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빈티>와 엘리 새틀러 박사, 보편자 개념 본문
페미니즘 이론가 실비아 페데리치는 인간입니다. 고식물학자 엘리 새틀러는 인간입니다. 소설 작가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인간입니다. 세 사람들,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똑같은 인간입니다. 범주로서 인간은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를 함께 묶습니다. 인간이 아주 보편적인 범주이기 때문에, 아주 보편적인 범주로서 인간은 비단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묶습니다. 분명히 인간은 수많은 사람들을 묶습니다. 인간이 보편적인 범주이기 때문에, 인간은 보편자입니다.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은 보편자(universal)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잠깐. 정말 범주로서 인간이 보편자인가요? 이게 사실인가요? 만약 인간 범주가 보편자라면, 이 보편자가 실재하나요? 우리는 실비아 페데리치가 실재한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비아 페데리치를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비아 페데리치를 직접 만질 수 있습니다. 반면, 누가 보편자로서 인간을 직접 봤나요? 누가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를 묶기 위한 인간 범주를 직접 만졌나요?
아무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습니다. 범주로서 인간은 보편자이나,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아무도 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실비아 페데리치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나, 이 사람들은 보편자 인간으로서 실비아 페데리치보다 그저 개별적인 실비아 페데리치를 만질 뿐입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보편자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보편자를 믿는다면, 이게 오류가 아닌가요? 만약 보편자가 존재한다면, 실비아 페데리치 내부에서 보편자가 존재하나요, 아니면 외부에서 존재하나요?
만약 보편자가 존재한다면,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 외부에서 보편자는 존재해야 합니다. 외부에서 보편자 인간이 존재할 때, 보편자 인간은 비단 세 사람들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묶을 수 있습니다. 비단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만 아니라 주디스 오어와 쑹 리와 옥타비아 버틀러 역시 인간입니다. 비단 주디스 오어와 쑹 리와 옥타비아 버틀러만 아니라 아이작 아시모프와 요하네스 티어플라이와 배미주 역시 인간입니다. 보편자 인간은 주디스 오어, 쑹 리, 옥타비아 버틀러, 아이작 아시모프, 요하네스 티어플라이, 배미주를 묶습니다.
보편자 인간이 수많은 사람들을 묶기 때문에, 만약 개별적인 실체 내부에서 보편자가 존재한다면, 이건 모순인지 모릅니다. 엘리 새틀러, 은네디 오코라포르, 주디스 오어, 쑹 리, 옥타비아 버틀러, 아이작 아시모프, 요하네스 티어플라이, 배미주를 묶기 위해 실비아 페데리치 외부에서 보편자 인간은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개별적인 존재 외부에서 보편자 인간이 존재할 수 있나요? 만약 이 세상에서 오직 은네디 오코라포르만 존재한다면, 인간은 흑인을 가리킬 겁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흑인이기 때문에, 오직 흑인만 인간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오코라포르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보편자 인간은 오직 흑인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배미주는 흑인이 아닙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와 배미주가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은 오직 흑인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개별적인 존재 외부에서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 외부에서 보편자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인 은네디 오코라포르보다 보편자 인간은 선행하지 않습니다.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와 주디스 오어와 쑹 리와 옥타비아 버틀러와 배미주를 비롯해 수많은 개별자들은 아주 보편적인 인간 범주를 만듭니다.
