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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레아를 논의하다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레아를 논의하다

OneTiger 2019. 4. 3. 19:10

영화 <스타 워즈> 시리즈에서 레아 공주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다양합니다. 어떤 관객들은 레아 공주가 전형적인 공주에서 벗어났다고 호평합니다. 다른 많은 공주들처럼, 영화 <새로운 희망>에서 레아는 붙잡힌 공주입니다. 악마(다스 베이더)는 공주(레아)를 납치했고 성(데스 스타)에 가두었습니다. 영웅(루크 스카이워커 일행)들은 성(데스 스타)에 들어아고 공주(레아)를 구합니다. 하지만 영웅들이 공주를 구한다고 해도, 공주는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레아는 적극적으로 스톰 트루퍼들과 싸우고, 한 솔로에게 투덜거리고, 츄바카가 걸어다니는 양탄자라고 쏘아붙입니다.


레아는 단순한 공주보다 반란군(혁명군)을 이끄는 지도자입니다. 일반적으로 반반한 얼굴과 높은 신분으로서 공주는 영웅들을 위한 전리품이 되나, 레아는 이런 전리품 역할에서 벗어났습니다. 속편 <제다이의 귀환>에서 레아는 훨씬 전형적인 공주 역할에서 벗어납니다. 하지만 유명한 황금 비키니처럼, 레아에게는 남성 판타지가 있습니다. 영화 <제다이의 귀환>에서 레아의 비키니 복장은 남성 판타지로 흘러가고, 남성 판타지와 레아는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펄프 SF 잡지들은 흉측한 외계인이 벌거벗은 여자를 납치하는 여러 남성 판타지들을 그렸습니다. 레아 역시 이런 관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바 헛은 흉측한 외계인이고, 레아는 벌거벗은 여자입니다. 자바 헛과 사로잡힌 레아는 비대한 노예 주인과 유혹적인 성 노예 같습니다. 어쩌면 감독 조지 루카스는 정말 이런 관례(펄프 SF 잡지들이 그리는 남성 판타지)를 따르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조지 루카스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이런 장면을 집어넣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지 루카스가 레아에게 남성 판타지가 없다고 부인한다고 해도, 누가 조지 루카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 적이 있나요?


조지 루카스가 진실을 말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요? 아무리 조지 루카스가 남성 판타지를 부정한다고 해도, 이건 거짓말일지 모릅니다. 사회적인 비난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조지 루카스는 형식적으로 거짓말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조지 루카스는 자기 자신을 속였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레아를 남성 판타지로 만들기 위해 조지 루카스는 자신을 기만했고 속였을지 모릅니다. 관객들은 조지 루카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조지 루카스가 많이 인터뷰했다고 해도, 조지 루카스가 진실을 말했는지 관객들은 판단하지 못합니다. 관객들은 그저 영화 <스타 워즈> 시리즈를 관람할 뿐입니다. 관객들은 영화로서 영화를 판단해야 합니다.



작가는 소설을 쓰고, 감독은 영화를 찍고, 프로그래머는 게임을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설과 영화와 게임을 평가할 때, 작가와 감독과 프로그래머는 필수적이고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사람들이 작가와 감독과 프로그래머를 참고한다면, 사람들은 소설과 영화와 게임을 훨씬 쉽게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작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감독이 진실을 말했는지 완벽하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게임 프로그래머가 속내를 숨긴다고 해도, 어떻게 사람들이 속내를 자세히 알 수 있나요? '한 길 사람 속을 알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인간의 심리 속으로 완벽하게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현실에 나타난 사물을 파악할 뿐입니다.


작가와 감독과 프로그래머는 필수적이고 중요한 기준이나, 그들은 완벽하고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작가보다 소설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감독보다 영화를 믿어야 하고 프로그래머보다 게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정치인보다 정책에 투표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작가와 감독과 프로그래머보다 소설과 영화와 게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정책보다 정치인을 지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설과 영화와 게임보다 작가와 감독과 프로그래머를 믿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믿고, 인간을 응원하고, 인간을 미워하기 원합니다. 아이돌 안티들이 아이돌 가수의 공연보다 아이돌 가수의 인간성을 따지는 것처럼, 우리는 창작물보다 작가를 따지기 원합니다.



