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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둠스데이 북>과 농담과 죽음 그리고 행성급 환경 오염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둠스데이 북>과 농담과 죽음 그리고 행성급 환경 오염

OneTiger 2019. 4. 20. 20:30

코니 윌리스가 쓴 <둠스데이 북>은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신나고 떠들썩하고 즐거운 성탄절과 첨단 미래 도시와 고요한 중세 마을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꽤나 희극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매력 덩어리이고 사방에 독특한 개성들을 펼칩니다. 어떤 등장인물은 꽤나 얄밉고, 어떤 등장인물은 장난기를 한껏 발산하고, 어떤 등장인물은 농담 따먹기에 어울립니다. 온갖 좌충우돌 소동은 여기에 한 몫을 더합니다. 코니 윌리스는 연이어 농담들과 우스꽝스러운 소동들과 톡톡 튀는 등장인물들을 늘어놓습니다.


종종 <둠스데이 북>은 진지한 분위기를 연출하나, 전반적으로 이 소설은 진지함보다 쾌활함에 치우칩니다. 소설의 시간적인 배경이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동들은 훨씬 흥겹게 휘돌 수 있습니다. 속편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그런 것처럼, <둠스데이 북>은 희극적인 분위기에 치중합니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보다 <둠스데이 북>은 어느 정도 진지하나, <둠스데이 북>에서도 유쾌한 장난들은 커다란 특징입니다. <둠스데이 북>은 시간 여행 이야기보다 한 편의 우스꽝스러운 수다 같습니다. 농담 같은 사건들과 톡톡 튀는 등장인물들은 독자의 시선을 빼앗을 겁니다.



문제는 <둠스데이 북>이 대규모 전염병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입니다. <둠스데이 북>은 시간 여행 이야기이고 동시에 전염병 아포칼립스입니다. 이 소설은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고 말하지 않으나, 정체 불명의 전염병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비록 <둠스데이 북>이 <스탠드>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은 목숨들을 잃었습니다. 소설 <둠스데이 북>은 비참하고 암울한 죽음들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가볍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런 사건은 절대 가볍지 않을 겁니다.


이런 대대적인 죽음에는 농담 따먹기나 우스꽝스러운 소동이나 톡톡 튀는 등장인물이나 장난스러운 수다가 어울리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소설 <둠스데이 북>에는 이런 것들이 함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장난스러운 수다가 있고 동시에 대대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이 농담거리가 아님에도, <둠스데이 북>에는 죽음과 농담이 함께 있습니다. 이 소설이 전염병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가끔 이 소설은 농담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농담과 죽음은 크게 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둠스데이 북>은 전염병과 죽음을 늘어놓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쾌활합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이게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소설이 아닌가요?



만약 장례식장에서 누군가가 크게 웃거나 농담하거나 장난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욕하거나 탓할 겁니다. 심지어 싸움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장례식장은 죽음을 다룹니다. 죽음은 엄숙해야 합니다. 장례식장과 농담은 어울리지 않아요. 가끔 어떤 사람들은 장례식이 좀 더 밝고 가볍기 원합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어떤 여자는 자신의 장례식이 신나는 노래와 어울리기 원합니다. 정말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신나는 노래 <바이 바이 베이비>를 틀고 문자 그대로 '웃픈 얼굴들'로 죽은 사람을 떠나보냅니다. 그렇다고 해도 죽음은 엄숙합니다. 죽음은 종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 생명체이고, 결국 우리는 막다른 길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건너야 합니다. 유한 생명체로서 우리에게 죽음은 정말 최종적인 목적지이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나든, 우리가 편안하게 두 눈을 감든, 결국 양쪽 모두 막다른 길에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엄숙합니다. 그래서 죽음과 농담은 어울리지 않아요. 하지만 소설 <둠스데이 북>은 대대적인 죽음과 농담들과 우스꽝스러운 소동들을 함께 보여줍니다. <둠스데이 북>은 장례식장 속의 농담들과 웃음들 같습니다. 이런 표현이 죽음을 모독하나요?



