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왜 (생태학 SF) 문학이 중요한가 본문
[생태학 SF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이 그저 기호품에 불과한가요? 이런 창작물들에 무슨 가치가 있나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은 재미있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 책은 독서 방법을 설명합니다. 교양과 지식을 쌓기 위해 사람들은 책들을 읽습니다. 하지만 독서 방법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독서할 수 있나요? 누군가는 많은 책들을 빠르게 읽고 싶어할 겁니다. 누군가는 적은 책들을 천천히 읽고 싶어할 겁니다. 누군가는 개요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장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 세상에 책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쩌면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기 위한 방법을 고민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모든 책을 읽지 못합니다. 책벌레들조차 모든 책을 읽지 못합니다. 독자가 어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다른 수많은 책들을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독자에게는 책을 읽지 않기 위한 방법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독서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독서 방법에는 독서하지 않기 위한 방법 역시 있습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 역시 독서 방법을 설명합니다.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실용적인 독서 방법을 중시합니다. 실용적인 독서가 중요하기 때문에, 다치바나 다카시는 어느 정도 창작물을 무시합니다. 문학은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논픽션입니다.
이건 다치바나 다카시가 문학을 비롯해 창작물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문학은 오롯하게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현실에서 파생합니다.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런 도구들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작가가 문학을 쓰고 싶다면, 독자가 문학을 읽고 싶다면, 작가와 독자는 문학 이외에 다른 도구들을 동원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어둠의 왼손>은 아주 유명한 페미니즘 소설입니다. 소설 <어둠의 왼손>은 페미니즘 사이언스 픽션을 대표합니다. 하지만 조안나 러스 같은 전투적인 작가는 <어둠의 왼손>에 페미니즘이 없다고 혹평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꽤나 당황했고,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했고, 자신이 실수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만약 어슐라 르 귄이 페미니즘 사상을 좀 더 공부했다면, <어둠의 왼손>은 좀 더 달라졌을 겁니다. 이렇게 철학은 문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문학을 평가하기 위해 문학 평론가는 철학들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가 낭만주의나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를 운운한다면, 이게 철학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문학 이야기일까요? 사실주의는 문학 사조입니다. 하지만 사실주의가 철학이 되지 못하나요? 문학 사조가 철학이 되지 못한다면, 왜 철학자들이 구조주의를 언급하나요? 왜 철학자들이 문학 같은 철학을 언급하거나 문학을 이용해 철학을 풀어나가나요? 왜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같은 문학 비평 서적이 '문학과 철학이 엉켰다'고 말하나요?
문학은 현실에서 파생하고, 철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양쪽 모두 현실을 들여다보기 위한 도구입니다. 양쪽은 서로 다른 도구이나, 현실 속에서 문학과 철학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비단 철학만 아니라 사회 과학과 자연 과학 역시 문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픽션보다 논픽션이 중요하다고 말했을 겁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문학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건 문학 역시 현실에서 파생하고 다른 것들 역시 현실에서 파생한다는 뜻입니다. 소설 <어둠의 왼손>을 쓴 이후 어슐라 르 귄이 페미니즘 사상을 공부한 것처럼, 문학은 다른 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SF 소설가입니다. 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오직 SF 소설가라는 정체성만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대학 생화학 교수이고 동시에 과학 저술가입니다. 사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숱한 책들을 썼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아시모프는 인간 타자기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자연 과학 저술가이기 때문에, 자연 과학 저술은 SF 소설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학은 그저 문학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다른 정체성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그저 SF 작가에 불과하지 않는 것처럼, 문학에는 여러 정체성들이 있습니다. 문학은 과학이 아니나, 아이작 아시모프는 자연 과학을 저술했고 동시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렇게 문학과 과학은 만날 수 있어요.
여기에서 문학은 오직 소설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심지어 비디오 게임에도 모두 문학적인 측면이 있을 겁니다. 비디오 게임은 문학이 아니나, 분명히 비디오 게임에는 문학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네버윈터 나이츠> 같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일기를 씁니다. <네버윈터 나이츠>에는 필기 기능이 있고, 게임 플레이어는 일기를 쓸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 캐릭터에게 멋진 이야기를 덧붙이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환상적인 숲 속 이야기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게임 <웨이스트랜드 2>를 만들었을 때, 브라이언 파고는 소설 <전쟁과 평화>처럼 <웨이스트랜드 2>가 압도적인 텍스트를 자랑한다고 인터뷰했습니다.
