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두 사람>이 허구적인 소설이 될 수 있는가 본문
사람들이 어떤 글을 소설이라고 부를 때, 이건 그 글이 허구라는 뜻입니다. 소설은 허구이고, 그래서 소설 등장인물들과 사건들 역시 허구입니다. 배경 무대는 허구가 아닐 수 있으나, 소설은 배경 무대에게 문학 장치들을 덧붙입니다. 현실 속의 어떤 거리에서 주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 속의 그 거리에서 주점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의 어떤 거리에서 주점이 존재한다고 해도, 소설 속의 그 거리에서 주점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설이 문학 장치를 동원하기 때문에, 소설과 실존 인물은 대조적입니다. 실존 인물은 허구가 아닙니다. 허구와 실존 인물은 대립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허구와 실존 인물이 대립한다고 해도, 수많은 소설들은 실존 인물들을 묘사합니다. 수많은 소설들에서 실존 인물들은 주연이 되거나 중요한 조연이 됩니다. 만약 소설이 실존 인물을 묘사하지 못한다면, 수많은 역사 소설들은 사라질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역사 소설들은 도마 위에 올라갑니다. 역사 소설들에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허구이고 사실인가요? 역사 소설이 실존 인물에게 문학 장치를 덧붙일 수 있나요? 이게 사실 왜곡인가요, 아니면 창작과 표현의 자유인가요? 소설 작가가 자신의 세계관을 실존 인물에게 투영하지 않나요? 만약 독자가 허구와 사실을 헛갈린다면?
역사 소설들은 이런 물음들에 부딪힙니다. 논픽션 전기(傳記) 역시 여러 물음들에 부딪히나, 전기가 논픽션이기 때문에, 적어도 전기는 정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만약 전기 작가가 레프 트로츠키 생애를 잘못 적는다면, 독자들은 전기 작가가 사실을 왜곡한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판이 역사 소설에 통하나요? 만약 역사 소설이 레프 트로츠키 생애를 잘못 적는다면, 독자들이 소설 작가를 비판할 수 있나요? 소설 작가는 이게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고 해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서 정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역사 소설은 실존 인물을 다루나, 한편으로 소설은 허구입니다.
일로나 예르거는 <두 사람>을 썼습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를 가리킵니다.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는 실존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단순한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는 인류 사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관점에서 찰스 다윈보다 카를 마르크스는 훨씬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많은 사람들은 찰스 다윈을 인정하나, 언제나 카를 마르크스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자본주의가 모순을 드러낼 때마다, 죽은 카를 마르크스는 부활합니다. 엄청난 폭우들이 화제가 되는 것처럼, 기후 변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가 엄청난 폭우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를 저질렀습니다. 비단 19세기 산업 자본주의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만 아니라 이미 초기 산업 자본주의 역시 환경 오염을 저질렀습니다. 상업 자본주의가 나타난 이후, 산업이 발전하는 동안, 수익을 올리기 위해 유럽 국가들은 늪지와 배수로를 갈아엎었고 늪지 생물 다양성을 훼손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늪지가 비옥한 토양과 풍요로운 새들과 물고기들을 제공한다고 반박했으나, 아무리 늪지 뱀장어가 살찐 먹거리라고 해도, 지배 계급은 늪지 뱀장어에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수익을 올리기 위해 지배 계급은 자연 환경을 갈아엎었고, 이미 초기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습니다.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이런 사례들을 언급하고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경 오염들이 문제였다고 지적합니다.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경 오염들이 문제인 것처럼, 기후 변화는 자본주의 책임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열심히 비판했고, 그래서 기후 변화 시대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부활하고 기후 변화를 비판하는 것처럼, 카를 마르크스는 실존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실존 인물 카를 마르크스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논픽션 전기가 아닙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이 전기라고 간주할지 모르나, <두 사람>은 논픽션이 아닙니다.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가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여러 실존 인물들을 보여주나, 주연 의사 베케트는 허구적인 등장인물입니다. 의사로서 베케트가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를 연결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베케트는 핵심 등장인물입니다. 하지만 베케트는 허구입니다. 두 사람을 연결하기 위해 일로나 예르거는 허구적인 등장인물 베케트를 창작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의사 베케트입니다. 실질적인 주인공은 허구입니다.
