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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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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은 모틀리를 (설명하지 않고) 표현한다

OneTiger 2019. 4. 12. 20:02

"당신은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요. 전혀. 그런데도 그런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게 신기하군요."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이렇게 조직 폭력배 두목 모틀리는 말합니다. 이른바 미스터 모틀리는 거대 조직 폭력배 두목입니다. 동시에 모틀리는 자신이 어느 정도 미학자라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모틀리는 자신의 몸을 특별하게 꾸몄습니다. 미스터 모틀리는 자신의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틀리는 린이라는 예술가를 고용합니다. 린은 절지류 인간 종족 예술가입니다. 린은 타액을 뱉고 타액을 빚고 타액 조각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모틀리는 린이 자신의 몸을 닮은 타액 조각상을 만들기 원합니다. 린은 조직 폭력배 두목을 혐오하나, 모틀리의 몸이 너무 신기하고 기이하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린은 창작 욕구를 멈추지 못했습니다. 모틀리의 기이하고 이상한 몸은 자극적인 영감을 선사했습니다. 그래서 린은 조직 폭력배를 찾아가고 타액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린은 훌륭하게 타액 조각상을 빚었고, 모틀리는 린이 정말 훌륭한 타액 조각가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모틀리는 린이 예술 대상(모틀리의 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린은 훌륭한 예술가이나, 예술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린이 이럴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예술가가 예술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예술가가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 수 있나요? 빈센트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해바라기>를 그리기 위해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관찰했을 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제대로 관찰했나요? 아니면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나요?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멋지게 그릴 수 있었나요? 흔히 사람들은 표현보다 이해가 선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나 분위기를 어떤 매체로 표현하고 싶다면, 예술가는 그 사물이나 현상이나 분위기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표현보다 이해는 선천적입니다. 예술가가 사물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예술가는 그걸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파악할 때,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흔히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뭔가를 표현하기 전에 사람들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기 원합니다. 문제는 결과적으로 예술이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술은 현실을 날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현실을 완벽하게 모방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한낱 인간입니다. 인간이 현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나요? 아니, 인간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현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술 대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요? 예술가 역시 인간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인간입니다. 해바라기가 빛을 받을 때, 빈센트 반 고흐는 그걸 관찰했고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예술 비평가들은 <해바라기>가 빛의 성질을 아주 멋지게 보여준다고 호평합니다.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는 물리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빛의 성질을 연구하기 위해 반 고흐가 물리학을 공부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동시에 빈센트 반 고흐는 생물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해바라기가 식물임에도, 생물학 관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해바라기가 국화과에 속하는 1년생 식물이라고 해도, 빈센트 반 고흐는 이런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주 만물을 날것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든 지식을 머릿속에 담지 못합니다. 예술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술가가 예술 대상을 바라볼 때, 예술가는 피상적으로 예술 대상을 이해합니다. 예술가가 예술을 표현할 때, 여기에는 왜곡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술가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예술가는 현실을 날것으로 예술 속에 집어넣지 않습니다. 현실에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림 <해바라기>에서 특정한 그림체로서 해바라기는 존재합니다. 현실에는 이런 특정한 그림체가 없습니다. 그림체로서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그림체가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 <엘더 스크롤 IV: 오블리비언>에서 어떤 등장인물은 마법으로 그림 속에 들어갑니다. 전우치가 도술을 이용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오블리비언>에서 어떤 등장인물은 마법으로 그림 속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림체는 현실이 됩니다. 현실은 그림체입니다. 하지만 <오블리비언>은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현실에는 이런 마법이 없습니다. 현실은 그림체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그림체로서 해바라기는 존재하지 않아요. 