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식물 대 좀비>와 좀비 아포칼립스 본문
[좀비들은 우르르 몰려오고 어떤 집을 습격합니다. 이건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 줄거리입니다.]
아니, 세상에! 좀비들은 우르르 몰리고 어떤 집을 습격합니다. 좀비 무리는 엄청납니다. 좀비 행렬은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좀비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좀비들은 생존자를 공격할 겁니다. 좀비들은 사람 뇌를 먹기 원할 겁니다. 생존자는 좀비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아무리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온다고 해도, 생존자는 좀비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건 절대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건 너무 어려운 과정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포기는 없습니다. 포기는 죽음으로 이어질 겁니다. 만약 좀비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사람 뇌는 좀비 식사가 될 겁니다. 아아, 좀비들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줄거리는 아주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많은 좀비 아포칼립스들은 이런 줄거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많은 좀비 아포칼립스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좀비는 일종의 전염병이고, 사이언스 픽션에는 전염병 아포칼립스가 있고, 그래서 좀비 아포칼립스는 전염병 아포칼립스 하위 장르가 됩니다. 메리 셸리가 쓴 <최후의 인간>과 좀비 아포칼립스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나, <최후의 인간>과 리처드 매드슨이 쓴 <나는 전설이다>는 비슷한 감성,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보다 흡혈귀를 이야기하나, 이 소설은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할 수 있습니다.
위 문단에서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 줄거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언데드들은 우르르 몰리고 어떤 집을 습격합니다. 생존자는 언데드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아무리 생존자가 언데드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언데드들은 몰려오고, 몰려오고, 몰려오고, 다시 몰려옵니다. 언데드 행렬은 끝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 언데드 행렬이 멈춘다고 해도, 우글우글한 언데드 무리는 다시 몰려올 겁니다. 언데드 무리는 끝을 알지 못합니다. 생존자는 집을 요새화하고 언데드들을 영원히 몰아내야 합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 줄거리입니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는 이런 전형적인 줄거리가 있습니다.
리처드 매드슨이 좀비 아포칼립스를 쓰기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전설이다>가 흡혈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 줄거리와 <나는 전설이다>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 사이에 커다란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나는 전설이다>가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두 가지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설이다>와 <최후의 인간>은 비슷한 감성,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사실 '최후의 인간'과 '나는 전설이다'는 상통합니다. 두 문구는 비슷한 의미를 지향합니다. 인류 문명은 멸망했고, 소설 주인공, 소설 화자는 최후의 생존자입니다.
만약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생존자가 안전 가옥을 요새화하고, 안전 가옥이 좀비 행렬을 물리치고, 물리치고, 물리치고, 다시 물리친다면, 이건 좀비 아포칼립스가 될 겁니다. 많은 SF 팬들은 이것을 인정할 겁니다. 많은 SF 팬들은 이것을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가 좀비 아포칼립스에 가깝거나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는 것처럼, 영화 <새벽의 저주>는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분명히 이건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영화 <새벽의 저주>가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는 것처럼, 비디오 게임 <식물 대 좀비>가 좀비 아포칼립스…인가요? <식물 대 좀비>가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하나요?
이건 뭔가 좀 이상합니다. 소설 <최후의 인간>이 전염병 아포칼립스인 것처럼,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언데드들은 흑마술보다 전염병, 바이러스 감염에 가깝습니다. 영화 <새벽의 저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과 달리, <새벽의 저주>는 사악한 악마가 강령술 주문을 외우고 언데드들을 일으킨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와 영화 <새벽의 저주>처럼, 비디오 게임 <식물 대 좀비>는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게임 속에서 좀비들은 우르르 몰려오고, 생존자는 안전 가옥을 요새화하고, 안전 가옥은 좀비 행렬을 물리치고, 물리치고, 물리치고, 다시 물리칩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 줄거리입니다. 소설 <최후의 인간>이 전염병 아포칼립스인 것처럼,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언데드들이 흑마술보다 전염병, 바이러스 감염에 가까운 것처럼, <식물 대 좀비>에서도 언데드들은 사악한 강령술, 흑마술보다 전염병, 바이러스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식물 대 좀비>는 아주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하지만 많은 SF 팬들은 <식물 대 좀비>가 타워 디펜스 게임에 가깝다고 말할 겁니다. <나는 전설이다>와 <새벽의 저주>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으나, <식물 대 좀비>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 소설과 영화와 게임에는 아주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세 가지 소설과 영화와 게임에는 모두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 줄거리가 있습니다. 만약 SF 팬들이 <나는 전설이다>와 <새벽의 저주>가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한다고 인정한다면, SF 팬들은 <식물 대 좀비>가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한다고 인정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SF 팬들은 <식물 대 좀비>가 좀비 아포칼립스보다 타워 디펜스 게임에 가깝다고 부정할 겁니다. 