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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프로스트펑크>와 고대 종말론 차이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프로스트펑크>와 고대 종말론 차이

OneTiger 2020. 3. 7. 19:57

[이 게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스팀펑크를 조합합니다. 바이오펑크 매머드가 여기에 어울리나요?]



SF 장르 명칭으로서 '사이버펑크'는 첨단 기술 분위기를 풍깁니다. '사이버'는 (컴퓨터) 정보 기술을 가리키고, 19세기 이전, 인류 문명에서 (컴퓨터) 정보 기술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가상 공간과 정보 기술, 광역 네트워크를 떠들지 않았습니다. 만약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가상 공간을 떠들었다고 해도, 그들은 첨단 기술이 가상 공간을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사람들이 장르 명칭 사이버펑크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사람들은 온갖 첨단 기술들을 함께 떠올립니다. 그래서 SF 장르와 장르 명칭으로서 사이버펑크는 잘 어울립니다.


사이버펑크는 첨단 기술 분위기를 반영하고, 일반적으로 SF 장르는 미래 세상을 묘사합니다. 미래 세상은 첨단 기술에 기반할 테고, 그래서 사이버펑크와 SF 장르는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사이버펑크와 달리, 어떤 SF 장르 명칭들은 훨씬 구시대적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최신 기술보다 구시대적인 종교 용어에 가깝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문화 전통을 비롯해 여러 인류 문화들에서 고대 신화들은 문명 종말을 이야기했습니다. 인류보다 현실, 자연 환경과 우주는 훨씬 거대하고, 인류는 삼라만상과 우주만물을 절대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 인류 문명은 무너질지 모릅니다. 인류가 필멸자이기 때문에, 문명 역시 필멸일지 모릅니다. 신은 불멸이나, 인간은 신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문명은 필멸일지 모릅니다. 만약 언젠가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문명 종말을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이런 사고 방식은 존재합니다. "만약 세계화 자본주의가 온실 가스를 너무 지독하게 뿜는다면, 바다가 정말 리우데자네이루를 삼킬까?" 고대 종말론은 세계화 자본주의와 온실 가스를 알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런 사고 방식은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SF 장르 역시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고대 신화부터, 종말론은 이어졌고, 이건 인류 문화에 깊게 배었습니다. 사이버펑크와 달리, 이런 유구한 흐름 속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존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근대 신화에 가깝습니다. 고대 사람들이 인류 문명 종말을 걱정한 것처럼, 여전히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인류 문명이 무너질 거라고 열심히 떠듭니다. 영화 <일라이>가 성스러운 분위기를 향해 흘러가는 것처럼, SF 장르는 신화적인 수사학을 빌립니다.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아틀란티스, 바벨 탑, 노아 방주, 최초 아담 같은 신화들을 언급합니다. 노아 방주는 거대 우주선이고, 고대 신화와 외계 문명은 이어지고, SF 장르는 근대 신화가 됩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어떻게 SF 장르가 신화적인 수사학을 빌리는지 보여줍니다. SF 울타리에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드문 사례가 아닙니다. 사실 많은 SF 소설들,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영화들, 연극들, 게임들은 신화적인 수사학들을 빌립니다. SF 장르는 근대 신화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고대 신화와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근대' 신화로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고대 신화들은 여러 차이들을 보여줍니다. 특히, 서구 기독교 신화와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계몽주의를 받아들입니다.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사회 구조를 고민했습니다. 사회 계약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노동 가치론 같은 것들은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회 사상입니다.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가 대립한 것처럼,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했으나, 사회 구조는 아주 중요한 화두였고, 나중에 19세기 서구 근대화에서 이런 계몽주의 흐름은 사이언티픽 로망스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인류 문명은 바뀝니다. 인류 문명이 경이적으로 발전하든, 부정적으로 몰락하든, 인류 문명은 바뀝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시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집니다. 하지만 토마스 홉스 같은 사회 계약론이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치고, 존 로크 같은 소유권 이론이 야만 상황을 가정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시 문명과 야만을 구분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문명이 무너지기 때문에, 인류는 야만 상황에 빠지고, 인류는 야만이 됩니다.


