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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그래픽 노블 <오듀본>과 신비로운 비경 탐험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그래픽 노블 <오듀본>과 신비로운 비경 탐험

OneTiger 2018. 12. 10. 17:40

[이런 장대한 탐험과 생물 다양성과 신비로운 원주민들은 SF 소설들에 영향을 미쳤을지 모릅니다.]



그래픽 노블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파비앵 그롤로와 제레미 루아예가 만든 존 제임스 오듀본 이야기입니다. 19세기 서구 자연 과학에서 존 오듀본은 꽤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픽 노블 제목처럼, 존 오듀본은 새들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존 오듀본은 새들에게 미쳤습니다. 누군가가 오듀본을 조류 덕후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건 과장이 아닐 겁니다. '미쳤다'는 부정적인 용어이나, 어쩌면 이런 부정적인 용어는 오듀본 같은 조류 덕후에게 아주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존 오듀본은 조류에게 열정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새들은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창공을 날기 위해 깃털들은 섬세하고 아름답게 작동합니다. 하늘을 날기 때문에 새들은 일반적인 동물들과 다릅니다. 존 오듀본은 그런 섬세하고 아름답고 이질적인 특성에 매력을 느꼈고 새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 양반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새를 그리고 관찰하기 원했습니다. 19세기에 이건 꽤나 거창한 포부였습니다. 조류 덕후 오듀본은 이런 포부를 그저 마음에만 담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야생 지역들을 떠도는 동안 오듀본은 다양한 새들을 관찰하고 그립니다. 당연히 야생 지역들에서 이 양반은 원주민들을 만나고, 도적들에게 쫓기고, 열병에 걸리고, 온갖 위기들을 헤칩니다.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그런 비경 탐험을 묘사합니다. 찰스 다윈이 비글 탐사선에 탑승한 것처럼, 알프레드 월레스가 말레이 열대 밀림을 돌아다닌 것처럼, 알렉산더 훔볼트가 아마존 강에서 다양한 동식물들을 조사하고 페루 연안에서 '훔볼트 해류'를 연구한 것처럼, 존 오듀본은 북아메리카 삼림들과 늪지대들을 열심히 탐험했습니다. 19세기 자연 철학자들, 이른바 내추럴리스트들에게 이런 탐험은 필수적이었을 겁니다. 자연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을 연구하기 원한다면, 자연 철학자들은 야생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유럽 백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세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와 동남 아시아가 있음에도, 왜 자연 철학자들이 작은 유럽 대륙에 갇혀있어야 할까요.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19세기 자연 철학자로서 어떻게 오듀본이 숱한 삼림들과 늪지대들을 탐험했는지 보여줍니다. 이 그래픽 노블이 드러내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부드럽고 섬세한 그림일 겁니다. 존 오듀본은 새를 사랑한 자연 철학자였고 동시에 새를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당연히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오듀본이 그린 것 같은) 여러 조류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이 그래픽 노블은 그런 그림들에 어울리는 그림체로 장면들을 전개해야 했을 겁니다.



파비앵 그롤로와 제레미 루아예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림체는 존 오듀본과 오듀본이 그린 그림들과 잘 어울립니다. 존 오듀본 같은 화가의 일대기를 그린다면, 그래픽 노블은 섬세한 그림체에 신경을 쏟아야 할 겁니다. 특히, 야생 지대에서 오듀본이 각종 자연 현상들과 야생 동물들, 원주민들을 만나는 장면은 꽤나 환상적입니다.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판타지가 아니나, 가끔 신비한 야생과 생명 현상을 만날 때, 이 책은 판타지로 슬쩍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대자연, 신비로운 원주민 주술사, 각종 야생 동물들이 서로 어울린다면, 그런 이야기는 판타지와 아주 쉽게 만날 수 있겠죠.


적어도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어떤 영성을 그리기 원합니다. 각종 새들을 비롯해 대자연을 바라보는 영성. 독자들이 너무 낭만적인 자연관에 치우치지 않는다면, 이런 영성은 나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때, 이런 영성은 아주 중요하겠죠. 종종 환경 경제학자들은 인류가 자연 환경을 바라볼 때 오직 수치만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농담이겠죠. 그건 상품 가격을 계산하기 위한 헛소리겠죠. 영성을 수치화할 수 있나요? 철새들을 관찰하는 동안 존 오듀본은 반복적인 신비를 느낍니다. 환경 경제학이 이걸 수치화할 수 있겠습니까?