만약 현실에서 그림체로서 해바라기가 존재한다고 해도, 해바라기를 '그리기 위해' 화가는 (현실이라는 그림체와 다른) 특정한 그림체를 이용할 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해바라기라는 사물에 자신의 특정한 그림체를 덧붙였습니다. (현실 속의) 해바라기가 (그림 속의) 해바라기가 될 때, 고흐의 특정한 그림체는 현실 속의 해바라기를 그림 속의 해바라기로 바꿉니다. 현실 속의 해바라기가 그림 속의 해바라기가 되고 싶다면, 현실 속의 해바라기는 일부 현실성을 버리고 특정한 그림체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 속의 해바라기와 그림 속의 해바라기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예술 비평가들은 <해바라기>를 칭찬했습니다. 아무리 꽃밭에서 해바라기가 아름답고 당당하게 피어난다고 해도, 예술 비평가들은 그걸 칭찬하지 않을 겁니다. 이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특정한 표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는 예술 대상을 특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진 기사가 고성능 카메라로 해바라기를 찍는다고 해도, 어떤 비평가들은 고화질 해바라기 사진보다 그림 <해바라기>를 호평할 겁니다. 여기에 특정한 표현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스터 모틀리 타액 조각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미스터 모틀리는 린이 예술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린이 예술 대상(모틀리의 기이한 몸)을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어떻게 린이 타액 조각을 만들 수 있었나요? 현실보다 표현 방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린에게는 특정한 표현 방법이 있고, 미스터 모틀리는 이런 표현 방법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스터 모틀리는 이런 표현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기 원했습니다. 미스터 모틀리가 그저 자신의 몸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을 뿐이라면, 미스터 모틀리는 얼마든지 헬리오타입(스팀펑크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미스터 모틀리는 헬리오타입보다 타액 조각을 선택했습니다. 헬리오타입과 타액 조각이 다른 표현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술가는 예술 대상을 아주 피상적으로 관찰하는지 모릅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야생종>을 썼으나, 옥타비아 버틀러는 동물 변신술사를 본 적이 없을 겁니다. 흑인 여자가 표범으로 변신하고 날렵하고 은밀하게 돌아다닐 때, 뭐라고 흑인 여자가 느끼고 생각하나요? 옥타비아 버틀러는 알지 못합니다. 현실에 동물 변신술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오로라>를 썼으나, 킴 스탠리 로빈슨은 장거리 세대 우주선을 탄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세대 우주선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지 킴 스탠리 로빈슨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옥타비아 버틀러와 킴 스탠리 로빈슨은 <야생종>과 <오로라>를 썼습니다. 두 SF 작가에게 독특한 사상과 표현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킴 로빈슨이 세대 우주선을 탄 적이 없음에도 킴 로빈슨이 <오로라>를 쓸 수 있는 것처럼, 린이 미스터 모틀리의 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린은 타액 조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건 무조건 예술 대상보다 표현 방법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대 우주선을 묘사하기 위해 킴 스탠리 로빈슨은 여러 우주 과학 지식들과 사회 과학 지식들을 공부했습니다. 비록 킴 로빈슨이 직접 세대 우주선을 타지 못했다고 해도, 킴 로빈슨은 여러 과학 지식들을 공부했고 그것들을 소설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예술가는 예술 대상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파악합니다. 예술가는 설명을 예술 속에 집어넣기 원할지 모릅니다. 예술가는 예술을 이용해 현실을 설명하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예술가는 예술 대상을 설명하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술은 뭔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설명보다 반영에 가깝습니다. 현실 속에는 설명이 없습니다. 일상은 설명서가 아닙니다. 현실은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설명하고 싶어할 뿐입니다. 현실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인간보다 현실은 선천적입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을 때, 유럽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발달한다고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쓸 때까지, 유럽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자세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본론>을 쓸 때까지, 카를 마르크스 역시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자본론>은 미완성이고, 죽을 때까지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자본론>보다 자본주의는 선천적입니다. 설명보다 현실은 선천적입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달리, 찰스 디킨스는 자본주의 경제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올리버 트위스트>를 쓸 수 있었습니다. 찰스 디킨스가 설명하지 않았고 현실을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찰스 디킨스는 얼마든지 고아가 불쌍하게 죽 한 그릇을 더 먹고 싶다고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설명보다 반영은 훨씬 빨리 현실을 따라갈 수 있어요.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는 꼬마 독자가 자본주의 경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꼬마 독자는 올리버가 불쌍하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명보다 반영은 훨씬 현재 진행형입니다. 반면, 카를 마르크스는 현실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올리버 트위스트>와 <자본론>이 똑같이 유럽 자본주의 사회를 말한다고 해도, 양쪽은 서로 다릅니다. 과학과 예술은 다른 방법을 이용합니다. 과학은 설명하나, 예술은 반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명을 좋아할 테고, 어떤 사람들은 반영을 좋아할 겁니다. 사람들이 설명을 좋아한다면, 사람들은 학자나 비평가가 되어야 할 겁니다. 사람들이 반영을 좋아한다면, 사람들은 예술가가 되어야 할 겁니다. 예술은 반영이고, 그래서 예술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습니다.