야만으로서 인류는 온갖 끔찍하고 추잡한 측면들을 드러냅니다. 살인, 성 폭행, 노예, 절도, 폭정은 일상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식인은 절정을 찍습니다. 이제 인간은 인간을 먹습니다. 문자 그대로 인간은 인간을 먹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식인은 야만을 강조하기 위한 가장 유명한 수단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극단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묻습니다.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일상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묻지 않습니다. 문명, 사회 인프라, 부유한 재화들, 공권력이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것들은 무너졌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문명, 사회 인프라, 부유한 재화들, 공권력은 무너졌습니다. 이것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아니면 다시 사람들은 문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하지만 야만에서 문명이 일어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가기 위해 사람들은 끔찍한 난관들을 거쳐야 할지 모릅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다수결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나요?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철인 통치가 훨씬 낫지 않나요? 물리적으로 여자들이 약하기 때문에,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우대를 받아야 하나요? 사람들이 재화들을 평등하게 나눌 수 있나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런 것들을 묻습니다.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황을 고민해야 하고, 그래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명이 정말 문명인가?"라고 묻습니다. 문명은 그저 눈가림에 불과하고, 사실 문명은 야만인지 모릅니다. 문명은 그저 가벼운 껍데기에 불과하고, 언제든 문명은 추악한 속내를 드러낼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회 구조는 크게 바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일처일부제가 옳다고 생각하나, 어쩌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일처일부제보다 일처다부제는 나을지 모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합니다.



그래서 많은 SF 팬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좋아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문명이 정말 문명인지 파격적으로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할 때, 누가 기준을 정하나요? 문명과 야만이 고정적인 영역인가요? 야만이 정말 야만인가요? 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야만을 야만이라고 말하나요? 왜 우리가 야만을 야만이라고 생각하나요?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가 야만 상황, 자연 상태를 가정했기 때문에?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가 반드시 옳은가요? 일반적인 문명-야만 구도는 그저 지배적인 관념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서 세계화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인 사회 구조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세계화 자본주의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서구 문명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 아시아, 오세아니아를 끔찍하게 수탈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은 부유해졌고, 부유한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로 이어졌습니다. 다른 여러 가부장 사회들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여자 무급 노동에 기반하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성 차별입니다. 그래서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인종 차별들과 성 차별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너무 야만적입니다.



[이런 상황은 윤리학과 사회 구조를 극단적으로 고민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학교 교과서들은 식민지 수탈이 지리상의 발견, 대항해 시대라고 미화합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자본주의가 성 착취 경제라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지배 계급 관념은 식민지 수탈과 성 차별을 은폐하고 자본주의를 미화합니다. 분명히 자본주의는 야만이나,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야만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가 무너지고 혼란이 찾아온다고 해도, 이건 문명-야만 구도가 절대 아닙니다. 이건 그저 야만-또 다른 야만 구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자본주의가 야만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자본주의를 용서하고 인류를 심판합니다.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인간이 추악한 존재라고 말하나, 자본주의는 추악한 뭔가가 절대 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고결하고, 오직 인간만 추악한 존재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자본가 지배 계급에게 부합합니다. 자본주의보다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본가 계급이 행성급 환경 오염을 저지른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본가 계급보다 탐욕스러운 인간을 욕합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착각입니다.



그래서 SF 팬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바라볼 때, SF 팬들은 지배적인 관념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의심해야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SF 팬들은 자유 민주주의 역시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이름과 달리, 자유 민주주의는 너무 야만적인 거짓말, 세뇌입니다. 한편으로 SF 장르로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비단 사회 구조만 아니라 기술 격차를 이야기합니다. 여러 고대 신화들은 기술이 인류 문명을 무너뜨린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핵 폐기물들이 심각한 위협인 것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기술이 인류 문명을 위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는 거대 괴수 무토가 도시를 무너뜨린다고 이야기하고, 무토는 핵 발전소를 노립니다. 핵 발전소는 거대 괴수 무토를 깨웠습니다. 영화 속에서 어떤 등장인물이 경고한 것처럼, 만약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면, 인류는 석기 시대로 돌아갈지 모릅니다. 이것 역시 기술 격차가 됩니다.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인류 문명이 무너지고 중세 사회, 부족 사회로 돌아간다고 묘사합니다. 인류는 과학 기술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인류는 과학 기술을 두려워합니다. 소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은 대표적입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인류가 중세 사회로 '후퇴'하는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과학 기술은 오직 부정적인 측면만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기술은 인류 문명을 도울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프로스트펑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무자비한 폭설 때문에, 인류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최후의 도시는 거대한 중앙 발전소를 가동하고, 혹한기에 대비하고, 영하 50도 추위를 넘어가야 합니다. 혹한기에 대비하기 위해 최후의 도시 사람들은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다시 일해야 하나, 사방이 눈밭이기 때문에, 오직 인력(人力)만으로 혹한기에 대비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 보행 기계는 부족한 노동력을 충원할 수 있습니다.


