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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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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은 종족이 아니라 세계를 논증하는 장르

OneTiger 2018. 7. 22. 18:49

[사이언스 픽션은 종족이 아니라 변화하는 전복적인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이미지 출처)]



"일반인들이 SF에 대해 떠올리는 선입견과 달리, SF는 꽤 오래 전에 외계인이나 안드로이드, 미확인 생물체, 돌연변이, 인공 지능 같은 비인간 캐릭터에 대한 열광을 잃었습니다. 현대의 SF가 비인간 캐릭터를 이용한다면, 그것은 오브제로 취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다른 우리를 자극해서 일깨우는 오브제는 우리 자신을 재조립하게 하는 거울과는 조금 다릅니다."



위 문구는 이영도 타자가 쓴 <판타지와 비인간들>이라는 비평문에서 나옵니다. <판타지와 비인간들>에서 이영도 타자는 SF 장르가 비인간적인 존재들을 향한 열광을 잃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더 이상 그런 존재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와 달리, 20세기 이후 인류는 비인간적인 존재들과 만날 가능성을 잃었습니다. 우주에는 외계인이 없는 것 같고, 언제 기술적 특이점이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고, 사실 복제 인간은 진짜 인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돌연변이가 뭔가 지적인 존재가 될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비인간 존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작가가 비인간 존재를 묘사한다고 해도, 인간을 반영할 수 있는 거울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비인간 존재는 인간이 아니고, 인간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인간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SF 장르는 비인간 존재를 열심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현대적인 SF 장르는 비인간 존재에게서 시선을 돌렸습니다. 현대적인 SF 장르 속에서 비인간 존재는 오브제입니다. 비인간 존재는 오직 색다른 관점을 제시할 뿐이고, 그 자체로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영도 타자는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세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정말 현대적인 SF 소설들이 비인간 존재를 향한 열광을 잃었을까요? 더 이상 SF 소설들에 비인간 존재를 향한 열광이 없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처럼 여전히 SF 소설들은 열심히 비인간 존재들을 떠듭니다. 소설 <레비아탄>에 나오는 레비아탄 같은 생체 비행선은 그 자체로서 '존재'입니다. 흔한 우주선이나 잠수함이나 비행선과 달리, 레비아탄 비행선은 살아있고, 그래서 존재가 됩니다. 이런 살아있는 비행선은 우리를 보편적인 관념에서 힘껏 잡아당기고 색다른 현실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에 나오는 기이한 외계 생명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피터 왓츠는 완전히 새로운 외계 생명체를 구상하지 못했고, 지구 생명체에게서 영감을 슬쩍 빌렸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아무리 하드 SF 작가가 노력한다고 해도, 인간적이고 지구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나요? 저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피터 왓츠가 지구 생명체에게서 영감을 빌렸다고 해도, 아무도 피터 왓츠에게 뭐라고 따지지 못할 겁니다. 피터 왓츠는 탄탄한 상상력과 고증을 이용해 놀랍고 색다른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블라인드 사이트>는 멋진 SF 소설입니다.



<판타지와 비인간>에서 이영도 타자는 <라마와의 랑데부>를 언급합니다. 이영도 타자는 <라마와의 랑데부>가 아무 외계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여러 생체 로봇들이 나옵니다. 이런 생체 로봇들은 지적 존재가 아니라 진짜 로봇처럼 작동하는 유기체들입니다. 하지만 인류 탐사 대원들은 생체 로봇들을 만나고 기계처럼 생명체가 작동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배웁니다. 저는 이런 SF 소설들을 계속 늘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여전히 수많은 SF 작가들은 이런 소설들을 쓸 겁니다. 그런 소설들은 비인간 존재들을 열심히 이야기할 겁니다.