인간이 현실을 설명하고 싶다면, 인간은 예술가보다 학자나 비평가가 되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설명이라는 방법이 존재함에도, 왜 수많은 사람들이 반영을 좋아하나요? 과학이 현실을 훨씬 제대로 가리킬 수 있다면, 예술이 너무 많은 해석들을 낳는다면, 반영보다 설명이 낫고 예술보다 과학이 낫지 않나요? 문제는 과학에 사회적인 관계가 없거나 미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술은, 특히, 문학은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합니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합니다. 과학은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과학이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한다고 해도, 이건 미약합니다. 심지어 사회학이나 심리학조차 사회적인 관계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문학에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소설 작가 임수현은 문학이 등장인물들의 향연이라고 말합니다. 등장인물들의 향연 속에서 독자는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과학이 이걸 시도할 수 있나요? 페미니즘 서적 <페미니즘을 어따 써먹어>는 숱한 페미니스트들을 이야기합니다. 저자 손냐 아이스만은 <페미니즘을 어따 써먹어>에 숱한 발언들을 집어넣었습니다. <페미니즘을 어따 써먹어>를 읽는 동안, 독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책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항연을 벌입니다. 이게 문학적인 측면인가요?



이건 문학적인 측면보다 과학적인 측면에 가깝습니다. 이건 반영보다 설명입니다. 독자가 <페미니즘을 어따 써먹어>를 문학적으로 읽는다고 해도, 이 책은 문학과 반영보다 과학과 설명에 가깝습니다. 손냐 아이스만은 허구적인 장치를 동원하지 않습니다. 손냐 아이스만은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고민하지 않고, 춤꾼으로서 언어를 이용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뭔가를 생략하거나 덧붙이지 않습니다. 문학에게 이런 허구적인 장치들은 중요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직접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 문학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걸 위해 우리는 문학을 읽습니다. 이게 문학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사회적인 관계는 중요한 목적입니다. 어떻게 현실 속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함에도, 문학 속에서 우리가 그럴 수 있나요? 문학이 허구적인 장치를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을 고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특정한 시점을 이용해 등장인물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70살 먹은 할머니가 소설 <직녀의 일기장>을 읽는다면, 70살 할머니 독자는 소설 화자 '나'가 될 수 있습니다. 70살 할머니 독자는 여자 고등학생이 될 수 있어요. 문학에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웹소설 <뜨거운 동토>는 20세기 초반 핀란드 사회 민주당을 이야기합니다. <뜨거운 동토>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사회 민주당 소녀들입니다. 하지만 역사 소설로서 <뜨거운 동토>는 사회 민주당 소녀들과 함께 역사적인 인물들을 제시합니다. 당연히 이 소설에는 볼셰비키 당원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동토>는 전지적 시점을 이용해 볼셰비키 당원들의 속내들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독자는 코바(이오시프 스탈린)의 마음을 직접 읽을 수 있습니다. <뜨거운 동토>가 전지적 시점이라는 허구적인 장치를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에는 여러 허구적인 장치들(시점, 심리 묘사, 비유와 언어 유희, 환상, 기타 등등)이 있어요. 그래서 독자는 문학을 이용해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논픽션은 이걸 시도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이오시프 스탈린 전기 작가가 스탈린의 마음을 직접 묘사하고 싶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스탈린 전기 작가가 스탈린을 친숙하게 묘사하고 싶다고 해도, 전기 작가는 스탈린의 마음을 직접 묘사하지 못합니다. 전기 작가가 스탈린의 마음을 직접 묘사하는 순간, 이건 설명보다 반영이 됩니다. 마르크스주의 서적 <사회주의는 실패했는가>는 레프 트로츠키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나, 이 책은 트로츠키의 심리를 직접 묘사하지 못합니다. 반면, 케이트 에반스가 그린 만화 <레드 로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심리를 직접 묘사합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는가>는 설명이고, <레드 로자>는 반영에 가까워요. <뜨거운 동토>는 완전히 문학이고 반영입니다.



