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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와인드업 걸>에게 홍수 설화가 원형인가?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와인드업 걸>에게 홍수 설화가 원형인가?

OneTiger 2020. 10. 13. 20:00

 

 

소설,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노래, 회화, 연주, 무용, 조각,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기타 등등…. 문화 예술들은 우리를 둘러쌌습니다. 소설부터 게임까지, 수많은 문화 예술들은 우리를 둘러쌌습니다. 문화 예술들은 비단 우리를 둘러쌌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들을 장식합니다. 소설은 지적이고, 노래는 흥겹고, 게임은 신나고, 무용은 아름답습니다. 노래 경연 대회에서 가수들이 눈물들을 흘리고, 관객들이 탄성들을 지르는 것처럼, 문화 예술들은 장엄하고 감동적인 천상에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종종 이건 훨씬 높은 감정으로 승화합니다.

사람들이 문화 예술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문화 예술들을 동일시합니다. 인간이 뭔가를 사랑할 때, 인간이 그것에게 자신을 대입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문화 예술들에게 푹 빠지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을 문화 예술들에게 대입합니다. 어떤 대기업 홍보 문구("문화를 만듭니다.")처럼, 많은 사람들은 비단 소설, 음악, 영화 같은 예술 작품들만 아니라 문화 영역을 함께 중시합니다. 문화 영역은 지적이고, 흥겹고, 신나고, 고상하고, 장엄하고, 감동적입니다. 문화 영역과 달리, 먹고 사는 문제는 별로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짧은 철학 서적 <마르크스 철학 연습>조차 노동을 고민하는 것처럼, 먹고 살기는 고달픕니다. 문화 영역에게는 기품이 있으나, 먹고 사는 문제에게는 기품이 없습니다. 예술 작품은 미학을 추구하나, 먹고 사는 문제는 미학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가 미학을 추구한다고 해도, 미학은 부차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문화 예술들에게 동화합니다. 하지만 예술 작품들을 비롯해 문화 영역에게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문화 영역은 근본적이지 않습니다. 문화 영역은 너무 많은 해석들을 늘어놓습니다.

문화 영역이 근본적이지 않기 때문에, 문화 영역이 너무 많은 해석들을 늘어놓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오직 문화 영역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표면적이고 얄팍한 시각을 버리지 못할 겁니다. 아이돌 가수들은 자신들을 아티스트, 예술인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여자 아이돌 가수가 짧은 치마를 입고 춤을 춘다면, 이게 무대 공연을 위한 예술 행위인가요? 아니면 이게 그저 성 상품에 불과한가요? 만약 짧은 치마가 고작 성 상품 따위라면,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지 말아야 하나요? 만약 짧은 치마가 성 상품이라면, 더운 여름날에 여자들이 긴 바지를 입어야 하나요?



만약 젊은 여자가 짧은 복장들을 입고 몸매를 드러낸다면, 이게 자신감을 드러내기 위한 행위인가요? 아니면 이게 그저 가부장 편견에 불과한가요? 어떤 사람들은 이게 자신감이라고 대답할 테고, 어떤 사람들은 이게 그저 가부장 편견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두 대답 중에서 무엇이 옳은가요? 만약 어떤 소녀가 아이돌 가수를 좋아한다면, 이 소녀 팬이 이른바 걸 크러시 가수를 좋아해야 하나요? 아니면 이 소녀 팬이 청순 계열 아이돌을 좋아할 수 있나요? 걸 크러시 아이돌이 당당한 여자 정체성을 표현하고, 청순 계열 아이돌이 가부장 편견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들을 내놓을 겁니다. 다양한 대답들은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할 겁니다. 다양한 근거들은 공존합니다. 소설 해석에게 정답이 없는 것처럼, 예술 작품들에게는 정답이 없고, 문화 영역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문화 영역에 매달립니다. 심지어 문화 예술이 문제가 될 때, 어떤 사람들은 아주 급진적이고 과격해집니다. 반면, 먹고 사는 문제가 나타날 때, 이 사람들은 급진성을 내다버리고 보수적으로 돌변합니다. 이건 너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SF 장르는 예외가 아닙니다. SF 장르는 근본적이지 않습니다.