거대 보행 기계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퍼뜨리고, 쿵쿵거리며 돌아다니고, 연료들을 철컥거리며 수집합니다. <프로스트펑크>는 19세기 서구(영국) 문명에 기반하고, 그래서 과학 기술은 스팀펑크를 추구합니다. 이 비디오 게임에서 비단 포스트 아포칼립스만 아니라 스팀펑크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거대한 중앙 발전소는 이 게임이 스팀펑크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거대 보행 기계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퍼뜨릴 때마다, 게임 플레이어는 스팀펑크를 의식할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스팀펑크는 잘 어울립니다. 사이버펑크와 스팀펑크는 다릅니다. 사이버펑크는 고급스러운 첨단 기술입니다.



반면, 스팀펑크는 투박하고 거칩니다. 아무리 스팀펑크에서 비행선들이 날아다니고, 오토마톤들이 돌아다니고, 증기선들이 바다를 누비고, 기관차가 칙칙폭폭 달린다고 해도, 결국 스팀펑크는 19세기~20세기 초반에 속합니다. 20세기~21세기 초반 문명에게 19세기~20세기 초반은 구시대적입니다. 스팀펑크는 구시대적입니다. 구시대적인 과학 기술로서 스팀펑크는 고급스럽고 사치스럽기보다 투박하고 거칩니다. 인류 문명 종말, 최후의 도시에게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과학 기술보다 투박하고 거친 과학 기술은 훨씬 어울립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스팀펑크는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이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세련되고 사치스러운 과학 기술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장르에는 정석, 정답이 없고, 어떤 SF 팬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세련되고 사치스러운 과학 기술이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인류 문명은 무너지고, 세련된 기술과 무너진 문명은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소설 <메트로 2033>,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비디오 게임 <폴아웃> 역시 세련된 과학 기술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무너진 인류 문명과 투박하고 거친 과학 기술은 잘 어울립니다. <프로스트펑크> 역시 두 가지를 맛깔나게 조합합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워리그 트럭과 <프로스트펑크>에서 거대 보행 기계는 어떻게 무너진 인류 문명과 투박하고 거친 과학 기술이 어울리는지 훌륭하게 보여줍니다. 물론 여기에서 '투박하고 거친 과학 기술'은 오직 기계 공학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웅웅거리는 거대 보행 기계는 스팀펑크 기계 공학이나, 오래 전부터 인류 문명은 여러 사역 동물들을 이용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유전 공학 기술들은 발달하고, SF 장르 역시 유전 공학 기술들을 반영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시 이것을 도입합니다. 소설 <미친 아담> 3부작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바이오펑크를 결합합니다.


<미친 아담> 3부작에서 유전자 조작 동물들이 생존자 무리를 돕는 것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비단 스팀펑크만 아니라 바이오펑크 역시 주된 기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 문명이 여러 사역 동물들을 이용했기 때문에, '사역 동물'은 고급스럽고 사치스럽고 세련된 느낌을 풍기지 않습니다. 유전 공학 그 자체는 사치스러운 기술이나, 아무리 <미친 아담>에서 생존자 무리와 유전자 조작 동물들이 어울린다고 해도, 소설 독자들은 이 장면이 세련되고 고급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20세기 이후, 인류 문명이 기계 문명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역 동물은 구시대적입니다.



