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여행하지 않은 곳>과 내면의 비경 탐험 본문
[이런 외계 생존 게임을 만들었을 때, 게임 제작자들은 정말 외계 식생을 탐험하지 않았을 겁니다.]
피에르 바야르가 쓴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은 문학을 이용한 여행 철학 서적입니다. 이 책은 이른바 '방콕' 여행자들 역시 다른 장소들을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방콕 여행자는 '방에 콕' 들어박히고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사실 방콕 여행자는 진짜 여행자가 아닙니다. 여행은 외향적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장소를 방문할 때, 그건 여행이 됩니다. 누군가가 한 장소에 안착한다면, 너무 오래 동안 누군가가 한 장소를 떠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여행자가 되지 못하겠죠.
영화 <호빗> 1편 부제는 <뜻밖의 여정>입니다. 빌보 배긴스가 호비튼을 떠나고, 임라드리스와 머크우드를 방문하고, 외로운 산에서 드워프 지하 왕국을 탐험하고, 황금용 스마우그와 대면하고, 다섯 군대 전투에 참가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건 여정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빌보 배긴스와 샘 와이즈가 말하는 '다시 돌아오다'라는 문구처럼, 떠나지 않는다면 여행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여행자는 떠나야 합니다. 떠나기 때문에 여행자는 여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은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방콕 여행자가 여행자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멀리 떠나지 않는) 방콕 여행자가 여행자일 수 있을까요? 피에르 바야르는 여러 문학들을 언급하고 방콕 여행이 유용하다고 논증합니다. 여러 문학들 중에서 가장 먼저 피에르 바야르는 <동방견문록>을 언급합니다. 유명한 탐험가이자 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썼습니다. <동방견문록>은 동양의 여러 풍습들, 민족들, 지리들, 생태계들을 묘사합니다. 생태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동방견문록>은 아주 흥미로운 자료들입니다. 이 책은 자바 섬 일각수(유니콘)를 이야기합니다. 마르코 폴로는 코끼리보다 일각수가 별로 작지 않고, 물소처럼 털들이 있고, 코끼리 같은 발이 있고, 아주 굵고 검은 뿔이 있다고 묘사합니다. 일각수의 머리는 멧돼지 같고, 호수와 진창 속에서 살고, 아주 추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유니콘이 아름다운 아가씨와 어울리는 성스러운 동물이라고 상상했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그런 상상력을 거부하고 사실 유니콘이 아주 추하다고 지적합니다. 어쩌면 마르코 폴로는 코뿔소가 유니콘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마르코 폴로는 비단 유니콘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동방견문록>은 엄청나게 힘이 세고, 거대하고, 코끼리를 잡아먹는 로크라는 괴수 조류를 이야기합니다. 로크가 정말 존재했을까요? 마르코 폴로가 '동양'을 여행하는 동안 정말 로크 같은 괴수 조류가 하늘을 날아다녔을까요?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중국을 여행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런 주장을 의심합니다. 중국에는 마르코 폴로가 여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게다가 마르코 폴로는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만리장성은 엄청난 건축물이고, 만약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을 여행했다면, 마르코 폴로는 만리장성을 봤을 겁니다. 왜 마르코 폴로가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마르크 폴로는 만리장성 따위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까요? 로크 같은 괴수(자연 현상)가 아주 놀랍기 때문에 만리장성 같은 인공적인 건축물 따위는 마르코 폴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동방견문록>이 날조이고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어쩌면 마르코 폴로는 여행자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마르코 폴로는 그저 수많은 여행자들을 만났을 뿐이고 그들의 경험들을 짜집기했을 뿐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동방견문록>은 아주 놀라운 여행기입니다. 비록 이게 진짜 여행기가 아니라 어떤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는 SF 소설에 가까울지 모른다고 해도, <동방견문록>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습니다. <동방견문록>이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책은 독자들을 거대 괴조 로크가 날아다니는 어떤 상상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만약 마르코 폴로가 정말 방콕 여행자였다면) <동방견문록>은 사이언티픽 로망스인지 모릅니다. 유토피아나 나자르나 라퓨타를 여행하는 원형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처럼, <동방견문록>은 아주 초기적인 SF 소설인지 모릅니다. 초기 SF 소설들에서 소설 주인공은 미지의 장소를 방문합니다. 거기에는 낯선 국가, 낯선 민족, 낯선 생태계가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그런 것들을 관찰하고, 둘러보고, 파악합니다. 유토피아나 나자르나 라퓨타를 여행하는 이야기들처럼, <동방견문록>은 이런 조건들을 만족합니다. 따라서 <동방견문록>은 초기적인 SF 소설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만약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과 동남 아시아를 여행했다면, <동방견문록>은 오리엔탈리즘이 가득한 여행기가 될 수 있겠으나, 만약 마르코 폴로가 방콕 여행자였다면, <동방견문록>은 진짜 여행기에서 원형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로 바뀌겠죠. 재미있게도 <동방견문록>을 언급한 이후, 피에르 바야르는 <80일 간의 세계 일주>를 설명합니다. <80일 간의 세계 일주>는 쥘 베른 소설입니다. 그리고 쥘 베른은 <해저 2만리>, <지구 속 여행>, <지구에서 달까지> 같은 비경 탐험 소설들을 썼습니다. 사실 <80일 간의 세계 일주>와 달리, 쥘 베른은 직접 80일 동안 세계를 여행한 적이 없을 겁니다. 아니, 적어도 <해저 2만리>와 달리, 쥘 베른은 아틀란티스를 방문한 적이 없겠죠.
