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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소멸의 땅>과 21세기 초반 과학 신화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소멸의 땅>과 21세기 초반 과학 신화

OneTiger 2020. 8. 17. 19:57



왜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나요? 많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SF 설정에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이언스 픽션보다 그저 감동적인 소설, 신나는 영화, 재미있는 게임을 좋아할 뿐입니다. 아무리 어떤 소설, 영화,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해도, 소설 독자들과 영화 관객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은 사이언스 픽션에게 상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SF 소설에서 로봇이 인간이 되기 원한다고 해도, 많은 소설 독자들은 이 로봇과 피노키오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피노키오는 SF 설정이 아니나, 로봇과 피노키오는 비슷합니다.

 

하드 SF 로봇과 피노키오는 인간의 피조물입니다. 제페토는 로봇 공학자가 아니나, 그렇다고 해도 로봇과 피노키오는 똑같은 인간의 피조물입니다. 인간의 피조물로서 로봇과 피노키오는 진짜 인간이 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로봇과 피노키오는 비슷한 위상이 됩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온갖 어려운 과학 용어들을 퍼붓는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어려운 과학 용어들보다 이야기 구조(인간의 피조물은 인간이 되기 원한다)이고, 그래서 하드 SF 로봇과 피노키오는 비슷한 위상이 됩니다. 온갖 어려운 과학 용어들은 파란 머리 요정을 밀어내지 못합니다. 이 상황에서 동화와 SF 경계선은 희미합니다.



로봇과 피노키오가 비슷한 소재가 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에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국내 문화에서 <스타크래프트>는 이른바 국민 게임입니다. <스타크래프트>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국내 문화에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인기를 끌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스타크래프트>가 국민 게임이라고 해도, <마일즈의 전쟁>은 국민 소설이 아닙니다. 국내 문화에서 보드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테라포밍 마스>는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묘사합니다. 국내 문화가 이것을 좋아하나요?

 

국내 문화에서 외계 행성 테라포밍, 외계 생태계 조성이 인기를 끌기 때문에, <테라포밍 마스>가 인기 보드 게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국내 문화는 소설 <붉은 화성>을 외면했습니다. <붉은 화성>이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어 판본 <붉은 화성>은 반쪽짜리입니다. 아무리 어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이 인기를 끈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이나 스페이스 오페라 '애니메이션'은 인기를 끌지 못할지 모릅니다. SF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SF 그 자체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사이언스 픽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SF 설정은 이야기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분명히 하드 SF 로봇과 피노키오는 다릅니다. SF 독자들은 미래 인공지능이 안전한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SF 독자들은 미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SF 소설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SF 팬덤은 이 장르를 사랑합니다. 비단 SF 팬덤만 아니라 다른 일반 독자들 역시 SF 가치를 인정합니다. 종종 독자들은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 그들이 SF 소설들을 읽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미래 전망은 SF 가치의 전부가 아닐 겁니다. 하드 SF 소설은 미래를 전망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이언스 픽션들과 미래 전망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니, 상당히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과 미래 전망은 아무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이언스 픽션들은 판타지에 훨씬 가깝습니다. 아서 클라크가 설명한 것처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을 읽을 수 있으나, 사이언스 판타지들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습니다. 제프 밴더미어는 <소멸의 땅>을 썼습니다. <소멸의 땅>은 뉴 위어드입니다. 뉴 위어드는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하드 SF 소설들과 달리, <소멸의 땅>은 엄중한 과학 지식들에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불가해한 자연을 묘사합니다.



X 구역은 불가해한 자연입니다. 여기에서 이성, 과학,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성, 과학, 논리를 불가해한 자연에게 들이대지 못합니다. 압도적인 자연은 인간을 삼키고, 인간은 자연에게 동화합니다. 인간은 자연을 분석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분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를 전망하지 못합니다. 하드 SF 소설에서 이성, 과학, 논리는 필수적입니다. 하드 SF 소설은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뉴 위어드 <소멸의 땅>은 이성, 과학, 논리를 버리고 판타지 요소들을 받아들입니다. X 구역에서 어떤 야생 동물들은 야생 동물이 아닌지 모릅니다. 이 동물들은 인간들인지 모릅니다.