비단 소설 <미친 아담>만 아니라 소설 <와인드업 걸>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바이오펑크를 결합합니다. 특히, <와인드업 걸>은 유전자 조작 코끼리를 보여줍니다. 개조 코끼리는 정말 뛰어난 사역 동물입니다. <프로스트펑크>에서 거대 보행 기계가 연료들을 철컹거리며 모으는 것처럼, <와인드업 걸>에서 개조 코끼리는 육중한 육체를 이용하고 공장을 가동시킵니다. 심지어 개조 코끼리가 폭주할 때, 이건 괴수 이야기에 거의 가까워집니다. 스팀펑크로서 <프로스트펑크>가 거대 보행 기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바이오펑크로서 <와인드업 걸>은 개조 코끼리를 보여주고, 양쪽은 비슷한 위상입니다.


만약 <프로스트펑크>가 바이오펑크를 도입했다면, 게임 분위기가 다소 달라졌을까요? 만약 <프로스트펑크>가 비단 보행 기계만 아니라 개조 코끼리를 함께 보여준다면? <프로스트펑크>는 19세기 서구 문명에 기반합니다. 소설 <모로 박사의 섬>처럼,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바이오펑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프로스트펑크>가 바이오펑크를 도입했다고 해도, 이건 어색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이 게임은 압도적인 폭설을 이야기하고, 코끼리는 열대 지역 동물입니다. <와인드업 걸>에서 배경 무대는 태국입니다. 흐릿한 유럽과 무더운 태국은 다르고, 코끼리와 유럽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고대 신화 종말론과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로서 <와인드업 걸>은 개조 사역 코끼리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코끼리에게는 친척 매머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매머드가 빙하기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비디오 게임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이 하얀 북방 삼림과 매머드를 함께 보여주는 것처럼, 매머드와 혹한기는 잘 어울립니다. 만약 바이오펑크 기술이 '사역 매머드'를 키우고, 최후의 도시 노동자들이 사역 매머드와 함께 석탄들을 채굴한다면, 이런 장면과 혹한기 아포칼립스는 잘 어울리는 한쌍일 겁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비단 인간 권리만 아니라 동물 권리를 함께 고민할지 모릅니다. 가혹한 최후의 도시에서 인간 권리는 풍전등화입니다.


인간 권리가 풍전등화이기 때문에, 동물 권리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미친 아담> 3부작과 <와인드업 걸>은 얼마나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동물 권리를 짓밟는지 보여줍니다. <프로스트펑크> 역시 예외가 아닐 겁니다. 아이들은 굶주리고, 노동자들은 죽어라 일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부장적인 편견과 성 차별은 훨씬 심각해질 겁니다. 가부장적인 편견 속에서 사역 매머드가 동물 권리를 찾을 수 있나요? 최후의 도시에서 어떤 사람들은 생태주의를 추구하고 동물 권리를 주장할지 모릅니다. 이건 사회 문제로 번질지 모르고, 사회 구성원들은 갈등할 겁니다.



사역 매머드가 사회 문제로 번지는 것처럼, 과학 기술 문제와 사회 문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고대 신화와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기술 격차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프로스트펑크>가 '펑크'를 빼고 오직 폭설만 이야기한다면, 거대 보행 기계와 사역 매머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프로스트펑크>는 훨씬 일반적인 재난 이야기에 가까울 겁니다. 웅웅거리는 거대 보행 기계는 낯설고 기이한 감성을 선사할 수 있으나, 일반적인 재난 이야기는 훨씬 밋밋해질 겁니다. 스팀펑크는 철컥거리는 보행 기계를 제시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스팀펑크 기술과 19세기 서구 근대화를 대조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비(非)현실과 현실을 대조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현실을 훨씬 뚜렷하게 자각할 수 있습니다. SF 장르에서 이건 아주 커다란 미덕입니다. 반면, 일반적인 재난 이야기는 이런 미덕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SF 장르로서 <프로스트펑크>에서 비단 포스트 아포칼립스만 아니라 스팀펑크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프로스트+펑크일 겁니다. 프로스트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가리키고, 펑크는 기술 격차를 가리킬 겁니다. 구전 민담 역시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구전 민담은 이런 기술 격차를 부각하지 못하고, 구전 민담과 SF 장르는 다릅니다.



