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신의 망치>가 하드 SF 소설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는가 본문
[하드 SF의 장점은 외계인이 아니라 복잡한 공학을 찬미하는 가능성입니다. (이미지 출처)]
소설 <신의 망치>를 비평하는 어떤 글에서 듀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20세기의 정통 하드 SF 대부분은 곧 구닥다리가 될 것이다. 윌리엄 깁슨이 얼마 전 트위터에서 지적했듯, 우리의 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예언한 건 하드 SF 작가들이 아니라 J.G. 발라드와 같은, 다른 비전을 가진 작가들이었다." 이 비평은 꽤나 모순적인 상황을 지적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드 SF 소설들이 복잡하고 엄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뉴웨이브 소설이나 소프트 SF 소설은 헐렁하고 과학적으로 엄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드 SF 소설들이 가장 핵심적인 SF 장르라고 여기죠.
하지만 복잡하고 엄중하기 때문에 하드 SF 소설은 특정 시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특정 시대의 과학 기술(적인 상상력)이 낳은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설정이 아주 헐렁하기 때문에 소프트 SF 소설은 폭넓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은 특정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소프트 SF 소설은 여기저기 들러붙을 수 있고, 제임스 발라드는 아서 클라크보다 훨씬 미래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 발라드에게 미래를 예언할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시대 변화는 제임스 발라드에게 손을 들어준 것 같습니다.
이는 하드 SF 소설이 허망하다고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하드 SF 소설은 특정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닥다리가 될 겁니다. SF 매니아들은 하드 SF 소설이 SF 장르의 핵심이라고 부르짖으나, 하드 SF 소설에게는 구닥다리가 된다는 태생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드 SF 소설들에게 아무 가치가 없을까요? SF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들이 구닥다리가 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까요? 듀니님이 저렇게 비평했음에도, 저는 여전히 하드 SF 소설이 SF 장르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SF 소설은 미래를 예언하는 장르가 아닙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기능은 SF 소설의 주된 목표가 아닙니다.
설사 SF 작가들이 우연히 미래를 예측했다고 해도, 그것들은 오직 우연에 불과합니다. 어떤 글에서 듀나님 역시 SF 작가들이 스마트폰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 미래를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SF 작가들이 통밥을 굴린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그저 미래를 현재로 끌어올 뿐입니다. SF 작가들은 직접 미래로 나가지 못합니다. 수많은 미래들을 현재로 끌어오기 때문에 우연히 몇몇 SF 소설은 미래를 때려맞춥니다. 그건 예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드 SF 소설이 미래를 제대로 때려맞추지 못한다고 해도, SF 독자들이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드 SF 소설이 미래를 제대로 때려맞추지 못한다면, 왜 작가들이 하드 SF 소설을 써야 할까요? 하드 SF 소설이 미래를 예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구태여 작가들이 복잡하고 어려운 하드 SF 소설에 매달려야 할까요? 네, 저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드 SF 소설들이 인류 문명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살펴보기 때문입니다. <신의 망치>는 아서 클라크가 쓴 소설입니다. 소설 <2001 우주 대장정>으로서 아서 클라크는 유명합니다. 고대 유인원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2001 우주 대장정>은 시작합니다. 아서 클라크는 곧바로 우주 탐사선을 말하지 않고, 그 전에 고대 유인원들을 언급합니다.
이렇게 하드 SF 소설은 인류 문명이 걸어온 길을 신중하게 살피고, 거기에서 미래적인 변화를 도출합니다. <타임십> 같은 소설은 아예 시대적인 변화들을 대대적으로 늘어놓습니다. 뉴웨이브 소설은 이렇게 시도하지 못합니다. <물에 잠긴 세계>에서 소설 등장인물들은 공룡 시대 운운합니다. 하지만 그건 지구 생태계가 걸어온 길을 살피는 시각이 아닙니다. <물에 잠긴 세계>가 공룡 시대를 운운하는 이유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공룡과 춤을>처럼 <물에 잠긴 세계>가 훌륭한 공룡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물에 잠긴 세계>는 지구 생태계가 걸어온 길을 자세하게 살피지 않죠.
하드 SF 소설은 과거를 면밀하게 살피고, 거기에서 미래를 도출합니다. 그런 미래가 옳지 않다고 해도, 그건 하드 SF 소설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하드 SF 소설은 감동적입니다. 우리는 하드 SF 소설이 미래를 예측하기 때문에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그건 결과론입니다. 우리는 방법론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드 SF 소설의 방법(하드 SF 소설이 과거를 면밀하게 살피고, 거기에서 미래를 도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드 SF 소설에 감동합니다. 만약 우사인 볼트와 10살짜리 꼬마 여자 아이가 경주한다면, 우사인 볼트는 설렁설렁 꼬마 아이를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꼬마 아이가 격렬하게 달린다고 해도, 꼬마 아이는 우사인 볼트를 이기지 못하겠죠. 하지만 꼬마 아이가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런 모습은 꽤나 감동적일 겁니다.