실질적인 주인공이 허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전기가 아닙니다. 아무리 이 책이 전기가 된다고 해도, 이 책은 '가상의' 전기, '허구적인' 전기입니다. 허구와 전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허구와 전기가 대립하기 때문에, 이 책은 소설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허구적인 주인공 베케트는 <두 사람>이 소설에 가깝다고 증명합니다. 비단 주인공 베케트만 아니라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에서 시점은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의 심리를 직접 묘사합니다. 논픽션에서 작가는 인간 심리를 직접 묘사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인간 심리를 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뭐라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지 읽지 못합니다. 우리는 궁예가 아니고, 우리는 미륵 관심법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노련한 탐정은 프로파일링할 수 있으나, 프로파일링은 심리를 직접 읽지 못합니다. 노련한 탐정은 그저 물리적인 근거들을 동원하고 심리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뿐입니다. 어쩌면 현실에서 누군가는 숨겨진 초능력자인지 모르고, 초능력자는 인간 심리를 직접 읽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텔레파시 초능력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인간 심리를 읽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 속은 비밀의 정원입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마음 속은 비밀의 정원이 아닙니다.
소설 시점은 등장인물 심리를 직접 묘사합니다. 독자는 등장인물 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독자는 비밀의 정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등장인물이 마음을 감추기 원한다고 해도, 만약 소설 시점이 마음을 들여다보기 원한다면, 등장인물은 감추지 못합니다. 소설을 위해 등장인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설을 위해 등장인물은 마음을 공개합니다. 소설에서 작가는 등장인물 심리를 얼마든지 공개하고, 작은 따옴표('')를 사용하고, 심리를 직접 묘사할 수 있습니다. 논픽션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논픽션에서 작가는 여러 정황들을 동원하고 인간 심리를 분석할 수 있으나, 이건 '분석'입니다.
소설 작가는 비단 분석할 뿐만 아니라 직접 묘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가 직접 묘사할 수 있기 때문에, 소설 작가는 심리를 분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설 시점이 관찰자 시점일 때, 소설 작가는 심리를 묘사하기보다 분석하나, 소설 작가는 시점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설 작가가 전지적인 시점을 선택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막지 못합니다. 반면, 만약 논픽션 작가가 전지적인 시점을 선택한다면, 독자들은 논픽션 작가를 크게 비판할 겁니다. 논픽션 작가는 텔레파시 초능력자가 아닙니다. 논픽션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어떻게 논픽션 작가가 심리를 직접 서술하나요?
어떤 상황에서 흥미를 부각하기 위해 논픽션 작가는 인간 심리를 직접 서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서술들이 논픽션을 가득 채운다면, 이 책은 호평보다 비판에 직면할 겁니다. 논픽션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수많은 실존 인물들을 거론하나, 캐롤린 머천트는 그들의 심리들을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캐롤린 머천트는 여러 문헌들을 인용하고, 정황 증거들을 제시하고, 심리들을 분석합니다. 캐롤린 머천트는 작은 따옴표를 사용하고 인간 심리를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논픽션 화자 '나'를 내세우고 '나'의 관점에서 서구 과학 역사를 서술합니다.
비단 캐롤린 머천트만 아니라 많은 논픽션 작가들은 1인칭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오염 활동이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는 경제(자본주의)와 관련한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 논픽션 서적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나오미 클라인이 기본 소득을 논의할 때, 나오미 클라인은 '우리(1인칭 복수)'를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1인칭은 논픽션 작가 나오미 클라인을 포함합니다. 논픽션 서적에서 1인칭 화자는 논픽션 작가를 가리킵니다. 반면, 소설 시점에서 1인칭은 작가보다 화자를 가리킵니다. 소설 작가와 1인칭 소설 화자는 다릅니다. 양쪽은 똑같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1인칭 화자는 옥희입니다. "우리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소설 작가 주요섭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설 화자 옥희를 포함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우리'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우리'는 다릅니다. 전자는 논픽션 작가(나오미 클라인)를 포함하나, 후자는 소설 작가(주요섭)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후자 '우리'는 소설 화자 옥희를 포함합니다. 옥희는 어린 여자 아이입니다. 주요섭은 성인 남자입니다. 양쪽은 너무 다릅니다.
어린 여자 아이와 성인 남자는 너무 다릅니다. 양쪽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독자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비판해야 하나요? 독자가 주요섭을 비판해야 하나요? "아니, 어떻게 어린 여자 아이 시점에서 성인 남자가 서술할 수 있지? 어떻게 성인 남자가 어린 여자 아이를 쓸 수 있지? 이건 엉터리야!" 이렇게 독자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비판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평론가들은 주요섭이 옥희 시점을 이용하고 미묘한 심리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 호평합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허구입니다. 이게 허구이기 때문에, 성인 남자는 어린 여자 아이를 쓸 수 있습니다.