수많은 개별자들이 보편자를 만들기 때문에, 개별자보다 보편자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개별자보다 보편자가 우선하지 않기 때문에, 개별자 외부에서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별자들이 모이고 교집합을 형성하기 때문에, 보편자는 나타납니다. 보편자에게는 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보편자에게 약점이 있기 때문에, 보편자는 허상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보편자 인간에 속한다고 생각하나, 인간은 그저 기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보편자 허상을 버리고 개별자들이 실재한다고 주목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재론은 이 명목론 논리에 반박할 겁니다. 우리는 보편자 인간이 실재한다고 감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나, 왜 보편자가 필연적으로 감각적이어야 하나요? 우리가 모든 개념을 직접 보고 직접 만져야 하나요? 오직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 중요한가요? 이건 편파적인 주장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가시적인 것 역시 중요할 수 있습니다. 비록 보편자 인간이 비가시적이라고 해도, 비록 우리가 보편자 인간을 직접 구경하지 못하고 직접 만지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가시적인 것이 중요할 수 있기 때문에, 비가시적인 개념 보편자 역시 중요할 수 있습니다. 비가시적인 개념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편자는 허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실재론은 보편자를 주장하고, 명목론은 보편자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누가 옳은가요? 실재론이 옳은가요? 보편자가 존재하나요? 아니면 명목론이 옳은가요? 보편자가 그저 허상에 불과한가요? 하지만 실재론이 옳든, 명목론이 옳든, 보편자가 존재하든, 보편자가 그저 허상에 불과하든, 두 의견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의견은 '사회 구조'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나, 보편자 인간 논쟁은 이것을 외면합니다.
만약 근대 초기 코뮨 마을에서 어떤 아기가 태어난다면,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인간인 것처럼, 이 아기는 인간일 겁니다. 코뮨 아기가 인간인 것처럼, 보편자 인간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와 코뮨 아기는 다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살아가나, 근대 초기 코뮨 마을이 자본주의에게 저항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기는 살지 않습니다. 아무리 네 사람들이 똑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해도, 아기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지 않습니다.
이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점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먹고 삽니다. 엘리 새틀러는 먹고 삽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먹고 삽니다.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먹고 사는 것처럼, 코뮨 아기는 먹고 삽니다. 인간은 뭔가를 먹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먹습니다. 미래 사회에서도 이건 크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뭔가를 먹기 위해 인간은 노동합니다. 아무리 쌀에게 높은 영양분이 있다고 해도, 만약 인간이 농사를 짓지 않고 추수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팟타이를 볶아먹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자연 환경이 건강할 때, 풍요로운 작물들은 자랄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이 먹거리를 선사하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건강한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노동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노동은 생존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경제학은 고작 쓸데없는 시장 균형 가격 따위보다 인간 노동 시간을 분석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에게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 구조입니다. 북튜버 겨울서점님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논의했을 때, 겨울서점님은 다른 인간들을 차별했고 오직 자유주의 인간만 인간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겨울서점님이 다른 인간들을 차별한 것처럼, 극심한 계급 사회에서 인간은 똑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모두가 힘들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구 온난화를 저질렀기 때문에,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이미 제3세계 가난한 민중들은 심각한 고통에 빠졌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공공 의료를 조롱하고 의료 민영화를 밀어붙이기 때문에, 제3세계 민중들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코로나 19 사태에서 제3세계 민중들은 훨씬 심각한 고통에 빠집니다. 밥이 보약이라는 속담처럼, 인간이 잘 먹을 때, 인간은 면역 체계를 키울 수 있습니다. 제3세계 민중들이 먹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병마와 싸우기 위한 면역 체계를 키우지 못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힘들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제3세계 민중들은 훨씬 끔찍한 고통에 빠지나, 자유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힘들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식민지 수탈을 은폐합니다. 이 주장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완전히 다릅니다. 현실에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제3세계들은 훨씬 힘듭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자본가들보다 임금/무급 노동자들은 훨씬 힘듭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훨씬 힘듭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나누고 차별합니다.