<웨이스트랜드 2>에서 줄거리, 대사들, 지문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런 기나긴 롤플레잉 게임에서 언어는 아주 커다란 장벽입니다. 중세 판타지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네버윈터 나이츠>가 의도적으로 낡은 언어나 고풍스러운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게임에서도 언어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사이베리아>처럼 어드벤처 게임은 이른바 '그래픽 노블'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사이베리아>를 음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서브머지드>처럼 대사와 지문이 완전히 없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어떤 텍스트를 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소설과 비디오 게임에 똑같이 문학적인 측면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비디오 게임에서도 우리는 문학적인 측면을 찾을 수 있어요.
다치바나 다카시는 문학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으나, 종종 어떤 사람들은 문학을 외면하거나 조롱합니다. 오늘날 사회가 대규모 산업 사회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실용적인 것을 중시합니다. 사람들은 인간 활동이 물질적인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약품을 만들고, 자동차를 만들고, 스마트폰을 만들고, 노트북 컴퓨터를 만든다면, 이런 활동들은 좋은 것이 됩니다. 이것들은 실용적인 것이고, 실용적인 것은 좋습니다. 문학은 이런 실용적인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약품과 자동차와 스마트폰과 노트북 컴퓨터를 만들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독자가 소설책 1,000권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쌀알 하나조차 만들지 못할 겁니다. 문학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습니다. 문학은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이 쓸데없는 것이고 그저 기호품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왜 인간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문학은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으나, 마음의 양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문학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소설과 만화와 게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설과 만화와 게임보다 실용적인 과학 기술은 훨씬 중요합니다. 소설과 만화와 게임 따위는 굶어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은 문학을 비롯해 창작물들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정말 문학에 아무 가치가 없나요?
아이작 아시모프는 실용적인 과학 저술가입니다. 동시에 아시모프는 SF 작가입니다. 왜 아이작 아시모프가 SF 소설들을 썼나요? 문학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면, 왜 아이작 아시모프가 SF 소설들을 썼나요? 심심하기 때문에? 심심하기 때문에 아이작 아시모프가 온갖 SF 소설들을 썼나요? 만약 아시모프에게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왜 아이작 아시모프가 소설들을 썼을까요? 왜 우리가 소설을 쓰고 만화를 보고 게임을 플레이하나요? 문학에 무슨 가치가 있나요? 대답들은 다양할 겁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문학에 아주 다양한 가치들이 있다고 대답할 겁니다. 그것들 중에는 간접 체험이 있습니다.
문학은 간접 체험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사회학자들이 구태여 어려운 학술 용어들을 동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고 싶어합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들을 원합니다. 문학은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마스다 미리가 그린 만화 <코하루 일기>는 여고생 코하루를 보여줍니다. 어떤 할머니가 여자 고등학생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할머니가 <코하루 일기>를 읽는다면, 할머니는 고등학생 코하루와 가상의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코하루 일기>를 읽는 동안, 할머니는 여자 고등학생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할머니는 여자 고등학생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고 해도, 할머니는 간접적으로 고등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코하루와 함께 여자 고등학생으로서 사춘기를 보낼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으나, 할머니는 공부벌레였을지 모릅니다. 할머니는 공부하느라 사춘기를 탕진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학창 시절을 후회하고 풋풋하고 싱그러운 고등학교 연애 이야기를 보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할머니가 <코하루 일기>를 읽는다면, 할머니는 여자 고등학생들과 (간접적인)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어떻게 그들이 연애하고 데이트하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들을 유지해야 합니다. 할머니가 <코하루 일기>를 읽는 것처럼, 문학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인 관계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필수적으로 문학을 쓰고 읽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문학을 쓰고 읽을 때, 우리는 풍성한 사회적인 관계들을 유지할 수 있고, 이건 공동체를 원활하게 운영할지 모릅니다. 문학은 기호품이 아니라 필수적인 생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 조선 왕조는 <용비어천가>를 지었습니다. 왜 조선을 개국한 이후, 조선 왕조가 <용비어천가>를 지었나요? 조선 학자들이 심심하기 때문에? 심심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그들이 <용비어천가>를 짓기 원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조선 왕조는 자신이 정당하다고 명분을 부여하기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문학을 이용해 공동체를 바라보고, 그래서 조선 왕조는 사람들이 <용비어천가>를 이용해 조선 사회를 바라보기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용비어천가>를 읽는다면, 사람들은 개국 시조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용비어천가>가 조선 왕조가 정당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선 왕조가 정당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신화를 이용해 문명과 자연을 들여다봤습니다. 신화 역시 문학입니다. 신화는 너무 거시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그래서 신화는 근대 소설과 많이 다르나, 신화 역시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신화를 읽는 동안, 사람들은 거시적인 영웅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존 로널드 톨킨이 쓴 <실마릴리온>은 신화입니다. 