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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멸종>이 지적하는 공허한 중립 본문

SF & 판타지/또 다른 시간 속으로

<멸종>이 지적하는 공허한 중립

OneTiger 2019. 6. 16. 08:36

※ 이 게시글에는 로버트 소여가 쓴 소설 <멸종>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로버트 소여가 쓴 <멸종>은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소설 주인공 브랜든은 고생물학자이고 박물관 큐레이터입니다. 브랜든은 친구 클릭스와 함께 시간 여행 장치를 이용해 중생대 백악기로 돌아갑니다. 클릭스는 지질학자이고, 따라서 이건 학술적인 탐사입니다. 고생물학자와 지질학자는 시간 여행 장치를 이용해 중생대 생태계와 지질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브랜든과 클릭스는 왜 공룡들이 멸종했는지 연구하기 원합니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이나, 학술적인 의견은 서로 다릅니다. 클릭스는 운석 충돌이 멸종을 불렀다고 주장합니다. 브랜든은 그게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아무리 거대한 운석이 충돌했다고 해도, 지구에는 공룡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생명은 끈질기게 번성하고, 따라서 공룡들 역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브랜든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브랜든은 자신의 주장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백악기로 돌아갔을 때, 브랜든은 간절하게 증거를 찾기 원합니다. 브랜든과 클릭스는 열심히 중생대 생태계와 지질을 연구하고 자료들을 수집합니다. 하지만 이내 순조로운 학술 탐사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브랜든과 클릭스가 아주 똑똑한 공룡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들은 공룡들이 아니었습니다.



중생대 백악기에서 브랜든과 클릭스는 외계인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화성 외계인들이었습니다. 브랜든과 클릭스는 크게 놀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미지와의 조우가 감동적이고 장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설 <멸종>에서 미지와의 조우는 별로 감동적이지 않고 장엄하지 않습니다. 브랜든과 클릭스는 다소 꼴불견스럽게 외계인들을 만납니다. 화려한 첨단 우주선이나 환희에 도취한 분위기나 거룩한 영성 따위는 없습니다. 두 지구인과 화성인들은 어설프게 서로 소개하고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 부분에서 소설 <멸종>은 공룡보다 외계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어떤 독자들은 속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소설 <멸종>의 표지 그림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멸종>이 시간 여행과 공룡 이야기라고 기대할 겁니다. 하지만 <멸종>은 기대를 저버리고 공룡보다 외계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여전히 공룡은 중요한 소재이나, 솔직히 외계인에게 공룡은 밀려납니다. 외계인과 공룡이 함께 있다면, 무엇이 훨씬 이목을 끄나요? 브랜든은 열렬한 공룡 덕후이나, 클릭스는 이제 공룡보다 외계인이 훨씬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열렬한 공룡 덕후 브랜든은 클릭스에게 반박합니다. 공룡을 좋아하는 독자들 역시 반박하고 싶을 겁니다. 아니, 왜 공룡 소설에서 외계인이 조명을 받아야 하나요.



게다가 클릭스는 공룡 탐사를 때려치우자고 주장합니다. 시간 여행의 목적은 공룡 탐사였으나, 두 지구인이 외계인들을 만났기 때문에, 시간 여행의 목적은 바뀌어야 합니다. 외계인들은 화성에서 왔습니다. 하지만 화성은 죽은 행성입니다. 인류 문명은 화성이 죽은 행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악기에 공룡들이 멸종한 것처럼, 과거에 화성 문명 역시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은 죽은 화성을 바라봅니다. 만약 브랜든과 클릭스가 외계인들과 함께 20세기로 돌아간다면, 화성 외계인들은 목숨들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브랜든과 클릭스는 화성인 전부를 구하지 못하나, 적어도 두 사람은 시간 여행 장치를 이용해 몇몇 화성인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서 인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우주에서 인류는 또 다른 지적 존재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클릭스는 두 사람이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브랜든은 여기에 반박합니다. 공룡 덕후로서 브랜든은 공룡 탐사가 가장 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이미 화성 문명은 멸망했습니다. 만약 브랜든과 클릭스가 몇몇 화성인을 구한다면, 브랜든과 클릭스는 거시적인 역사에 개입할지 모릅니다. 인간이 거시적인 역사를 바꾼다면, 이건 재앙이 될지 모릅니다. 수많은 시간 여행 소설들은 인간이 함부로 거시적인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브랜든과 클릭스는 싸우기 시작합니다. 브랜든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브랜든 역시 이게 굉장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든은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지구인이 외계인들을 구한다면, 이건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지 모릅니다. 두 지구인이 외계인들을 구해야 하나요? 아니면 두 지구인이 거시적인 역사에 끼어들지 말아야 하나요? 시간 여행 이야기에서 이런 '선택의 갈림길'은 언제나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바꿀 수 있나? 아니면 바꾸지 말아야 하나? 흔히 사람들은 선형적으로 역사가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역사는 이미 흘렀고, 과거는 그저 과거에 불과합니다. 일방적으로 사람들은 과거 역사를 바라봐야 합니다. 발터 벤야민은 우리가 현실을 멈추고 사라지는 과거를 구원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은 그걸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 권력은 열대 밀림을 파괴했고,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착취했고, 여자들을 개무시했습니다. 무산자 민중 계급이 저항했을 때, 자본주의 권력은 민중들을 끔찍하게 짓밟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라지는 과거를 구원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권력이 폭력적이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깨달을 겁니다. 자본주의 권력은 이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권력은 과거가 그저 과거에 불과하다고 세뇌시킵니다.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고 선형적으로 역사가 흘러간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과거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간 여행 소설에서 이건 가능합니다. 시간 여행 소설에서 시간 여행자는 과거에 개입하고 과거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시간 여행자는 멸망을 막거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소설 <화재 감시원>에서 시간 여행자는 과거를 바꾸고 싶어합니다. 소설 <타임 패트롤>에서 시간 여행자는 과거를 바꾸고 싶어합니다.