모든 인간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에게 특정한 본질이 있다고 규정하지 못합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어떤 백인들은 흑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백인들은 흑인들이 인간이 아니거나 백인과 흑인이 똑같지 않다고 규정합니다.) 노예 제도 사회가 흑인들을 차별하는 것처럼, 사회 구조는 인간 범주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 구조가 인간 범주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회 구조가 바뀔 때, 인간 범주 역시 바뀝니다. 소설 <반지 전쟁>에서 흑인과 여자는 중심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인종 차별, 성 차별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합니다. 동시에 (실비아 페데리치가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게 기생합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과 여자 무급 노동에게 기생한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교 교육은 수요-공급 곡선 같은 헛소리들을 열심히 세뇌합니다.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때문에, 자유주의 사회에서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은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소설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을 테고, <반지 전쟁>에서 흑인과 여자는 중심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반면,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흑인과 여자는 중심 등장인물입니다. 이 소설이 공산주의 사회를 묘사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가 평등과 해방을 추구하기 때문에, 흑인과 여자는 중심 등장인물입니다. <반지 전쟁>과 <안드로메다 성운>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 구조는 인간 범주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반지 전쟁>은 백인 상류층 남자를 떠받드나, <안드로메다 성운>은 빈부를 없애고 인종과 성별을 뛰어넘습니다. 사회 구조에서 인간 범주는 절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에서 인간 범주가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보편자로서 인간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실비아 페데리치와 엘리 새틀러와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극심한 인종 차별 사회에서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인간일 수 있나요? 엘리 새틀러는 소설 등장인물입니다. 하지만 엘리 새틀러는 전형적인 백인입니다. 비록 엘리 새틀러가 소설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흑인이고 엘리 새틀러가 전형적인 백인이기 때문에, 극심한 인종 차별 사회에서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인간이 되지 못하고 엘리 새틀러는 인간이 됩니다. 할렘 르네상스 문학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 구조에서 인간 범주는 절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는 보편자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보편자가 사회 구조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팟타이가 보편자가 된다면, 팟타이가 사회 구조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나요? 보편자 팟타이 범주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사회 구조를 필연적으로 파악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와 팟타이 범주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두 가지 사이에서 필연적인 연결 고리가 있다고 해도, 이 연결 고리는 희미합니다. 적어도 인간 범주와 자유 민주주의보다 팟타이 범주와 자유 민주주의에서 연결 고리는 희미합니다. 팟타이 범주처럼, 사회 구조는 어떤 보편자들에게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회 구조가 보편자들에게 영향들을 미친다고 해도, 이 영향들은 똑같지 않을지 모릅니다. 다양한 측면들에서 사회 구조는 보편자들에게 영향들을 미칠지 모릅니다. 팟타이가 보편자가 되는 것처럼, 비록 어떤 보편자 논쟁이 사회 구조를 외면한다고 해도, 이건 절대적인 오류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팟타이를 먹을 때, 그들은 사회 구조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편자로서 팟타이와 보편자로서 인간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평화로운 인류 문명은 불가능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아니, 이건 그저 자유 민주주의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보편자로서 인간 범주는 사회 구조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리아 미스는 인간이 탐욕스럽기보다 자본주의가 탐욕을 부추긴다고 비판했습니다. 마리아 미스와 달리, 겨울서점님은 인간을 모욕하고 차별합니다. 마리아 미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겨울서점님이 인간을 모욕하는 것처럼, 보편자로서 인간과 사회 구조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보편자 논쟁 대상은 인간이 되거나 팟타이가 될 수 있으나, 팟타이보다 인간이 논쟁 대상이 될 때, 사회 구조는 빠지지 못합니다. 실재론은 보편자를 주장하나, 실재론은 이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명목론은 보편자를 부정하나, 명목론 역시 이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비단 인간 범주만 아니라 보편자로서 SF 역시 사회 구조에게 기반합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SF 작가입니다. SF 소설은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합니다. 거대 갑각류는 우주선이 되고, 승무원들과 승객들은 거대 갑각류에 탑승합니다. 생체 우주선은 SF 설정입니다. 이건 모든 SF 소설이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SF 소설들은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생체 우주선은 상대적으로 드문 소재입니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SF 소설들은 생체 우주선보다 기계 우주선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생체 우주선은 SF 설정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생체 우주선이 SF 설정인가요?
