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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미친 아담>과 고통공 죄수 문제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미친 아담>과 고통공 죄수 문제

OneTiger 2020. 1. 28. 20:35

※ 이 게시글에는 마가렛 앳우드가 쓴 <미친 아담> 3부작의 치명적인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사형, 처형은 많은 논란들을 부릅니다. 목숨이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자가 되었다고 해도, 만약 사람들이 범죄자를 처형한다면,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널지 모릅니다. 만약 이 사람이 무고했다면? 만약 이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면? 비록 이 사람이 무고하지 않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에게 다른 인간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권리가 있나요? 목숨이 오직 하나뿐임에도,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나요? 이게 합법적인가요? 어떻게 사형이 합법적인가요? 이게 가능한가요?


이렇게 사형, 처형이 많은 논란들을 부르기 때문에, 문학에서 사형, 처형은 중요한 소재가 됩니다. 특히, 문학은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처형이 옳은지 물을 수 있습니다. 만약 사회 구조가 안정적이라면, 사회 구성원들은 사형 제도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종종 좌파들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범죄를 유발한다고 주장하고 사형 제도보다 사회 구조 개량/혁명에 치중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회 구조가 불안정하다면? 치열한 전장에서 처형에 반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치열한 전장에서 아군들이 적군 포로들을 처형해야 하나요, 아니면 구속해야 하나요? 이런 상황에서 처형이 옳은가요?



만약 아군들이 적군 포로들을 구속한다면, 아군들은 적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관리해야 할 겁니다.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아군들은 병력과 물자를 할애해야 할 테고, 병력과 물자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전투력은 줄어들 겁니다. 만약 적군 포로들이 탈옥하고 적군 진영으로 돌아간다면, 적군 전투력과 사기는 올라갈 겁니다. 어떤 아군 병사들은 적군 포로들을 혐오할 테고, 만약 적군 포로들이 죽지 않는다면, 아군 병사들은 불만을 품거나 사기를 잃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형에 반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전장은 목숨이 오고 가는 장소이고, 목숨이 오고 가는 장소에서 처형에 반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치열한 전장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더 이상 문명의 이기, 혜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정적인 사회 구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야만적인 행위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온갖 야만적인 상황들을 가정하고 묻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는 이런 특성이 있습니다. 독자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을 읽는 동안, 관객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를 보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그들은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지?"



(서구 근대적인)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지?"라고 극단적으로 묻지 않습니다. 이미 규범, 도덕, 법률이 선택을 교육하거나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선택하기 전에, 이미 보편적인/지배적인 체계는 선택을 교육/강요합니다. 하지만 만약 규범, 도덕, 법률이 무너진다면, 만약 보편적인/지배적인 체계가 선택을 교육/강요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규범, 도덕, 법률, 보편적인/지배적인 체계가 무너진다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읽는 동안, 독자는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지?"


만약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생존자들이 사형, 처형을 논의한다면, 독자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독자가 사형, 처형에 반대해야 하나요? 원론적으로 사형, 처형은 나쁩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원론은 통하지 않습니다. 소설 <트리피드의 날>은 어떤 사회학자를 보여줍니다. 사회학자는 일장연설하고 무너진 인류 사회에서 더 이상 원론이 통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사회학자는 사회 구성원들이 관념, 상식을 바꿔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트리피드의 날>에서 사회학자 연설은 중심 주제를 관통하는지 모릅니다. 무너진 인류 사회에서 더 이상 원론은 원론이 아니고, 상식은 상식이 아니고, 망상은 망상이 아닙니다.



(서구 근대적인)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일처다부제, 일부다처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인류 번식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처다부제, 일부다처제는 상식이 될지 모릅니다. 심지어 일처다부제에서 아내를 위해 남편들은 죽어야 할지 모릅니다. 아내는 아기를 낳고 아기를 몸으로 직접 먹일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기를 낳을 수 있나요? 남편이 아기를 직접 먹일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남편은 쓸모가 없습니다. 남자 젖꼭지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처럼, 남편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힘겨운 생존 상황에서 귀중한 자원들을 아끼기 위해 쓸모없는 남자들은 죽어야 합니다.


