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방랑자의 시>와 <안사락 족의 계절>, 성 역할과 문명 발전의 인류학 SF 본문
엘리너 아나슨이 쓴 <방랑자의 시>는 <오늘의 SF 걸작선>에 실린 단편 소설입니다. 제목처럼 <오늘의 SF 걸작선>은 여러 SF 단편 소설들을 담았습니다. 어떤 소설은 하드 SF 장르이고, 어떤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사막의 눈>은 꽤나 재미있군요.) 어떤 소설은 좀 더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방랑자의 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방랑자의 시>는 미래 사회를 그리지 않습니다. 이 단편 소설에는 첨단 과학 기술이나 우주 항해나 로봇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위기는 중세 판타지와 비슷하고, 소설 주인공(주인공들)은 음유 시인과 비슷합니다. 음유 시인은 대륙을 떠돌고, 어떤 마을에 들리고, 귀족의 성채를 방문하고, 이런저런 모험을 겪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SF 소설보다 중세 판타지 소설에 가깝겠죠. 하지만 <오늘의 SF 걸작선>은 주저하지 않고 <방랑자의 시>를 실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저는 SF 소설과 판타지 소설의 경계가 꽤나 아슬아슬하다고 느낍니다. 두 소설의 경계는 희미하고, 작가들은 SF 장르와 판타지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습니다. 때때로 작가들은 사이언스 판타지 같은 장르를 씁니다.
왜 <방랑자의 시>가 SF 소설 모음집에 들어가야 할까요? 엘리너 아나슨이 SF 작가이기 때문에? 하지만 어떤 작가가 SF 소설들을 많이 썼다고 해도, 그 작가의 모든 소설이 자동적으로 SF 소설이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SF 그랜드 마스터입니다. 하지만 <아자젤> 소설은 SF 소설이 아니라 풍자 소설에 가깝죠. 아무리 엘리너 아나슨이 SF 작가 진영에 속한다고 해도, <방랑자의 시>는 자동적으로 SF 소설이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방랑자의 시>가 <리디아 덜루스> 시리즈에 속하기 때문일지 모르죠.
저는 <리디아 덜루스> 시리즈를 읽어본 적이 없으나, 그것 때문에 <방랑자의 시>가 SF 소설이 되는지 모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랑자의 시> 그 자체는 SF 소설보다 판타지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건 사이언스 판타지보다 훨씬 중세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판타지 소설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방랑자의 시>가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대부분 SF 독자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SF 걸작선> 편집자 역시 <방랑자의 시>를 주저하지 않고 집어넣었겠죠. <방랑자의 시>는 놀라운 사변을 보여주고, 독자들은 그런 사변에 만족할 겁니다.
누군가가 모든 SF 소설이 사변 소설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틀린 주장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수많은 SF 소설들은 분명히 뛰어난 사변을 보여주고, 그건 독자들이 SF 소설을 읽는 주된 이유들 중 하나입니다. SF 소설들은 미래 사회와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해 사변들을 펼칩니다. 첨단 과학이라는 설정과 사변 중 뭐가 더 중요할까요? 어쩌면 누군가는 첨단 과학이라는 설정을 중요하게 여길지 모르고, 누군가는 첨단 과학이라는 설정이 약하다고 해도 사변을 더 중시할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첨단 과학보다 사변을 더 중시하는 SF 독자들이 많을 겁니다. 솔직히 아무리 SF 소설들이 첨단 과학을 떠든다고 해도, 그게 말초적인 대규모 학살이나 선정적인 볼거기로 이어진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게다가 숱한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그런 말초적인 학살이나 선정적인 볼거리로 이어집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첨단 과학 대신 마법이나 환상종을 이용해 사변들을 펼친다고 해도, 그런 사변이 뛰어나다면, 독자들은 거기에 만족할지 모르죠. 사변 소설로서 <방랑자의 시>는 SF 소설 모음집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방랑자의 시>에서 소설 주인공(주인공들)은 곡스햇이라는 외계 종족입니다. 따라서 <방랑자의 시> 그 자체는 중세 판타지 같으나, 배경 설정은 엄연히 스페이스 오페라나 사이언스 판타지인 것 같습니다. 아마 <리디아 덜루스> 시리즈는 스페이스 오페라겠죠. 재미있게도 곡스햇은 단일 개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집단 지성이고, 여러 개체들은 하나가 됩니다. SF 세상에는 종종 이런 '집단 개인(?)'이 존재하죠.
