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과 부분적인 유사성 본문
영화 <에일리언 2>는 우주 해병대와 제노모프 괴물들이 열불나게 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LV-426 식민 기지는 거대하고 복잡한 미궁입니다. 거대하고 복잡한 미궁 속에서 야만적인 괴물들은 우주 해병대를 압박합니다. 우주 해병대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몰려오는 괴물들을 처치하고, 식민 기지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에일리언 2>는 테이블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비슷합니다. 식민 기지는 던전입니다. 우주 해병대는 모험가 일행입니다. 제노모프들은 좀비들입니다. 던전 속에서 모험가 일행은 좀비들을 물리치고 탈출합니다.
이것처럼, 식민 기지에서 우주 해병대는 제노모프들을 처치하고 탈출합니다. <에일리언 2>와 <던전스 앤 드래곤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 같은 게임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은 <에일리언 2>와 비슷하고, 한편으로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은 던전 탐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에일리언 2>와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비슷하다고 해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모방하기 원했나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에일리언 2>를 던전 탐험 이야기라고 간주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분명히 <에일리언 2>와 <던전스 앤 드래곤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으나, 제임스 카메론은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모방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던전 탐험 게임을 참고했다고 해도, <에일리언 2>는 던전 탐험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던전 탐험 게임 <다키스트 던전>이 "Game over, man! Game over!"라는 대사를 보여준다고 해도, 이건 <에일리언 2> 오마쥬일지 모르고 아닐지 모릅니다. <에일리언 2>와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 사이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에일리언 2>는 던전 탐험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는 던전 탐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 후반부에 기동 보병들이 아라크니드 땅굴로 침투한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스타십 트루퍼스>는 던전 탐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달리, <스타십 트루퍼스>는 던전 탐험에 커다란 비중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대부분 이야기들은 육군 훈련소와 병영 생활과 야외 전투입니다. 하지만 SF 팬들은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이 <다키스트 던전>보다 <스타십 트루퍼스>와 닮았다고 말할 겁니다.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에서 던전 탐험보다 근대적인 진보(우주선, 강화복, 외계인)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이 똑같이 던전 탐험이라고 해도,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다키스트 던전>보다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을 좋아할 겁니다. 그들은 플린트록 권총보다 자동 화기 볼터를 보고 싶어할 테고, 해골 병사보다 외계 괴물 진 스틸러를 보고 싶어할 테고, 철판 갑옷보다 동력 강화복 터미네이터를 보고 싶어할 겁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은 다릅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첨단 우주선이나 인공 지능 컴퓨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소설 <인스머스의 그림자>와 <크툴루의 부름>이 그러는 것처럼, <다키스트 던전>은 첨단 우주선보다 사악한 외계 악마를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양쪽 게임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들(우주 해병대와 모험가 일행)은 복잡한 던전(우주선과 유적)을 헤매고, 숱한 적들(진 스틸러들과 악마들)과 싸우고, 위험한 장소(통풍구와 함정)를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은 비슷합니다. 평론가들이 양쪽을 똑같이 던전 탐험 이야기라고 분류한다고 해도, 이건 오류가 아닐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을 바라봐야 하나요? 어떻게 우리가 <에일리언 2>와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과 <스타십 트루퍼스>와 <인스머스의 그림자>에서 공통점들을 논의할 수 있나요?
