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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메타트로폴리스>와 흐릿한 미래 생태 도시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메타트로폴리스>와 흐릿한 미래 생태 도시

OneTiger 2018. 6. 15. 20:07

소설 모음집 <메타트로폴리스>는 미래 도시, 도시 너머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메타트로폴리스>에 참가한 작가들은 제이 레이크, 존 스칼지, 토비어스 버켈, 엘리자베스 베어, 칼 슈뢰더이고, 그들은 미래 도시 설정을 구상했습니다. 다섯 작가들은 똑같은 설정을 공유하고, 그 설정 위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전반적으로 이 미래 도시는 생태주의에 기대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막대한 양극화와 환경 오염을 일으켰고, 양극화와 환경 오염은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찾기 원하고, 그들은 생태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생태 도시는 기존 도시와 별로 접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메타트로폴리스>에서 생태 도시는 풀뿌리 유목민들에게 기반을 두고, 평판 경제를 확립하고, 생산보다 재활용이나 소비에 중요하게 여깁니다. <메타트로폴리스>에서 도시는 거대한 주거지들이 가득한 인공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그보다 사람들이 모이는 조직이고 연대입니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상을 이용해 연대하고, 그것 자체가 도시가 됩니다. 이는 도시라는 고정 관념을 뒤짚어요.



겉보기에 <메타트로폴리스>는 고정 관념을 깨고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는 소설 모음집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다섯 작가들이 쓴 이야기들이 그런 개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경제 구조, 새로운 조직을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새로운 사상과 경제 구조와 조직에는 여러 설명들이 따라붙어야 할 겁니다. 어디에서 그런 사상이 뻗어 나오는가? 어떻게 그런 경제 구조가 작동하는가?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조직을 짤 수 있는가?


하지만 <메타트로폴리스>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작가들은 그저 원래 그런 것들이 존재했다고 대충 넘어갈 뿐입니다. 저는 이게 작가들이 저지른 아주 커다란 실수라고 생각해요. <뒤 돌아보며>나 <붉은 별> 같은 소설은 어떻게 새로운 미래 도시가 작동하는지 시시콜콜 늘어놓습니다. 때때로 그런 설교는 꽤나 지겹게 보이나, 덕분에 새로운 미래 도시는 설득력을 얻을 수 있고, 독자는 사상과 철학을 깊게 파고들 수 있죠. 하지만 <메타트로폴리스>는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사상이나 경제 구조를 대충 넘어가고, 디스토피아를 떠드느라 바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 도시는 설득력을 잃겠죠.



저는 <메타트로폴리스>가 기대는 생태주의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풀뿌리 유목민, 평판 경제, 분산된 조직 형태. 모두 좋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그런 조직이나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평판 경제가 작동하고, 사람들이 신뢰나 사회적 자본을 교환할 수 있을까요? 정말 여기저기에서 풀뿌리 유목민들이 마음대로 마을을 이룩할 수 있을까요? 자본가들이 가장 중요한 생산 수단인 토지를 함부로 내버려둘까요? 아무리 풀뿌리 조직들이 많아진다고 해도, 그들이 아주 강력한 중앙 정부를 뒤집을 수 있을까요?


중앙 정부가 정말 위기에 빠진다면, 군대를 이용해 그들을 쓸어버리지 않을까요? 아무리 풀뿌리 유목민들이 분산된 조직을 구성한다고 해도, 결국 물리적인 실체는 존재합니다. 중앙 정부는 그런 실체를 쓸어버리려고 할 겁니다. 어떻게 분산된 조직이 거기에 맞설 수 있을까요? 이런 분산된 조직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을까요?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 같은 소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홍수>가 어떻게 풀뿌리 생태 공동체가 살아가는지 자세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생태 종교 집단에 합류하고, 화장실 청소, 꿀벌 농사, 축제 등에 참가하고, 생태 철학을 깊게 고민하죠. <메타트로폴리스>는 그렇지 않아요.



저는 <메타트로폴리스>가 <뒤 돌아보며>나 <홍수> 같은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사상을 길게 설교하거나 생태 공동체를 자세하게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경제 구조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메타트로폴리스>는 갑자기 새로운 사상을 얼버무리고, 생태 도시를 둘러싼 주변 요소들을 들여다보느라 바쁩니다. 진짜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들은 피상적으로 흐려지고, 오직 주변 요소들만 부각됩니다. 이게 새로운 경제 구조를 제시하는 올바른 방법일까요.