하드 SF 소설 역시 비슷합니다. 하드 SF 소설이 치열하게 과거를 고민하고 미래를 도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드 SF 소설이 감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결과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역사가 앞으로 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그런 함정에 빠집니다. 우리는 현재에서 과거를 평가합니다. 가령, 우리가 소비에트 연방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게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사라졌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사라졌다고 여기지 않고) 그게 사라졌기 때문에 그게 잘못되었다고 여기죠. 저는 그런 해석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과론보다 방법론에 주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드 SF 소설에는 숱한 설정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SF 매니아들은 신나게 설정놀음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물에 잠긴 세계>를 보세요. <노변의 피크닉>을 보세요. <소멸의 땅>을 보세요. 이런 소설들은 너무 헐렁합니다. 이런 소설들은 너무 포괄적입니다. 이상 구역에서 갑자기 기괴한 좀비 무리가 나타나고 스토커들을 짓밟는다고 해도, 그건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설정이 너무 헐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낙원의 샘>에서 갑자기 좀비 무리가 출현한다면, 그걸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논리적인 전개들을 기반에 깔아야 합니다.
<낙원의 샘>은 하드 SF 소설입니다. 하드 SF 소설 속에서 뭔가 비일상적인 사건이 터진다면, 그 사건은 수많은 설정들을 설명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비일상적인 사건이 터질 수 있는지 작가는 설정들을 조합해야 합니다. 그건 아주 복잡한 퍼즐 놀이 같습니다. 작가는 능숙하게 퍼즐을 짜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설정 놀음의 커다란 재미죠. <물에 잠긴 세계>에는 이런 재미가 부족해요. <노변의 피크닉>에서 이상 구역은 무엇이든 만들고, 그래서 퍼즐 놀이는 없습니다. 이건 너무 헐렁하고 포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놀이를 좋아하는 SF 매니아는 <노변의 피크닉>보다 <낙원의 샘>을 좋아할 겁니다. 수많은 퍼즐들을 짜맞출 수 있을 때, 퍼즐 놀이는 더욱 즐거울 겁니다.
비일상적인 사건을 터뜨리는 전개는 당연히 과학적 상상력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건 사회 과학적인 상상이거나 자연 과학적인 상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기 원한다면, 우리가 아주 비일상적인 뭔가를 만들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회와 과학을 동원해야 합니다. 사회를 동원한다면, 우리는 생태 혁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과학을 동원한다면, 우리는 똑똑한 개조 생명체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설사 인류 문명 밖에서 비일상적인 사건이 나타난다고 해도, 하드 SF 소설은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드 SF 소설은 사회 과학이나 자연 과학을, 특히 자연 과학을 엄중하게 끌어들여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사회와 과학을 이용해 뭔가를 만들고, 그래서 하드 SF 소설들 역시 그렇습니다.
특히, 과학 기술은 근대 문명을 크게 바꿨고, 하드 SF 소설은 그런 과학 기술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힘을 믿습니다. 하드 SF 소설은 우리 인류가 과학 기술과 첨단 장비를 사용한다고 가장 강력하게 떠듭니다. 하드 SF 소설 속에서 우리 인간은 뭔가를 뚝딱뚝딱 만듭니다. 그건 우주 강화복이나 만능 잠수함이나 생체 비행선이나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만들든, 우리는 뚝딱뚝딱 만듭니다. 하드 SF 소설은 그런 설정 놀음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하드 SF 소설은 당대의 과학 패러다임과 과학 기술을 반영하죠. 후대 사람들은 하드 SF 소설을 이용해 과거의 과학 패러다임과 과학 기술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겁니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면, 문학으로서 하드 SF 소설은 현실의 과학 패러다임을 반영하죠.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저는 하드 SF 소설이 SF 장르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이 브레드버리의 소설들은 과거를 치열하게 고찰하거나 거기에서 미래를 이끌어내거나 첨단 장비들을 늘어놓거나 복잡한 퍼즐 놀이를 선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아서 클라크와 레이 브레드버리를 똑같이 비교하겠어요.
솔직히 저 역시 하드 SF 소설들이 부담스럽다고 느낍니다. 하드 SF 소설은 어렵죠. 여전히 저는 <블라인드 사이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드 SF 소설을 읽는 행위는 즐겁습니다. 저는 왜 그런 독서가 즐거운지 이유들을 늘어놨습니다. 시대가 흐른다고 해도, 그런 이유들 때문에 하드 SF 소설은 재미있을 겁니다. 그래서 하드 SF 소설들이 구닥다리가 된다고 해도, SF 독자들에게 실망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여전히 SF 출판사들은 여러 하드 SF 소설들을 내놓는 중입니다. 아서 클라크가 구닥다리라고요? 괜찮습니다. 우리는 아서 클라크에게 우아하게 경의와 작별 인사를 표시하고, 다른 하드 SF 소설들을 집어들 수 있습니다.