만약 어린 아이 시점에서 캐롤린 머천트와 나오미 클라인이 서술했다면, 독자들은 캐롤린 머천트와 나오미 클라인이 엉터리라고 비판했을 겁니다. 소설 작가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으나, 논픽션 작가는 다른 누군가가 되지 못합니다. 소설 작가는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비밀의 정원을 들여다볼 수 있으나, 논픽션 작가는 창조신이 아닙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자연의 죽음>은 글자 매체, 출판 매체입니다. 양쪽은 똑같은 매체입니다. 하지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주요섭은 창조신이 되고,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창조신이 되지 못합니다. 논픽션 작가는 창조신이 되지 못합니다.
<두 사람>에서 일로나 예르거는 의사 베케트를 서술합니다. 일로나 예르거는 의사가 아니나, 일로나 예르거는 의사를 서술합니다. 이럴수가!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소설이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성인 남자 주요섭이 어린 아이 옥희(시점)를 서술하는 것처럼, 일로나 예르거는 의사 베케트(시점)를 서술할 수 있습니다. 비단 의사 베케트 시점만 아니라 찰스 다윈과 카를 마르크스 시점에서 일로나 예르거는 서술합니다. 일로나 예르거는 카를 마르크스 심리 속으로 들어가고 개새끼라는 단어를 직접 공개합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지배적인 관념을 개새끼라고 욕할 때, 독자는 이것을 직접 읽습니다.
창조신으로서 소설 작가는 등장인물 심리를 직접 서술할 수 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진흙탕 길에는 유리 조각들이 무수히 깔려있었다. 짜증이 솟구쳐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길바닥에 유리 조각이라니, 딱 리처드답구나!' 그러나 찰리의 분노는 토니를 향해 폭발했다." 이 문구들에서 소설 작가 도리스 레싱은 등장인물 찰리 심리를 직접 서술합니다. 도리스 레싱은 여자입니다. 찰리는 남자입니다. 어떻게 남자 시점에서 여자가 심리를 직접 드러낼 수 있나요? 소설이 허구이기 때문에, 이건 가능합니다.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도리스 레싱은 남자 등장인물 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도리스 레싱이 남자 등장인물이 되는 것처럼, 일로나 예르거 역시 의사 베케트가 되고, 찰스 다윈이 되고, 카를 마르크스가 될 수 있습니다. 논픽션 전기 작가는 카를 마르크스가 되지 못하나, 일로나 예르거는 카를 마르크스가 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허구적인 장치, 문학적인 장치를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자연의 죽음>과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보다 <두 사람>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풀잎은 노래한다>에 훨씬 가깝습니다. <자연의 죽음>과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논픽션 서적입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풀잎은 노래한다>는 소설, 허구입니다.
<두 사람>부터 <풀잎은 노래한다>까지, 이것들은 글자 매체들입니다. 글자 매체는 근본적인 공통점입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글자 매체들을 갖춥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두 사람>과 <자연의 죽음>과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풀잎은 노래한다>를 갖춥니다. 하지만 아무리 글자 매체가 공통점이라고 해도, 허구는 아주 커다란 차이입니다. <자연의 죽음>과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허구를 동원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두 서적에서 허구는 문학적인 허구, 소설 같은 허구가 아닙니다. 소설처럼, <두 사람>은 허구를 집어넣습니다. <두 사람>은 허구입니다.
적어도 <두 사람>에서 많은 것들은 허구입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마음 속으로 개새끼라고 욕할 때, 이건 허구입니다. 사실 카를 마르크스는 욕쟁이 영감이었습니다. 독일 사회 민주당에서 고타 강령이 노사정 화합, 사회 민주주의, 복지 국가를 추구했을 때, 카를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을 썼고 욕설들을 날렸습니다. (독일 사회 민주당은 식민지 수탈에 찬성하고, 무산자 민중들을 배신하고, 세계 대전에 찬성합니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참하게 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카를 마르크스가 욕쟁이 영감이었다고 해도, 논픽션 작가는 카를 마르크스 심리를 직접 서술하지 못합니다.