"9월 말에 둥지가 비었다. 2월, 여전히 둥지는 텅 비어 있다. 어떤 희한한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제비가 완전히 이 고장을 떠난 것 같다. 그리고 봄이 왔다. 봄바람은 하늘의 방랑객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늙은 양버즘나무는 몇 주 만에 손님들로 다시 북적인다.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이렇게 존 오듀본은 반복되는 자연 현상에서 영성을 느꼈습니다. 사실 레이첼 카슨 역시 비슷한 영성을 말한 적이 있죠. 레이첼 카슨은 계절 변화를 비롯해 반복적인 자연 현상에 치유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연 현상에는 이런 반복들이 있죠. 그건 인류를 아득히 뛰어넘는, 살아있는 반복들입니다.


심지어 그런 반복들은 다양성을 키우고 진화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듭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고 따라서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때 영성은 아주 중요할지 모릅니다. 과학 역사가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비록 대기 조성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해도 희귀종 야생 꽃 한 송이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신비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게 우리에게 영성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파비앵 그롤로, 제레미 루아예는 그런 영성을 그리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그런 느낌을 자아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19세기 비경 탐험의 골격과 많이 닮았습니다. 서구 자연 철학자는 야생을 탐험하기 원하고, 야생을 탐험하는 동안 자연 철학자는 온갖 야생 동물들과 마주치고 경이로운 대자연을 느낍니다. 그러는 동안 자연 철학자는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도적들과 싸우고, 원주민들과 교류하고, 열병에 걸리고, 악천후를 피하고, 여러 위기들을 극복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19세기 비경 탐험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솔직히 21세기 작가들 역시 이런 비경 탐험들을 이야기합니다.


만약 작가가 여기에 상상 과학을 끼워넣는다면, 만약 존 오듀본이 천둥새 같은 미지의 거대 조류를 만난다면, 이건 충분히 SF 비경 탐험이 될 수 있겠죠. 만약 대자연을 탐험하는 동안 정말 존 오듀본이 천둥새를 만났다면? 천둥새가 너무 컸기 때문에 오듀본이 자료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다면? 헛것을 봤다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 오듀본이 일부러 함구했다면? 그건 더없이 좋은 비경 탐험이 되겠죠.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그래픽 노블에는 SF 비경 탐험이 될 수 있는 디딤돌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천둥새나 가상의 야생 동물 같은 상상 과학입니다. 그게 있다면, <오듀본>은 SF 비경 탐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19세기 자연 철학 탐험이 비경 탐험과 많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자연 철학 탐험이 SF 소설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이 완전히 옳을까요? 설사 그런 주장이 다소 틀린다고 해도, 분명히 19세기 서구 사이언티픽 로망스 작가들은 자연 철학 탐험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소설 <아부 천문대에서> 같은 비경 탐험과 괴수 이야기는 존 오듀본 같은 자연 철학자에게서 비롯했을지 모릅니다. 자연 철학자들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동남 아시아를 탐험하지 않았다면, SF 비경 탐험은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비경 탐험에는 끔찍한 수탈과 학살이 있죠.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에서 삼림들을 돌아다니는 동안 존 오듀본은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만납니다. 존 오듀본은 그들이 건강하고 자연 친화적이라고 느끼고 백인들이 뺏은 것들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존 오듀본이 정말 이렇게 생각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처럼, 가끔 서구 자연 연구자들은 인디언들에게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수탈 역사가 끔찍하기 때문에 백인들은 정말 자신들이 뺏은 것을 보상해야 할 겁니다.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에서 추천사를 쓴 박병권 소장은 인류의 탐욕 운운했습니다. 아, 인류의 탐욕? 박병권 소장이 정말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추천사를 썼나요? 존 오듀본이 바라본 아메리카 인디언들 역시 인류입니다. 그들은 산업 문명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산업 문명은 자본주의 문제죠. 탐욕스러운 것은 인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경제 현상입니다. 생물 다양성을 그리는 비경 탐험을 읽는다고 해도, 박병권 소장처럼, 우리는 인류의 탐욕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착각은 언제나 인간의 본질이 문제라고 이야기하죠. 문제는 인간의 본질이고, 인간의 탐욕이고, 인간 권리이고, 인간의 개인적인 성향이죠.


이런 시각은 사회 구조가 문제라고 절대 판단하지 못합니다. 사회 구조가 인간을 탐욕스럽고 비열한 구석으로 몰아감에도, 숱한 지식인들과 작가들은 절대 사회 구조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 구조가 사람들을 짓밟는다고 해도, 모든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됩니다. 계급 구조 속에서 지배 계급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해도, 환경 오염은 개인적인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주의적인 착각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죠. 골백번 인권의 날을 지정해봤자 뭐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인권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구조입니다. SF 비경 탐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경 탐험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기 원한다면, 작가는 인류의 해악이나 인권 같은 착각이 아니라 산업 자본주의의 해악을 지적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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