로버트 서비스가 쓴 <트로츠키>는 레프 트로츠키 전기입니다. 이 책은 온갖 편파적인 거짓말들을 늘어놓고 레프 트로츠키를 왜곡합니다. 따라서 로버트 서비스는 온갖 혹평들을 받아야 합니다. <트로츠키>는 레프 트로츠키 전기를 빙자하는 거짓말 열전입니다. 만약 소설 <뜨거운 동토>가 코바(이오시프 스탈린)를 왜곡한다면, 로버트 서비스가 혹평들을 받는 것처럼, <뜨거운 동토>가 혹평들을 받아야 하나요? 만약 <뜨거운 동토>가 코바를 왜곡한다면, 독자는 소설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역사 소설은 역사 교과서가 아닙니다. 코바와의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하기 위해 <뜨거운 동토>는 코바를 가공하거나 코바의 심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두 양반이 대화했나요? 놀랍게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볼셰비키 주요 당원들조차 뭐라고 대머리 아저씨와 콧수염 아저씨가 떠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해요. 뭐, 그때 레닌조차 콧수염 아저씨가 강철 권력을 차지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뜨거운 동토>는 레닌과 코바가 대화했다고 묘사합니다. 심지어 소설은 그루지아 사회주의자 코바가 핀란드 사회주의 소녀들을 만난다고 말하고 코바의 마음 속으로 직접 들어갑니다. 소설이 허구이기 때문에, 소설은 그럴 수 있어요. 만화 <레드 로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에는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인 인물들(로자, 트로츠키, 스탈린)을 다룬다고 해도, 설명과 반영에는 이런 차이들이 있어요.



환경 오염을 경고하기 위해, 생태학 서적 <침묵의 봄>은 허구적인 장치(새들이 노래하지 않는 미래 세계)를 이용해 독자를 안내합니다. 레이첼 카슨은 시간 여행자가 되고, 미래 세계로 날아가고, 침묵하는 미래 세계를 보여줍니다. 독자는 침묵하는 미래 세계(에 있는 레이첼 카슨)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미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건 문학적인 측면입니다. <페미니즘을 어따 써먹어>는 이런 허구적인 장치를 동원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페미니즘을 어따 써먹어>를 문학적으로 읽는다고 해도, <페미니즘을 어따 써먹어>보다 <침묵의 봄>은 문학적인 향취를 많이 풍깁니다. 찰스 더버가 쓴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같은 책은 훨씬 그렇습니다.