아니, 아서 클라크에게 경의를 표하기 전에 잠시 저는 <라마와의 랑데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21세기 중반이 넘어간다고 해도, <라마와의 랑데부>가 구닥다리가 될까요? 라마 우주선이? 이 거대한 폐쇄 생태계가? 생체 로봇들이? 유전자 복제 공정들이? 글쎄요, 우리가 직접 50km짜리 폐쇄 생태계와 생체 로봇들과 유전자 복제 공정들을 만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 라마에게 감동할 겁니다. (게다가 라마 우주선을 이용해 <라마와의 랑데부>는 경이적인 우주관을 담았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주제는 그거죠.) 흠, 저는 제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우리는 아서 클라크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명예의 전당에서 우리는 계속 아서 클라크에게 경의를 보내고, 함께 <라마와의 랑데부>를 읽어야 합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신의 망치>보다 덜 하드 SF적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라마와의 랑데부>는 분명한 하드 SF 소설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장엄한 소설을 쉽게 떠나보내야 하나요? 아직 우리가 거대 폐쇄 생태계나 생체 로봇들을 만들지 못함에도, 왜 우리가 라마 우주선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나요? 저는 그렇게 작별하지 못하겠습니다. SF 독자들은 <라마와의 랑데부>와 <블라인드 사이트>와 최신 하드 SF 소설들에서 비슷한 감동을 받을 수 있어요.
게다가 여전히 하드 SF 소설들은 지속적으로 나오는 중입니다. 과거의 하드 SF 소설들이 낡았다고요? 우리는 최신 하드 SF 소설들을 집어들 수 있습니다. 비록 접근성이 너무 높다고 해도, 하드 SF 소설들은 꾸준히 나오는 중입니다. 비록 그 숫자가 적다고 해도, 하드 SF 독자들은 꾸준히 소설들을 읽는 중입니다. 어쩌면 언젠가 하드 SF 소설은 사장될지 모릅니다. 그때 SF 소설 전체는 사장될지 모릅니다. 하드 SF 소설이 SF 장르의 핵심이기 때문에, 하드 SF 소설이 사장된다면, SF 소설 전체 역시 사장되겠죠. SF 소설 전체가 존재한다면, 하드 SF 소설 역시 생명력을 잃지 않겠죠.
물론 아서 클라크의 소설들을 전반적으로 살펴본다면, 독자들은 점차 아서 클라크가 비좁은 상상력으로 퇴행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신의 망치>는 그런 결과고요. 하지만 왜 우리가 구태여 <신의 망치>로 하드 SF 소설을 전반적으로 이야기해야 할까요. 최신 하드 SF 소설들은 아주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자랑합니다. 2015년에 나온 킴 로빈슨의 <오로라>는 폐쇄 생태계 장거리 우주선이 타우-세티로 날아가고 행성 공학을 시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와, 멋지지 않습니까. 아직 하드 SF 소설들은 웅장한 시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직 <신의 망치>로 하드 SF 소설을 논의한다면,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일지 몰라요.
22세기나 23세기에 SF 소설들이 존재할까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3세기에 SF 소설들이 존재한다면, 지금처럼 하드 SF 소설들 역시 존재할 겁니다. 누군가는 21세기의 하드 SF 소설들이 낡았다고 여길지 몰라요. 하지만 23세기의 하드 SF 소설들은 여전히 웅장한 상상력을 뽐내겠죠. 시대가 계속 흐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하드 SF 소설들이 구닥다리라고 생각할지 몰라요. 네, 그건 하드 SF 소설의 태생적인 단점이겠죠. 하지만 '시대가 흐른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드 SF 소설에게 장점이 됩니다. 시대가 흐르지 않고, 시대적인 변혁이나 변화가 없다면, 하드 SF 소설 역시 나오지 못합니다.