물론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다양합니다. 장자는 야생 동물들이 자신의 시체를 뜯어먹기 원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고귀하다고 해도, 시체는 그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결국 시체는 썩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체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장자는 비싸고 화려한 장례식이 헛짓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호화롭게 장례를 치른다고 해도, 시체는 그저 시체에 불과합니다. 시체는 썩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야생 동물들이 시체를 뜯어먹는다고 해도, 이건 모욕이 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시체를 인간이라고 생각해야 하나요? 한때 시체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시체가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리처드 매드슨이 쓴 <나는 전설이다>에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흡혈귀들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그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소설 주인공은 흡혈귀들에게서 인간적인 잔재들을 엿봅니다. 그들이 인간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비단 <나는 전설이다>만이 아니라 수많은 좀비 아포칼립스들은 이런 모순을 다룹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가 된다면, 우리가 그 좀비를 사악한 언데드라고 간주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 좀비를 아무렇지 않게 처치할 수 있나요?



소설 <시인장의 살인>은 왜 좀비 이야기가 무서인지 보여줍니다. 좀비는 무섭습니다. 한편으로 좀비는 서글픕니다. 좀비는 인간과 닮았습니다.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는 제작 비용을 아낄 수 있습니다. 배우들이 대충 분장하고 어기적거리며 걷는다고 해도, 배우들은 얼마든지 좀비가 될 수 있습니다. 늑대인간 분장보다 좀비 분장은 훨씬 쉽습니다. 좀비가 인간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화 제작자들은 이런 특징에 주목하고 좀비 영화를 만들기 원할지 모릅니다. 영화 <슈퍼 에이트>에서 주연 등장인물 소년들과 소녀는 싸구려 좀비 영화를 만듭니다. 그들은 늑대인간 영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늑대인간 분장은 어렵습니다. 좀비 분장은 훨씬 쉽습니다. 배우가 지저분하게 화장하고 피를 묻힌다면, 배우는 좀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좀비가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에, 좀비는 서글픕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가 된다면, 우리가 그 좀비를 쉽게 처치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마에 쉽게 총알을 쏠 수 있을까요? 언데드가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언데드가 닮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비 아포칼립스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어쩌면 죽음에도 비슷한 모순이 있을지 모릅니다. 왜 우리가 시체를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장례를 치르러야 하나요? 시체는 시체입니다. 시체는 인간이 아니에요. 우리가 시체를 존중한다면, 이건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요?



우리는 시체를 들판에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종 유목민들은 시체를 들판에 버립니다. 유목민들은 그게 예의이고 장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착 민족 문화는 이런 장례가 야만스럽다고 혐오할지 모르나, 유목 민족 문화에게 이런 장례는 전통인지 모릅니다. 누가 옳은가요? 우리가 누가 옳다고 판단할 수 있나요? 소설 <휴먼 디비전>에서 어떤 외계인은 인간에게 침(물)을 뱉습니다. 만약 인간이 다른 인간의 얼굴에 침(물)을 뱉는다면, 이건 모욕이 될 겁니다. 하지만 외계인에게 이건 악수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악수하는 것처럼, 외계인들은 서로 침(물)을 뱉습니다.


외계인이 인간에게 침(물)을 뱉었다고 해도, 인간은 화내지 못합니다. 이게 악수이기 때문입니다.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 외계인은 침(물)을 뱉었을 겁니다. 만약 인간이 화낸다면, 오히려 이건 예의가 아닐 겁니다. 외계인에게 침(물)이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는 문화가 꽤나 상대적이라고 말합니다. 문화 상대주의는 이런 사례들을 좋아할 겁니다. 유목 민족 문화가 시체를 들판에 버린다고 해도, 이건 예의인지 모릅니다. 정착 민족 문화는 유목 민족 문화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겁니다. 우리는 죽음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고 해도, 이건 모독이 아닌지 모릅니다.



시체는 시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시체에게서 연민과 추억을 이끌어낸다고 해도, 이건 가식이고 위선인지 모릅니다. 장례식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인지 모릅니다. 이건 장례식이 모두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죽음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면, <둠스데이 북> 역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소설이 되지 않을 겁니다. 소설 <둠스데이 북>에 죽음과 농담이 함께 있다고 해도, 이건 모욕이 아닌지 모릅니다. 사실 인생에서 우리는 농담과 죽음을 함께 겪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죽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침울한 비관으로 인생을 장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한 생명체라고 해도, 우리는 웃고 농담합니다. 무한 생명체들은 이런 모습이 모순이라고 여길지 모릅니다. 그들은 왜 유한 생명체로서 인간이 웃고 농담하는지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소설 <기시감>에서 인공 지능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처럼 느끼고 싶어합니다. 여러 기술적 특이점 소설들에서 인공 지능이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유한 생명체이나, 우리는 웃고 떠듭니다. 이건 모순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웃고 떠듭니다. 우리는 막다른 길을 인식해야 하나, 우리는 오직 그것만을 인식하지 않아요.



