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분노의 날들>과 우주 개척 이야기들 본문
인간은 무인도가 아닙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떠벌이나,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순수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가 가리키는 것처럼, 사회 없이, 인간은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관계들을 맺습니다.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단수보다 복수입니다. 인간이 단수보다 복수인 것처럼, 여러 관계들 속에서 인간은 존재합니다. 인간이 여러 관계들을 맺는 것처럼, 소설은 여러 관계들을 맺습니다.
실비 제르맹은 소설 작가입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실비 제르멩이 새로운 마술적인 사실주의(마술적인 리얼리즘)를 썼다고 호평합니다. 만약 소설 독자가 <밤의 책>과 <분노의 날들>을 흥미롭게 읽는다면, 소설 독자는 비슷한 소설들을 계속 읽기 원할지 모릅니다. 실비 제르멩이 마술적인 사실주의를 새롭게 가다듬었기 때문에, 소설 독자는 또 다른 마술적인 사실주의 소설 작가를 찾기 원할 겁니다. 마술적인 사실주의로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이사벨 아옌데는 아주 유명하고, 소설 독자는 실비 제르멩과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이사벨 아옌데 소설들을 함께 읽기 원할지 모릅니다.
실비 제르멩과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이사벨 아옌데는 독립적입니다. 실비 제르멩은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아니고,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이사벨 아옌데가 아닙니다. 세 소설 작가들은 다릅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과 <밤의 책>은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비 제르멩과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이사벨 아옌데는 관계를 맺습니다. 이 관계는 마술적인 사실주의입니다. 마술적인 사실주의 범주 속에서 실비 제르멩과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이사벨 아옌데는 관계를 맺고, 그래서 만약 소설 독자가 <분노의 날들>을 흥미롭게 읽었다면, 소설 독자는 가브리엘 마르케스에게 관심을 기울일지 모릅니다.
마술적인 사실주의는 환상을 묘사합니다. 마술적인 사실주의에서 사실보다 마술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마술적인 사실주의가 환상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 장르에서 비(非)현실은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비단 마술적인 사실주의만 아니라 초현실주의는 환상, 비현실을 묘사합니다. <세계 테마 기행>이라는 여행 프로그램이 멕시코 미술을 소개했을 때, 여행 안내자는 프리다 칼로를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미술 평론가들은 프리다 칼로가 마술적인 사실주의 화가라고 분류합니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나, 살바도르 달리와 프리다 칼로는 다릅니다.
살바도르 달리와 프리다 칼로가 다른 것처럼, 초현실주의와 마술적인 사실주의는 다릅니다. 양쪽이 다르기 때문에, 여행 프로그램 안내자가 틀렸나요? 하지만 초현실주의와 마술적인 사실주의에게는 환상, 비현실이라는 교집합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환상과 비현실을 중시합니다. 유럽 초현실주의가 라틴 아메리카 마술적인 사실주의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어떤 소설 독자들은 실비 제르멩과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이사벨 아옌데가 초현실주의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실비나 오캄포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를 썼습니다. 이게 초현실주의인가요, 아니면 마술적인 사실주의인가요? 무엇이 옳은가요?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가 초현실주의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어떤 소설 독자들은 이게 마술적인 사실주의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실비나 오캄포가 남아메리카(아르헨티나) 작가이고, 마술적인 사실주의가 대표적인 라틴 아메리카 예술 장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를 초현실주의보다 마술적인 사실주의에 집어넣기 원할지 모릅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가 무엇에 속하든, 이건 무인도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는 초현실주의, 마술적인 사실주의와 관계를 맺습니다. 여러 관계들 속에서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는 존재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가 무인도가 아니기 때문에, 문학 평론가들은 이것을 다른 초현실주의 소설들과 연결하거나 이것을 <백년 동안의 고독>과 <밤의 책>과 연결할 겁니다. 아니면 문학 평론가들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를 다른 초현실주의 소설들, 마술적인 사실주의 소설들과 폭넓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문학 평론가들은 소설이라는 형식과 매체를 넘고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를 프리다 칼로 회화에 연결하거나 이것을 영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 실비 제르망은 여러 관계들을 거치고 <판의 미로>를 향해 이어질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판의 미로>가 에스파냐 내전을 다룬다고 해석합니다. 파쇼주의 세력이 확장했기 때문에, 에스파냐는 끔찍한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비단 에스퍄나만 아니라 유럽에서 파쇼주의는 세력을 확장했고 2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습니다. 유럽은 자신이 자유 민주주의라고 자랑하고 공산주의를 혐오하나, 자유 민주주의에서 파쇼주의는 비롯했고, 파쇼주의는 2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은 가장 커다란 전쟁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파쇼주의가 비롯한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는 파쇼주의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유주의는 파쇼주의를 유발합니다.