거대 갑각류 우주선은 비(非)현실 설정입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거대 갑각류가 우주를 항해한다고 관찰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거대 갑각류 뱃속에 탑승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거대 갑각류는 행성 대기권을 돌파하지 않습니다. SF 소설에서 거대 갑각류가 행성 대기권을 돌파하는 동안, 엄청난 열기가 갑각류 외피를 녹이기 때문에, 행성 지상에서 거대 갑각류는 빠른 치유 속도를 자랑하고 외피를 복원합니다. (비단 거대 갑각류 우주선만 아니라 여러 거대 괴수들은 빠른 치유 속도를 자랑합니다.) 현실에서 이 거대 갑각류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체 우주선은 비현실 설정입니다.
동시에 생체 우주선은 근대 과학을 반영합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과학은 발달했고 우주선과 행성 대기권 진입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전에, 중세 문명 사람들은 우주선이 대기권에 진입하는 동안 엄청난 온도가 우주선 표면을 달군다고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거대 갑각류 우주선은 이 사실을 반영합니다. 거대 갑각류 우주선은 근대 과학을 반영합니다. 거대 갑각류 우주선은 비현실이고, 동시에 이건 근대 과학을 반영합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근대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근대 과학에게 서구 근대화는 전제가 됩니다. 거대 갑각류 우주선은 '비현실 설정+서구 근대화'입니다.
생체 우주선이 '비현실 설정+서구 근대화'이기 때문에, 생체 우주선은 SF 설정입니다. 엘리 새틀러는 백인 여자 고식물학자입니다. 이건 SF 설정이 아닙니다. 이미 현실에서 백인 여자 고식물학자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백인 여자 고식물학자로서 엘리 새틀러는 SF 설정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엘리 새틀러가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연구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대 갑각류 우주선이 비현실 설정인 것처럼, 엘리 새틀러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유전 공학과 고생물학은 근대 과학에 속합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유전 공학과 고생물학은 나타났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전에, 중세 문명 사람들은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중세 문명 사람들이 유전 공학과 고생물학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엘리 새틀러는 근대 과학을 반영합니다. 근대 과학에게 서구 근대화가 전제이기 때문에, 엘리 새틀러는 서구 근대화를 반영합니다. 거대 갑각류 우주선이 비현실 설정+서구 근대화인 것처럼, 엘리 새틀러는 비현실 설정+서구 근대화입니다. 거대 갑각류와 엘리 새틀러가 SF 설정인 것처럼, 비현실 설정+서구 근대화는 사이언스 픽션을 구성합니다. 여기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보편자입니다. 보편자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수많은 비현실들+근대화들을 묶습니다.
우리는 SF 그 자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SF 그 자체를 만지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SF 그 자체를 본 적이 없고, 우리는 SF 그 자체를 만지지 못하고, 사이언스 픽션은 실체가 아니나, 보편자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많고 많은 비현실 설정들+서구 근대화들을 묶습니다. 거대 갑각류 우주선과 엘리 새틀러는 다릅니다. 양쪽은 다르나, 보편자 사이언스 픽션은 거대 갑각류 우주선과 엘리 새틀러를 묶습니다. 보편자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비단 거대 갑각류 우주선과 엘리 새틀러만 아니라 배틀메크 우지엘을 묶습니다. 배틀메크 우지엘은 비현실 설정+서구 근대화입니다.
현실에서 보행 전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행 전차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기계 공학은 근대 과학입니다. 중세 문명 사람들은 산업 공장을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산업 공장은 나타났습니다. 현실에서 보행 전차가 존재하지 않고, 서구 근대화 이후, 산업 공장이 나타났기 때문에, 우지엘은 비현실 설정+서구 근대화입니다. 비록 거대 갑각류 우주선과 엘리 새틀러와 우지엘은 다르나, 보편자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세 가지들을 묶습니다. 만약 보편자로서 사이언스 픽션이 세 가지들을 묶는다면, 배틀 메카 T200은 어떤가요? 배틀메크 우지엘이 보행 전차인 것처럼, 배틀 메카 T200은 보행 전차입니다.