하지만 이런 집단 개인에게는 여러 성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여자이고, 누군가는 중성이고, 누군가는 남자입니다. 여러 곡스햇들은 서로 다른 성별들을 뒤섞습니다. 여러 성별들은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성별들이 갈등 없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누가 주도권을 쥐어야 할까요? 여러 성별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여러 성별들이 각자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요? 엘리너 아나슨은 집단 지성을 이용해 성별이 맡는 역할들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곡스햇 같은 외계 종족 없이 엘리너 아나슨은 이런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수 있을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곡스햇 같은 집단 개인은 계급 갈등을 훨씬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겁니다. 집단 개인은 사회보다 훨씬 작은 단위이고, 그래서 독자들은 여러 계급들이 부딪히는 문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겠죠. 엘리너 아나슨은 특정한 성별을 지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방랑자의 시>는 여자 역할에 좀 더 점수를 주는 것 같으나, 남자들을 무조건 배제하지 않아요. 악질 여자들 역시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생물적인 성별이 아니라 사회가 성별들에게 각자 다른 역할들을 맡긴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고요.
<방랑자의 시>에서 핵심 소재는 아기입니다. 어떤 아기를 두고 집단 개인들은 서로 갈등합니다. 아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방랑자의 시>는 남자보다 여자를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여성이라는 생물적인 성이 아니라 돌봄이라는 역할에 가까울 겁니다. 남자든 여자든 중성이든,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돌본다는 사실입니다. 전통적으로 여자가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돌봄이 여성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해요. 반면, 전통적으로 남자가 군대에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남자가 파괴적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왜 돌봄 행위가 여성스러운 행위가 되어야 할까요.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런 돌봄 행위를 사회 전체에 퍼뜨릴 수 있을 겁니다. <방랑자의 시>는 집단 개인이라는 사변을 통해 그런 사회 문제를 조명합니다. 게다가 <오늘의 SF 걸작선>에는 <방랑자의 시>와 유사한 SF 소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안사락 족의 계절>입니다. 저는 <오늘의 SF 걸작선>에서 <방랑자의 시>와 <안사락 족의 계절>이 꽤나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양쪽 모두 중세 판타지 같은 사이언스 판타지이고, 동시에 외계 종족을 이용해 사회 문제를 비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여자 작가의 소설이고요.)
단편 소설 <안사락 족의 계절>은 어슐라 르 귄이 쓴 인류학 SF 소설입니다. 어슐라 르 귄에게 익숙한 독자는 <안사락 족의 계절>이 무슨 분위기와 무슨 주제를 드러내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겠죠. <안사락 족의 계절>은 <오늘의 SF 걸작선>에 실렸으나, 솔직히 이 소설은 별로 SF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소설에 첨단 과학 기술이나 우주 항해는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배경 설정은 분명히 SF 장르이나, 실질적인 내용은 중세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이런 소설이 <오늘의 SF 걸작선>에 들어가야 할까요?
이 소설에서 우주 항해는 막판에 그저 잠시 등장할 뿐입니다. 사실 우주 항해가 없다고 해도, <안사락 족의 계절>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이 소설이 SF 소설보다 중세 판타지 소설과 비슷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주장은 별로 틀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배경 설정이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안사락 족의 계절>은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걸 SF 울타리에서 내쫓지 않을 겁니다. 위에서 <방랑자의 시>를 말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첨단 과학 기술이 아닙니다.