동시에 이건 문학입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실마릴리온>이 문학이라고 평가합니다. 아무리 문학 평론가들이 중세 유럽 판타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들은 <실마릴리온>이 문학이라고 인정할 겁니다. <실마릴리온>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루시엔 같은 아름다운 엘프 처자나 앙칼라곤 같은 거대한 화염 드래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벨레리안드의 공동체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용비어천가>와 <코하루 일기>는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거시적이거나 일상적인)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하고, 독자들은 사회적인 관계들을 이용해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 사람들은 신화가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고전적인 신화를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신화를 믿는다고 해도, 신화는 대규모 산업 사회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규모 산업 신화는 고전적인 신화를 밀어냈습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신화가 힘을 잃었다고 해도, 여전히 신화는 존재하고, 문학에는 신화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파쇼주의가 장대한 영화를 만들었나요? 왜 파쇼주의가 장대한 영화들을 민중들에게 퍼뜨렸나요? 파쇼주의는 신화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이건 근대적인 신화입니다. 비단 이런 영화들만 아니라 초인 영웅들 역시 신화를 빌립니다. <슈퍼맨> 같은 만화는 신화와 아주 비슷합니다. 아예 <마이티 토르> 같은 만화는 신화에서 영감을 빌렸습니다. 영화 <어벤저스>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은 초인 영웅들과 관계들을 맺고 거시적인 사건에 동참합니다. 비록 관객들은 망치를 휘두르지 못하고 번개를 날리지 못하나, 관객들은 토르와 거시적인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어떻게 초인 영웅이 살아가는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초인 영웅이 좀 더 일반인에 가깝다면, 관객들은 훨씬 쉽게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많은 인기들을 끕니다. 이렇게 <용비어천가>와 <코하루 일기>와 <실마릴리온>과 <어벤저스>는 비슷합니다.
사회주의적인 페미니즘 서적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에서 도로시 앨리슨은 소설이 일상을 제시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레즈비언이 억압과 절망을 느낀다고 해도, 사회 과학이 이런 억압과 절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나요? 사회 과학은 사회적인 현상을 분석하기 원합니다. 아무리 사회 과학이 절망적인 레즈비언을 말하기 원한다고 해도, 사회 과학은 절망을 분석할 겁니다. 하지만 레즈비언은 얼마나 자신이 절망하는지 알리기 원할지 모릅니다. 이런 레즈비언에게 사회 과학은 별로 유용한 도구가 아닙니다. 레즈비언에게는 사회 과학보다 문학이 필요합니다.
만약 독자가 퀴어 문학을 읽는다면, 독자는 레즈비언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독자는 얼마나 레즈비언이 절망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사회 과학에게 절망은 분석 대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망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레즈비언이 절망하는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과학은 이걸 시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로시 앨린슨은 문학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독자가 문학을 읽을 때, 독자는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가 절망을 느낄 때, 현실 속에서 독자는 레즈비언들과 훨씬 풍성한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문학에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쩌면 공동체를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필수적으로 문학을 쓰고 읽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문학은 그저 기호품에 불과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공동체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는 문학을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는 이야기하는 존재 호모 나랜스(homo narrans)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문학은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인지 모릅니다. 이런 주장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해도, 분명히 문학에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대규모 산업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문학이 실용적이지 않다고 조롱합니다. 그들은 문학이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오직 실용적인 것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무인도에서 아무리 인간이 혼자 풍족하게 먹고 산다고 해도,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를 그리워할 겁니다. 혼자 풍족하게 먹고 사는 생존자보다 간신히 연명하는 여러 생존자들은 훨씬 행복할지 모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사회적인 동물이고, 여러 생존자들이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문명에게 사랑은 필수적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연애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섹스하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망할 겁니다.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사회적으로 재생산하지 못할 테고 망할 겁니다. 그리고 섹스와 사랑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물론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섹스하기 바랍니다. 피지배 계급이 섹스하고 출산할 때, 사회가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예 주인들은 노예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노예들이 섹스하고 출산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자 노예들은 '출산 파업'을 벌이거나 '결혼 파업'을 벌였습니다. 여자의 몸이 생산적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출산 파업'을 벌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21세기 산업 국가들 역시 국민들이 섹스하기 바랍니다.