심지어 죽음과 가까운 좌파들조차 언제나 오직 죽음만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좌파들은 지구에 온갖 비참한 모순들이 있다고 인식합니다. 지배 계급은 수많은 민중들을 세뇌시킵니다. 지배 계급은 소수이고, 민중들은 다수입니다.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고 싶다면, 소수는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소수 지배 계급은 온갖 거짓말들을 늘어놓습니다. 지배 계급은 신이 자신들을 낙점했다고 말합니다.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혈통들이 고급스럽다고 말합니다. 지배 계급은 국가 정부가 사회 구성원들을 보호한다고 말합니다. 지배 계급은 인간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이고 시장 경제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지배 계급은 남자가 강간을 좋아하고 여자가 수동적으로 강간을 바란다고 말합니다. 지배 계급은 유럽 백인이 우월하고 열대 원주민들이 열등하다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거짓말들이고 세뇌들이고 헛소리들입니다. 하지만 민중들은 이것들을 믿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미 인간은 사회화 과정에 포섭되고 세뇌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류 사회에는 물질성이 있습니다. 민중들은 물질성을 받아들이고 세뇌들을 받아들이고 지배 계급에게 충성합니다.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이런 민중들을 욕합니다. 지배 계급이 민중들을 세뇌시켰음에도,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지배 계급보다 민중들을 욕합니다. 이런 진보 지식인들은 수구 꼴통 지식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지배적인 체계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좌파들은 살아갑니다. 좌파들은 모순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소수 지배 계급은 다수 민중들을 세뇌시키고, 다수 민중들은 끔찍한 비극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이런 세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목처럼, 수산업 논픽션 <포 피시>는 연어, 대구, 참치, 농어를 이야기합니다. <포 피시>는 네 물고기들을 이용해 대규모 어업과 해양 생물 자원, 생물 다양성 위기를 이야기합니다. 근대적인 진보는 대규모 어업을 만들었고, 대규모 어업은 해양 생물 자원을 싹쓸이합니다. 해양 생물 다양성은 크게 줄어듭니다. <포 피시>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꽤나 친숙한 주장입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을 파괴합니다. <포 피시>는 이런 주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인류 문명이 탐욕스러운가요? 인간이 정말 이기적인가요? 문제는 모든 인간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문명에는 수직적인 계급 구조가 있습니다. 수탈과 착취 없이, 수직적인 계급 구조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실 근대적인 진보는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했습니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가 구구절절 떠드는 것처럼, 식민지 수탈 없이 근대적인 진보는 없습니다. 하지만 <포 피시>는 이걸 말하지 않아요.



우리가 시각을 아메리카 식민지보다 유럽 문명으로 한정한다고 해도, 근대적인 진보는 절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인클로저 비극은 수많은 농민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갔습니다. 산업 공장들이 매연들을 뿜는 동안, 가난한 노동자들은 죽어나갔습니다. 산업 자본가들은 아이들을 공장들과 탄광들로 밀어넣었습니다. 아이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산업 자본가들은 이게 시장의 자유라고 지껄였습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여자가 가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여자 노동자는 많은 임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실 가난한 여자 노동자들은 산업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여자가 가정적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여자가 가정적일 때, 산업 자본주의는 핑계를 대고 훨씬 적은 임금을 줄 수 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착취했습니다. 이런 착취 때문에 산업 자본주의는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어요. 남한 사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여자가 적은 돈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여자 노동자들을 값싸게 착취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커다란 손해를 볼 겁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여자 노동자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남한 사회는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기적인가요? 끔찍한 착취가 기적인가요? 착취는 부정적인 단어이고, 기적은 경이로운 단어입니다.