우리가 문학을 해석할 때, '유사성'은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서 다른 대상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서 다른 대상을 유추할 때, 우리는 두 대상을 하나로 엮을 수 있습니다. 문학은 이런 유사성을 중요하게 활용합니다. 어쩌면 전반적으로 예술에서 이런 유사성은 가장 커다란 가치인지 모릅니다. 밥 로스가 웅장한 산맥과 삼림을 그리고 "참 쉽죠?"라고 말한다고 해도, 캔버스 속의 산맥과 삼림은 그저 그림에 불과합니다. 이건 진짜 삼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진짜 삼림과 캔버스 속의 삼림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림을 감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나 스팀펑크 판타지 역시 이런 유사성을 활용합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별의 눈물>을 썼습니다. SF 독자들은 <별의 눈물>을 감동적이고 충격적으로 읽습니다. 왜 SF 독자들이 충격적으로 감동하나요? 현실에는 외계인들이 없습니다. 현실에 외계인들이 없음에도, 왜 SF 독자들이 황당무계한 외계인 이야기에 감동하나요? SF 독자들이 '유사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계 문명과 인류 문명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유럽 사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바랍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처럼, 식민지 수탈 없이 사회 민주주의 역시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회 민주주의는 입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외치나,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평화로운 사회 민주주의는 끔찍한 식민지 수탈에 기반합니다. <별의 눈물>에서 SF 독자들은 이런 상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소설 <별의 눈물>은 외계인들을 이용해 인류 문명을 비판하고, 그래서 SF 독자들은 <별의 눈물>을 읽습니다.
왜 소설 <별의 눈물>이 구태여 외계인들을 언급하나요? <별의 눈물>이 인류 문명을 비판하기 원한다면, 외계인들 없이 <별의 눈물>은 인류 문명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구태여 외계인들을 집어넣었습니다. 외계인들이 훨씬 극단적으로 차이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유럽 백인 남자들이 아프리카 흑인 여자들을 학살한다고 해도, 유럽 백인 남자와 아프리카 흑인 여자는 똑같이 인간입니다. 양쪽에서 차이들은 별로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외계인들은 다양한 행성들에서 비롯했고, 차이들은 훨씬 큽니다.
그래서 거인 외계인이 난쟁이 외계인을 학살할 때, 이건 학살이라는 비극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별의 눈물>은 외계인들을 이용해 인류 문명을 반영합니다. 비록 현실에 외계인이 없다고 해도, <별의 눈물>과 인류 문명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낸시 크레스가 쓴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를 읽는다면, 독자들은 문자 그대로 외계인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외계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아주 강한 유사성이 있어요. 영화 <에일리언 2>를 촬영하기 전에, 자넷 골드스타인은 에일리언이 이주민을 가리킨다고 착각했고 이주민 연기를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네, 외계인은 정말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유사성은 정답이 아닙니다.
어떤 독자는 <별의 눈물>을 읽고 자본주의와 사회 민주주의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는 학교 폭력이나 직장 성 폭행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별의 눈물>은 식민지 수탈보다 성 차별을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별의 눈물>이 식민지 수탈을 비판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20세기 식민지 수탈보다 17세기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자넷 골드스타인이 외계인을 이방인으로 착각한 것처럼, 유사성은 오해를 부를지 모릅니다. "Beware of the Aliens!"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게 자유한국당 같은 수구 꼴통들이 이주 노동자를 차별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식민 기지에서 우주 해병대 지정 사수가 동료들에게 경고하나요?
유추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유사성을 찾는다고 해도, 이건 정답이 아닐지 모릅니다. 장미는 부드럽고 복잡한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미가 우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장미를 미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장미에서 우아함을 유추할 때, 장미와 미인은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장미는 미인이 아닙니다. 장미와 미인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으나, 장미는 미인이 아닙니다. 유추에는 이런 함정이 있습니다.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이런 유사성은 전부가 아닐지 모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부분적인 유사성을 근본적인 유사성으로 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올바른 해석보다 편집증적인 해석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A poet could not but be gay." 이렇게 윌리엄 워즈워스가 말했을 때, 게이(gay)는 성 소수자를 가리키지 않았을 겁니다. 'gay woman'은 성 소수자 여자가 아니라 즐거운 여자를 가리킵니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시인이 즐겁다고 말하기 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21세기 독자는 게이가 성 소수자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21세기 사회에서 게이는 성 소수자를 가리키고, 윌리엄 워즈워스는 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부분적인 유사성입니다.