이런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사변일 겁니다. 첨단 과학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안사락 족의 계절>이나 <방랑자의 시> 같은 소설들은 놀라운 사변을 보여줍니다. <안사락 족의 계절>과 <방랑자의 시>는 모두 중세 판타지에 기반한 인류학 SF 소설 같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왜 첨단 과학이 나오지 않는 소설이 SF 소설 모음집에 들어가는지 반문할지 몰라요. 하지만 놀라운 사변을 보여줄 수 있다면, 숱한 SF 독자들은 별로 개의치 않을 겁니다. 솔직히 첨단 과학 설정이 중요할까요? 수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침을 튀기며 우주 구축함이나 함선 인공 지능이나 궤도 폭격을 떠듭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우주 구축함에 아주 목숨을 매다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첨단 과학 설정입니다. 하지만 그런 첨단 과학 설정들은 그저 열심히 사람들을 학살할 뿐입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사람들을 열심히 학살하기 위해 SF 소설이 첨단 과학을 떠든다면, 거기에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말초적인 재미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SF 소설이 말초적인 재미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첨단 과학이 없는) 사변 소설과 (첨단 과학을 이야기하는) 말초적인 SF 소설이 있다면, 저는 사변 소설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게다가 <안사락 족의 계절>에서 첨단 과학 기술은 분명히 핵심적인 소재입니다.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 덕분에 SF 소설은 탄생했습니다. 19세기 유럽은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탄생한 곳이고, 동시에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가 등장한 곳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지지 않았고, 함께 묶였습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유럽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꾸었고, 기술적인 진보를 가져왔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이런 기술적인 진보가 놀랍다고 생각했고, 진보가 사회를 바꾸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사이언티픽 로망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인류 문명은 꾸준히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칭찬한 것처럼) 산업 자본주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바꾸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런 진보가 인류 문명을 계속 바꿀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SF 소설들은 그런 확신을 밑바닥에 깝니다. 변화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우리는 그런 변화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변화가 너무 이질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함부로 판단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 SF 소설들은 인류 문명이 계속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안사락 족의 계절>은 그렇게 지적 문명이 바뀌는 기로를 보여줍니다. 소설 속에서 안사락 종족은 중세 판타지 설정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중세적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안사락 종족은 첨단 과학 기술 문명과 조우했습니다. 안사락 종족이 원한다면, 그들은 첨단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고, 중세 문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안사락 종족이 중세 문명에서 벗어나야 할까요? 첨단 과학 기술이 안사락 종족에게 무슨 혜택을 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안사락 종족은 제3세계 부족 사회를 상징할지 모르고, 첨단 과학 문명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상징할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조건 서구적인 근대화를 추종합니다. 유럽 문명이 강자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서구적인 근대화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고, 제3세계 부족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베재합니다. 하지만 정말 서구적인 근대화가 무조건 옳은 길일까요? <안사락 족의 계절>은 부족 사회와 첨단 과학 문명이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독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무슨 길을 선택해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안사락 족의 계절>이 좋은 SF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안사락 족의 계절>은 분명히 지적 문명이 첨단 과학으로 발전하는 경로를 이야기하죠. SF 세상에서 그건 가장 핵심적인 소재일 겁니다.
어슐라 르 귄은 폭력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는 작가입니다. <안사락 족의 계절> 역시 폭력을 자세하게 그리지 않아요. 하지만 어슐라 르 귄이 묘사하지 않았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서구적인 근대화는 수탈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산업 헉명과 자본주의는 수탈 없이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이 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이런 수탈에 훨씬 집중하죠. 저는 독자들이 어슐라 르 귄이 쓴 여러 인류학 SF 소설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안사락 족의 계절>을 서로 비교할 수 있겠죠.
그리고 독자들은 <안사락 족의 계절>이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을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서로 비교한다면, 독자들은 그저 제3세계와 서구적인 근대화를 저울질하지 말고, 어떻게 서구적인 근대화가 나타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고민은 <안사락 족의 계절>을 좀 더 깊이 분석할 수 있을 테고, 어슐라 르 귄이 쓴 소설들을 전반적으로 아우를 수 있겠죠. 저는 어슐라 르 귄의 소설들이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고 생각해요. 르 귄의 소설들은 정말 하나의 설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닙니다. 독자들은 여러 인류학 설정들을 비교할 수 있고, 어떻게 문명이 흐르는지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SF 걸작선>에서 <방랑자의 시>와 <안사락 족의 계절>은 중세 판타지 같은 사이언스 판타지를 이용해 사회 문제와 인류 문명을 고민하는 비슷한 소설들일 겁니다. 이건 개인적인 느낌일지 모르나, 저는 두 소설이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엘리너 아나슨을 잘 모르고, 그래서 이런 비교는 틀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엘리너 아나슨을 잘 모른다고 해도, <방랑자의 시>와 <안사락 족의 계절>은 분명히 비슷하게 보입니다. 아마 이런 소설들을 싫어하는 SF 독자들 역시 있을 겁니다. 이런 소설들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해도, 어떤 SF 독자들은 SF 소설이 첨단 과학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그런 SF 독자들은 외계인이 그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우주 생물학에 기반해야 한다고 여기겠죠. 저는 그런 독자들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방랑자의 시>와 <안사락 족의 계절>과 이런 부류의 SF 소설들은 외계인들을 이용해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주장합니다. 첨단 과학에 너무 치중하는 SF 소설은 이런 주제를 쉽게 펼치지 못하죠. 그래서 저는 SF 울타리 안에 <안사락 족의 계절> 같은 소설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