한강의 기적은 기적이 아닙니다. 이건 착취입니다. 한강의 기적은 여자 노동자들을 착취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을 운운하고 경제 발전을 찬양합니다. 이게 아주 심각한 고정 관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이 착취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좌파들이 논리적으로 열심히 설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정 관념은 무섭습니다. 광신도들은 진화 이론을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물학자들이 논리적으로 열심히 설득한다고 해도, 광신도들은 진화 이론을 믿지 않습니다. 광신도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이 착취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지배 계급이 퍼뜨리는 거짓말을 믿습니다. <포 피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코 페미니즘 지식인들은 근대적인 진보가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했다고 이야기하나, <포 피시>는 식민지 수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포 피시>가 원주민 낚시를 이야기함에도, <포 피시>는 식민지 수탈을 인식하지 못해요. 그래서 이 책은 인류 문명이 이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포 피시>는 인류가 평등하게 자연 환경을 공유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포 피시>는 세뇌와 거짓말과 헛소리를 추구합니다. 비단 <포 피시>만 아니라 수많은 자연 과학 서적들과 환경 논픽션들은 헛소리를 따릅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좌파들은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좌파들은 이런 모순을 의식해야 합니다. 이건 거의 정신 분열증과 마찬가지입니다. 좌파들은 이 세상에 세뇌가 있다고 인식합니다. 동시에 좌파들은 세상이 당장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좌파들은 모순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좌파들이 웃고 농담할 수 있나요? 좌파들은 밑바닥 계급을 바라봅니다. 밑바닥 계급은 고통스럽다고 울부짖습니다. 좌파들은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인식하고 세뇌를 인식하고 거짓말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좌파들이 웃고 농담할 수 있나요? 하지만 수많은 좌파들은 웃고 농담합니다.


언제나 좌파들은 오직 고통스러운 비명만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좌파들은 밑바닥 계급을 바라보고, 한편으로 좌파들은 일상을 살아가고 웃고 떠듭니다. 이건 이중적인 생활인지 모릅니다. 이중 인격처럼, 좌파들은 고통스러운 비명들과 즐거운 일상을 함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게 잘못인가요? 이게 좌파들의 잘못인가요? 언제나 좌파들이 침울하게 살아가야 하나요? 좌파들이 즐거움을 느껴서는 안 되고, 농담해서는 안 되고, 웃어서는 안 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좌파들은 초인이 아닙니다. 매 순간마다 좌파들이 오직 고통만 의식해야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좌파는 미쳐버릴 겁니다.



심지어 좌파들조차 비참한 고통과 유쾌한 농담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훨씬 그렇습니다. 현실 속에는, 일상 속에는 죽음이 있고 농담이 있습니다. 유한 생명체로서 우리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나, 언제나 우리는 오직 죽음만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보다 농담들을 훨씬 많이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유한 생명체라고 해도, 우리가 필멸자라고 해도, 우리는 당장 죽음과 맞부딪히지 않습니다. 죽음에 닿기 위해 우리는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필멸자이나, 인생 없이 죽음은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죽음과 농담을 함께 받아들인다면, 문학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문학은 현실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하나, 문학은 어느 정도 현실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죽음과 농담이 함께 있기 때문에, 문학은 죽음과 농담을 함께 모방할 수 있어요. 소설 <둠스데이 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둠스데이 북>이 우스꽝스러운 소동들을 늘어놓고 대대적인 전염병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소설이 아닐 겁니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소설 <둠스데이 북>은 그저 현실을 모방했을 뿐입니다. 만약 <둠스데이 북>이 비윤리적이라면,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훨씬 비윤리적일 겁니다. 이 소설은 지구가 부서졌다고 농담합니다. 지구가 부서진다면, 수많은, 정말 수많은 생명체들은 죽을 겁니다.



정말 수많은 생명체들이 죽었음에도, 소설 <은하수 안내서>는 아무렇지 않게 농담 따먹기합니다. 이게 비윤적인가요? 수많은 생명체들이 죽었음에도, 어떻게 <은하수 안내서>가 아무렇지 않게 농담 따먹기할 수 있나요? 하지만 문학 평론가들은 이걸 풍자와 해학이라고 부를 겁니다. 문학에는 풍자와 해학이 있습니다. 문학은 비극을 우스꽝스럽게 포장할 수 있습니다.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비극을 희석하기 위해, 비극에 희망을 덧붙이기 위해, 문학은 풍자와 해학을 추구합니다.