아아, 세상은 타락했습니다!! 세상은 너무 흉흉하고 불안합니다. 더 이상 아무도 행복하게 웃지 못합니다. 언제까지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나요? 이 세상에게 존재하기 위한 가치가 있나요? 결국 수많은 타락들은 재앙으로 이어집니다. 엄청난 홍수는 사람들을 덮칩니다. 엄청난 홍수는 수많은 것들을 휩씁니다. 홍수가 수많은 것들을 휩쓸기 때문에, 여러 설화들은 홍수를 좋아합니다. 고대 홍수 설화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홍수는 고대 설화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엄청난 홍수가 부정한 세상을 휩쓴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고대 설화들에서 엄청난 홍수는 보편적인 소재이나, 고대 설화들은 엄청난 홍수를 독차지하지 못합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은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이 'SF' 소설은 고대 설화가 아닙니다. 고대 설화들은 개조 생명체를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인류 문명들은 유전 공학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거대 코끼리를 개조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와인드업 걸>은 유전 공학을 이용합니다. 거대 코끼리는 산업 공장을 위한 생체 동력원입니다. 산업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고대 사람들이 거대 코끼리를 개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 설화와 SF 소설은 대조적입니다.



하지만 고대 설화에서 엄청난 홍수가 타락한 세상을 휩쓴 것처럼, SF 소설에서 엄청난 홍수는 부정한 도시를 휩씁니다. 고대 설화와 SF 소설에서 엄청난 홍수가 부정한 것들을 휩쓸기 때문에, 고대 설화와 SF 소설은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비단 <와인드업 걸>만 아니라 <카본 다이어리 2015>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와인드업 걸>보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주류 문학에 훨씬 가깝습니다. <와인드업 걸>은 새로운 동력원과 온갖 개조 생명체들을 제시하나,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심각한 기후 변화와 몇몇 상황 이외에 전반적인 설정들은 SF 소설보다 주류 문학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소설이 주류 문학에 가깝다고 해도, 결국 환경 아포칼립스로서 이 소설은 엄청난 홍수를 보여줍니다. 엄청난 홍수가 난리법석을 휩쓸기 때문에, 고대 설화와 SF 소설은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소설 작가 새시 로이드가 이것을 의도했나요? 새시 로이드가 고대 설화를 모방했고 물난리를 집어넣었나요? 아니면 기후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 새시 로이드가 엄청난 홍수를 집어넣었나요?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어떤가요?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고대 설화를 모방했고 엄청난 물난리를 집어넣었나요? 아니면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요? 어쩌면 이건 단순한 유사성인지 모릅니다.



새시 로이드와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고대 설화를 모방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새시 로이드가 <카본 다이어리 2015>를 쓰는 동안, 새시 로이드는 고대 설화들보다 환경 사회학 서적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와인드업 걸>을 쓰는 동안,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홍수 설화를 의식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만약 두 소설 작가가 홍수 설화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고대 설화와 SF 소설이 교집합을 형성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단순한 유사성에 불과할 겁니다. 단순한 유사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와플에게는 격자 무늬(▦)라는 핵심 특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빵에게 격자 무늬가 없다면, 사람들은 이 빵이 와플이라고 분류하지 않을 겁니다. 격자 무늬는 와플을 규정하기 위한 핵심 특성입니다. 체스판에게는 격자 무늬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게임판(보드)에게 격자 무늬가 없다면, 사람들은 이 게임판이 체스판이라고 분류하지 않을 겁니다. 격자 무늬는 체스판을 규정하기 위한 핵심 특성입니다. 와플과 체스판에게는 핵심 특성이 있습니다. 와플과 체스판은 핵심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와플과 체스판이 비슷하다고 해도, 체스판보다 와플은 초콜릿 타르트에 훨씬 가깝습니다.