조지 루카스가 레아에게 남성 판타지가 없다고 말한다면, 관객들은 그걸 믿을 겁니다. <스타 워즈> 덕후들은 훨씬 그걸 믿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감독의 발언과 영화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조지 루카스는 <제다이의 귀환>을 만들었으나, 조지 루카스는 <제다이의 귀환>이 아닙니다. 영화 <제다이의 귀환>은 조지 루카스의 사상과 심리를 모두 반영하지 않습니다. <제다이의 귀환>을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은 조지 루카스보다 조지 루카스가 만든 영화를 봅니다. 관객들은 조지 루카스보다 조지 루카스가 만든 영화를 판단해야 합니다. <제다이의 귀환>은 벌거벗은 성 노예처럼 레아를 묘사했고, 레아는 남성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뭐라고 조지 루카스가 의도했든, 분명히 <스타 워즈> 시리즈에서 레아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레아는 전형적인 공주보다 반란군 지도자입니다. 동시에 레아는 벌거벗은 성 노예 같습니다. 그래서 레아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크게 갈라집니다. 어떤 관객들은 반란군 지도자로서 레아를 바라볼 테고, 어떤 관객들은 벌거벗은 성 노예로서 레아를 바라볼 겁니다. 어떤 관객들은 양쪽을 모두 거부할지 모르고, 어떤 관객들은 양쪽을 모두 옹호할지 모릅니다. 평소에 어떤 관객이 레아를 반란군 지도자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그 관객에게 남성 판타지가 필요할 때, 그 관객은 남성 판타지로서 레아를 소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관객은 <스타 워즈> 시리즈가 백인 남자 영웅을 추구한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레아가 반란군 지도자라고 해도, <스타 워즈> 시리즈에서 중점은 백인 남자 영웅입니다. <스타 워즈> 시리즈는 백인 남자 영웅 루크 스카이워커가 강력한 백인 남자 악당 다스 베이더를 쓰러뜨리는 과정입니다. 가장 중요한 뼈대는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입니다. 관객들이 루크 스카이워커를 둘러싼 다른 등장인물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남자들입니다. 오비완 케노비는 남자이고, 한 솔로는 남자입니다. 랜도 칼리시안은 백인이 아니나, 남자입니다. 요다와 츄바카는 인간이 아니나, 양쪽 모두 남자입니다. C-3PO 역시 남자 로봇(드로이드)입니다. 제국 황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레아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스타 워즈> 시리즈는 남자 영화, 가부장적인 영화입니다. 레아는 반란군 지도자이고 전쟁을 지휘합니다. 하지만 반란군이 제국을 이기고 공화국을 만든다고 해도, 공화국에 성 차별들이나 성 폭행들이 없을까요? 영화 <스타 워즈> 시리즈에서 반란군은 자유주의 공화국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자유주의 공화국들이 얼마나 많은 성 차별들을 조장하는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제국이 사라지고 새로운 공화국이 나타난다고 해도, 여자들은 계속 성 폭행들에 시달릴 겁니다. 새로운 공화국에서 여자들은 계속 피지배 계급이 될 테고 피해자들이 될 겁니다.



왜 자유주의 공화국에서 여자들이 피지배 계급이 되나요? 자유주의 공화국에서 가장 지배적인 경제 현상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새로운 희망>, <제국의 역습>, <제다이의 귀환>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자세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지배적인 체계는 자본주의 체계입니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반란군이 새로운 공화국을 만든다면, 그건 자유주의 공화국이 될 겁니다. 수많은 관객들은 반란군이 빨갱이 공화국을 만들 거라고 예상하지 않을 겁니다.


파리 코뮌에서 가난한 여자들은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를 외쳤으나, 코루스칸트 도시에서 시민들은 사회주의 공화국을 외치지 않을 겁니다. 숱한 블록버스터들이 그러는 것처럼, 코루스칸트 시민들은 그저 자유만을 외칠지 모릅니다. 영화 <시스의 복수>에서 오비완 케노비가 민주주의를 외쳤을 때, 그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였을 겁니다. 만약 정말 새로운 공화국이 자유주의 공화국이 된다면, 새로운 공화국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할 테고, 자본주의 속에서 여자들은 피지배 계급이 될 겁니다. 자본주의는 여성적인 노동을 착취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는 온갖 돌봄 노동들에 댓가를 지불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온갖 돌봄 노동들에 댓가를 지불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제대로 이윤을 축적하지 못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여자들이 싸구려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기 원합니다. 여자들이 싸구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될 때, 자본가 계급은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윤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숱한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은 죽어나갑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했을 때, 여자 노동자들은 이런 죽어나가는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기리기 원했습니다.



