까요?

북아메리카 인디언 문학이 낭만주의에 속하나요?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 문학이 형식주의에 속하나요? 이슬람 문학이 모더니즘에 속하나요? 사실 르네상스, 계몽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형식주의, 모더니즘,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운운할 때, 우리는 유럽 중심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르네상스부터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문학 사조는 서구 문명에서 비롯합니다. 문학 사조가 서구 문명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서구 제국주의가 세계를 폭력적으로 장악했기 때문에, 우리는 드뷔시의 <달빛>이 클래식 예술이라고 칭송하고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주술을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창작물에는 어떤 절대적이고 무소불위한 영원성이 없습니다. 그런 것 따위는 없습니다. 창작물은 사회적으로 나타납니다. 사회 구조가 유럽을 숭배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창작물 평론 역시 유럽을 숭배합니다. 사회 구조가 가부장 문화에 충성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러브 라이브>는 씹덕질로 이어집니다. 사회 구조가 씹덕질을 양산한다면, 당연히 성 해방 운동은 비단 창작물만 아니라 사회 구조를 깨뜨려야 합니다. 아무리 여성 단체들이 <러브 라이브>를 비판한다고 해도, 여성 단체들이 가부장적인 사회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씹덕 사회 구조는 계속 씹덕 상품들을 양산할 테고, 남성 소비자들은 계속 씹덕질에 빠질 겁니다.

하지만 여성 단체들, 안락하고 1차원적인 페미니스트들, 온건 좌파들은 절대 사회 구조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러브 라이브>만을 헐뜯을 뿐이고 사회 구조를 뒤집지 않습니다. 그래서 씹덕 사회 구조는 계속 씹덕 상품들을 양산할 수 있습니다. 성 폭행이 장난입니까? 성 폭행이 만만하고 재미있습니까? 성 폭행이 그저 재미있고 신나는 학술 담론에 불과합니까? 창작물은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씹덕 성 상품들 역시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왜 창작물 비평이 사회 구조가 아니라 오직 몇몇 성 상품만 헐뜯습니까? 이게 근본적인 비평입니까?

창작물에 어떤 절대적이고 무소불위한 영원성이 없기 때문에, 창작물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창작물은 선험적이지 않고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창작물이 선험적이지 않기 때문에, 창작물을 덕질하는 행위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덕후들과 덕질들은 선험적이지 않고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창작물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작물이 나타날 때, 창작물에는 '생산 조건들'이 있습니다. '생산 조건들' 때문에 창작물은 나타납니다. 어떤 고립되고 독립적인 차원에서 <러브 라이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머나먼 7차원 세계에서 아야세 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속에서, 이런 '생산 조건들' 속에서 <러브 라이브>와 아야세 에리는 존재합니다. 다른 생산 조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사 덕후가 아리카와 히로가 쓴 <바다 밑>을 평가할 때, 이런 평론은 군사 덕질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 <바다 밑>에 해상 자위대 잠수함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다 밑>에는 해상 자위대 잠수함과 함께 연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상 자위대 잠수함 장교와 어떤 여자 고등학생은 서로 좋아합니다. <바다 밑>에는 오직 잠수함 이야기만 있지 않습니다. 만약 군사 덕후가 이런 것들을 언급한다면, 이게 군사 덕질이 될 수 있을까요?

소설 <바다 밑>은 잠수함 설명서가 아닙니다. <바다 밑>은 소설이고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잠수함이 있고, 동시에 여기에는 해자대 장교와 여고생과 풋풋한 연애가 있습니다. 군사 덕질을 위해 군사 덕후는 잠수함에 주목하고 풋풋한 연애를 버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잠수함 속에서 장교와 학생이 연애하기 때문에, 군사 덕후는 이런 부분에 주목할지 모릅니다. 만약 군사 덕후가 <바다 밑>의 구성과 문체와 시점과 등장인물 성격들을 언급한다면, 이게 군사 덕질이 될 수 있을까요? 왜 군사 덕질이 소설 시점과 문체에 상관해야 합니까? 하지만 많은 군사 덕후들은 밀리터리 SF 소설들을 읽고 소설 시점과 문체와 구성을 이야기합니다.

JoySF 같은 SF 동호회에서 회원들은 그런 것들을 논의합니다. 종종 이건 군사 덕질과 문학 평론을 건너뜁니다. 이게 군사 덕질인가요? 아니면 이게 문학 평론인가요? 군사 덕후가 정말 군사 덕후인가요? 왜 JoySF 같은 SF 동호회에서 군사 덕후가 떠드나요? 왜 군사 덕후가 국방부에 들어가지 않고 SF 동호회를 찾아가나요? 왜 군사 덕후들이 <월드 오브 워쉽>이나 <워해머 40K> 같은 게임들에 열광합니까? 이것들은 현실이 아닙니다. 아무리 <월드 오브 워쉽>에서 일본 제국 어뢰 구축함이 멋지게 나온다고 해도, 이건 그저 게임에 불과합니다. 군사 덕후가 <월드 오브 워쉽>을 플레이한다고 해도, 이게 군사 덕질이 될 수 있나요?

창작물처럼, 덕질에는 생산 조건들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사회 구조 속에서, 덕후들은 덕질합니다. 현실과 사회 구조는 덕질을 생산합니다. 현실 속에서 덕후들은 인간입니다. 인간들은 이야기를 즐깁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생산했습니다. 덕후들 역시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덕후들은 이야기들을 즐깁니다. 군사 덕후들은 군사적인 것들이 나오는 이야기들을 즐깁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군사는 군사가 아닙니다. 군대는 엄청난 비용을 요구합니다. 사회 구조가 엄청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때, 군대는 나타납니다. 우리는 군대를 다른 사회적인 요소들과 떼어놓지 못합니다.