소설 <11/22/63>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간 여행자는 과거를 바꾸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엄청난 후폭풍을 부를지 모릅니다. 브랜든 역시 후폭풍을 두려워합니다. 브랜든은 곤혹스러워하나, 클릭스는 당장 결정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얼마 후, 시간 여행 장치는 브랜든과 클릭스를 20세기로 데려갈 겁니다. 시간 여행 장치가 작동하기 전에 두 지구인은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브랜든은 중립을 지키기 원합니다. 중립은 편안합니다. 중립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습니다. 중립은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중립은 개입하지 않고 관망합니다.



하지만 클릭스는 중립을 비웃습니다. 클릭스는 말합니다. "인간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다." 네, 그렇습니다. 중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립은 관망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중립은 결정입니다. 현실을 보세요. 현실은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현실은 크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이름처럼 세계화 자본주의는 전세계를 장악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좌파들을 짓밟고 모욕하고 학살합니다.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좌파는 우파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중반, 좌파가 나타난 이후, 단 한 번이라도 좌파는 우파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파리 코뮌부터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정부까지, 언제나 좌파는 학살과 고립과 탄압과 봉쇄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은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정말 중립을 지킬 수 있나요? 이건 망상입니다. 결국 중립은 보수 우파를 편듭니다. 보수 우파가 좌파 세력들을 학살하는 동안, 중립이 이걸 관망한다면, 결국 중립은 보수 우파를 편들 겁니다. 중립이 좌파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중립이 적극적으로 보수 우파를 막을 때, 중립은 간신히 중립을 지킬 수 있어요. 하지만 자칭 중립들은 그저 관망할 뿐입니다. 자칭 중립들은 진짜 중립이 아니라 (그저 허울만 좋은) 보수 우파의 앞잡이들입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싶어!" 이렇게 사회주의 세력들은 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싶으나, 그 전에 자본주의 공세에서 우리는 살아남아야 해!" 이렇게 사회주의 세력들은 외쳐야 합니다. 사회주의 세력들은 안락하고 평안하고 순조롭고 풍요롭게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자본주의 권력이 사회주의를 짓밟고 봉쇄하고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의 혁명입니다. 사회주의와 달리, 자본주의는 부유합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하고 자연 환경을 대대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부유합니다.


부유한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회주의를 아주 쉽게 짓밟고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는 살아남아야 합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공세를 막고, 막고, 막고, 막고, 막고, 막고, 또 막고, 다시 막고, 또 다시 막고, 계속 막고, 연이어 막고, 끝까지 막아야 합니다. 사회주의는 아주 극심한 타워 디펜스 게임을 플레이해야 합니다. 사회주의 세력의 목표는 사회주의 건설이 되지 못합니다. 사회주의 세력의 목표는 극심한 타워 디펜스 플레이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사회주의 세력은 몰락하고 타락합니다. 이런 기울어진 상황에서 중립이 존재할 수 있나요? 이건 어처구니가 없는 망상입니다.



브랜든 역시 깨닫습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브랜든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 그건 결정이 됩니다. 브랜든은 반대하거나 찬성해야 합니다. 중생대에서 공룡들과 외계인들을 만나는 동안, 브랜든은 여러 사건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겁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인간은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합니다. 결국 중립은 찬성이나 반대로 귀결합니다. 다른 한쪽보다 한쪽이 막강한 상황에서 중립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결국 중립은 막강한 세력으로 수렴할 겁니다. 브랜든은 꽤나 우유부단했으나, 중생대에서 브랜든은 중립이 없다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브랜든은 결정합니다. 인간은 결정해야 합니다. 중립이 없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중립이 절대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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