와플과 체스판에게 격자 무늬가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한 것처럼, 고대 설화와 SF 소설에게 엄청난 홍수는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관건은 생산 조건입니다. 먹기 위해 인간은 와플과 초콜릿 타르트를 만듭니다. 유희를 즐기기 위해 인간은 체스판을 만듭니다. 와플과 체스판에게 생산 조건은 다릅니다. 다른 생산 조건(먹기와 유희)에서 와플과 체스판은 비롯합니다. 그래서 체스판보다 와플과 초콜릿 타르트는 가깝습니다. 이 분류와 달리, 고대 설화는 이야기입니다. SF 소설은 이야기입니다. 고대 설화와 SF 소설은 이야기, 텍스트라는 범주에 속합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라고 부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나랜스인 것처럼, 인간이 이야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나타납니다. 왜 인간이 이야기를 사랑하나요? 대답들은 다양합니다. 비록 대답들이 다양하고, 이 대답들이 일치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인간은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술자리 노가리부터 스터디 셀러 고전 문학까지, 인간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사랑합니다. 고대 설화는 이야기 범주에 속하고,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와플과 체스판이 다르기 때문에, 격자 무늬는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합니다.



와플/체스판과 달리, 고대 설화와 SF 소설은 이야기 범주에 속합니다. 양쪽은 비슷한 범주에 속하고, 양쪽은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이 교집합(엄청난 홍수)은 표면적인 유사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학 평론가들은 이게 원형을 드러낸다고 분석할 겁니다. SF 소설보다 고대 설화가 선구적이기 때문에, SF 소설에게 고대 설화는 원형이 됩니다. 안젤라 카터는 <피로 물든 방>을 썼습니다. 이건 <빨간 두건>에게 페미니즘 시각을 대입하고 새롭게 해석합니다. <피로 물든 방>에게 <빨간 두건>은 원형입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썼습니다. 이건 <오디세이아>에게 기반합니다.

 

<율리시스>에게 <오디세이아>는 원형입니다. <피로 물든 방>에게 <빨간 두건>이 원형이고, <율리시스>에게 <오디세이아>가 원형인 것처럼, SF 소설에게 고대 설화는 원형입니다. 하지만 <빨간 두건>과 <와인드업 걸>이 비슷한 사례가 되나요? 안젤라 카터가 <피로 물든 방>을 쓰는 동안, 안젤라 카터는 <빨간 두건>을 의식했습니다. 안젤라 카터가 <빨간 두건>을 의식한 것처럼,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고대 홍수 설화를 의식했나요? 만약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홍수 설화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와인드업 걸>에게 홍수 설화가 원형이 될 수 있나요?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안젤라 카터와 달리, 만약 새시 로이드가 홍수 설화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카본 다이어리>에게 홍수 설화가 원형이 되나요? 인류 문화에서 홍수 설화는 아주 보편적이고 유명합니다. 이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새시 로이드와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홍수 설화를 들었을 겁니다. 안젤라 카터와 제임스 조이스 역시 홍수 설화를 들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까페에서 어떤 제빵사는 바삭바삭한 와플 위에 향기로운 아이스크림을 올리는 중인지 모르나, 이 제빵사는 홍수 설화를 들었을 겁니다. 까페 제빵사는 비단 <오늘따라 예쁘다> 같은 까페 배경 음악만 아니라 홍수 설화를 들었을 겁니다.