여러 페미니즘 지식인들은 돌봄 노동들이 중요하다고 외치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돌봄 노동들에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남성적인 노동(대규모 산업, 전쟁, 학살)을 중시합니다. 유럽 문명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식민지를 수탈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수탈 없이, 자본주의는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폭력적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계속 폭력을 강조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온갖 방법들로 폭력을 강조합니다. 학교 교육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폭력을 가르칩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절대 돌봄 노동들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역사 수업 시간에 역사 선생님들은 어떻게 민중들이 연대하고 서로 돌보고 공유지를 주장하고 침략과 전쟁과 학살에 저항했는지 가르치지 않습니다. 역사 선생님들은 이런 것들보다 어떻게 남자들이 남성적인 노동으로 인류 문명을 세웠는지 이야기합니다. 비디오 게임 <문명 5> 초반 동영상을 보세요. <문명 5> 동영상에서 늙은 남자는 젊은 남자에게 이야기합니다. 늙은 남자는 건장한 남자 바이킹, 거대한 피라미드, 웅장한 성벽과 사원, 일본 병사들의 전쟁을 보여줍니다. 늙은 남자, 젊은 남자, 침략, 대규모 산업, 전쟁. 결국 인류 문명은 이런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여자들과 여성적인 노동들(돌봄, 간호, 저항, 치유)이 없습니다.



폭력적인 사회 속에서 어린 학생들은 폭력을 배웁니다. 어린 학생들은 폭력이 인류 문명을 만든다고 배웁니다.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은 폭력을 배우고, 학교 밖에서 어린 학생들은 폭력적인 사회를 봅니다. 어린 학생들이 폭력에 노출되고 폭력을 본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제도권 교육은 자본주의 노예들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제도권 교육이 계속 임금 노예들을 공급한다면, 어린 학생들이 삐뚤어지거나 사고를 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부르주아 지식인들 역시 학교 교육이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그저 몇몇 교육 정책을 따지거나 윤리와 도덕을 언급할 뿐입니다. 그들은 사회 구조가 여성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학교 교과서들이 여성적인 노동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가 자본주의적인 임금 노동(남성적인 노동)들보다 여성적인 돌봄 노동들을 중시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여성적인 노동들에 댓가들을 지불해야 할 겁니다. 자본가 계급은 제대로 이윤을 축적하지 못할 겁니다.


"아오, 존나 씨발, 왜 우리가 집구석에서 애들이나 처보는 씨발년들에게 댓가를 지불해야 해?" 이렇게 숱한 자본가들은 불평할 겁니다. 여성적인 노동들이 노동력들을 낳고 먹이고 키우고 사회적인 재생산에 이바지함에도, 너무 현명하고 고매하신 숱한 자본가들께서는 이런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십니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이런 자본가 계급을 열심히 편듭니다. 부르주아 지식인들 역시 너무 현명하시고 고매하십니다. 부르주아 지식인들께서는 정말 대단하시고 멋지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페미니즘 지식인들의 비판을 들어처먹으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학교 폭력들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학원 폭력 만화에서 학교 일진들이 욕지거리를 씹고 싸움을 벌일 때, 만화 독자들은 학교 폭력들이 문제라고 걱정할 겁니다. 하지만 만화 독자들은 그저 학교 폭력들이 문제라고 피상적으로 걱정할 뿐입니다. 만화 독자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오직 남성적인 노동들만 중시한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만화 독자들은 학교 교육들이 폭력을 가르친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폭력적인 사회는 폭력적인 교육을 만들고, 폭력적인 교육은 온갖 학교 폭력들을 만듭니다. 만화 독자들은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미 제도권 교육 속에서 만화 독자들 역시 폭력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폭력적인 교육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평등한 관계보다 무한 경쟁과 임금 노예를 찬양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폭력적인 교육이 구조적인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이 성 폭행 피해자들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건 이상한 현상일 겁니다. 영화 <스타 워즈> 시리즈는 어떨까요? <스타 워즈> 시리즈가 이런 것들을 비판하나요? 레아 공주가 이런 것들을 비판하나요? 아니, 레아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영화 <스타 워즈> 시리즈는 그저 루크 스카이워커를 비롯해 숱한 남자들을 보여줄 뿐입니다. 제도권 교육이 임금 노예들을 폭력적으로 양산한다고 해도, <스타 워즈> 시리즈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영화 <제다이의 귀환>은 왜 학교 일진들이 나타나는지 분석하지 않아요.