"어휴, 병신 새끼." 만약 이렇게 누군가가 말했다면, 이 사람이 장애인을 모욕하기 원했을까요? 분명히 병신이라는 단어는 장애인을 모욕할 수 있습니다. 병신과 장애인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한 사회에서 병신이라는 단어는 특별히 장애인을 모욕하지 않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병신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욕설입니다. 심지어 친한 친구들은 서로 병신 새끼라고 말하고 낄낄거립니다. 흑인이 다른 흑인에게 "어이, 깜씨."라고 말한다고 해도, 이건 인종 차별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 대학생이 어떤 남자 대학생에게 "형, 지난 1년 동안 나는 오직 형만 바라봤어."라고 울먹거리며 고백한다고 해도, 이건 여자가 남자라는 커밍아웃이 아닙니다. 그저 형이라는 단어가 바뀌었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 여자 대학생들은 남자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입니다. 병신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장애인 인권 운동가조차 가까운 친구에게 병신 새끼라고 말하고 장난칠지 모릅니다. 아니면 장애인 인권 운동가는 수구 세력 노인들에게 병신 새끼라고 욕할지 모릅니다. 수구 세력 노인들이 장애인 편의 시설을 혐오 시설이라고 반대한다면, 장애인 인권 운동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병신 새끼라고 욕할지 모릅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분노를 터뜨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남한처럼 억압적인 사회에서 장애인 인권 운동가는 쉽게 분노를 참지 못할 겁니다.
관광 명소를 짓는답시고 산을 허물고 강을 파헤치기 위해 보수 우파 정당들은 엄청난 비용을 허용합니다. 하지만 보수 우파 정당들은 장애인 편의 시설들에 아주 인색합니다. 그래서 장애인 인권 운동가가 병신 새끼라고 욕한다고 해도, 이건 장애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병신과 장애인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이건 부분적인 유사성입니다. 언어의 물질성이 이미 병신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인 욕설로 만들었기 때문에, 장애인 인권 운동가는 그저 일상적인 욕설을 내뱉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왜 장애인 인권 운동가가 장애인을 차별하는지 따지지 못할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따진다면, 이건 편집증적인 해석이 될 겁니다.
이건 병신 새끼라는 욕설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욕설들은 사라져야 할 겁니다. 솔직히 평소에 저 역시 이런 욕설들을 내뱉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저도 모르게 임신 중절 권리보다 낙태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언어의 물질성을 극복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그렇다고 해도 독자가 문학을 해석할 때, 독자는 부분적인 유사성과 전반적인 유사성을 구분해야 합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옥주현이 "청취자 여러분,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라고 표현한다고 해도, 청취자들은 따가운 밤송이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겁니다. 밤(夜)과 밤(栗)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이건 부분적인 유사성(발음)입니다. 이건 간단한 언어 유희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유사성을 헛갈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해석은 훨씬 복잡해질지 모릅니다. 예전에 어떤 휴대폰 광고는 에픽하이 노래 <Love Love Love>를 이용했습니다. 휴대폰 광고 속에서 노래 <Love Love Love>를 듣는 동안, 광고 모델은 해맑게 웃고 신나게 춤을 췄습니다. 제목처럼 <Love Love Love>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있나요. 사랑해본 적. 영화처럼 첫 눈에 반해본 적. 전화기를 붙들고 밤새본 적. 세상에 자랑해본 적. 쏟아지는 빗속에서 기다려본 적." 이런 가사는 설레고 두근거리고 풋풋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듣는 동안 광고 모델은 해맑게 웃고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었어요. 어떤 사람은 트와이스 노래 <What is Love?>처럼 <Love Love Love>가 설렌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What is Love?>와 <Love Love Love>라는 제목에서 모두 Love라는 단어는 핵심 단어입니다.