<침묵의 봄>보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훨씬 문학에 가깝습니다. 서평가들이 "소설처럼 이 책은 재미있다."고 호평할 때, '소설 같다'는 비유는 이런 특징을 가리킬 겁니다. 아니, 어쩌면 정말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소설인지 모릅니다. 누가 아나요? 에드워드 벨라미가 소설 <뒤돌아보며>를 쓴 것처럼, 찰스 더버는 소설을 쓰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이 소설이 아니라고 완벽하게 장담할 수 있나요? 뭐, 찰스 더버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철학 서적이나 사회 과학 서적일 겁니다. 이 책은 그저 문학적인 측면을 많이 활용했을 뿐입니다. 과학은 이런 특징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과학이 이런 특징을 받아들일 때, 과학은 문학적인 재미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과학 학습 만화 <이상 기후에서 살아남기>는 교양 과학 서적에 가깝습니다. 이건 문학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 만화에는 아주 커다란 문학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상 기후에서 살아남기>는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입니다. 소녀와 두 소년은 이상한 세계로 떨어지고, 온갖 위기들을 극복하고, 커다란 교훈을 깨닫습니다. 독자는 소녀와 두 소년을 따라가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어요. <이상 기후에서 살아남기>가 문학적인 측면과 허구적인 장치들을 동원하고 등장인물들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등장인물들의 향연이 되는 것처럼, <이상 기후에서 살아남기>는 소녀와 두 소년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세 아이들과 함께 모험하는 동안, 독자는 환경 사회학 지식들을 쌓고 중요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독자가 좀 더 깊은 지식들을 쌓고 싶다면, 독자는 기후 변화 서적들을 참고할 수 있을 거에요. 산업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들을 저지르고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기후 변화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할 테고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미칠 겁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상 기후에서 살아남기>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직접 비판하지 않으나, 독자가 환경 사회학 지식들을 좀 더 많이 쌓는다면, 독자는 이런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독자가 오직 <이상 기후에서 살아남기>만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현실이 이상하다고 깨달을지 모릅니다. 만화 <이상 기후에서 살아남기>에 자세한 환경 사회학이 없다고 해도, 문학으로서 이 만화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문학이 뭔가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비단 문학이 말하는 것만 아니라 문학이 말하지 않는 현실을 직감할 수 있어요. 사실 근본적인 문학 비평은 텍스트가 말하는 것보다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것을 잡아채야 합니다.



어쩌면 과학보다 문학은 선천적일지 모릅니다. 고대 시인들은 해양 생태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고대 시인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해양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과학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고대 시인들은 돌고래를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시인들이 일상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해양 생태학이 없었다고 해도, 고대 시인들은 일상을 반영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은 다릅니다. 과학은 왜 돌고래가 아가미로 숨을 쉬지 않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과학은 왜 돌고래가 다른 물고기들과 다른지 설명해야 합니다. 신화는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신화를 이용해 자연 환경을 이해했습니다.


과거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개가 태양을 물기 때문에 일식이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화는 자연 과학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연 과학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화는 위상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신화 그 자체가 사라졌나요? 그저께 게시글이 언급한 것처럼, 신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매슈 아널드 같은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문화·예술을 이용해 민중들을 통제하기 원했습니다. 이렇게 신화, 과학, 예술(문학)은 복잡한 관계들을 맺습니다. 이런 관계들은 문학이 현실을 (설명하지 않고) 반영한다고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문학을 이용해 사회와 자연을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현실을 설명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문학을 읽고 사회적인 관계를 맺기 원합니다. 문학 이외에 다른 예술들에 이런 특징이 있나요? 어쩌면 이건 문학의 고유한 특징이고, 다른 예술들(그림, 조각, 음악, 춤, 기타 등등)에는 이런 특징이 없을지 모릅니다. 이런 특징이 있다고 해도, 이런 특징은 미약할지 모릅니다. 예술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사이에서 숱한 매체들은 다양한 특징들을 자랑합니다. 그림과 음악이 똑같이 예술이라고 해도, 그림과 음악은 똑같은 표현 방법이 아닙니다. 사실 가사 없는 음악 연주와 노래 역시 똑같지 않습니다.