미국에서 수구 세력이 난리법석을 치는 것처럼, 유럽에서 극우 세력이 확장하는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는 파쇼주의로 빠집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3차 세계 대전이 피부에 와닿는다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판의 미로>는 이것들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판의 미로>는 파쇼주의를 설명하기보다 잔혹하고 환상적인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판의 미로>가 마술적인 사실주의로 이어진다고 해석합니다. 잔혹하고 환상적인 장면들 때문에, <판의 미로>는 실비나 오캄포로 이어지고, 이사벨 아옌데로 이어지고, 프리다 칼로로 이어지고, 심지어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와 <밤의 책>(과 다른 여러 초현실주의들, 마술적인 사실주의들)이 관계를 맺기 때문에, 여러 관계들 속에서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가 존재하는 것처럼, 소설은 무인도가 아닙니다. 소설이 무인도가 아니기 때문에, 소설 독자가 <밤의 책>과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를 비교하는 것처럼, 소설 독자들은 비슷한 소설들을 비교하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건 장르가 됩니다. 마술적인 사실주의는 장르입니다. <밤의 책>과 <판의 미로>가 이어지는 것처럼,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역시 무인도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관계를 맺습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역시 관계를 맺고, 그래서 이것들은 장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장르 속에서 개별적인 이야기들은 여러 연결 고리들을 맺고, 이야기는 복수가 됩니다. 단수보다 복수로서 이야기는 존재합니다. 단수로서 존재하기보다 <판의 미로>를 비롯해 여러 관계들 속에서 <분노의 날들>은 존재합니다. 이건 장르라는 범주가 완전히 고정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떤 장르가 전형(典型)을 확립했다고 해도, 이 장르는 고정적인 경계선이 되지 못합니다. 캐서린 애디슨(사라 모넷)은 <고블린 황제 The Goblin Emperor>를 썼습니다.
주된 배경이 엘프 제국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엘프 황제 가문은 비행선 추락 사고에 휘말립니다. 비행선이 추락했기 때문에, 엘프 황제 가문은 비명횡사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와 비행선이 어울리나요? 아니, 비행선은 스팀펑크 설정입니다. 비행선은 스팀펑크 설정이나, <고블린 황제>는 비행선 추락 사고를 묘사합니다. <고블린 황제>가 중세 판타지인가요, 아니면 스팀펑크인가요? 중세 판타지로서 <고블린 황제>는 스팀펑크를 받아들입니다. 이 기준에서 <고블린 황제>는 <에라곤> 같은 중세 판타지와 다릅니다. <에라곤>은 스팀펑크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이 그림(링크)을 보세요. 이 그림은 <고블린 황제> 팬 아트입니다. 이 그림은 SF 분위기를 풍기지 않습니다. 이 그림처럼, <에라곤>은 중세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고블린 황제>는 스팀펑크를 묘사하고, <에라곤>은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두 소설이 똑같은 중세 판타지라고 해도, 만약 판타지 독자들이 스팀펑크를 좋아한다면, 판타지 독자들은 <에라곤>보다 <고블린 황제>를 흥미롭게 읽을 겁니다. <고블린 황제>와 <에라곤>은 똑같은 중세 판타지이나, 스팀펑크가 끼어들기 때문에, <고블린 황제>와 <에라곤>은 다릅니다. 스팀펑크가 끼어들기 때문에, <에라곤>보다 <고블린 황제>는 <마술사가 너무 많다>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마술사가 너무 많다>는 중세 유럽 판타지가 아닙니다. 이 소설은 중세 판타지가 아니나, 이 소설이 스팀펑크(가스등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에, 만약 판타지 독자들이 스팀펑크를 좋아한다면, 판타지 독자들은 <에라곤>보다 <고블린 황제>가 <마술사가 너무 많다>에 가깝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을 비롯해 이야기는 여러 관계들을 맺고, 관계들은 장르를 형성하나, <에라곤>보다 <고블린 황제>가 <마술사가 너무 많다>에 가까울 수 있는 것처럼,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장르에서 이야기는 뛰쳐나가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장르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류 기준입니다.