 

X 구역에서 압도적인 자연이 인간을 삼키기 때문에, 인간은 야생 동물로 변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인간이 야생 동물로 변한다면, 이건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에 가까울 겁니다. 인간이 동물로 변하기 때문에, <소멸의 땅>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환경 오염이 심각하다고 해도, 미래 사람들은 야생 동물들로 변신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치명적이라고 해도, 과학자들은 2050년 사람들이 야생 동물들로 변신할 거라고 예측하지 않습니다. 2050년 사람들이 동물들로 변신하지 않는 것처럼, <소멸의 땅>과 미래 전망은 아무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만약 <소멸의 땅>이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다면, 왜 독자들이 SF 소설을 읽나요? 여기에서 과학 계몽 역시 걸림돌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SF 장르가 과학을 계몽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 학습 만화들이 SF 공식들을 빌리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바다 탐험대 옥토넛>이 사이언스 픽션이 되는 것처럼,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을 계몽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과학 학습 만화들을 좋아한다면, 이 아이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함께 좋아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사이언스 픽션에게 관심을 기울일 겁니다. 하지만 <소멸의 땅>과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너무 대조적입니다.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해양 생태계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합니다. 반면, <소멸의 땅>은 X 구역 자연 환경을 분석하지 못하고 연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인간은 야생 동물이 됩니다. 만약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서 대쉬나 셸링턴이 장수 거북이나 귀상어로 변신한다면, <옥토넛>은 과학 학습 만화로서 가치를 잃을 겁니다. 아무리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서 신나는 모험이 중요하다고 해도, <옥토넛>은 판타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반면, <소멸의 땅>은 판타지 요소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소멸의 땅>은 판타지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갑니다. 이건 과학 계몽이 아닙니다.



<소멸의 땅>은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을 묘사하나, 만약 사람들이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을 분석하고 연구하기 원한다면, <소멸의 땅>보다 레이첼 카슨은 훨씬 나을 겁니다. 만약 독자가 <바다의 가장자리>를 읽는다면, 독자는 해양 생태학 연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건 과학 계몽이 될 수 있습니다. <바다의 가장자리>와 달리, <소멸의 땅>은 과학을 계몽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소멸의 땅>은 이성과 과학과 논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 관점에서 <바다의 가장자리>와 <소멸의 땅>은 대조적입니다. 전자는 논리적인 과학을 중시하나, 후자는 논리적인 과학을 팽개칩니다.

 

만약 <바다의 가장자리>와 <소멸의 땅>이 대조적이라면, 이건 <소멸의 땅>이 과학 계몽, 미래 전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소멸의 땅>이 생물 다양성을 묘사한다고 해도, 독자가 <소멸의 땅>을 읽고 미래 기후 변화를 고민할 수 있나요? 이윤을 높이기 위해 산업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심각해집니다. 산업 자본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이윤이기 때문에, 산업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정화 비용을 줄인다면, 이건 높은 이윤으로 이어질 겁니다. 환경 오염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을 환영합니다.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 청구서입니다. 이미 자본주의는 실패했습니다. 심각한 환경 오염들은 자본주의가 실패했다고 증명합니다.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 청구서들을 외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오직 부유하고 화려한 것들만 자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자본주의가 부유하고 자유롭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람들이 기만적인 베일을 아주 살짝 들춘다면, 사람들은 이미 자본주의가 실패했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높은 이윤이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실패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심각하다고 해도, 오히려 기후 위기에서 자본주의는 이윤을 얻기 원할 테고 기후 위기를 상품화할 겁니다.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후 위기는 심각한 환경 재앙보다 상품이 될 겁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대기 오염을 상품화하고 에어컨을 팔아먹는 것처럼,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위기를 상품화하고 이윤을 얻기 원할 겁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은 산업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공유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진짜 녹색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지속 가능한 공유 사회만 진짜 녹색입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진짜 녹색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레이첼 카슨은 화학 회사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레이첼 카슨은 비단 <바다의 가장자리>만 아니라 <침묵의 봄>을 썼습니다. <소멸의 땅>은 어떤가요? 이 소설이 영리 기업들을 비판하나요?



