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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와인드업 걸>이 그저 문제 제기에 불과한가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와인드업 걸>이 그저 문제 제기에 불과한가

OneTiger 2019. 11. 7. 19:56

만화 <고우영 삼국지>는 제갈 공명이 나긋나긋한 등장인물이라고 묘사합니다. 제갈 공명이 의자에 앉을 때, 만화 해설은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의자에 앉는 것처럼 조심스럽다'고 비유합니다. 이 문구는 제갈 공명이 여리고 소극적이고 나긋나긋하다고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는 조심스럽고 여리고 소극적인 인상을 대변합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는 여자입니다. 그래서 만화 해설은 여자가 조심스럽고 여리고 소극적이라고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만화 독자는 만화 해설이 성 차별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고우영이 그린 만화 <일지매>에서 어떤 놈팽이들은 어떤 아가씨의 저고리를 벗기기 원합니다. 놈팽이들이 계속 집적대기 때문에, 아가씨는 억지로 저고리를 풀고 앙가슴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 장면에서 아가씨가 저고리를 양쪽으로 벌릴 때, 만화는 무대 막이 양쪽으로 벌어지는 비유를 보여줍니다. 흔히 무대 막은 양쪽으로 벌어집니다. 그래서 만화는 양쪽으로 벌어지는 저고리와 양쪽으로 벌어지는 무대 막이 비슷하다고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비유는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연결하고 동일한 위상이라고 간주합니다. 아가씨의 양쪽으로 벌어지는 저고리와 양쪽으로 벌어지는 무대 막은 동일한 위상이 됩니다.



놈팽이들은 저고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아가씨의 앙가슴을 보기 원하고, 만화는 이게 양쪽으로 벌어지는 무대 막과 비슷하다고 간주합니다. 무대는 볼거리입니다. 놈팽이들 역시 볼거리를 원합니다. 놈팽이들은 아가씨의 앙가슴이 볼거리라고 생각합니다. 무대 막이 양쪽으로 열린 이후, 관객들은 공연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고리가 양쪽으로 열린 이후, 놈팽이들은 아가씨의 앙가슴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대 막 비유는 놈팽이들의 시점을 반영합니다. 만화 <일지매>가 저고리와 무대 막을 동일한 위상으로 간주할 때, 만화 <일지매>는 놈팽이들의 시점을 반영합니다.


문제는 이게 그저 볼거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성 범죄입니다. 놈팽이들이 아가씨의 저고리를 억지로 벌리기 원할 때, 이건 빼박캔트 성 범죄가 됩니다. 하지만 <일지매>는 이게 성 범죄보다 볼거리라고 비유합니다. 어떤 만화 독자는 이게 성 차별이라고 느낄 겁니다. 만화 독자는 고우영이 <삼국지>와 <일지매>에 가부장적인 성 차별 시각을 집어넣었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모든 독자가 이 장면이 성 차별이라고 생각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어떤 독자는 제갈 공명과 조심스러운 아가씨, 저고리와 무대 막이 그저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비유는 명제가 아닙니다.



비유는 자신이 진실이라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호모 사피엔스이다." 이건 명제입니다. 우리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습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호모 사피엔스이고, 이건 참입니다. "아랫집 수진의 눈동자는 에메랄드이다." 이건 비유입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아랫집 수진의 눈동자가 에메랄드라고 말하나, 옆동네 철수는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의 홍채가 광석일 수 있는지 반문하지 않습니다. 이건 비유이고, 옆동네 철수는 참과 거짓을 가리지 않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이게 어색한 비유라고 지적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시비가 아닙니다.