여자는 중요하나, 남자는 쓸모가 없습니다. 일처다부제에서 남자들은 죽어야 합니다. 정자 제공 이외에, 남자들은 너무 쓰잘데기 없는 것들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이건 상식이 될지 모릅니다. 일처다부제가 상식이 되는 것처럼, 사형, 처형은 상식이 될지 모릅니다. 종말 세상에서 생존자들은 힘겹게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면, 생존자들은 범죄자를 극단적으로 처벌해야 할 겁니다. 만약 사회 구조가 안정적이라면, 사회 구성원들은 극단적인 처벌보다 훈계, 구속을 지지할 겁니다. 하지만 종말 세상에서 생존자들에게는 범죄자를 훈계하고 구속하기 위한 여유가 없습니다.



만약 생존자들이 범죄자를 훈계한다고 해도, 범죄자가 잘못을 쉽게 뉘우치지 않는다면? 만약 생존자들이 범죄자를 구속한다고 해도, 범죄자가 탈출하고 극단적인 범죄를 다시 저지른다면? 힘겨운 종말 세상에서 생존자들은 인력과 자원을 훨씬 소모할 겁니다. 훈계, 구속은 너무 커다란 비용을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자들은 단순한 공리주의를 추구하고 최대 다수의 안전을 위해 범죄자를 극단적으로 처벌할 겁니다. 안정적인 일상 속에서 공리주의는 그저 사탕발림에 불과한지 모르나, 힘겨운 종말 세상에서 공리주의는 유효한 대답입니다. 그래서 심리 테스트들은 공리주의를 유도합니다.


"뗏목에는 열 사람들이 있다. 뗏목이 망가졌기 때문에, 뗏목에서 누군가는 내려야 한다. 만약 한 사람이 바다에 빠진다면, 다른 아홉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열 사람들 중에는 장애인이 있다. 당신을 비롯해 아홉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당신이 장애인을 바다에 내던질 것인가? 아니면 윤리를 지키기 위해 당신이 열 사람이 함께 익사해야 한다고 선택할 것인가?" 이런 심리 테스트는 드물지 않을 겁니다. 이런 심리 테스트에서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공리주의를 선택하고 아홉 사람들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대답할 겁니다. 힘겨운 생존 상황에서 단순한 공리주의는 유효하고 합리적인 대답 같습니다.



마가렛 앳우드가 쓴 <미친 아담> 역시 사형, 처형을 논의합니다. <미친 아담>은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입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졌고, 소규모 생존자 공동체는 힘겹게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고통공 죄수는 소규모 생존자 공동체를 노립니다. 고통공 죄수는 너무 흉악한 범죄자입니다. 소설 주인공 토비는 두 죄수를 붙잡으나, 토비가 생태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토비는 두 죄수를 처형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두 죄수는 탈출하고, 토비는 자책합니다. 두 죄수는 생존자 공동체를 다시 노릴 테고, 만약 두 죄수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납치하거나 폭행한다면, 이건 토비 잘못일 겁니다.


소설 <미친 아담> 초반부에서 두 죄수가 탈출하기 때문에, 소설이 결말을 향해 진행하는 동안, 토비는 연이어 고민하고 자책합니다. 특히, <미친 아담>이 토비 심리를 직접 표현하기 때문에, 독자는 얼마나 토비가 괴로워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건 <미친 아담>이 1인칭 시점으로 토비 심리를 표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미친 아담>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면, 토비는 햄릿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주인공 심리에 너무 바짝 다가가고, 독자는 토비가 너무 징징거린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미친 아담>은 1인칭 주인공 시점보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 가깝습니다.



<미친 아담>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 가까우나, 이 소설은 전지적 시점을 집어넣고 토비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독자는 객관성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고 토비가 너무 징징거리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미친 아담>은 토비 심리를 직접 묘사하나, 3인칭 관찰자 시점은 토비와 독자 사이를 가로막고, 독자는 토비 심리에 너무 바짝 다가가지 않습니다. 젭 시점은 다릅니다. 소설 속에서 젭 시점은 1인칭입니다. 독자는 젭 심리에 아주 바짝 다가갈 수 있습니다. 독자가 젭 심리에 아주 바짝 다가간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젭은 아주 자신만만하고 개성적이고 재치가 넘칩니다.


독자가 젭 심리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도, 젭이 아주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독자는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젭은 소설 분위기에 활력을 더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작 <홍수의 해>에서 토비가 젭을 일방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독자에게 젭은 다소 낯섭니다. 젭이 중요한 등장인물임에도, 젭은 낯섭니다. 만약 <미친 아담>에서 젭이 3인칭 시점으로 서술했다면, 서술 시점과 등장인물 비중은 어울리지 못했을 겁니다. <미친 아담>에서 독자는 젭 심리에 바짝 다가가야 하고,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여기에 어울립니다. 물론 젭이 1인칭 시점으로 말한다고 해도, 젭은 독자보다 토비에게 말합니다.