종종 <메타트로폴리스>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생태 도시라는 미래에 별로 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설들이 자꾸 주변을 둘러보고, 중심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새로운 사상을 파고들어야 했으나, 거기에서 어물쩍 물러나고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소설들은 구심점을 잃고, 허공에서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설명하기 원하는 소설은 새로운 사상을 디딤돌로서 깔아야 합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그런 작업을 무시했고, 그래서 헛다리들을 짚는 것 같아요.



어쩌면 작가들은 독자가 스스로 풀뿌리 민주주의나 환경 보호나 평판 경제를 공부하기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설명을 대충 넘어갔는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그런 방법에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적어도 <메타트로폴리스>는 사상의 기본적인 골격을 설명해야 했어요. 독자가 오직 주변 요소들만 둘러보고, 사상의 핵심을 금방 파악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하다면, 철학 수업들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뒤 돌아보며> 같은 소설은 몇 페이지로서 끝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같은 지배적인 관념은 사람들을 장악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설사 새로운 사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에 복종합니다. 오랜 동안 사람들은 신이 왕을 결정했다고 믿었습니다. 오랜 동안 사람들은 왕이 좀 더 특별하고 잘난 인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틀린 생각이었으나, 아무도 그걸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의심한 사람은 사형장으로 끌려가야 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사상은 금방 퍼지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에 복종하고, 노예 근성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평생 노예로서 살아온 사람은 당장 자유민이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작가가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고 싶다면, 차근차근 설명해야 합니다. 작가는 단단한 디딤돌을 깔고, 디딤돌 위에서 차근차근 탑을 쌓아야 합니다. 작가가 디딤돌을 깔고, 골격을 세우고, 벽돌들을 붙이고, 지붕을 덮는 동안, 독자들은 새로운 주거지를 점차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강철 군화> 같은 소설은 새로운 사회를 갑자기 들이밀지 않습니다. <강철 군화>는 왜 자본주의가 틀렸는지, 어떻게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는지, 어떻게 기득권들이 장악하는지 길게 설명합니다. 그걸 모두 설명한 이후, 마침내 <강철 군화>는 저항 운동을 본격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 저항 운동 역시 자세한 이론을 동반합니다.


덕분에 독자는 새로운 사상과 저항 운동과 미래 사회를 작가와 함께 따라갈 수 있어요. <메타트로폴리스>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새로운 건물 대신 건물 주변만 훑어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건물이나, <메타트로폴리스>는 건물을 주목하지 않아요. 대신 소설들은 건물 옆에 있는 잡초나 돌멩이를 열심히 떠들죠. 이게 정말 미래 도시를 보여주는 방법일까요? 독자가 잡초나 돌멩이를 본다면, 새로운 건물을 연상할 수 있을까요?



유토피아 소설과 디스토피아 소설은 서로 다릅니다. 디스토피아 소설은 암울한 현재를 극단적으로 과장합니다. 따라서 디스토피아 소설은 구태여 새로운 사상을 파고들 필요가 없습니다. 디스토피아 소설은 그저 암울한 문제들만 조명할 수 있어요. 반면, 유토피아 소설은 거기에서 더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 유토피아 소설은 발판을 깔아야 합니다. 유토피아 소설은 왜 현실이 틀렸는지 설명하고, 동시에 그 반작용으로서 추진력을 얻어야 합니다. <뒤 돌아보며> 같은 고전 소설과 <홍수> 같은 21세기 소설 모두 그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미래 도시를 보여주기 때문에 <메타트로폴리스>는 유토피아 소설에 좀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메타트로폴리스>는 어떻게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왜 현실이 틀렸는지 분석하고 거기에서 추진력을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들은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갑자기 생태 도시들을 대충 훑어봅니다. 만약 독자가 거기에 감동하고 생태 철학을 좀 더 공부한다면, <메타트로폴리스>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는 <메타트로폴리스>에게 반박할지 모릅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그런 반박에 대답해야 하나, 소설들 속에는 반박하기 위한 근거가 별로 없습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평판 경제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요. <메타트로폴리스>에게 디스토피아를 떠들 시간이 있었다면, 대신 어떻게 평판 경제가 작동하는지 보여줘야 했습니다. 작가들은 어떻게 사람들이 신뢰를 쌓고, 사회적 자본을 쌓고, 그걸 교환하는지 직접 보여줘야 했습니다. <메타트로폴리스>에서 사람들이 사회적 자본을 쌓는 장면이 나오나요? 그렇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독자가 평판 경제라는 새로운 구조를 받아들이겠어요. 저는 SF 소설이 미래 사회를 안내하는 자세한 GPS 지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대략적인 나침반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나침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건 나사가 하나 빠진 나침반이겠죠. <메타트로폴리스>가 가리키는 방향 자체는 옳습니다. 저는 그게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런 길을 가리키기 위해 소설들이 훨씬 많은 설명들을 동원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모순적이게도 <메타트로폴리스>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은 <꿀꿀대는 소리 말고는 버릴 것이 없다>입니다. 이 소설은 함부로 새로운 사상이나 경제 구조를 설파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다섯 소설들 중 가장 규모가 작습니다. 덕분에 존 스칼지는 충실하게 사건을 전개합니다. <꿀꿀대는 소리>에게는 별로 야심이 없습니다. 이 소설은 그저 어떻게 도시가 개조 돼지들을 사육하고 새로운 연료를 얻는지 보여줄 뿐입니다. 미래 생태 도시를 설명하는 소설로서 작가는 생체 연료를 제시하고, 어떻게 사람들이 생체 연료를 얻는지 화기애애하고 웃기게 그립니다.