장르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르로서 스페이스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함대 전투로 이어집니다. 우주 함선들이 화려하게 싸우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커다란 인기를 누립니다. SF 장르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 함대 전투로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너 해링턴과 포 다메론과 카란 스젯은 우주 함대 전투로 이어질 수 있으나, 어떤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우주 함대 전투는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소한 정의>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조차 우주 함대 전투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소설 <사소한 정의>는 은하 제국과 우주 함선을 묘사합니다. 소설 속에서 은하 제국과 우주 함선은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사소한 정의>는 우주 함대 전투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정의>가 보여주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함대 전투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언클레임드 월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외계 행성에서 우주인들은 불시착했습니다. 다행히 외계 행성은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자랑하고, 생존자들은 자연 환경을 가공하고 재화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 속에서 생존자들은 채집하고, 낚시하고, 농사를 짓습니다. 이 게임은 농사를 보여줍니다.
<언클레임드 월드>는 스페이스 오페라이나, 이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우주 함대 전투보다 채집과 낚시와 농사는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홈월드>와 <언클레임드 월드>는 똑같은 스페이스 오페라이나, <홈월드>와 달리, <언클레임드 월드>는 우주 프리깃이 함포들을 쾅쾅 쏜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홈월드>와 달리, 우주 프리깃을 조종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은 <언클레임드 월드>를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마술적인 사실주의에서 실비 제르멩과 <판의 미로>와 프리다 칼로와 실비나 오캄포가 관계를 맺는 것처럼, <사소한 정의>와 <홈월드>와 <언클레임드 월드>는 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사소한 정의>와 <홈월드>와 <언클레임드 월드>는 다릅니다. <홈월드>에서 우주 함대 전투는 핵심입니다. <사소한 정의>는 우주 함선을 묘사하나, 우주 함대 전투는 핵심이 아닙니다. <언클레임드 월드>는 우주 함선에게 관심을 완전히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외계 생존자들은 채집하고 낚시하고 농사를 짓느라 바쁩니다. "11시 방향 상단! 적군 콜벳! 어뢰 경보! 어뢰 경보! 모두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달리, <언클레임드 월드>에서 이런 대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클레임드 월드>는 생존 게임, 농사 게임에 가깝습니다.
<언클레임드 월드>가 농사 게임에 가깝기 때문에,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언클레임드 월드>와 <스타듀 밸리>가 비슷하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채집과 낚시와 농사가 교집합이 되기 때문에, <언클레임드 월드>와 <스타듀 밸리>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스타듀 밸리>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나, <스타듀 밸리>에서 채집과 낚시와 농사는 핵심입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채집과 낚시와 농사가 재미있다고 느낀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스타듀 밸리>와 <언클레임드 월드>를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홈월드>는 스페이스 오페라이나, <홈월드>가 채집과 낚시와 농사를 중시하나요?
채집과 낚시와 농사를 즐기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가 <홈월드>를 선택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홈월드>에서 우주 프리깃은 함포들을 쾅쾅 날리고, 이것을 구경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홈월드>를 선택합니다. <스타듀 밸리>와 <언클레임드 월드>에서 우주 프리깃은 함포들을 쾅쾅 날리지 않고, 그래서 <홈월드>보다 <스타듀 밸리>와 <언클레임드 월드>는 비슷합니다. 아무리 <홈월드>와 <언클레임드 월드>가 똑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도, 비록 <스타듀 밸리>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라고 해도, 채집과 낚시와 농사는 <홈월드>보다 <스타듀 밸리>와 <언클레임드 월드>를 분류합니다.
이건 <스타듀 밸리>와 <언클레임드 월드>가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스타듀 밸리>와 <언클레임드 월드>에게 채집과 낚시와 농사는 뚜렷한 교집합입니다. 이것들이 뚜렷한 교집합이기 때문에, <홈월드>보다 <스타듀 밸리>와 <언클레임드 월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언클레임드 월드>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아무리 <스타듀 밸리>와 <언클레임드 월드>가 비슷하다고 해도, <언클레임드 월드>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언클레임드 월드>는 외계 행성 생존자들을 묘사합니다. 중편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 역시 외계 생존자들을 묘사합니다.