안타깝게도 <Love Love Love>는 연애보다 실연을 말합니다. 이 노래에서 후렴구 "아무도 내 맘을 모르죠."는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실연이 너무 아프다고 말하기 위해 <Love Love Love>는 의도적으로 사랑이 설렌다고 강조합니다. 이건 부정적인 강조 방법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첫 구절에서 <Love Love Love>는 사랑이 설렌다고 말했고, 그래서 휴대폰 광고 모델은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Love Love Love> 첫 구절을 이용해 <Love Love Love>와 <What is Love?>가 비슷하다고 해석한다면, 이건 편집증적인 해석이 될 겁니다. 이 해석은 부분적인 유사성을 전반적인 유사성으로 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What is Love?>처럼 <Love Love Love>가 설렌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부정적인 서술들이 두근거린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노래 화자가 술에 취하고 친구를 붙잡고 헤어진 상대를 욕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이게 감미롭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개인적인 취향이고, 아무도 개인적인 취향에 간섭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Love Love Love>에서 부정적인 서술들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반면, 여자친구 노래 <오늘부터 우리는>과 케이윌 노래 <오늘부터 1일>은 비슷합니다. 양쪽 제목은 비슷하고, 양쪽 내용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두 연인이 설레는 연애를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What is Love?>와 <Love Love Love>가 다르다고 생각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부터 우리는>과 <오늘부터 1일>이 비슷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여자친구 노래 <시간을 달려서>와 아이유 노래 <너랑 나>가 똑같이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사람들은 두 노래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시간을 달려서>와 <너랑 나>는 <채리티가 남긴 말>이 아니에요. <시간을 달려서>와 <너랑 나>는 똑같이 검지와 엄지(여자친구 멤버 엄지가 아니라 손가락 엄지)를 이용해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안무를 선보입니다. 여자친구 안무가 아이유 안무를 표절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두 노래가 똑같이 시간과 사랑을 연결하기 때문에, 두 노래는 비슷한 두 안무를 보여줬을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헛갈리지 않을 겁니다.
고려 대학교가 호랑이 문양을 이용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고려 대학교가 아무르 호랑이를 키운다고 헛갈리지 않을 겁니다. 고려 대학교와 아무르 호랑이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습니다. 호랑이 문양은 너무 부분적이고 희미한 유사성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르 호랑이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고려 대학교를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 대학교는 아무르 호랑이가 아닙니다. 아무리 고려 대학교에 많은 학생들이 입학한다고 해도, 아무르 호랑이는 멸종 위기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고려 대학교 학생들이 열심히 자본주의 경영학을 공부한다면, 아무르 호랑이는 정말 멸종 동물이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명문' 고려 대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본주의 경영학을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은 다소 말장난 같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유사성에 집착합니다. 가브리엘레 주세페 로세티는 단테가 장미 십자회 회원이었다고 생각했고, 이걸 증명하기 위해 로세티는 여러 상징들과 단어들에서 유사성을 찾아내기 원했습니다. 이런 해석은 해석보다 집착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소설 <솔라리스>에서 솔라리스 학파 과학자들이 인간과 솔라리스 바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빡빡 우기는 것처럼, 지식인들 역시 부분적인 유사성을 뻥튀기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원인에 따른 결과보다 결과에 따른 원인에 주목할지 모릅니다.
여전히 학술 대회들에서 숱한 기호학자들과 비평가들과 철학자들은 무엇이 올바른 해석이고 무엇이 부분적인 유사성이고 무엇이 집착이고 무엇이 편집증적인 해석인지 설전들을 벌입니다. 이런 설전들처럼, SF 독자들은 <별의 눈물>과 현실 속의 식민지 수탈 사이에 아주 정확한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하지 못할 겁니다. SF 독자들은 <별의 눈물>이 반드시 유럽의 남아메리카 식민지 수탈을 비유한다고 지적하지 못할 겁니다.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과 <다키스트 던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을 수 있고 없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정답을 내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계속 논의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문학이 너무 많은 해석들을 낳기 때문에 문학이 짜증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너무 나쁘게 생각해야 하나요? 우리는 거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 아주 많은 해석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