이건 다소 이상합니다. <나는 전설이다>와 <새벽의 저주>와 <식물 대 좀비>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음에도, 왜 소설 <나는 전설이다>와 영화 <새벽의 저주>가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하고, 왜 <식물 대 좀비>가 타워 디펜스 게임인가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쩌면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식물 대 좀비>가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한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나는 전설이다>와 <새벽의 저주>와 <식물 대 좀비>에게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모두가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 줄거리를 제시하기 때문에,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식물 대 좀비>가 좀비 아포칼립스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다른 SF 팬들은 <식물 대 좀비>가 타워 디펜스 게임이라고 반박할 테고, 이런 논란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물 대 좀비>와 <나는 전설이다>가 비슷하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식물 대 좀비>와 <나는 전설이다>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식물 대 좀비>에는 비단 좀비만 아니라 식물이 있습니다. <식물 대 좀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식물들을 배치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식물들을 배치해야 합니다. <Equilinox>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식물들을 배치해야 합니다. <식물 대 좀비>와 <Equilinox>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식물들을 배치하고, 이런 행위는 비슷합니다. <식물 대 좀비>와 <Equilinox>에는 근본적인 유사성, 다양한 식물들 배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식물 대 좀비>와 <Equilinox>가 비슷한가요? <Equilinox>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인 것처럼, <식물 대 좀비>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식물 대 좀비>와 <Equilinox>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다양한 식물들을 배치함에도, 왜 <식물 대 좀비>와 <Equilinox>가 다른가요? <식물 대 좀비>와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 사이에서 긴밀한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 생태계가 영양분 순환, 번성, 생명력,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Equilinox>는 영양분 순환, 번성, 생명력, 진화를 구현합니다. 반면, <식물 대 좀비>는 이런 것들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해바라기가 햇빛들을 내놓는다고 해도, 이건 유닛을 생산하기 위한 점수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항성 에너지-식물 생산자-행성 생태계 순환 구조가 없습니다. <식물 대 좀비>에서 식물은 식물이 아닙니다.
만약 <식물 대 좀비>에서 식물이 식물이라고 해도, 이런 '식물'은 생산자가 아닙니다. <식물 대 좀비>에는 자연 생태계 순환이 없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해바라기와 햇빛 점수가 자연 생태계 순환을 상징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게임 속의 햇빛 점수와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 순환 사이에서 연결 고리는 희미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해바라기와 햇빛 점수가 자연 생태계 순환을 상징한다고 느낀다고 해도, 이건 주관적인 해석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식물 대 좀비>보다 <Equilinox>는 자연 생태계 순환을 훨씬 구체적으로 구현합니다. 그래서 <식물 대 좀비>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되지 못합니다.
왜 게임 플레이어들이 <식물 대 좀비>를 좋아하나요? 자연 생태계 순환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들이 생태적인 감성과 순환, 생명력과 번성과 모성을 느끼기 원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재미있는 타워 디펜스 게임을 원할 겁니다. 만약 <식물 대 좀비>에서 어떤 게임 플레이어가 생태적인 감성을 느낀다고 해도, <식물 대 좀비>보다 <Equilinox>를 비롯해 다른 많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생태계 순환을 훨씬 구체적으로 구현합니다. <식물 대 좀비>에는 이런 구체적인 구현이 없습니다. 아무리 <식물 대 좀비>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생태적인 감성을 느낀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Equilinox>와 달리 <식물 대 좀비>에 구체적인 생태계 구현이 없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식물 대 좀비>는 재미있는 타워 디펜스 게임입니다. <식물 대 좀비>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보다 타워 디펜스 게임에 가깝습니다. <식물 대 좀비>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보다 타워 디펜스 게임에 가까운 것처럼, <식물 대 좀비>는 좀비 아포칼립스보다 타워 디펜스 게임에 가깝습니다. <식물 대 좀비>와 <Equilinox>가 다른 것처럼, <식물 대 좀비>와 <새벽의 저주>는 다릅니다. <식물 대 좀비>와 <새벽의 저주>가 다르기 때문에, <식물 대 좀비>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지 못하거나 좀비 아포칼립스보다 다른 것에 가깝습니다.
좀비는 비일상적인 요소입니다. 왜 좀비 아포칼립스가 비일상적인 요소, 언데드를 이야기하나요? 언데드에 무슨 측면이 있나요? 폭력? 인해전술? 기괴함? 하지만 타이라니드처럼, 폭력적이고 기괴한 외계 괴물들 역시 우르르 몰려옵니다. 만약 언데드와 타이라니드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이게 무엇인가요? 타이라니드와 달리, 언데드는 인간에서 비롯합니다. 아무리 언데드가 추악하다고 해도, 언데드는 인간에서 비롯합니다. 언데드는 인간에게 잔인하고 야만적인 측면, 꼭두각시 같은 측면이 있다고 가리킬 수 있습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이 꽥꽥거리고 소리지를 때, 그들은 정말 좀비 무리 같습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자본주의 좀비 무리입니다. 자본주의 좀비로서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자본주의 만만세를 부르짖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굶주린다고 해도, 고작 굶어뒈지는 애새끼들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윤 창출입니다. 만약 인류 사회가 가난한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준다고 해도, 이건 이윤 창출에서 비롯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리 기업들은 사회적인 가치다 뭐다 지껄여댑니다. 이윤 창출 안에서 가난한 아이들은 먹거리를 얻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가난한 아이들은 먹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보다 이윤입니다. 자본주의에게 굶주리는 애새끼보다 이윤은 훨씬 중요합니다.