젭이 독자보다 토비에게 말하기 때문에, 젭과 독자 사이에는 거리가 어느 정도 있습니다. <미친 아담>에서 젭이 1인칭 시점으로 말한다고 해도, <미친 아담>은 <직녀의 일기장>이 되지 않습니다. 전아리 작가가 쓴 <직녀의 일기장>에서 소설 주인공 직녀는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합니다. '일기장'이라는 제목처럼, 이런 1인칭 시점에는 (표면적인) 거리가 없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소설 화자이고, 소설 화자와 독자 사이는 아주 가깝습니다. 소설 화자는 꾸미지 않고 우회하지 않습니다. 젭과 직녀가 1인칭으로 똑같이 말한다고 해도, 젭은 토비에게 말하고, 직녀는 독자에게 말합니다.


<미친 아담>이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아무리 젭이 자신만만하다고 해도, 만약 젭과 독자 사이가 너무 가깝다면, 희극은 비극을 부식시킬지 모릅니다. 만약 젭이 우울한 등장인물이라면, 가까운 거리는 디스토피아를 강조할지 모르나, 젭은 재치가 넘칩니다. 젭과 독자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에, 희극은 비극을 완전히 침식하지 않습니다. 직녀와 해학은 (표면적으로) 가까울 수 있으나, 젭과 해학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젭보다 토비에게는 훨씬 길다란 거리, 간격이 필요합니다. 토비가 고민하고 자책하기 때문에, 독자와 토비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독자와 토비 사이에 거리가 있다고 해도, 토비가 소설 주인공이고, 소설이 토비 심리를 직접 표현하기 때문에, 독자가 <미친 아담>을 읽는 동안, 독자는 두 고통공 죄수를 연이어 의식해야 합니다. 결국 두 고통공 죄수는 사람들과 동물들을 죽이고 소규모 생존자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만약 토비가 두 죄수를 빨리 처형했다면, 사람들과 동물들은 죽지 않았을 테고, 소규모 생존자 공동체는 위기에 빠지지 않았을 겁니다. 생태주의 윤리는 인간 목숨이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두 고통공 죄수 역시 인간이나, 이건 그저 원론적일 뿐입니다. 토비가 원론을 따랐기 때문에, 결과는 훨씬 나빠졌습니다.


소설 결말에서 소규모 생존자 공동체는 두 죄수를 붙잡습니다. 생존자 공동체는 처벌 방법을 논의하고, (토비를 비롯해) 대부분 생존자들은 처형을 지지합니다. 만약 생존자 공동체가 두 범죄자를 훈계하거나 구속한다면, 두 범죄자는 또 다시 탈출할지 모르고, 공동체는 위기에 또 다시 빠질지 모릅니다. 심지어 돼지구리 같은 똑똑한 개조 동물들 역시 훈계와 구속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똑똑한 개조 동물들은 약식 재판에 참가하고, 그들은 두 죄수가 죽어야 한다고 전달합니다. <미친 아담>이 우화가 아님에도, 똑똑한 개조 동물들은 인간을 처형할 수 있습니다. <미친 아담>은 기발한 바이오펑크 소설입니다.



결국 소규모 생존자 공동체는 두 죄수를 처형하나, 이미 생존자 공동체는 아픈 댓가를 치르러야 했습니다. 토비가 두 죄수를 빨리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독자들은 토비가 너무 낭만적이었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원론적인 생태주의보다 단순한 공리주의가 옳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분명히 토비는 잘못했습니다. 토비는 너무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만약 토비가 흉악한 두 고통공 죄수를 빨리 처형했다면, 만약 토비가 원론적인 생태주의보다 단순한 공리주의를 추구했다면, 아담과 지미와 다른 사람들/동물들은 죽지 않고 위기에 빠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중에 토비 역시 처형을 지지합니다. 토비는 처형을 지지해야 했습니다. 다른 생존자들 역시 단순한 공리주의를 따릅니다. 소설 결말이 처형을 지지하고 공리주의를 따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미친 아담>이 처형, 공리주의를 지지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미친 아담>이 보여주는 것처럼, 불가피한 상황에서 교과서적인 원론보다 처형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겁니다. 사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급진적인 혁명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은 지주 계급, 자본가 계급을 처형하곤 합니다. 심지어 볼셰비키가 아나키즘을 처리한 것처럼, 사회주의 세력들은 다른 좌파 계열들을 처형합니다.