존 발리는 <화성의 왕궁에서>를 썼습니다. 화성에서 우주 탐사대는 사고를 겪고, 그들은 탐사대보다 생존자들이 됩니다. 나중에 생존자들은 개척자들이 됩니다. SF 장르에서 생존자는 개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주 생존 이야기는 우주 개척 이야기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언클레임드 월드>와 <화성의 왕궁에서>가 외계 생존자들을 묘사하고, <화성의 왕궁에서>가 비단 우주 생존만 아니라 우주 개척을 포함하기 때문에, <언클레임드 월드> 역시 우주 개척 이야기들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무인도가 아닙니다. 이야기는 여러 관계들을 맺습니다. <언클레임드 월드>는 우주 개척 이야기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외계 행성에서 생존자들이 충분히 먹고 살기 때문에, 외계 행성에서 생존자들이 작은 문명을 이룩하기 때문에, 만약 생존자들이 고향별로 돌아간다면, 인류는 이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우주 생존과 우주 개척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아직 화성에서 인류는 생존하지 못하고 자급자족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약 화성에서 인류가 생존하고 자급자족한다면, 화성 생존은 화성 개척으로 바뀔 겁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화성 개척이 타당한가요? 왜 인류 문명이 외계 행성을 개척하나요? 외계 행성 개척은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합니다. 왜 인류 문명이 어마어마한 비용을 소모하나요?
아직 지구 문명은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왜 지구 문명이 화성 문명에게 어마어마한 비용을 소모해야 하나요? 여기에서 관건은 세계화 자본주의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니콜라이 부하린부터 이른바 세계 체제 4인방 이론가들까지, 여러 좌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비(非)자본주의 영역에게 필연적으로 기생한다고 분석합니다. 자본주의는 다른 뭔가에게 필연적으로 기생합니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같은 서발턴 이론가 역시 자본주의가 밑바닥 계급에게 기생한다고 분석합니다. 뭔가에게 기생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를 향해 필연적으로 확장합니다.
지구에서 세계화 자본주의가 다른 뭔가에게 기생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는 외계 행성으로 마수를 뻗을지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외계 행성 개척은 개척보다 기생이 됩니다. 이미 지구에서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행성급 환경 오염을 저질렀습니다. 환경 오염 범죄를 감추기 위해 자본주의는 악랄한 거짓말들을 나불거립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외계 행성으로 마수를 뻗는다면, 이건 또 다른 행성급 환경 오염을 초래할 겁니다. 또 다른 행성급 환경 오염이 나타나기 전에, 인류 문명은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주 개척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언클레임드 월드>는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을 고민하지 않으나, 이야기는 무인도가 아닙니다. 이야기는 여러 관계들을 맺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언클레임드 월드>는 우주 개척 이야기들과 여러 관계들을 맺고, 이 관계들 속에서 우주 개척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언클레임드 월드>가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을 고민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 관계들 속에서 <언클레임드 월드>는 자본주의 문제, 환경 오염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건 <언클레임드 월드>가 자본주의 문제, 환경 오염 문제로 필연적으로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필연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실비나 오캄포가 <판의 미로>로 이어지는 것처럼, 단수보다 복수로서 이야기는 존재하나, <에라곤>보다 <고블린 황제>가 <마술사가 너무 많다>에 가까울 수 있는 것처럼,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장르에서 이야기는 뛰쳐나가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장르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클레임드 월드>는 자본주의 문제, 환경 오염 문제로 이어질 수 있으나, 이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류 기준입니다. 현실에서 기후 위기, 행성급 환경 오염은 너무 심각한 화두입니다. 아무리 코로나 19 사태가 끝난다고 해도, 이상 기후는 또 다른 전염병을 부를지 모릅니다.
현실에서 기후 변화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중요한 분류 기준이 되고, 이 분류 기준은 <언클레임드 월드>와 우주 개척 이야기들과 자본주의 문제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만약 소설 독자가 <밤의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면, 소설 독자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이사벨 아옌데와 실비나 오캄포를 계속 읽기 원하는 것처럼,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언클레임드 월드>를 흥미롭게 플레이했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 생존/개척 이야기들을 계속 좋아할 테고, 이 관계들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기후 변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