 

고대 인류부터 근대 인류까지, 까페 제빵사부터 문학 작가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홍수 설화를 인지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홍수 설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게 아주 보편적이고 유명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홍수 설화를 퍼뜨립니다. 이건 이른바 '오래된 문학'입니다. 작가가 SF 소설을 쓰는 동안, 비록 작가가 홍수 설화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작가가 '오래된 문학'을 인지하기 때문에, 이건 SF 소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SF 소설은 고대 설화를 피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SF 소설이 엄청난 홍수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고대 설화들은 엄청난 홍수를 선구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문학 평론가들은 <와인드업 걸>에게 고대 홍수 설화가 원형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와인드업 걸>에게 고대 홍수 설화가 원형인 것처럼, 고대 설화와 SF 소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비단 <와인드업 걸>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고대 신화, 전설, 민담으로 이어집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에서 지구 생물권이 무너지기 때문에, 장거리 우주선은 바이오 돔을 장착합니다. 바이오 돔은 생물 다양성을 보존합니다. 지구에서 장거리 우주선은 떠나고 외계 행성으로 향합니다. 새로운 세계(외계 행성)에서 우주선은 바이오 돔을 개방합니다. 새로운 자연은 나타납니다.

 

이건 SF 설정입니다. 하지만 이미 고대 설화는 거대 방주가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고, 새로운 대륙으로 향하고, 새로운 자연을 조성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방주 설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건 '오래된 문학'입니다. 장거리 우주선은 오래된 문학을 피하지 못합니다. SF 소설에게 고대 설화는 원형이 됩니다. 장거리 우주선과 바이오 돔에게 고대 방주 설화가 원형이 되는 것처럼,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 vs. 라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스라는 어머니 자연입니다. 모나크 과학 보고서는 모스라가 'Mother of Natural World'라고 서술합니다. 모스라와 달리, 라돈은 불타는 무서운 악마입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신화학자는 라돈이 불타는 악마라고 설명합니다. 어머니 자연과 불타는 악마는 싸웁니다. 비디오 게임 <미들어스: 섀도우 오브 워>는 비슷한 대립 구도를 보여줍니다. <섀도우 오브 워>에서 카르난은 어머니 자연입니다. 카르난은 삼림을 조성하고, 야생 동물들을 조종하고, 재생을 관장합니다. 카르난 형태는 식물+여자입니다. 카르난이 어머니 자연이기 때문에, 게임 주인공 탈리온은 카르난과 협력합니다. 카르난과 달리, 발록 타르-고로스는 탈리온을 적대합니다. 타르-고로스는 불타는 악마입니다. 울창한 삼림에서 카르난은 비롯하나, 마그마에서 발록은 비롯합니다.

 

식물들은 카르난을 휘감으나, 발록에게는 불타는 날개가 있습니다. 어떤 소설 독자들은 발록에게 날개가 없다고 반박할지 모르나, 비록 <섀도우 오브 워>가 원작 소설 고증을 무시한다고 해도, 분명히 원작 소설 <반지 전쟁>은 발록이 불타는 악마라고 묘사합니다. (원작 소설과 상관없이) <섀도우 오브 워>에서 발록 타르-고로스는 불타는 악마입니다. 어머니 자연과 불타는 악마는 싸웁니다. <고지라: 괴수왕>과 <섀도우 오브 워>에서 어머니 자연(모스라, 카르난)과 불타는 악마(라돈, 타르-고로스)는 싸웁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SF'입니다. <섀도우 오브 워>는 중세 판타지입니다.



비록 <고지라: 괴수왕>이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해도, 사이언스 판타지와 중세 판타지는 다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로서 <고지라: 괴수왕>은 핵 발전소가 위험하다고 경고할 수 있습니다. 중세 판타지로서 <섀도우 오브 워>는 핵 발전소를 직접 묘사하지 못합니다. 만약 중간계 사람들이 핵 발전소를 뚝딱뚝딱 짓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릴 겁니다. 발록 타르-고로스는 악마이고, 악마는 고대 신화에게 기반합니다. 발록이 보여주는 것처럼, 판타지는 고대 신화에게 기반합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비슷한 구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에게 기반합니다.