소설 <홍수의 해>는 <미친 아담> 3부작 중에서 둘째 소설입니다. <홍수의 해>에서 이른바 신의 정원사들은 주연 세력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특히, 소설 속의 여러 주연 세력들 중에서 신의 정원사들은 가장 긍정적입니다. 이름처럼, 신의 정원사들은 유사 기독교 집단입니다. 기독교가 서구 문화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아무리 <홍수의 해>가 SF 소설이라고 해도, <홍수의 해>는 신화적인 수사학(기독교 수사학)을 빌렸을 겁니다. 아니, 이미 소설 제목 '홍수의 해'는 신화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신이 홍수를 일으키고 세상을 정화하는 것처럼, <홍수의 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소설 <홍수의 해>가 기독교 수사학, 고대 홍수 설화를 빌렸다면, 신의 정원사들이 방주가 되나요? 홍수 설화에서 거대 방주는 수많은 동물들을 태우고 생물 다양성을 보존합니다. 작은 꿀벌부터 심해 대왕 오징어까지, 신의 정원사들 역시 생물 다양성을 중시합니다. 홍수 설화 방주와 신의 정원사들이 비슷한 위상이 되나요? 하지만 홍수 설화 방주와 달리, 신의 정원사들은 기후 변화, 유전 공학, 자본주의 영리 기업을 의식해야 합니다. 아무리 홍수 설화 방주와 신의 정원사들이 비슷한 위상이라고 해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력, 바이오펑크 세력으로서 신의 정원사들은 홍수 설화 방주와 다릅니다.



이렇게 고대 종말론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두 가지 차이를 드러냅니다. 고대 신화 종말론과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사회 구조를 극단적으로 고민합니다. 그래서 <프로스트펑크>는 '사회' 생존 게임입니다. <프로스트펑크>가 사회 생존 게임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최후의 도시와 사회 구조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사회 구조에서 성 차별은 아주 핵심적인 쟁점입니다. <프로스트펑크>에서 영하 50도 혹한기에 대비하기 위해 최후의 도시는 석탄들을 비롯해 엄청난 연료들을 모아야 합니다. 탄광 노동자들은 화석 연료 석탄들을 모으고, 그래서 탄광 노동자는 노동자 계급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도시 중앙에서 거대한 발전기가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탄광 노동자들은 가장 대표적인 노동자들입니다. 그리고 여자 근력보다 남자 근력이 강하기 때문에, 많은 탄광 노동자들은 남자들일 겁니다. 철컹거리는 거대 보행 기계를 정비하기 위해 최후의 도시에는 기술자들이 있을 테고, 정비 과정이 힘들고 험하기 때문에, 기술자들 역시 남자들일 겁니다. 거대 보행 기계가 연료들을 열심히 모으기 때문에, 남자 기술자들은 막대한 가치를 만듭니다. 탄광 노동자들과 보행 기계 기술자들처럼, 최후의 도시에서 남자들은 중요하게 활약합니다. 반면, 여자들은 활약하지 못하고, 여자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도시에서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중요하게 활약하기 때문에, 남자들은 훨씬 커다란 권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이런 논리는 아주 당연한 것 같습니다. 사실 고대 신화 역시 이런 논리를 주장했습니다. 서구 기독교 신화를 보세요. 창조신은 가부장, 아버지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은 딸보다 아들을 보냅니다. 신의 아들에게는 열 두 제자들이 있으나, 대부분 제자들은 남자들입니다. 서구 기독교 신화는 아주 가부장적이고, <프로스트펑크> 역시 가부장적인 측면을 드러낼지 모릅니다. 하지만 <프로스트펑크>는 19세기 서구 문명에 기반하고, 19세기 서구 문명은 페미니즘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19세기 서구 문명이 페미니즘을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프로스트펑크>에 페미니즘 시각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노동 가치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탄광 노동자들과 보행 기계 기술자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오직 이런 노동만 노동인가요? 만약 최후의 도시가 영하 50도 혹한기를 버틴다고 해도, 만약 최후의 도시가 후손들을 낳지 못한다면, 한 세대 안에서 최후의 도시는 망할 겁니다. 최후의 도시는 문명을 일으켜야 하고, 문명을 일으키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은 후손들을 낳아야 합니다. 누가 후손들을 먹이고 돌보나요? 이것들이 노동이 아닌가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남자 기술자들이 보행 기계를 열심히 고친다고 해도, 아무리 보행 기계들이 막대한 석탄들을 모은다고 해도, 만약 여자들이 이른바 '임신 파업'에 돌입한다면, 한 세대 안에서 최후의 도시는 망할 겁니다. 여자들은 임신하고, 이것 때문에, 남자 근력보다 여자 근력은 약하나, 여기에서 약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가부장 사회는 비단 이것만 아니라 수많은 여자 무급 노동들에 기반하고, 여자 무급 노동들은 진정한 노동이 되지 못합니다. <프로스트펑크>에서 여자 무급 노동 없이, 최후의 도시 역시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무급 노동을 유급 노동으로 전환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서구 사회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여자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스팀펑크 <프로스트펑크>가 19세기 서구 문명에 기반하기 때문에, '사회' 생존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문제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반면, 구전 민담이 인류 종말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구전 민담은 노동 가치와 여자 유급 노동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구전 민담이 사회 구조를 고민한다고 해도, 구전 민담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사회 구조를 다르게 고민할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 여자 유급 노동은 뚜렷한 특징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여자 유급 노동을 고민할 수 있고 철컹거리는 거대 보행 기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구전 민담과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 여자 유급 노동이 뚜렷한 차이인 것처럼, 기술 격차는 뚜렷한 차이가 됩니다. 구전 민담은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구전 민담은 스팀펑크 기술자를 말하지 못합니다. 구전 민담과 달리, 개조 코끼리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류 문명 멸망과 기술 격차를 함께 제시합니다. 두 가지 차이(사회 구조와 기술 격차) 이외에 고대 종말론과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는 다른 여러 차이들이 있으나, 두 가지 차이는 아주 뚜렷한 특징일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는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 두 가지 특징이 있나요?