<소멸의 땅>이 미래 기후 재앙, 아니, 기후 범죄를 전망할 수 있나요? 미래 기후 범죄는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을 짓밟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멸의 땅>이 생물 다양성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미래 환경 오염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논리적인 과학보다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분위기는 훨씬 강렬합니다. <소멸의 땅>에서 미래 전망, 과학 계몽은 가치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 미래 전망, 과학 계몽이 가치가 되지 못한다면, <소멸의 땅>에게 어떤 가치가 있나요? <소멸의 땅>을 비롯해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 사이언스 판타지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나요? '과학 신화'는 대답인지 모릅니다.

 

이 TED-ED 동영상(링크)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신화를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 왕 궁전 지하에는 엄청난 미궁이 있습니다. 지하 미궁은 무시무시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자랑합니다. 피에 굶주린 괴물이 화내고 울부짖을 때,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은 요동칩니다. 미노타우로스는 비(非)현실 설정입니다. 현실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이건 비현실 설정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들이 비현실 설정들을 묘사하는 것처럼, <소멸의 땅>에서 X 구역 야생 동물들이 비현실 설정인 것처럼, 미노타우로스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왜 고대 인류가 비현실 설정을 만들었나요?



TED-ED 동영상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고대 인류가 비현실 설정, 신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고대 인류는 여러 자연 현상들을 목격했으나, 그들은 그것들을 분석하지 못했습니다. 고대 인류에게 충분한 과학 지식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인류는 비현실 설정,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근대 과학은 신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나, 만약 과학자들이 신화를 차근차근 따라간다면, 신화는 과학으로 이어지기 위한 실마리가 될지 모릅니다. 최초 미노타우로스 이야기 판본은 반인반수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에서 외형은 핵심 소재가 아닐 겁니다.

 

여러 이야기 판본들에서 교집합은 지하 미궁, 엄청난 울음소리, 요동치는 지각입니다. 크레타 섬 지하에서 고고학자들은 미궁을 찾지 못했으나, 분명히 지하 미궁은 어떤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에게 해 구역'이라고 불리는 대륙 암석층 위에서 크레타 섬은 존재합니다. 에게 해 구역 아래에서 누비안 구역이라는 해양 암석층은 에게 해 구역에게 약간 끼어듭니다. 이건 섭입대(攝入帶) 지형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섭입대 지형은 지진을 일으킵니다. 크레타 섬에서 상황은 훨씬 심각합니다. 누비안 구역이 아프리카 대륙에게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누비안 구역이 움직일 때, 누비안 구역은 가파르게 내려가지 않습니다.



다른 섭입대 바다 지각 조각들과 달리, 누비안 구역은 지중해 지각을 위로 강렬하게 밀어냅니다. 이 현상의 중심부에서 크레타 섬은 존재합니다. 2014년, 크레타 섬에서 강도 2.0 이상의 지진들은 1,300회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고대 미노아 왕은 지진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했으나, 과학자들은 화석들과 지층 증거들을 분석하고 고대 크레타 지진들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한때 크레타 섬은 90cm까지 치솟았을 겁니다. 그래서 심각한 지진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크레타 사람들은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과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크레타 지진들이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만든 것처럼, 하와이 화산들과 지진들은 신화를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이 신화는 화산 여신 펠레입니다. 펠레가 화산 여신이기 때문에, 펠레는 세상을 불태우고 파괴합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서 나무 외계인 언폴른들이 화염과 번성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처럼, 화산 여신 펠레는 춤과 창조를 함께 포함합니다. 여러 인류 문화들에서 여신이 자연, 번성, 창조, 풍요로움을 관장하는 것처럼, 화산 여신 펠레는 자연과 번성을 관장하는지 모릅니다. 반면, 미노타우로스는 오직 파괴만 관장합니다. 왜 미노타우로스와 펠레가 대조적인가요?