 

사이언스 픽션(<고지라: 괴수왕>)과 판타지(<섀도우 오브 워>)가 비슷한 구도(모스라와 카르난, 라돈과 발록)를 보여주고, 판타지가 신화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에게 기반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신화는 원형이 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어머니 자연과 불타는 악마를 묘사하기 전에, 이미 고대 신화, 전설, 민담은 이것을 선구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문학 평론가는 SF 장르에게 고대 신화가 원형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10월 7일~11일까지, 세 게시글들은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가 비슷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원더스: 플래닛폴>에서 아마존 진영은 환경 보호 진영입니다. 그들은 생태학 전문가입니다. 아마존 진영은 식물을 조성하고 적군을 묶습니다. 아마존 진영은 야생 동물들을 동원합니다. 테이블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는 생태학 전문가입니다. 드루이드는 식물을 조성하고 적군을 묶습니다. 드루이드는 야생 동물들을 동원합니다.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는 비슷합니다. 모스라와 카르난이 비슷한 것처럼, 아마존과 드루이드는 비슷합니다. 사이언스 픽션(<플래닛폴>)과 판타지(<디앤디>)는 비슷한 구도(아마존 진영과 드루이드)를 보여줍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비슷한 구도를 보여주고, 판타지가 신화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에게 기반합니다. 문학 평론가는 사이언스 픽션에게 고대 신화가 원형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와인드업 걸>과 홍수 설화, 티타누스 모수라와 카르난, 티타누스 라돈과 발록 타르-고로스,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는 사이언스 픽션에게 고대 신화가 원형이라고 증명합니다. 다른 많고 많은 사례들 역시 사이언스 픽션에게 고대 신화가 원형이라고 증명합니다. 그래서 문학 평론가는 주장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새롭지 않다.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문화 예술은 나타나지 않는다."

 


비단 문학 평론가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돌고 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돌고 돌기 때문에,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건 사실입니다. 세상은 돌고 돕니다. <플래닛폴> 아마존이 어머니 자연을 추구하기 전에, 이미 고대 힌두 신화가 안나푸르나 여신을 묘사한 것처럼, 고대 힌두 신화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돌고 돕니다. 고대 힌두 신화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별로 새롭지 않습니다. 왜 'SF'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신화학자가 주연 등장인물인가요? 신화와 사이언스 픽션이 돌고 돌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별로 새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돌고 돕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커다란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세상이 돌고 돈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현실을 정당화합니다.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세상이 돌고 돈다고 말합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이나, 자본주의는 심각한 빈부 격차를 유발합니다. 빈부 격차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코로나 19 사태에서 남반구 가난한 민중들은 훨씬 커다란 고통에 부딪힙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남반구 가난한 국가들은 절대 똑같이 힘들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보다 남반구 가난한 국가들은 훨씬 커다란 고통과 아픔에 부딪힙니다.



자본주의가 심각한 빈부 격차를 유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너무 악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이 돌고 돈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세상이 돌고 돌기 때문에, 언제나 세상은 악랄했습니다. 언제나 세상이 악랄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정당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빈부 격차를 정당화합니다. 관건은 생산 조건입니다. 와플과 체스판에게 관건이 생산 조건인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고대 설화에게도 관건은 생산 조건입니다. <와인드업 걸>과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유전 공학과 자유 민주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홍수 설화는 유전 공학과 자유 민주주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모스라는 핵 폐기물을 정화하나, 카르난은 핵 폐기물을 알지 못합니다. <플래닛폴> 아마존은 유전 공학을 이용하나, <디앤디> 드루이드는 유전 공학을 알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서구 근대화에게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돌고 돌다고 해도,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에게 신화가 원형이라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특정한 생산 조건(서구 근대화)에게 기반합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세상이 돌고 도는 것처럼, 특정한 생산 조건(서구 근대화)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돌고 돈다고 해도, 고대 인도 사람들은 안나푸르나가 유전 공학을 이용하고 개조 작물을 키운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돌고 돈다고 해도, 특정한 생산 조건은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를 나눕니다. SF 평론가는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 사이에서 연속성이 있다고 해석합니다. 한편으로 SF 평론가는 특정한 생산 조건이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를 나눈다고 해석합니다. 특정한 생산 조건이 <플래닛폴>과 <디앤디>를 나누기 때문에, <플래닛폴>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되고, SF 평론가는 고유한 색깔을 확립합니다. 만약 특정한 생산 조건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생산하지 않는다면, SF 평론가와 판타지 평론가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는 특정한 생산 조건, 서구 근대화를 주목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문학 평론가는 SF 평론가에게 반박할지 모릅니다. SF 평론가는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가 다르다고 해석하나, 일반적인 문학 평론가는 세상이 돌고 돌기 때문에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에게 연속성이 있다고 해석합니다. 두 해석은 대조적입니다. 하지만 두 해석은 사실입니다. 사실로서 두 해석은 공존합니다. 어떻게 대조적인 두 해석이 공존할 수 있나요? 어떻게 새로운 것이 나타나고, 동시에 어떻게 세상이 똑같이 돌고 도나요?