옆동네 철수는 그저 비유가 상투적이라고 지적할 뿐입니다. 철수는 참과 거짓을 따지지 않습니다. 만화 <삼국지>와 <일지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화 <삼국지>가 소극적인 동작을 여자에 비유한다고 해도, 만화 <일지매>가 성 범죄를 볼거리에 비유한다고 해도, 이런 비유는 여자가 반드시 소극적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성 범죄가 반드시 볼거리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고우영 만화들에는 다양한 여자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아주 괄괄하거나 사납거나 공격적이거나 적극적입니다. <일지매>가 성 범죄를 볼거리에 비유한다고 해도, 괄괄하고 사나운 여자들 때문에, 어떤 독자는 성 차별을 느끼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놈팽이들이 성 폭력을 저지를 때, 만화가 성 폭력을 볼거리에 비유한다고 해도, 이게 문제가 되지 않나요? 만약 만화 독자가 이 장면을 보고 불쾌하다고 느낀다면, 이런 불쾌한 기분이 잘못인가요? 왜 만화 독자가 불쾌하다고 느끼나요? 고우영 작가는 여자를 폭행하지 않았습니다. 만화는 그저 허구에 불과합니다. 고우영이 수두룩한 여자 등장인물들을 벗겨먹는다고 해도, 등장인물들은 진짜 인간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창작과 표현이 문제가 된다면, 아무도 창작물을 쉽게 만들지 못할 겁니다. 나오미 노빅은 <테메레르> 시리즈를 썼습니다. 소설 <테메레르> 시리즈는 나폴레옹 전쟁을 다룹니다.


<테메레르> 시리즈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은 죽습니다. 심지어 드래곤들은 함선들을 침몰시킵니다. 심지어 어린 병사들 역시 전사합니다. 소설 독자가 나오미 노빅을 대량 학살범이라고 고발해야 하나요? 나오미 노빅이 소녀 병사, 소년 병사를 묘사하기 때문에, 독자가 나오미 노빅을 국제 인권 재판에 고발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나오미 노빅은 그저 밀리터리 대체 역사 소설을 썼을 뿐입니다. 아무리 나오미 노빅이 전열함을 침몰시킨다고 해도, 이건 그저 소설에 불과합니다. 나오미 노빅은 아무도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오미 노빅은 문학상을 받아야 합니다. <테메레르>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고, 나오미 노빅에게는 상을 받기 위한 자격이 있습니다.



만약 나오미 노빅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고우영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만화 <일지매>가 성 폭력을 볼거리에 비유한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만화 독자들은 이게 불쾌하다고 느낄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만화를 보고, 현실이 가부장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만화 <일지매>를 해석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만화 <일지매>를 해석하고, 현실(남한 사회)은 가부장적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약자들을 차별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을 돌봄 노동들로 억지로 밀어넣고 돌봄 노동자들(여자들)을 착취합니다.


돌봄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과 여자가 부차적이고 보조적이라고 취급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 침략, 정복, 탐험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정화 비용을 빼돌리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가 자연 환경을 왜곡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과 여자를 왜곡합니다. 남자와 정복이 중요한 것이고, 여자와 돌봄 노동이 보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통제하고 정복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를 위해 여자가 존재한다고 간주합니다. 여자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남자를 위해 여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당연히 주된 존재 남자는 보조적인 존재 여자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부장 문화에는 온갖 성 폭력들이 있습니다. 현실, 남한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남한 사회에는 온갖 성 폭력들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성 폭력을 당한다고 해도, 심지어 피해자 여자들은 오직 성 폭행만 성 폭력이라고 스스로 입증해야 합니다. 보수 우파 정치인들은 페미니즘과 여자 권리를 신나게 나불거리나, 이건 그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페미니즘 정치인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페미니스트는 가부장 문화를 타파해야 합니다. 남한 정부는 가부장적입니다. 페미니즘 정치인은 남한 정부를 전복시켜야 합니다. 이건 국가 보안법에 걸립니다. 페미니즘 정치인은 멋지고 반짝거리는 은팔찌를 철컹철컹 차야 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페미니즘 정치인은 존재하지 못하거나 감옥에 가야 합니다.