왜 고대 신화 종말론이 사회 계약론과 계급 갈등을 이야기하지 않나요? 왜 구전 종말 민담이 거대 보행 기계와 개조 코끼리를 이야기하지 않나요? 어떻게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인민 주권과 개조 사역 매머드를 고민할 수 있나요? 대답은 서구 근대화입니다. 고대 신화 종말론이 서구 근대화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 신화 종말론은 사회 계약론과 거대 보행 기계를 말하지 못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서구 근대화를 거쳤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민 주권과 개조 사역 매머드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서구 근대화를 거쳤나요?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가요?



이렇게 SF 팬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들여다보는 동안, SF 팬들은 서구 근대화에 도달합니다. 서구 근대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들여다보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최근에 코로나 19 사태가 판데믹 위기에 근접하기 때문에, 어쩌면 사람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훨씬 가깝게 느낄지 모릅니다. 솔직히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인 것처럼, 코로나 19 사태와 상관없이, 이미 인류 문명은 환경 아포칼립스를 향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다른 SF 장르들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현실과 훨씬 밀접할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가장 밀접한 SF 장르인지 모릅니다.


문제는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너무 지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서구 제국주의 속에서 SF 팬들은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테고, SF 팬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SF 팬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떨쳐야 합니다. 서구 제국주의를 떨치기 위해 다른 관점에서 SF 팬들은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중국이 대기 오염 국가라고 욕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인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이건 너무 괴상한 논리입니다. 왜 대기 오염이 중국 정부 책임이고, 기후 변화가 인류 책임인가요?



인류는 모두 똑같은 인간들이 아닙니다. 19세기 서구 산업 자본주의가 온실 가스들을 열심히 뿜는 동안, 숱한 식민지들에서 원주민들, 흑인들, 인디언들은 학살을 당했고, 착취를 당했고, 수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는 탐욕스러운 인류보다 탐욕스러운 서구 산업 자본주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대기 오염은 중국 책임이 되나, 기후 변화는 서구 자본주의 책임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서구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들을 저지르기 때문에, 중국은 이것을 모방하는 중이나, 사람들은 대기 오염이 중국 책임이라고 욕합니다. 이건 너무 궤변, 엉터리 논리입니다. 왜 사람들이 궤변을 떠드나요?


사람들이 무식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궤변을 떠드나요? 그건 아닙니다. 문제는 서구 제국주의가 각종 학살들, 전쟁들, 수탈들, 오염들을 은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SF 팬들은 서구 근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SF 팬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 그림 <Bangkok XXIII - Megadonts> 출처: Julien Gauthier,

https://www.artstation.com/artwork/E8w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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