두 해석은 사실이나, 두 해석이 대립하기 때문에, SF 평론가와 일반적인 평론가는 싸울지 모릅니다. 두 평론가가 싸우는 것처럼, 문화 예술 해석들은 헛갈립니다. 예술 작품이 문화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비단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만 아니라 많고 많은 문화 해석들은 헛갈립니다. 문화 해석들에게 정답이 없기 때문에, 많은 해석들이 정답이기 때문에, 문화 해석은 '꿈보다 해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인류 사회에서 문화 영역이 전부인가요? 인류 사회에서 문화 영역이 모든 것을 차지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문화 영역보다 다른 것은 훨씬 근본적입니다.

 

아이스크림 와플은 먹거리입니다. 먹기 위해 인간은 와플을 만듭니다. 인간은 먹고 삽니다. 먹거리가 근본적이기 때문에, 어머니 자연과 <디앤디> 드루이드와 <플래닛폴> 아마존은 이어집니다. 먹거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어머니 자연과 모스라와 카르난은 이어집니다. 먹거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와인드업 걸>은 유전 공학 작물을 묘사합니다. 만약 인간이 먹지 못한다면, 인간은 굶어죽을 겁니다. 죽은 인간은 소설을 읽지 못합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인간이 먹고 살기 때문에, 인간은 소설을 읽습니다. 문화 영역보다 먹고 살기는 훨씬 근본적입니다. 어떻게 인류 사회가 먹고 사나요?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입니다. 달달한 아이스크림 와플에게 생산 조건이 있는 것처럼, 서구 근대화에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롯한 것처럼, 자본주의에게도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이게 무엇인가요? 어떻게 자본주의가 나타났나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우월한 서구 백인 남자들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떠벌입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수많은 식민지 피해자들은 그저 무식하고 열등한 야만인 새끼들에 불과할 겁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 아프리카 흑인들, 동남 아시아 원주민들이 그저 무식하고 열등한 야만인 새끼들에 불과한가요?

 

서구 근대화에서 <플래닛폴> 아마존은 비롯했으나, 자랑스러운 서구 백인 남자들이 자본주의를 만들었기 때문에, 뒈진 야만인 새끼들과 <플래닛폴> 아마존이 아무 관계를 맺지 않나요? 그건 아닙니다. 예술 작품보다 먹거리가 훨씬 근본적이고, 문화 영역보다 먹고 살기가 훨씬 근본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단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먹고 살기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가 어머니 자연을 강조하는 것처럼, 먹고 살기는 훨씬 중요한 논의입니다. 예술 작품들을 비롯해 문화 영역은 아주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하나, 문화 영역과 달리, 먹고 살기는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가 예술 해석을 비롯해 문화 영역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류 사회와 문화 영역이 떨어지지 못하고, 먹고 살기 역시 문화적인 측면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 영역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먹고 살기가 문화적인 측면을 포함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아이스크림 와플을 선호하고, 어떤 사람은 초콜릿 타르트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먹거리가 무엇이 되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먹습니다. 우리는 어떤 소설이 감동적이거나 지루하다고 해석할 수 있고, 대조적인 두 해석은 공존하나, 우리는 인간이 먹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조차 이 물음에 직면합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세상이 돌고 돈다고 암시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초기 기독교 정신을 보기 원한다면, 당신은 국제 노동자 협회를 주목해야 한다." 이 인용은 고대와 근대에서 연속성이 있다고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역사 유물론을 주장했습니다. 역사 유물론은 변증법을 포함합니다. 변증법은 정-반-합 원리에서 세상이 계속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역사 유물론은 세상이 돌고 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타당한가요? 전자인가요, 아니면 후자인가요?