논픽션 작가는 여러 서신들(정황 근거들)을 제시하고 카를 마르크스가 욕쟁이 영감이라고 분석해야 합니다. 반면, <두 사람>에서 일로나 예르거는 분석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분석이 아닙니다. 일로나 예르거는 뭐라고 카를 마르크스가 마음 속으로 욕하는지 직접 서술합니다. <두 사람>은 논픽션보다 소설에 가깝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심리를 직접 보여줍니다.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등장인물이 자신의 심리를 직접 보여주는 것처럼, 허구적인 전기 <두 사람>에서 '등장인물'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심리를 직접 보여줍니다. 독자는 카를 마르크스 심리에 직접 닿습니다.
독자가 카를 마르크스 심리에 직접 닿기 때문에, 독자는 카를 마르크스에게 훨씬 공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독자가 논픽션 전기를 읽는다고 해도, 카를 마르크스 외부에서 독자는 카를 마르크스를 바라봅니다. 반면, <두 사람>에서 독자는 카를 마르크스 세계관으로 직접 뛰어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허구적인 문학으로서 <두 사람>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나오미 클라인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나쁜지 분석하고 설명합니다. 독자는 나오미 클라인이 기본 소득, 시민 배당에 찬성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설명문이 아닙니다. 이건 허구입니다.
의사 베케트는 카를 마르크스가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는 마음 속으로 이상주의를 경멸합니다. 의사 베케트는 카를 마르크스를 크게 오해합니다. 의사 베케트는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카를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의문스러운 화자입니다. 소설 <나사의 회전>에서 가정 교사가 의문스러운 화자인 것처럼, 독자는 소설 주인공이 카를 마르크스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의사 베케트가 의문스럽기 때문에, 주인공 화자가 의문스럽기 때문에, 독자는 무엇이 옳은지 헛갈릴지 모릅니다. <두 사람>이 무엇을 편드나요?
독자들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의사 베케트는 공산주의를 확신하지 못하나, 아무리 베케트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베케트가 <자본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건 공산주의가 틀리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인공 베케트는 공산주의를 확신하지 못하나, 베케트가 의문스러운 화자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베케트를 편들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베케트를 그저 보여줄 뿐입니다. 만약 나오미 클라인이 의문스럽다면, 독자는 <이것을 모든 것을 바꾼다>를 읽지 못할 겁니다. 반면, 비록 주인공 베케트가 의문스럽다고 해도, 독자가 <나사의 회전>을 읽는 것처럼, 독자는 <두 사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베케트가 의문스러운 주인공 화자이기 때문에, 어쩌면 <두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를 훨씬 부각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주인공조차 카를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수많은 오해들과 착각들을 돌파해야 합니다. 심지어 (소설) 주인공조차 카를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는 너무 불쌍합니다. 적어도 베케트는 찰스 다윈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베케트와 찰스 다윈은 남아메리카 식민지를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케트는 카를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오해들에 직면하고, 카를 마르크스는 불쌍한 '등장인물'입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등장인물'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논픽션 서적과 다릅니다. <두 사람>과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다릅니다. <두 사람>은 <풀잎은 노래한다>에 가깝습니다. 여전히 어떤 독자들은 <두 사람>이 전기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두 사람>이 서구 철학(과학 철학, 마르크스주의)이라고 분류합니다. <두 사람>이 소설보다 철학 서적에 가까운가요? 이 책이 전기인가요, 아니면 소설인가요, 아니면 철학인가요? SF 평론가들이 SF 장르를 완전하게 합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전기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될 겁니다. 분류들은 다양할 겁니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가 '등장인물'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 관점에서 그래픽 노블 <레드 로자> 역시 논픽션 전기보다 문학에 가깝습니다. <레드 로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실존 인물보다 '등장인물'이고, 그래서 <레드 로자>는 문학적인 감동을 선사합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시선을 훨씬 확장할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어떤가요? 이 책이 소설인가요, 아니면 사상 서적인가요? 아니면 이 책이 소설과 사상 서적을 함께 포함하나요? 분류들은 다양할 겁니다. 하지만 <레드 로자>가 문학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것처럼, <에코토피아 뉴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감동 때문에, 많은 독자들은 문학을 읽을 겁니다. 문학이 설명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문학을 비하합니다. 그들은 문학이 실용적이지 않다고 비하합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논픽션 전기보다 <레드 로자>는 훨씬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 논픽션 전기보다 <두 사람>은 훨씬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논픽션 전기보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훨씬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