<꿀꿀대는 소리>에는 자세한 일상이 있고, 그런 자세한 일상 덕분에 독자는 쉽게 소설을 쫓아갈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일상 묘사가 풀뿌리 유목민이나 평판 경제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일상 묘사는 독자가 쉽게 따라가고 공감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존 스칼지처럼 다른 작가들 역시 독자가 따라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디스토피아에 새로운 사상을 집어넣느라 바빴고, 이야기는 산만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상이나 사회가 전달하는 충격적인 기쁨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환경 보호를 이야기함에도 <메타트로폴리스>는 에너지 문제에 무심한 것 같습니다. 생태 문제는 에너지 문제입니다. 생태 문제는 어떻게 영양분이 흐르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제이 레이크나 토비어스 버켈, 엘리자베스 베어는 그런 문제를 살짝 언급하나, 별로 파고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태 문제 대신 다른 잡담들을 늘어놓죠. 가장 심한 작가는 칼 슈뢰더입니다. 칼 슈뢰더는 가상 현실을 이용해 어떻게 개인이 다면적인 정체성들을 드러내는지 이야기합니다. 개인은 그저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은 동시에 여러 정체성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면적인 정체성들은 또 다른 도시를 조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도시는 별로 가시적이지 않고, 오직 공간적인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는 획기적이고 탄복할 발상입니다. 하지만 칼 슈뢰더는 그런 개념을 생태 도시로 연결하지 않고, <머나먼 실레니아에서>는 혼자 동떨어진 느낌을 풍깁니다. <머나먼 실레니아에서>는 사이버펑크 모음집에 훨씬 어울리는 소설 같아요. 역시 생태 문제(영양분과 에너지)에 제일 주목하는 작가는 존 스칼지입니다. 존 스칼지는 자신이 사소한 이야기를 썼다고 말하나, <꿀꿀대는 소리>는 다른 소설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어쩌면 각 소설들이 단편 소설들이기 때문에 <메타트로폴리스>는 이런 문제를 품었을지 모릅니다. 각 단편 소설들에게는 사상을 길게 떠들 시간이 없었고, 그래서 모든 것을 대충 넘겼을지 몰라요. 사실 사회 구조를 바꾸는 획기적인 논의를 단편 소설에 담기는 어렵겠죠. 어쩌면 작가들 역시 그런 부분을 고민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고충을 모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작가들은 단편 소설로서 새로운 도시라는 면모를 살짝 드러내고, 더 큰 상상을 독자에게 맡겼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작가들은 (모두 설정을 공유하기 때문에) 단편 소설들 묶음이 커다란 주제를 전달할 수 있다고 여겼을지 모르죠.


저는 작가들이 뭐라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소설 후기에 적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군요. 아무리 소설과 사상 서적이 다르다고 해도, 이런 소설에는 사상적인 부분이 많이 필요하죠. 하지만 <메타트로폴리스>는 그렇지 못했고, 그래서 저는 아쉽다고 느낍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아쉬운 소설입니다. 어쩌면 이런 주제는 단편 소설 모음집보다 장편 소설에 훨씬 어울리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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