심지어 좌파 정부가 가난한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저렴하게 분배할 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좌파 정부를 짓밟습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이런 자본주의가 좋다고 부르짖습니다. 제3세계에서 아이들이 질병에 걸리고, 얼굴이 썩어문드러지고, 살점들이 떨어져나간다고 해도, 이 아이들은 절대 제대로 치료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고작 가난한 깜둥이 애새끼들 따위가 무슨 돈이 됩니까? 깜둥이 애새끼들은 돈이 되지 않습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이런 자본주의 만만세를 열심히 부르짖습니다. 만약 수구 꼴통 할아버지가 이런 정치인들을 찬양한다면, 좌파적인 손녀는 할아버지가 좀비라고 느낄 겁니다.
할아버지가 수구 꼴통 정치인을 찬양할 때, 좌파적인 손녀는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볼 겁니다. 아무리 손녀가 할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해도, 손녀에게 할아버지는 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적이 됩니다. 언데드는 이런 맹목적인 어리석음, 사랑하는 사람이 적이 되는 비극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좀비 아포칼립스가 맹목적인 어리석음과 비극적인 인간 관계를 강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좀비 아포칼립스들에는 이런 주제가 있습니다. <나는 전설이다>에는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새벽의 저주>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처치해야 합니다. <식물 대 좀비>에는 이런 아픈 비극이 없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과 달리, <식물 대 좀비>는 번성과 생명력을 구체적으로 구현하지 않습니다.]
사변 장르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요소를 이야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으로서 좀비 아포칼립스는 비일상적인 요소, 좀비를 이야기합니다. 좀비는 인간의 꼭두각시 같은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소설 <시인장의 살인>은 사람들이 좀비라고 운운할 겁니다. 하지만 <식물 대 좀비>에서 좀비는 좀비가 아닙니다. <식물 대 좀비>에서 식물은 식물이 아니고, 좀비는 좀비가 아닙니다. 적어도 <식물 대 좀비>에서 좀비는 아픈 비극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식물 대 좀비>에 아픈 비극이 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식물 대 좀비>보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아픈 비극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아무리 <식물 대 좀비>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아픈 비극을 느낀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비단 아픈 비극만 아니라 쓸쓸한 외로움을 강조합니다. <최후의 인간>과 <나는 전설이다>와 <새벽의 저주>는 외로움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외로움에 시달립니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소설 주인공은 거의 고주망태가 됩니다. '최후의 인간'은 외로움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반면, <식물 대 좀비>에는 이게 없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햇빛 점수들을 바쁘게 모으고, 이런 바쁜 활동에는 외로움이 없습니다.
<식물 대 좀비>에서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낄지 모릅니다. 이 게임 속에서 인간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게임 속에는 인간보다 식물들이 있습니다. 아아, 얼마나 이게 외로운 장면입니까. 레이 브래드버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단편 소설을 쓴 것처럼, 사람들은 사라지고, 여기에는 오직 또 다른 존재들(식물들)만 있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장면이 지독하게 외롭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식물 대 좀비>는 이런 외로움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식물 대 좀비>보다 <최후의 인간>은 지독한 외로움을 훨씬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이렇게 <식물 대 좀비>는 <최후의 인간>, <나는 전설이다>, <새벽의 저주>와 다릅니다. <식물 대 좀비>와 다른 많은 좀비 아포칼립스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식물 대 좀비>가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들은 맹목적인 언데드들을 신나게 때려잡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나는 전설이다>와 <새벽의 저주>는 타워 디펜스 게임과 비슷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나는 전설이다>와 <새벽의 저주>가 타워 디펜스 게임과 비슷하다고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설이다>와 <새벽의 저주>가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하는 것처럼, <식물 대 좀비> 역시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여러 관점들에서 <식물 대 좀비>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거나 되지 않습니다. 장르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식물 대 좀비>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거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식물 대 좀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좀비가 된다고 쉽게 비유하지 못합니다. 만약 SF 작가가 자본주의 사회 속의 좀비들을 비유하기 원한다면, SF 작가는 <식물 대 좀비> 같은 게임보다 <나는 전설이다> 같은 소설을 선택해야 할 겁니다.
이건 <식물 대 좀비>보다 <나는 전설이다>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가지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기준에 따라 두 가지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질지 모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이 좀비 무리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새벽의 저주>와 달리, 중세 판타지 좀비 무리는 맹목적인 소비 자본주의를 쉽게 비유하지 못할 겁니다. <새벽의 저주>와 달리, 중세 판타지 소설에는 서구 근대화, 자본주의 시장 경제, 대형 쇼핑몰이 없습니다. 그래서 SF 팬들은 좀비 아포칼립스 그 자체보다 "왜 사람들이 좀비 아포칼립스를 이야기하는가?"라고 물어야 할 겁니다.
※ 게임 <식물 대 좀비> 스크린샷 출처: 9-Year-Old with 5k su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