저는 연속성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연속성보다 새로움에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국제 노동자 협회는 새롭습니다. 고대 인류 문명이 산업 노동자 계급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돌고 돌지 않습니다. 이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저와 달리, 어떤 사람들, 심지어 미카엘 뢰비 같은 좌파 지식인들조차 제 의견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네, 좋습니다. 세상은 돌고 돕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이 돌고 돈다고 해도, 결국 근본적인 것은 먹고 살기입니다. 세상이 돌고 돌기 때문에, 먹고 살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초기 공산주의를 계승해야 합니다.

 

연속성보다 새로움이 중요하고, 고대 인류가 외계 수각류 공룡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돌고 돌지 않습니다. 고대 인류는 안나푸르나 여신이 생체 병기로써 수각류 공룡을 길들인다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고대 인류는 수각류 공룡 그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속성보다 새로움을 강조하기 원합니다. 이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이 의견과 달리,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돌고 돈다고 주장할 겁니다. 이 사람들은 안나푸르나 여신과 <플래닛폴> 아마존과 <디앤디> 드루이드 사이에서 새로움보다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기 원할 겁니다.

 

 

세상이 돌고 돌기 때문에, 어머니 자연과 <플래닛폴> 아마존에게는 연속성이 있고, SF 장르는 새롭지 않은지 모릅니다. 네, 좋습니다. 어머니 자연은 자연 속에서 인류가 먹고 산다고 강하게 비유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류가 먹고 살기 때문에, 자연은 사유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은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 자연을 계승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공유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세상이 돌고 돌든, 새로운 것이 나타나든, 결국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공유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측면에서 해석 차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공유 사회로 가기 위한 경로가 절대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나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아직 세계 혁명이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어떻게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보기 위한 관점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심지어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이것을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국(一國) 사회주의를 주장했으나, 이건 세계 혁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건 세계 혁명을 위해 소비에트 연방이 구심점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서구 제국주의는 소비에트 연방을 압박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압박 속에서 일국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코민테른은 온갖 삽질/뻘짓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사회주의 혁명은 커다란 숙제이고, 커다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점들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주의 혁명은 먹고 살기를 인정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오직 예술 작품들과 문화 영역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드림캐쳐를 좋아해서는 안 돼! 리즈와 올라운더 같은 남자 프로듀서들이 드림캐쳐를 만들었기 때문이야! 드림캐쳐는 가짜 걸 크러시야아아~!" 사회주의는 이것을 외치기보다 먹고 사는 문제를 외칩니다.

물론 똑똑하신 포스트 모더니스트께서는 먹고 살기가 그저 해석 차이(차연)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겁니다. 이야아~, 이건 너무 천재적인 이론입니다. 먹고 살기가 그저 해석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리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소일렌트 그린을 우적우적 씹는다고 해도, 이건 그저 해석 차이에 불과할 겁니다. 낭만적인 까페에서 생태 사회주의자가 <오늘따라 예쁘다>를 들으며 아이스크림 와플을 먹는 동안, 아무리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제노모프 산성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고 해도, 이건 그저 해석 차이에 불과합니다.


※ 사진 <Waffle Sweets Ice Cream … Delicious> 출처: jusminmari,

pixabay.com/photos/waffle-sweets-ice-cream-sweet-4608843/

 

※ 게임 <에이지 오브 원더스: 플래닛폴> 스크린샷 출처: Cantastrophe,

www.youtube.com/watch?v=RUJAIIECz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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