하와이에서 최악의 지진은 화산 활동을 자극하고, 화산은 용암을 뿜습니다. 현무암으로서 하와이 용암은 토양을 기름지게 합니다. 비록 화산 폭발이 끔찍하다고 해도, 수 십 년 이후, 새로운 기름진 지반에서 고대 하와이 사람들은 풍요로운 녹색 식물들을 목격했을 겁니다. 고대 하와이와 달리, 고대 크레타에서 지진은 오직 파괴와 폐허만 남겼습니다. 그래서 펠레 여신과 달리, 미노타우로스 괴물은 풍요로운 여신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신화는 과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TED-ED 동영상은 신화와 과학이 동전의 양면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신화는 과학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신화가 과학의 또 다른 측면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판타지 요소들을 받아들이는지 모릅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인류 문명은 과학 혁명을 거쳤습니다. 21세기 초반은 첨단 과학 시대입니다. 하지만 고대 하와이 사람들과 고대 크레타 사람들이 지질학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아직 인류 문명은 우주 만물, 삼라만상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직 첨단 과학 문명은 자연 환경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21세기 초반 과학은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21세기 초반 과학은 복잡한 생명체를 직접 만들지 못합니다. 21세기 초반 과학은 외계 행성 생태계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21세기 초반 과학은 자연 환경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유년기에서 인류가 벗어나기 전에, 인류는 자연 환경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인류는 무지합니다. 고대 하와이 사람들과 고대 크레타 사람들이 지질학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여전히 21세기 초반 첨단 과학 시대는 무지합니다. 고대 하와이 사람들이 펠레 신화를 만든 것처럼, 21세기 초반 첨단 과학 시대에게는 신화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고대 인류와 달리, 21세기 초반 인류가 과학을 알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신화는 과학을 덧붙이고 '과학 신화'가 됩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과학 신화'입니다. <소멸의 땅>은 과학 신화입니다. <소멸의 땅>의 가치는 미래 전망, 과학 계몽보다 과학 신화입니다. 아직 인류가 무지하기 때문에, 신화 시대에서 인류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인류 문화들은 사이언스 판타지 같은 과학 신화들을 계속 만드는 중인지 모릅니다. 만약 SF 장르가 과학 신화이고, 신화 시대에서 인류가 벗어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인류 문화들은 사이언스 판타지 같은 과학 신화들을 계속 만들지 모릅니다. 21세기 초반 SF 장르와 (200~300년 이후) 미래 SF 장르는 아주 다를지 모르나, 양쪽에게는 과학 신화라는 공통점이 있을지 모릅니다.

 

 

※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테리 이글턴 같은 유명한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게 신화적인 회귀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이 분야에서 테리 이글턴은 아주 적극적입니다. 아니, 이미 프리드리히 엥겔스 역시 기독교 사회주의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인 사회주의이나, 만약 신화 시대에서 인류가 벗어나지 못한다면, SF 장르가 과학 신화가 되는 것처럼, 어쩌면 사회주의에게도 신화(적인 분위기)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사회주의는 자신이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역시 자신이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양쪽은 똑같은 과학입니다.

하지만 양쪽은 대립합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똑같은 과학이나, 양쪽은 대립합니다. 이 상황에서 과학은 효력을 잃습니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보다 신화입니다. 신화로서 사회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합니다. 반면,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떠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수구 꼴통 할배들조차 사회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의 유토피아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사회주의는 소중한 사상입니다. 여러분이 이 게시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는 중이고, 다른 무엇보다 사회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 사진 <Forest Mist Nature Trees Mystic Atmosperic Fog> 출처: Free-Photos,

pixabay.com/photos/forest-mist-nature-trees-mystic-93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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