남한에서 공산주의 정당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남한에서 페미니즘 정치인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민주당 의원들이 페미니즘을 신나게 지껄이고 운운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보수 우파 정치인들이 머저리 같은 헛소리를 나불거리는 상황에서 만화 독자는 <일지매>를 해석해야 합니다. 만화 독자는 현실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만화 독자는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일지매>가 만화이고 창작물이고 허구라고 해도, 만화 독자가 <일지매>를 보는 동안, 만화 독자는 허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만화 독자는 존재합니다. 만화 독자가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일지매>가 불쾌하다고 느낄 겁니다. 문제는 현실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그저 가벼운 농담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극심한 폭력들을 저지릅니다. 가부장 문화가 너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만화 독자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해도, 만화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일지매>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만화 독자는 <일지매>가 풍자와 해학을 보여준다고 평가할지 모르나, 만화가 억압적인 성 폭력을 볼거리에 비유하기 때문에, 또 다른 만화 독자는 이게 해학보다 지랄 맞은 헛소리에 가깝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지랄 맞은 헛소리를 호평하기 위한 이유가 없을 겁니다. 비단 <일지매>만 아니라 수많은 창작물들은 현실을 떠나지 못합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여러 논란들에 휩싸입니다. 어떤 관객들은 <82년생 김지영>이 남자들의 눈물을 외면한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관객들은 <82년생 김지영>이 여자들의 눈물에 초점을 훨씬 맞춘다고 주장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수많은 남자들은 어려움들에 부딪힙니다. 심지어 어떤 관점에서 여자들보다 남자들은 훨씬 불행합니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82년생 김지영>에게 손가락질합니다. 이게 논리적인 해석인가요? <82년생 김지영>이 여자들의 눈물에 초점을 훨씬 맞추기 때문에, 이 영화가 남자들의 눈물을 외면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82년생 김지영>을 비판해야 하나요?



문제는 이런 비판이 현실을 전반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관객들이 <82년생 김지영>을 비판할 때, 이런 비판은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한민국은 천민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는 착취 경제입니다. 동시에 자본주의는 남자 경제, 가부장 경제입니다. 착취 경제 속에서 피지배 계급 남자들은 어려움들에 부딪혀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착취하고 비하합니다. 만약 관객들이 <82년생 김지영>을 비판하기 원한다면, 관객들은 이런 현실을 전반적으로 고려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정말 현실을 전반적으로 고려하나요? 관객들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관객들이 계급 투쟁을 외치고 시민 배당을 지지하나요? 아니, 관객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계급 투쟁을 외치지 않고, 시민 배당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그저 <82년생 김지영>이 나쁘다고 투덜거릴 뿐입니다. 이건 비판보다 그저 투덜거림에 불과합니다. 관객들이 현실을 제대로 이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사회 문제들을 논의할 때,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언급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사회 문제들에 엄청난 영향들을 미침에도, 만약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외면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사회 문제들을 제대로 논의할 수 있나요? 이건 얄팍한 논의가 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기상천외한 세계를 묘사한다고 해도,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떠나지 못합니다. 만약 SF 팬들이 SF 소설들, 만화들, 연극들, 영화들, 게임들을 평가한다면, SF 팬들은 현실을 이용해 평가해야 할 겁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쓴 소설 <와인드업 걸>은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은 세계화 자본주의가 가난한 제3세계를 수탈하고 생태 재앙을 일으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이 소설을 읽고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나요? <와인드업 걸>은 세계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와인드업 걸>은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래, 세계화 자본주의는 생태 재앙이야. 자본주의는 환경 범죄야.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해." 만약 이렇게 독자가 생각한다면, 이건 과잉 해석일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급진적인 운동권이 폭력을 휘두르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훨씬 과잉 해석일지 모릅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은 문제를 제기하나, 이 소설은 어떻게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문제 제기와 문제 해결은 다릅니다. 어쩌면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문제 해결보다 오직 문제 제기만 원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와인드업 걸>에 오직 문제 제기만 있다면, 독자가 소설을 읽고 대안을 말할 수 있나요? 만약 대안이 아주 폭력적이라면,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폭력적인 대안에 동의할까요? 만약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자가 이런 대안을 버려야 하나요? 독자가 <와인드업 걸>을 평가할 때, 독자가 오직 문제 제기만 논의해야 하나요? 독자가 문제 해결을 언급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와인드업 걸>은 소설입니다. 이건 현실이 아닙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환경 아포칼립스 세상을 썼다고 해도, 이건 모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야 합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이 문제 제기라고 해도, 독자는 문제 제기를 읽고 대안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가 오직 문제만 제기한다고 해도, 소설 작가가 대안을 직접 제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대안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소설들은 대안을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설명보다 반영입니다. 소설은 그저 현실을 반영할 뿐입니다. 소설이 설명보다 반영임에도, 만약 독자가 현실과 소설을 분리한다면, 독자가 오직 소설(과 작가)에만 매달린다면, 독자는 오류에 빠지거나, 너무 좁은 시각에서 독자는 해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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