그래서 보수 우파들, 진보 좌파들은 볼셰비키를 비롯해 사회주의가 폭력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분명히 사회주의 세력들은 수많은 폭력들을 저질렀습니다. 수많은 폭력들은 너무 커다란 잘못입니다. 하지만 <미친 아담>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처형이 훨씬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여줍니다. 볼셰비키를 비롯해 사회주의 세력들은 불가피한 상황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확장하고,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세력을 압박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세력들은 새로운 문명을 여유롭게 건설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이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이게 사회주의 잘못인가요?


원론적으로 처형은 나쁩니다. 네, 처형은 나쁩니다. 하지만 토비는 처형을 지지합니다. 소규모 생존자 공동체는 처형을 지지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상황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소규모 생존자 공동체에게는 훈계하고 구속하기 위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세력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볼셰비키에게 여유가 있었나요? 서구 제국주의가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사회 민주당들이 전쟁이 옳다고 미쳐날뛰고,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반전 운동가가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볼셰비키에게 정말 여유가 있었나요? 이건 볼셰비키가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볼셰비키는 너무 커다란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너무 커다란 폭력을 저질렀다고 해도, 전반적인 상황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짜르 폭정과 1차 세계 대전은 만만한 상황이 절대 아닙니다. 만약 볼셰비키가 새로운 사회를 '여유롭게' 건설했다면, 다른 많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학살을 당한 것처럼, 볼셰비키 역시 학살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무도 볼셰비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날 서구 근대화 국가들이 돌봄 노동 사회화를 개무시하는 것처럼, 아무도 볼셰비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자본주의 폭력에서 비단 볼셰비키만 아니라 사회주의가 '정말 단 한 번이라도' 벗어난 적이 있었나요?


게다가 여기에서 독자는 또 다른 것을 물어볼 수 있습니다. 소설 <미친 아담>에서 토비는 두 죄수를 빨리 처형하지 않았고, 이건 토비 잘못입니다. 하지만 오직 토비만 잘못했나요? 모든 것이 토비 잘못인가요? 왜 토비가 실수해야 했나요? 왜 토비가 소총을 들고, 아만다를 구하고, 두 죄수를 쫓아야 했나요? 왜 인류 문명이 무너졌나요? 왜 환희이상 알약이 나타났나요? 토비가 실수하기 전에, 이미 자본주의 사회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는 온갖 극악무도한 개망나니 짓거리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환희이상 알약은 나타났고, 인류 문명은 무너졌고, 토비는 실수해야 했습니다.



만약 자본주의 사회가 개망나니 짓거리들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환희이상 알약은 나타나지 않았을 테고, 인류 문명은 무너지지 않았을 테고, 토비는 실수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압박하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폭력을 선택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가 개망나니 짓거리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토비는 실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토비가 실수했다고 해도, 이건 오직 토비 잘못만이 아닙니다. 토비가 실수하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독자는 토비가 잘못했다고 비판할 수 있으나, 독자가 토비를 비판하기 전에, 독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인식해야 할 겁니다.


전장에서 처형 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게시글에서 둘째 문단은 전장에서 처형에 반대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왜 전쟁이 일어납니까? 전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납니까? 인류 문명에게 전쟁이 필수적인가요? 왜 1차 세계 대전이 터져야 했나요? 1차 세계 대전이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과정인가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어떻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제국주의로 확장하고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지 분석했습니다. 심지어 군수 산업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수 산업을 분석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정말 지식인의 귀감이 아닌가요.)



비단 <미친 아담>과 전장 상황만 아니라 심리 테스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뗏목 위의 열 사람들' 같은 심리 테스트는 단순한 공리주의를 유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심리 테스트는 너무 제한적인 상황을 가정합니다. 왜 열 사람들이 뗏목에 타야 했나요? 왜 장애인이 뗏목에 타야 했나요? 왜 우리가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 너무 제한적으로 파악하나요? 왜 우리가 제한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나요? 왜 우리가 커다란 흐름을 파악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상황을 오직 받아들이기만 하나요?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커다란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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