배틀 메카 T200이 보행 전차이고, 보행 전차가 비현실 설정+서구 근대화이기 때문에, 배틀메크 우지엘이 SF 설정인 것처럼, 배틀 메카 T200은 SF 설정 같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배틀 메카 T200은 비디오 게임 <킹덤 러시 프론티어> 드워프 방어탑입니다. 드워프는 사이언스 픽션보다 (중세 유럽) 판타지 종족입니다. <킹덤 러시 프론티어>는 사이언스 픽션보다 중세 판타지 게임입니다. 아무리 보행 전차가 비현실+근대화라고 해도, 배틀 메카 T200이 <킹덤 러시 프론티어> 드워프 방어탑이고, 드워프와 <킹덤 러시 프론티어>가 중세 판타지이기 때문에, 배틀 메카는 SF 설정이 아닌지 모릅니다.
우지엘이 SF 설정인 것처럼, 배틀 메카 T200이 SF 설정인가요? 아니면 드워프가 중세 판타지 종족인 것처럼, 배틀 메카 T200이 판타지 설정인가요? 보편자로서 사이언스 픽션이 거대 갑각류 우주선과 엘리 새틀러와 우지엘과 배틀 메카 T200을 함께 묶을 수 있나요? 아니면 거대 갑각류 우주선보다 배틀 메카 T200이 <반지 전쟁>에게 가까운가요? 이 물음은 아주 헛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틀 메카 T200이 SF 설정이라고 분류할 테고, 어떤 사람들은 이게 중세 판타지 설정이라고 분류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작 분류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할 겁니다.) 보편자로서 SF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배틀 메카 T200이 거대 갑각류 우주선에게 가깝거나 <반지 전쟁>에게 가까울 수 있는 것처럼, 보편자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비단 배틀 메카 T200만 아니라 다른 SF 설정들 역시 헛갈립니다. SF 설정들이 헛갈리기 때문에, SF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유동적인 흐름입니다. 어쩌면 300년 이후, 어떤 소설 작가는 새로운 SF 설정을 쓸지 모릅니다. 새로운 SF 설정이 너무 헛갈리기 때문에, 배틀 메카 T200이 논란을 부르는 것처럼, 미래 SF 독자들은 새로운 설정이 SF 장르에 속하는지 논의할지 모릅니다. 이 사례는 보편자로서 사이언스 픽션이 흐르고 바뀐다고 증명합니다.
세상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반-합 관계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흐르고 바뀝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적인 덩어리보다 유동적인 논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끊임없이 흐르고 바뀐다고 해도, 결국 서구 근대화 이후,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프랑스에서 피에르 아벨라르가 보편자 논쟁에 참가하는 동안, 피에르 아벨라르는 높은 대기권 온도가 우주선 표면을 뜨겁게 달군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끊임없이 바뀐다고 해도,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나타났습니다. 분명히 이건 사실입니다.
서구 근대화라는 사회 구조가 나타났기 때문에, 사회 구조는 문화 예술로서 SF 범주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 구조와 SF 장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 없이, SF 장르는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편자 인간 범주를 파악할 때, 우리가 사회 구조를 함께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가 보편자 SF 범주를 파악할 때, 우리는 사회 구조를 함께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치명적인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사회 구조를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교 교육은 자본주의 만만세를 세뇌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교 교육은 자본주의 노예들을 양산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교 목적은 자본주의 노예 양산입니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에게 기생한다고 비판했으나,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많고 많은 여자들은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학교 교육이 여학생들을 세뇌하기 때문에, 많고 많은 여자들은 노예 근성을 열심히 발휘합니다. 많고 많은 여자들이 노예 근성을 열심히 발휘하는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는 사회 구조를 왜곡합니다. 노예 근성 속에서 사람들이 사회 구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요? 노예 근성 속에서 사람들이 보편자를 파악할 수 있나요? 아니, 이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자유 민주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 게임 <쥬라기 공원 에볼루션> 스크린샷 출처: BestInSlot,
www.youtube.com/watch?v=56_LO43n02o
※ 사진 <ผัดไทย หิว ก๋วยเตี๋ยว อร่อย กุ้ง กรุงเทพฯ> 출처: sharon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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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킹덤 러시 프론티어> 스크린샷 출처: 扑倒猫耳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