양산형 판타지 소설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100만 대군이 뚝 떨어진다고 묘사하나, 군사 덕후들은 이런 양산형 판타지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대군을 양성하기 위해 인류 사회는 복잡하고 거대해져야 합니다. 당연히 인류 사회가 복잡하고 거대해질 때, 여기에는 수많은 사회적인 요소들이 있을 겁니다. 군사 이야기는 그런 것들을 함께 언급합니다. 군대가 사회에서 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군사 이야기 역시 사회적인 요소들을 함께 언급합니다. 그래서 군사 덕질은 다른 덕질들로 확장하거나 넘어갈 수 있습니다. 군사 덕후가 소설 <바다 밑>을 읽을 때, 군사 덕후는 잠수함 이야기와 함께 풋풋한 연애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군사 이야기를 비롯해 수많은 이야기들은 언어를 동원합니다. 게임 <워해머 40K>는 스페이스 마린을 묘사합니다. 아니, 잠깐. 스페이스 마린? 우주 해병? 왜 우주 해병이 해병입니까? 우주 해병들이 바다에 잠수합니까? 아니, 그들은 바다에 잠수하지 않습니다. 우주 해병들이 스페이스 헐크에 강습하고 진 스틸러들과 박 터지게 싸운다고 해도, 우주 해병들은 바닷물 한 방울조차 구경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왜 그들이 해병(海兵)입니까? 바다에서 그들이 싸우지 않음에도, 왜 그들이 해병이 되어야 합니까? 이야기가 언어를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워해머 40K>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미래를 묘사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아직 우주 군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주 군대를 묘사하기 위해 밀리터리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 속의 해군과 해병대를 과장해야 합니다. 미래를 묘사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의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단 해병만 아니라 수많은 단어들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단어들은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단어들은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단어들은 창작물을 위한 구성 요소들입니다. 인류 사회는 이런 구성 요소들을 만듭니다.

게임 <워해머 40K>는 그저 미래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워해머 40K>는 현실과 사회 구조에서 파생합니다. 이렇게 창작물과 덕질에는 생산 조건들이 있습니다. 생산 조건들은 창작물과 덕질을 생산합니다. 창작물과 덕질은 선험적이지 않고, 고정적이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고, 영원불멸하지 않습니다. 창작물과 덕질은 생산됩니다. 창작물과 덕질이 생산되기 때문에, 창작물과 덕질을 구분하기 위한 정확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창작물과 덕질은 얼마든지 늘어나고, 줄어들고, 사라지고,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수많은 독자들을 울렸습니다. <베르사유의 장미>를 읽은 이후, 어떤 독자들은 프랑스 혁명 역사를 탐구하기 원할 겁니다.

만화가 정말 감동적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만화 시대 배경을 자세히 알기 원할 겁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가 <인간 희극>을 쓴 것처럼, 만약 만화 독자들이 공화주의 혁명이나 파리 코뮌을 연구한다면, 이게 만화 덕질일까요, 역사 공부일까요? 이건 만화 덕질이고, 역사 공부이고, 동시에 두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유럽 왕당파, 계몽주의, 시민 혁명, 근대적인 진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19세기 유럽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19세기 유럽이 있기 때문에,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유의 장미>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19세기 유럽(왕당파, 계몽주의, 시민 혁명, 근대적인 진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은 생산 조건입니다. 만화 독자가 공화주의 혁명을 연구할 때, 만화 독자는 '생산 조건'을 연구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덕질하고 싶다면, 우리는 창작물과 덕질이 파생하는 생산 조건들을 고민해야 합니다. 여기 <SF 생태주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이 블로그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게 빨갱이 짓거리라고 말할 겁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 역시 물어볼지 모릅니다. "아니, 왜 생태학 SF 덕질이 마르크스주의를 말해야 하나?" 하지만 왜 <러브 라이브> 팬이 아야세 에리의 생일 케이크를 만드나요? 왜 군사 덕후가 <워해머 40K>를 플레이하나요? 왜 <베르사유의 장미>를 읽은 이후, 만화 독자들이 공화주의 혁명을 연구하나요?

왜 아이콘(iKON) 덕후들이 그저 노래만을 듣지 않고 아이콘 브로마이드를 삽니까? 아이콘 브로마이드가 없다고 해도, 얼마든지 덕후들은 노래 <사랑을 했다>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B.I의 멋진 사진을 구경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랑을 했다>는 좋은 노래입니다. 하지만 덕후들은 <사랑을 했다>를 흥얼거리며 B.I의 멋진 브로마이드를 구입합니다. 이게 덕질이 아닐까요? 어디에서 어디까지 덕질이 될까요? 아이콘이 아니라 위너가 <사랑을 했다>를 불렀다면, 이런 <사랑을 했다>가 (현실 속에서 우리가 듣는) <사랑을 했다>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 아이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정말 위너가 <사랑을 했다>를 부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위너와 아이콘이 한 지붕 두 가족이라고 해도, 아이콘이라는 생산 조건 없이, <사랑을 했다>가 가능합니까? 게다가 어떻게 YG 엔터테이먼트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무슨 현실과 사회 구조 속에서 YG 엔터테이먼트가 존재하고 위너와 아이콘을 생산했습니까? 어떤 고립된 차원 속에서 YG 엔터테이먼트가 스스로 존재하나요? 흔히 사람들은 현실과 사회 구조를 부정하고 고립된 차원 속에서 어떤 현상이 존재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힐난합니다. 하지만 정말 고립된 차원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고고하게 존재했습니까? 그건 헛소리입니다.

덕질은 선험적이지 않습니다. 특정한 생산 조건들은 덕질을 생산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덕질하고 싶다면, 우리는 덕질을 생산하는 생산 조건들에 주목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