심지어 국가 정부들은 임신 가능 여자들을 조사하고 발표합니다. 언론 매체들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고 인구 절벽이 위험하다고 주절거립니다. 분명히 섹스 없이 인류 문명은 망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섹스가 중요하다고 해도, 사랑 없이 사람들이 섹스해야 하나요? 사랑 없는 섹스가 가능한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사랑 없이 섹스해야 하나요? 섹스와 임신과 출산은 실용적입니다. 서재우가 쓴 <일곱 번째 남편>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섹스와 임신과 출산은 인류 문명을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실용적인가요? 아니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비실용적이고, 오직 섹스라는 육체적인 행위만 실용적인가요? 사람들이 사랑 없이 섹스한다면, 이게 부정적인 현상을 일으키지 않을까요?
숱한 3류 저질 포르노들은 사랑 없이 섹스를 이야기합니다. 숱한 저질 포르노들은 인간이 인간보다 사물이라고 간주합니다. 저질 포르노들 속에서 인간은 인간보다 섹스하기 위한 사물이 됩니다. 섹스라는 육체적인 행위가 실용적이라고 해도, 사랑 없는 섹스는 인간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왜곡합니다. 사랑과 섹스가 함께 할 때, 포르노그래피들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을 겁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포르노그래피들을 선호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포르노그래피들을 싫어한다고 오해하나, 포르노는 나쁘지 않습니다. 왜 포르노가 나쁜가요?
질펀하고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섹스는 좋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이런 섹스가 나쁠 이유는 없습니다. 저질 포르노들이 사랑 없이 섹스를 묘사하기 때문에, 저질 포르노들은 문제가 됩니다. 포르노 소설들이 사랑을 고민하고 동시에 질척거리는 섹스를 묘사한다면, 이건 억압 없는 쾌락이 될 겁니다. 모태 솔로 독자가 기나긴 밤이 외롭다고 느낄 때, 독자는 포르노 소설을 읽고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실용적인 것만 중요하다면, 왜 독자가 포르노 소설을 읽어야 하나요? 포르노 소설 없이, 인간은 생식기를 자극하고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건 실용적이고 육체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성적으로 위안을 얻기 원할 때, 사람들은 그저 생식기만 자극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읽기 원합니다. 포르노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어떻게 두 연인이 사랑을 고민하고 끈적거리게 섹스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포르노 소설은, 문학은 실용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용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나, 무엇이 실용적인 것인가요? 사람들이 뭔가를 실용적이라고 말할 때, 왜 그게 실용적인 것이 되나요? 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실용적이라고 말하나요? 제약 회사가 약품을 만든다면, 사람들은 이런 의학 기술이 실용적이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제약 회사들이 약품들을 만든다고 해도, 제3세계 아이들은 질병들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어나가야 합니다. 분명히 21세기 과학 기술은 수많은 약품들을 만들 수 있으나, 제3세계 아이들은 죽어나가야 합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에서도 가난한 아이들은 죽어나가야 합니다. 이게 실용적인가요? 이런 의학 기술이 정말 실용적인가요? 제3세계 아이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감에도, 우리가 21세기 의학 기술이 실용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실용적인 것은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새시 로이드가 쓴 <식수 전쟁 2017>은 제3세계 난민 문제를 다룹니다. 온갖 의학 기술들은 제3세계 문제를 입도 뻥긋하지 않으나, 이 소설은 제3세계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식수 전쟁 2017>은 그저 기후 변화를 다루는 10대 성장 소설에 불과하나, 온갖 첨단 의학 기술들보다 <식수 전쟁 2017>은 훨씬 '실용적'일 겁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설 주인공 로라와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로라와 함께 제3세계 난민들을 살펴볼 수 있어요. 제약 회사들이 제3세계 문제를 입도 뻥긋하지 않을 때, <식수 전쟁 2017>은 귀중한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합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보다 문학은 훨씬 '실용적'일 수 있습니다. 문학보다 과학 기술들은 차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문학이 쓸데없는 기호품이라고 조롱하나, 그들은 과학 기술이 억압을 간과할 때 문학이 억압을 고발한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물론 문학은 어용 문학이 되고 지배 계급의 앞잡이가 될지 모릅니다. 미국 중앙 정보부가 소설 <1984>를 왜곡한 것처럼, 문학은 지배 계급의 앞잡이가 될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문학 그 차체나 과학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문학과 과학은 도구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도구를 제대로 이용하거나 잘못 이용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학과 과학으로 우열을 가리지 말고 양쪽 모두 유용하게 써먹어야 할 겁니다. 