변화하는 시대는 하드 SF 소설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입니다. 하드 SF 소설은 고정적이거나 초역사적이지 않습니다. 자꾸 우리는 초(超)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것들을 상정하나, 역사와 문명은 계속 바뀝니다.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것들은 없습니다. 적어도 그런 것들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고정 관념에서 헤어나와야 합니다. '시대가 흐른다는 사실 그 자체'는 하드 SF 소설에게 장점인 동시에 단점입니다. 게다가 하드 SF 소설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건 단점보다 장점으로 승화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어떤 사람은 초역사나 초문명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지 모르겠군요. 초역사나 초문명은 고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리킵니다. 가령, 경제학 교과서가 생산 수단을 자본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건 초문명적인 표현입니다. 오직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만 생산 수단은 자본이 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인류 문명의 전부가 아닙니다. SF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의 하드 SF 소설들이 구닥다리가 된다고 해도, 인류 문명은 21세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 뭐, 21세기에서 인류는 멸망할지 모르죠. 하지만 인류가 멸망한다면, 이런 논의 모두는 의미를 잃겠죠. 저는 인류가 계속 존재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22세기에는 22세기적인 상상 과학이 나올 테고, 23세기에는 23세기적인 상상 과학이 나올 겁니다. 시대는 계속 바뀌고, 상상 과학 역시 계속 바뀝니다. 하드 SF 소설에게 구닥다리는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하지만 그건 종말로서의 운명이 아니라 앞으로 나가는 운명입니다. 상상 과학이 계속 앞으로 나가기 때문에 구닥다리는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보수 없는 진보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구닥다리 없는 시대 변혁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닥다리를 부정하지 말고,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합니다. 구닥다리는 상상 과학이 계속 앞으로 나가기 위한 발판입니다. 어쩌면 이런 논리는 너무 선형적인 역사관에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선형적인 역사관을 경계하나, 이런 논리는 비약이 아닐 겁니다.
제임스 발라드가 쓴 <하이 라이즈>는 아서 클라크가 쓴 <신의 망치>보다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훨씬 더 잘 포착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부조리를 포착하는 측면은 하드 SF 소설의 장점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건 SF 소설의 전반적인 장점이 아니고요. 우리가 하드 SF 소설을 비롯해 SF 소설들을 읽는 이유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SF 소설들이 인류 문명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고 거기에서 시대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적인 변화가 옳든 틀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SF 세상에서 그런 고민을 가장 치열하게 전개하는 장르는 하드 SF 소설이고, 동시에 하드 SF 소설은 뭔가를 열심히 뚝딱뚝딱 만들죠. 그래서 저는 하드 SF 소설들이 계속 SF 장르의 핵심을 차지할 거라고 전망합니다. 전세계의 하드 SF 작가가 모두 펜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하드 SF 소설들은 지속적으로 나올 테고, 그들은 미래를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듀나님은 미래 예측을 언급했으나, 우리가 정말 미래를 예측하는 직관을 기르고 싶다면, 우리는 오직 SF 소설에만 의존해서는 안 될 겁니다. 우리는 SF 소설과 함께 현실을 꿰뚫어보고 미래를 통찰한 사상가들을 살펴봐야 할 겁니다. SF 작가들과 사상가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그런 변증법은 미래를 내다보는 직관을 선사할 겁니다. (이 블로그가 추구하는 주제 역시 그겁니다.)
윌리엄 깁슨은 미국 하드 SF 소설들보다 제임스 발라드가 훨씬 미래 사회를 제대로 그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2018년 7월 6일 8시 24분 트위터군요.) 저는 제임스 발라드 역시 미래를 그저 때려맞췄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정말 미래 사회를 제대로 그린 SF 작가를 꼽는다면, 저는 프레데릭 폴이나 시릴 콘블루스나 킴 스탠리 로빈슨이 제임스 발라드보다 훠어어어어얼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발라드는 그저 우울한 표면을 그렸을 뿐이나, 프레데릭 폴이나 시릴 콘블루스나 킴 스탠리 로빈슨은 그 우울 밑에 무엇이 있는지 고찰했습니다. 진짜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작가는 암흑 밑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윌리엄 깁슨이 말한 것과 달리, 그런 관점에서 제임스 발라드 역시 피상적인 작가겠죠. 킴 로빈슨이 제임스 발라드보다 20년 젊다고 해도, 이런 비교는 틀리지 않겠죠. (아니, 아예 우리는 에드워드 벨라미나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제임스 발라드가 에드워드 벨라미에게 쨉이 되나요.) 그리고 킴 로빈슨은 아주 대표적인 하드 SF 작가죠. 프레데릭 폴은 분명히 소프트 SF 작가가 아니고요. 어때요. 시릴 콘블루스나 킴 로빈슨이 대단하지 않나요? 하지만 윌리엄 깁슨의 저 트위터와 댓글들에는 <우주 상인>이나 <붉은 화성> 같은 소설이 없군요. 아이고, 이 사람들이 정말….
물론 킴 스탠리 로빈슨은 비단 하드 SF 작가만이 아닙니다. 킴 로빈슨은 SF 소설과 미래 사상을 함께 고민하는 SF 작가들 중 하나죠.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오로라>를 번역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결론은 삼천포로 빠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