<해저 2만리>와 달리, 쥘 베른은 만능 잠수함을 몰고 극지에 도달한 적이 없을 겁니다. <지구 속 여행>과 달리, 쥘 베른은 해양 파충류들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을 겁니다. <지구에서 달까지>와 달리, 쥘 베른은 포탄을 타고 달로 날아간 적이 없겠죠. 하지만 쥘 베른은 그런 소설들을 썼습니다. 머릿속에서 쥘 베른은 가상의 장소들을 탐험했고 그걸 생생하게 적었습니다. 물론 쥘 베른은 어느 정도 자연 과학 지식들과 지리학들을 참고했을 겁니다. <해저 2만리>와 <지구 속 여행>, <지구에서 달까지>는 순수한 상상력이 아닙니다. 어떻게 인간이 순수하게 다른 장소를 상상할 수 있겠어요.
언제나 현실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간이 뭔가를 상상하는 순간, 인간은 상상에 현실을 반영할 겁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외계 생태계를 묘사한다고 해도, 외계 생태계는 지구 생태계의 뻥튀기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쥘 베른은 자연 과학 지식들과 지리학들에 고유한 상상력을 덧붙였습니다. 무엇보다 쥘 베른은 낯선 장소를 방문할 때 인간이 무엇을 느끼는지 자세히 적을 수 있었죠. 그런 관념을 읽기 위해 SF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선택합니다. 구태여 심해 왕국이나 외계 생태계를 탐험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그런 관념을 적을 수 있습니다.
사실 SF 작가들이 탐험하고 싶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심해 왕국이나 외계 생태계를 탐험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아틀란티스 왕국이 존재한다고 해도, 어딘가에서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신비로운 잠수함을 타고 다닌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거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천문학자들은 아직 (외계 생태계는 고사하고) 외계 생명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설사 천문학자들이 외계 생명체를 찾는다고 해도, 거기까지 날아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SF 작가들은 상상해야 합니다. SF 작가가 비경 탐험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건 가상의 여행입니다.
SF 작가들은 직접 탐험하지 못하고 방콕 여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방콕 여행에 아무 가치가 없을까요? 방콕 여행에 아무 가치가 없다면, 왜 SF 작가들이 비경 탐험 소설들을 쓸까요? 왜 SF 독자들이 비경 탐험 소설들을 읽을까요? 피에르 바야르는 '내면의 여행'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SF 작가가 외계 생태계를 탐험하지 못한다고 해도, SF 작가는 '내면의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외계 식생을 만났을 때, 인간의 관념은 바뀔 겁니다. 그런 변화를 포착하고 싶다면, SF 작가는 인간의 영혼 속으로 내면의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그건 언어를 이용한 관념 여행입니다. 이게 있기 때문에 비경 탐험 소설들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온갖 비경 탐험 소설들은 그저 신기한 소풍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면의 여행입니다. 비경 탐험 소설들은 언어를 이용해 낯선 장소에서 어떻게 인간이 관념을 바꾸는지 표현합니다. 그래서 외계 식생을 탐험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외계 식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무조건 여행 경험 없이 여행을 떠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행 경험은 중요하죠. 하지만 내면의 여행 역시 중요할 겁니다. 이런 내면의 여행은 비경 탐험 소설들이 선사하는 가장 커다란 가치일지 모릅니다.
※ 피에르 바야르는 작가 카를 마이를 언급합니다. 카를 마이는 북아메리카 개척 소설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개척은 절대 명예롭고 신나는 탐험이 아닙니다. 개척은 침략이고, 수탈이고, 학살입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수탈했고 학살했죠. "기독교인들은 인디언들을 기만하고 그들의 재산을 도적질합니다. 마음이 열리고 솔직한 눈이 있는 백인 역시 자신이 인디언의 땅을 훔친다고 대답합니다. 선한 얼굴의 백인들도 있고 악한 얼굴의 백인들도 있지만, 속은 모두 똑같습니다." 이런 대사처럼, 16세기 이후 탐험은 절대 순수한 개척이 아니었습니다. 비경 탐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이런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