존 바에즈나 최도은 같은 민중 가수가 민중 가요를 부른다고 해도, 민중 가요에서 가사가 빠진다면, 민중 가요는 힘을 잃을지 모릅니다. 만약 노래 <인터내셔널>에서 가사가 빠진다면, 이게 저항적인 노래가 될 수 있을까요? 최도은이 힘차게 투쟁을 외치고 가사를 부르기 때문에, <인터내셔널>은 저항적인 노래가 될 수 있어요. <인터내셔널>에서 음악 연주보다 가사는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실 19세기 파리 코뮌이 초기 <인터내셔널>을 지었을 때, 파리 코뮌은 <라 마르세예즈> 연주를 빌렸습니다. 오늘날 좌파 정당들이 부르는 <인터내셔널> 곡조와 19세기 파리 코뮌이 지은 초기 <인터내셔널> 곡조는 다릅니다.



음악 연주는 추상적이고, 그 자체로서 음악 연주는 내용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Two Steps From Hell이 <Evergreen>을 연주한다고 해도, 이 음악은 웅장한 녹색 삼림을 직접 가리키지 못합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이 <Evergreen>을 듣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게 웅장한 녹색 삼림을 묘사한다고 생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저 검과 방패를 들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드래곤을 만나기 원할지 모릅니다. 반면, 표지 디자이너 Kayla Harren이 그린 <본 Borne> 그림을 사람들이 구경한다면, 사람들은 이 웅덩이 그림이 뭔가 기이한 자연 생태계나 바이오펑크 인공 생태계를 묘사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Kayla Harren이 멋지게 바이오펑크 웅덩이를 그린다고 해도, 산문이 없다면, 사람들은 이게 무슨 생태계인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다양한 예술 매체들은 다양한 표현 방법들을 동원하고, 이게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이 게시글은 이런 차이들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가 설명하고 싶다고 해도, 저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린은 소설 작가가 아니라 타액 조각가입니다. 타액 조각상이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하나요? 글쎄요. 그렇다고 해도 소설 작가가 자신의 사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린은 자신의 사상으로 현실을 반영합니다. 소설에 허구적인 장치가 있는 것처럼, 타액 조각상에는 허구적인 장치가 있어요. 미스터 모틀리는 타액 조각상을 이용해 다른 사람(린)의 특정한 사상을 느낄 수 있어요.


이건 문학을 비롯해 예술에 오직 이런 특징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학을 비롯해 예술이라는 테두리는 끊임없이 줄어들고 늘어나고 바뀝니다. 이런 허접하고 서툴고 짧은 게시글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테두리를 규정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왜 우리가 문학을 비롯해 예술을 생산하고 소비하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SF 소설 역시 소설이고 문학이고 예술입니다. SF 독자들이 다른 과학 서적들보다 SF 소설을 원한다면, SF 독자들이 <2030 화성 오디세이>보다 <녹색 화성>을 읽기 원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겁니다.



린은 학자나 비평가보다 예술가입니다. 그래서 린이 미스터 모틀리의 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린은 타액 조각에 미스터 모틀리의 몸을 (설명하지 않고) 반영할 수 있어요. 미스터 모틀리는 린이 언어를 이용해 예술 대상을 분석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해와 무지 사이에 타액 조각 예술은 존재합니다. 예술이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와 무지 사이에 예술은 존재할 수 있어요. 이건 예술의 장점이고 단점이고 특징입니다. 특히, SF 작가에게 이런 특징은 반가울지 모릅니다. SF 작가는 자신이 묘사하는 미래 세계를 직접 겪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화성 개척을 논의할 때마다, 사람들은 킴 스탠리 로빈슨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킴 스탠리 로빈슨은 싱그러운 녹색 삼림 화성을 절대 겪지 못할 겁니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하는 미래로 직접 떠나지 못한 것처럼, 킴 스탠리 로빈슨은 녹색 삼림 화성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킴 스탠리 로빈슨은 허구적인 장치를 동원하고 미래적인 사회 관계를 제시할 수 있어요. 문학은 허구적인 장치를 동원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합니다. 문학이 허구적인 장치를 동원할 수 있다면, 왜 이런 허구적인 장치가 비단 과거나 현재만 아니라 미래로 뻗지 못하나요? 그래서 <녹색 화성> 같은 예술(문학)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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