물론 풍자와 해학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문학이 뭔가를 풍자할 때, 문학은 약자들, 피지배 계급을 바라봐야 합니다. 강자들, 지배 계급에게는 풍자가 없습니다. 이미 그들이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피지배 계급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피지배 계급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피지배 계급은 웃어야 합니다. 이건 웃음보다 눈물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풍자와 해학은 웃음을 빙자하는 눈물인지 모릅니다. 소설 <둠스데이 북>은 어떤가요? <둠스데이 북>은 지배 계급을 떠받들지 않습니다. 전작 <화재 감시원>이 그런 것처럼, <둠스데이 북>은 민중들을 바라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소설 <둠스데이 북>이 농담과 죽음을 함께 이야기한다고 해도, 코니 윌리스는 비윤리적인 작가가 아닐 겁니다. 소설 <둠스데이 북>은 풍자와 해학에 가까울 겁니다. 무엇보다 <둠스데이 북>은 소설이고 문학이고 창작물입니다. 창작물은 허구입니다. 아무리 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이건 그저 허구에 불과합니다. 독자가 <둠스데이 북>을 읽고 크게 웃는다고 해도, 독자는 비윤리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독자는 그저 해학을 즐길 뿐이고 허구를 즐길 뿐입니다. 문학 평론이 전염병을 이용해 농담을 곁들인다고 해도, 이것 역시 해학이고 허구입니다.



여기 <SF 생태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SF 생태주의>에서 저는 생태적인 상상력들을 떠듭니다. 생태적인 상상력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기후 변화일 겁니다.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다른 생태적인 상상력들보다 행성급 환경 오염은 훨씬 현실적입니다. 거대 괴수는 존재하지 않고, 첨단 바이오 돔은 크지 않고, 테라포밍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생체 우주선은 머나먼 미래입니다. 하지만 행성급 환경 오염은 이미 존재하고, 거대하고, 현실적입니다. 동시에 행성급 환경 오염은 어마어마한 죽음들과 고통들을 초래합니다. 작가 사레나 울리바리(Sarena Ulibarri)는 Cli-Fi 소설들이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이 너무 암울하기 때문에, Cli-Fi 소설들이 디스토피아를 묘사한다면, 독자들은 절망하고 대안을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역사의 종언을 주절거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대안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Cli-Fi 소설들이 디스토피아를 묘사한다면, 독자들은 훨씬 절망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Cli-Fi 소설들은 대안을 제시하고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행성급 환경 오염은 암울합니다. 여기 <SF 생태주의>에서 저는 압도적이고 암울한 기후 변화를 말합니다. 이렇게 제가 심각한 환경 오염들을 떠듬에도, 제가 농담을 던지거나 히히덕거린다면, 이게 비윤리적이지 않을까요? 여기 <SF 생태주의>에는 여러 농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행성급 환경 오염과 농담들이 함께 있을 수 있나요?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는 별로 엄숙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창작물을 바라봐야 하나요?]



물론 창작물들은 비극을 반드시 엄숙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이매진 어스>는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빙하 축소를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환경 오염들을 방치한다면, 지구 온난화는 해수면을 높일 테고, 수많은 사람들은 물귀신이 될 겁니다. 게임 <이매진 어스>는 문자 그대로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별로 진지하지 않습니다. 그림체가 아기자기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이매진 어스>가 엄숙하고 진지하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초기 판본에서 <이매진 어스>는 훨씬 단순하고 아기자기한 그림체를 보여줬습니다.


이런 그림체는 행성급 환경 오염, 어마어마한 비극과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이매진 어스>가 비윤리적이라고 게임 플레이어가 비판해야 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창작물은 반드시 엄숙한 내용을 엄숙한 표현 방법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내용과 형식은 긴밀한 관계를 맺으나, 엄숙한 내용은 언제나 엄숙한 형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내용과 형식이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면, 문학은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지 못할 거에요. 창작물에서 내용과 형식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면, 창작물 덕질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요. 창작물이 내용과 형식을 다르게 이용한다면, 창작물 덕질 역시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창작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해도, 이건 허구입니다. 게임 <이매진 어스>에서 지구 온난화가 빙하를 녹이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해안 도시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된다고 해도, 이건 허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귀신이 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아무렇지 않게 욕설을 내뱉고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게임 플레이어는 "우아, 굉장하다! 바다가 해안 지역들을 덮쳤어! 이건 정말 대박이야!"라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게임 속에서 해수면 상승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감탄할 수 있습니다. 이 게임 플레이어가 비윤리적인가요? 우리가 이 게임 플레이어를 비판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허구는 허구입니다. 게임 <이매진 어스>에서 해수면 상승이 해안 도시를 덮친다고 해도, 현실에서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대한 볼거리를 위해 게임 제작자들은 지구 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게임 제작자들이 해수면 상승을 과장하고 신나게 사람들을 바다에 빠뜨린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창작물이 허구적으로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면, 비평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창작물 덕질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덕후가 "와, 씨발, 바다는 도시를 덮쳤고 수 만 명을 죽였어! 이건 존나 멋져!"라고 감탄한다고 해도, 덕후는 그저 허구를 즐길 뿐입니다. 덕후는 그저 죽음과 고통보다 거대한 규모를 즐길 뿐입니다.