이건 <스타 워즈> 시리즈가 무조건 여성적인 노동을 응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제다이의 귀환>이 왜 학교 깡패들이 나타는지 분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작물에게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창작물은 얼마든지 현실을 왜곡하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 레아는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현실에는 레아가 없습니다. 현실에는 밀레니엄 팔콘과 시스와 광검이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레아가 무슨 짓을 하든, 그건 그저 영화 속의 줄거리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레아보다 '레아를 바라보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레아를 바라볼 때, 레아는 존재합니다.


<스타 워즈> 시리즈는 영화이고, 영화는 관객들을 요구합니다. 관객들이 <스타 워즈> 시리즈를 관람할 때, 레아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는 레아가 없으나, 현실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관객들은 <스타 워즈> 시리즈를 관람하고 레아를 인식합니다. 이렇게 레아는 존재합니다. 문제는 현실이 초역사적이지 않고 초문명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은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입니다.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관객들은 레아를 바라봅니다.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현실은 관객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현실에게 영향을 받은) 관객들은 레아를 바라봅니다.



따라서 관객들은 오직 레아만을 논의해서는 안 될 겁니다. 어떤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상황 속에서 레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레아를 바라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학교 깡패들을 양산하고, 이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레아를 바라봅니다. 제도권 교육 속에서 아이들은 폭력적으로 임금 노예들이 되고, 이런 아이들은 레아를 바라봅니다. 폭력적인 제도권 교육 속에서 어린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 보지 구멍을 찢어버린다고 욕합니다. 어린 학생들이 보지 구멍을 찢어버린다고 욕하는 사회 속에서 관객들은 영화 <제다이의 귀환>을 관람합니다.


문제는 비단 <제다이의 귀환>만이 아니라 <제다이의 귀환>을 비롯해 관객들과 사회 구조입니다. 영화 <스타 워즈> 시리즈에서 레아가 정말 전형적인 공주가 아닌가요? 아니면 레아가 남성 판타지로 이어져야 하나요? 여기에는 여러 논란들이 있습니다. 관객들은 정답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문학 평론가들 역시 확신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창작물이고 설명서가 아닙니다. 창작물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영화 <스타 워즈>에서 레아는 전형적인 공주가 아니거나 전형적인 공주일 수 있습니다. 영화 <스타 워즈>는 벌거벗은 성 노예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창작물이 다양한 해석들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셰익스피어 희곡 <오셀로>는 흑인이 불쌍하다고 동정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오셀로>는 흑인이 죽어야 한다고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사악한 이아고가 고결한 무어인 오셀로를 질투하기 때문에, <오셀로>는 고귀한 무어인을 추모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열등한 흑인 오셀로가 순결한 백인 데스데모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오셀로>는 흑인이 비극적으로 죽어야 한다고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문학 비평 서적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다>에서 박홍구 교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제국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이런 주장에는 근거가 없지 않고, 어쩌면 정말 <오셀로>는 흑인이 열등하다고 차별하는지 모릅니다.


창작물은 다양한 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유럽 백인 시민들과 아프리카 흑인 부족민들은 <햄릿>을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희곡 <햄릿>에는 유령이 있으나, 유령은 특정한 문화 현상입니다. 어떤 아프리카 부족민들은 유령이나 좀비를 믿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부족민들이 유령이라는 문화 현상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은 왕이 햄릿에게 말할 때, 아프리카 부족민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프리카 부족민들은 어떻게 죽은 왕이 살아있는 햄릿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지 반문할 겁니다. <햄릿>에게는 보편적이고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창작물은 정답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창작물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화 <스타 워즈>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스타 워즈> 시리즈는 가부장 문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조지 루카스는 가부장 문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가부장 문화가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 <스타 워즈>가 가부장 문화를 반영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창작물을 특정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남성적인 노동들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관객들은 레아를 말해야 합니다.


어린 학생들이 오직 남성적인 노동들만 배우고, 일진회를 조직하고, 셔틀짓거리를 시키고, 삥을 뜯고, 씨발씨발거리며 존나게 욕설들을 씹는 동안, 관객들은 레아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관객들은 레아를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관객들이 레아를 제대로 논의하고 싶다면, 관객들은 어떤 특정한 사회 속에서 자신들이 레아를 바라보는지 인식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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