따라서 SF 소설들은 비인간 존재들을 향한 열광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알파고 같은 사례 때문에 다들 기술적 특이점을 좀 더 생생하게 꿈꿀 수 있겠죠. 이영도가 <판타지와 비인간>이라는 비평문을 쓴 시기는 2003년이나, 저는 이런 시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이라는 시기와 상관없이, 2003년 이전에도, 2003년 이후에도, SF 작가들은 계속 비인간 존재들에게 열정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이영도 타자는 생체 비행선이나 <블라인드 사이트>의 외계 생명체가 인간 같은 지적 존재가 아니라고 지적할지 모르겠군요.



좋습니다. SF 소설들에서 보다 인간 같은 비인간 존재들이 없을까요? 그런 존재들을 찾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숱한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스팀펑크 판타지들은 파충류 종족, 양서류 종족, 식물 종족, 절지류 종족, 인공 지능, 로봇을 줄기차게 쏟아내기 때문이죠. 이안 뱅크스부터 앤 레키까지, 여러 작가들은 어떻게 SF 소설들이 각종 외계 종족들과 로봇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같은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와 <사소한 정의> 같은 탈식민주의 스페이스 오페라는 여전히 SF 소설들이 열정적으로 지적인 비인간 존재를 설명한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는 이안 뱅크스와 앤 레키가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라고 지적할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이안 뱅크스와 앤 레키가 과학적으로 엄중하게 고증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건 사실이죠. 그래서? 그게 뭐가 어쨌다는 뜻인가요? 과학적으로 엄중하지 않다고 해도, <사소한 정의>는 SF 소설입니다. 이영도 작가는 특별히 하드 SF 소설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이영도 타자는 전반적인 현대 SF 소설이 열광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과학자들이 외계 문명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아직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안 뱅크스나 앤 레키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안 뱅크스와 앤 레키는 진짜 외계 문명이나 진짜 기술적 특이점에 상관하지 않았고, 열심히 우주 제국과 인공 지능들을 논의했습니다.



SF 소설들은 비인간 존재를 향한 열광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SF 작가들은 손가락들이 닳도록 비인간 존재들을 떠듭니다. 이영도 타자는 SF 장르에서 비인간 존재가 오브제가 되기 때문에 SF 작가들이 열광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 역시 틀렸습니다. 비인간 존재가 오브제가 된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별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많은 SF 작가들은 인류가 영원히 외계 문명을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어떤 SF 작가들은 기술적 특이점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 작가들은 그게 아쉽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 상관없이, SF 작가들은 열심히 외계 문명이나 인공 지능을 떠듭니다. 사실 애초에 SF 작가들이 열광을 잃고 자시고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SF 소설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존 클루트가 설명한 것처럼, SF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문명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입니다. 하지만 이영도 타자는 문명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가 아니라 종족을 주시합니다. 이는 퇴보입니다. 왜 SF 소설이 세계로 확장하지 못하고, 종족 속에 갇혀야 합니까?



이는 모든 SF 소설이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SF 소설들은 세계를 뒤집지 않습니다. 많은 SF 소설들은 세계보다 작은 뭔가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허구한 날, 하드 SF 독자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깝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를 한 번 보세요. 하지만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SF 작가가 세계를 뒤집을 때, 그건 가장 커다란 경이감이 되었습니다. SF 세상에서 '뒤집어지는 세계'는 가장 근본적인 경이감입니다.


<타임 머신>이 감동적인 이유는 엘로이와 멀록 같은 비인간 종족 때문이 아닙니다. 분명히 엘로이와 멀록은 중요한 요소이나, 진짜 핵심적인 요소는 '세계'입니다. 황량하고 무너진 '세계'를 제시했기 때문에 <타임 머신>은 감동적입니다. SF 소설은 '세계'를 뒤집을 수 있어야 하고, <타임 머신>은 그걸 보여줬습니다. SF 소설은 '세계'를 논증해야 합니다. 종족이 아니라.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가 원형적인 SF 소설인 이유는 그게 세계를 논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인간 존재가 오브제가 되든 거울이 되든, SF 작가들은 열심히 세계를 뒤집습니다. 그게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종족에 실망하지 않아요.