문제는 창작물과 현실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창작물이 허구라고 해도, 현실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창작물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소설 속에 현실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소설을 읽습니다. 현실 속에 19세기 진화 이론이 있었기 때문에, 허버트 웰즈는 소설 <타임 머신>을 썼습니다. 소설 <타임 머신>에서 시간 여행자가 응가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시간 여행자가 응가했을 거라고 간주합니다. 왜? 현실 속에서 인간이 응가하기 때문입니다. 엘로이 위나는 응가하지 않을지 모르나, 인간 시간 여행자는 응가할 겁니다. 소설이 응가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시간 여행자가 응가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가 뭔가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현실이라는 생산 조건은 창작물을 만듭니다. 인간은 현실의 물질성을 받아들이고 현실의 물질성을 이용해 창작물을 소비합니다. 이렇게 현실과 창작물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현실 속의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하기 위해 독자는 창작물을 소비할지 모릅니다. 창작물이 뭔가를 이야기한다면, 독자는 그걸 현실에 다시 적용할지 모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성 차별을 저지른다면, 성 차별 관념은 3류 저질 포르노를 만들 겁니다. 독자는 가부장적인 편견을 이용해 3류 포르노를 읽을 겁니다. 독자는 3류 포르노를 이용해 가부장적인 편견을 재생산할 테고, 독자는 이걸 다시 현실에 적용할 겁니다. 독자는 성 추행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독자는 강간이 범죄가 아니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아무 비판 없이 환경 아포칼립스 덕후가 심각한 환경 아포칼립스들을 받아들인다면,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환경 아포칼립스 덕후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간주할지 모릅니다. 아니,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대규모 학살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환경 아포칼립스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창작물이 허구라고 해도, 환경 아포칼립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면, 이게 정말 멋지다고 호들갑을 떨 상황인가요? 따라서 우리가 창작물을 소비할 때, 언제나 우리는 현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SF 생태주의>에서 저는 환경 오염들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저는 (썰렁하고 시시한) 농담들을 히히덕거립니다. 솔직히 저는 윤리나 도덕에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윤리와 도덕이 상부 구조이고 상부 구조가 토대(경제 현상)에서 파생한다고 말했습니다. 소설 <휴먼 디비전>에서 외계인이 인간의 얼굴에 반갑게 침(물)을 뱉는 것처럼, 절대적인 윤리와 도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도덕은 망상이에요. 그래서 저는 윤리와 도덕이 위선이고 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유주의 박애 정신이 윤리를 부르짖고 헛소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히 윤리와 도덕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겁니다.


인간이 창작물을 이용해 농담한다고 해도, 이건 비윤적인 행위가 아닐 겁니다. 소설 <둠스데이 북>이 해학을 추구하는 것처럼, 여기 <SF 생태주의>가 늘어놓는 (썰렁하고 시시한) 농담들 역시 해학이 되고 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 창작물들을 이야기하고, 창작물들은 허구입니다. 제가 농담한다고 해도, 저는 허구를 이용해 농담합니다. 제가 허구를 이용해 농담한다고 해도, 저는 현실을 경계합니다. 물론 저 역시 그저 인간에 불과합니다. 저 역시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에게는 가부장적인 편견, 자유주의적인 편견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저에게는 그런 것들이 있을 겁니다. 사회적인 존재 인간이 사회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나요?



하지만 저는 현실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제가 현실을 경계한다면, 제가 환경 아포칼립스를 이용해 농담한다고 해도, 이건 비윤리적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죽음과 농담이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은 이게 죽음을 모욕한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언어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언어에는 수많은 헛점들과 빈틈들이 있습니다. 언어에 헛점들과 빈틈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제 의사를 완벽하게 전달하지 못합니다. 제가 죽음을 모욕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제가 (썰렁하고 시시한) 농담들로 죽음을 모욕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완벽한 의사 소통은 불가능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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