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떡대 갯가재 괴수는 어떻게 우리 인간을 규정하는가 본문
소설 <백경>은 고래들에 관한 온갖 기록들과 철학들과 상념들을 쏟아부은 책 같습니다. 이 책에서 (흔히 사람들이 소설에 기대하는) 선형적이고 개연적인 줄거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망망대해에서 선형적이고 개연적인 줄거리를 풀어놓기는 어려울 겁니다. 포경선 피쿼드는 그저 여기저기 떠돌 뿐이고, 그러는 동안 몇몇 고래를 만나거나 다른 선박들을 만나거나 폭풍우에 휩쓸릴 뿐입니다. 모든 사건에서 시간적인 연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따라서 개연성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신 허먼 멜빌은 고래에 관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마치 신화 속의 홍수가 세상을 덮치는 것처럼 독자의 머리는 허먼 멜빌이 쏟아부은 기록들, 철학들, 상념들 속에 깊이 잠깁니다. <백경>을 읽는 재미는 그겁니다. 고래를 둘러싼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생태적인 무수한 관념들. 만약 누군가가 고래에 관한 철학이나 사상을 읽고 싶다면, <백경>은 무수한 철학들과 사상들을 그 독자에게 쏟아부을 겁니다. <백경>은 이런 분야에서 대표적인 대표 주자이나, 비단 <백경>만 사상들을 쏟아붓는 책이 아닐 겁니다. 이른바 고전 문학들은 독자들의 머리를 깊고 깊은 사상의 밑바닥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SF 소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고전적인 메리 셸리부터 현대적인 피터 와츠까지, SF 소설들 역시 독자들을 사상의 심연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물론 아주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주류 문학과 달리 SF 소설은 상상 과학적인 심연을 파고듭니다. SF 작가는 비일상적이지만 논리적인 가정 위에서 출발하고, 그런 가정은 세상을 뒤집거나 세상을 멀리 떠납니다. 덕분에 독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파악할 수 있어요.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사상의 심연이 중요하다면, 왜 소설책을 읽는가? 철학책을 읽는 편이 낫지 않은가?" 일리가 있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소설책과 철학책은 다르죠. 소설가는 등장인물, 배경, 사건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고, 덕분에 독자는 등장인물이나 배경이나 사건과 함께 주제를 향해 생생하게 항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메리 셸리가 아무리 사변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독자는 그걸 생생하게 읽지 못했을 겁니다.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이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기 때문에 그 모든 사변이 독자를 깊게 끌어당길 수 있었죠. <프랑켄슈타인>이나 <블라인드사이트>가 인조인간이나 외계 생명체를 논의하는 철학책이었다면, 느낌이 확연히 달라질 겁니다. 독자가 받아들이는 반응 역시 달라지겠죠.
어쩌면 누군가는 다시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SF 소설만 가능하다고? SF 영화나 SF 게임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흠, SF 소설처럼 SF 영화나 SF 게임이 여러 사상들을 풀어놓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서로 방법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허먼 멜빌은 고래에 관한 사상들을 소설에서 열심히 늘어놓습니다. 그걸 영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아무리 천재적인 영화 감독이라고 해도 그러지 못할 겁니다. 그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피터 와츠는 <블라인드사이트>에서 방황하는 우주 승무원들과 기이한 감각들을 집요하게 표현합니다. 그걸 영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그건 <블라인드사이트>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나, 그 부분을 영상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 감독은 없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수작 SF 영화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이미지만 관찰할 뿐이고, 추상적인 영역에 진입하지 못합니다. 가끔 독특하고 희한한 표현 기법들을 이용하나, 그렇다고 해도 영화는 추상적인 영역에 진입하지 못해요. SF 영화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SF 소설과 SF 영화는 서로 다른 방법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사변을 원한다면, 저는 SF 소설에게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SF 게임 역시 마찬가지겠죠.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자연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조화 성향은 제노 타이탄이라는 거대 갯가재 괴수를 만듭니다. 이는 꽤나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조화 성향은 자연 생태계를 지키기 원하나, 인공적인 괴수 병기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타당한 논리나 명분이 있을까요. 아마 어떤 사람은 왜 제노 타이탄이 논리적인지 이야기할 겁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왜 제노 타이탄에게 명분이 없는지 설명할 겁니다. 하지만 <비욘드 어스>는 그런 논리나 명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설사 보여준다고 해도 그건 핵심이 아닐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제노 타이탄에게 무슨 명분이 있는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런 명분보다 제노 타이탄이 제노매스 5를 소모하고 전투력이 86이라는 사실이 훨씬 중요할 겁니다. 만약 <비욘드 어스>를 실사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고 가정하죠. 그 영화에서 관객은 조화 성향 사람들이 제노 타이탄에 관해 깊이 토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는 회의적입니다. <신 고지라> 같은 영화는 시종일관 다양한 토론들과 연구들을 보여줍니다. 괴수보다 그런 토론들과 연구들이 영화의 주된 요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 고지라>가 온갖 토론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결국 표면적인 흐름만 둘러볼 뿐이죠. 어떤 영화 감독이 만든다고 해도, 영화는 그런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저는 SF 작가가 등장인물의 내면에 침투하고 어떻게 관념이 변하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념의 변화는 텍스트 속에서 제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관념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그런 관념들이 우리 인간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저 살과 뼈와 피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아닙니다. 현실의 물리적인 기반이 변할 때, 우리는 어떤 관념을 형성하고, 그런 관념들은 다시 우리 인간을 정의합니다. 화살을 쏘는 고대 병사와 대함 미사일을 날리는 21세기 해군 장교는 똑같은 인간입니다. 양쪽 모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입니다.
하지만 고대 병사와 21세기 해군 장교는 관념적으로 엄청나게 다릅니다. 물리적인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고대 병사와 21세기 해군 장교는 서로 다른 행동 원리를 사고하고, 서로 다르게 행동합니다. 저는 이런 면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떡대 갯가재 괴수가 제노매스 5를 소모한다는 전술이나 공중 부양 구축함을 실감나게 찢어발기는 장면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떡대 갯가재 괴수가 인간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고, 그런 영향이 어떻게 우리 인간을 바꾸는지가 훨씬 중요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