이영도 타자는 <라마와의 랑데부>에 외계인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어쨌다는 뜻입니까? 중요한 것은 외계인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세계입니다. 라마라는 거대한 우주선. 그건 하나의 놀라운 세계가 되고, 그래서 <라마와의 랑데부>는 감동적입니다. 인류 탐사대가 우주선 내부의 거대하고 장엄한 세계를 처음 목격하는 그 순간. 그때 그들의 세계관은 180도 뒤집어집니다. 그런 장면 때문에 SF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읽습니다. 생체 로봇들은 라마 우주선에 속한 일부 요소이고요. 저는 모든 SF 소설이 이런 뒤집어지는 세계를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인 경이감은 뒤집어지는 세계에서 비롯하죠. SF 소설이 종족에게 매달리는 장르였다면, 켄 맥레오드나 킴 스탠리 로빈슨 같은 작가들은 구태여 SF 소설을 쓰지 않았을지 모르죠. 외계인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붉은 화성>은 재미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화성이라는 새로운 세계, 외계 개척 도시라는 세계, 생태 사회주의 문명이라는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족은 그저 세계에 속하는 일부 요소일 뿐입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에게는 잃어버려야 할 열광이 없어요.



왜 <쿼런틴>이 재미있을까요? 왜 외계인들이 나오지 않음에도, <쿼런틴>이 재미있을까요? <쿼런틴>은 소설 주인공이 다양한 평행 세계들에 간섭하는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마침내 그런 장면들은 어마어마한 붕괴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쿼런틴>은 재미있어요. 왜 <공룡과 춤을>이 재미있을까요? 공룡들이 우르르 나오기 때문에? 물론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건 1차적인 재미입니다. 아니, 사실 <공룡과 춤을>에서 공룡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이 소설은 공룡 시대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공룡 시대가 뒤집어지기 때문에 <공룡과 춤을>은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례들을 계속 언급할 수 있습니다. <사기꾼 로봇>을 볼까요. 왜 이 소설이 재미있을까요? 외계인들 때문에? 인류와 외계인이 전쟁을 벌이기 때문에? 아닙니다. <사기꾼 로봇>의 마지막 문단을 읽은 독자들은 필립 딕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필립 딕은 그저 외계인들과 싸움박질하는 이야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누군가가 종족 운운한다면, 그건 <사기꾼 로봇>을 과소평가하는 발언일 겁니다.



<뉴로맨서>가 재미있는 이유가 오직 인공 지능 때문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윌리엄 깁슨은 가상 공간을 제시했고, 그런 놀라운 세계 때문에 <뉴로맨서>는 신비롭습니다. (솔직히 저는 <뉴로맨서>가 복잡하고 어지러운 소설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그저 취향에 불과하겠죠.) 왜 <물에 잠긴 세계>가 재미있겠어요? 바다 이구아나들과 바다 악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바다 악어들이 공룡 같기 때문에? 제목처럼 <물에 잠긴 세계>는 '세계'를 말합니다. 오직 여자들만 존재하는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재미있을 겁니다.


이는 이미 19세기 이전에 사라 스콧이 쓴 <천년 홀>에서 이어지는 연장선이 될 수 있겠죠. 여자들만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놀라운 세계, 충격적인 세계죠. 물론 세계에 주목하지 않는 SF 소설들 역시 많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코니 윌리스나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가 세계보다 등장인물들에게 주목한다고 말할지 몰라요. 네, 그런 사례들 역시 있어요. 하지만 SF 소설들을 전반적으로 말하고 싶다면, 우리는 근본적인 경이감에 주목해야 할 겁니다. 그런 경이감은 종족에게 실망하지 않아요.



이영도 타자는 뒤집어지는 세계를 논의하지 않아요. (누가 이걸 말했는지 까먹었으나) SF 소설에서 주인공은 세계입니다. 이영도 타자는 이런 중요한 특징을 잊었습니다. 제가 이영도 타자를 너무 까는 것 같으나, 저는 그저 SF 소설이 세계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여전히 <드래곤 라자>가 정말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이영도 타자가 정말 멋진 판타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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