게다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학과 과학은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SF 소설은 근본적으로 문학입니다. SF 소설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 잡지 <과학 동아>가 SF 소설들을 싣는 것처럼, 문학으로서 SF 소설은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학은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합니다. SF 소설은 미래의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합니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가 근대적인 진보를 이끌었을 때,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찬양했습니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공산주의자들 역시 근대성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근대성을 해친다고 생각했고 훨씬 나은 근대성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산주의를 추구합니다. 근대성은 세상을 바꿨고 19세기 공산주의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래 공산주의가 훨씬 나은 근대성을 이끌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래 공산주의가 나타난다면, 19세기 사람들이 근대성에 놀란 것처럼, 사람들은 다시 깜짝 놀랄 겁니다.
SF 소설들은 이런 감성을 묘사합니다. SF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미래 사람들과 미래적인 사회 관계를 맺을 테고, 독자는 어떻게 미래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지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시대는 흐르고, 미래에 사회는 바뀔 겁니다. 미래 사회에서 사람들은 새롭게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을 겁니다. 독자가 이런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고 싶다면, 독자는 SF 소설을 읽어야 할 겁니다. 로봇들이 일상적으로 돌아다니는 사회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사랑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희망을 품을까요? 로봇 심리학자가 인간적인 감정이나 사랑이 뭐라고 느낄까요? 독자가 <아이 로봇>을 읽는다면, 독자는 그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는 환경 오염들이 훨씬 심각해질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가 정말 심각해진다면, 미세 먼지 같은 문제는 그저 애교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남한 언론 매체들은 미세 먼지가 문제라고 거품을 물고 두 눈을 까뒤집고 난리지랄을 떱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는 정말 행성급 환경 오염이 될지 모릅니다. 네, 이건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이 닥칠 때, 뭐라고 사람들이 느낄까요? 우리가 소설 <식수 전쟁 2017>이나 <워터 나이프>를 읽거나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나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 <웨이스트랜드 2>나 <코이>를 플레이한다면, 우리는 미래적인 사회 관계들을 맺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인 관계를 이용해 현실 속의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영화 <분노의 도로>에서 부발리니 씨앗 할머니가 해골 위의 녹색 새싹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폐허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생명을 느낄 겁니다.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 마이나와 미아나가 번성과 생명을 말할 때, 관객들은 이런 것들이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한 선물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코이> 같은 게임은 꽤나 단순한 이야기를 담았으나, 아이들은 빛의 물고기와 별들이 빛나는 호수와 물고기를 풀어주는 여자 아이를 감동적으로 회상할 겁니다. <코이>에서 여자 아이가 빛의 물고기를 구하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은 <코이> 속의 여자 아이와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산업 자본주의 사회를 돌아볼 수 있어요.
물론 이런 것들 중에서 소설은 가장 나을 겁니다. 우리가 사고 방식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느끼고 싶다면, 만화나 영화나 게임보다 소설은 훨씬 나을 겁니다. 사고 방식과 감정이 추상적인 영역이고, 언어가 추상적인 영역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소설이 무조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 매체들에는 다양한 장점들이 있습니다. 소설, 만화, 영화, 게임(의 시나리오)는 모두 문학에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생태학 SF 문학을 이용해 환경 오염들과 미래 공동체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중요합니다. 기후 변화가 21세기 초반의 가장 커다란 화두라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하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