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옥토넛>이 보여주는 캐릭터들과 생물 다양성 본문
[탐험 보고를 노래하는 옥토넛 대원들. 생태학 지식들을 전달하기 위해 옥토넛 대원들은 존재합니다.]
애니메이션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과학 학습 애니메이션입니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들과 달리,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양 생태학입니다. 해양 생태학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기 위해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귀여운 애니메이션이 되었습니다. 이런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보여줄 수 있고 동시에 여러 사건들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청자들이 다양한 등장인물들에게 감정 이입하고 여러 사건들에 집중하는 동안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해양 생태학 지식들을 함께 전달할 수 있죠.
일반적인 생태학 서적들에는 이런 특징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태학 서적들이 쉽다고 해도, 그런 서적들은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긴박한 사건들을 제시하지 못하죠. 해양 생태학이 중요하다고 해도,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애니메이션입니다. 여기에는 시나리오가 있고, 등장인물들이 있고, 사건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시청자들은 해양 생태학 지식보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훨씬 좋아할지 모릅니다. 바나클은 듬직하고 인자하고 학구적이고 인정이 많은 대장입니다. 바나클은 꽤나 이상적인 등장인물입니다. 생태학 지식이 아니라 바나클을 보기 위해 어떤 시청자들은 <바다 탐험대 옥토넛>을 찾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바나클을 보는 동안, 시청자들은 해양 생태학 지식들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바나클 대장이 페이소와 콰지와 함께 출동하고, 복어 같은 탐험선을 조종하고, 트윅의 유행어를 어설프게 발음하고, 대시와 기후 및 지리를 논의하는 동안, 시청자들은 저도 모르게 해양 생태학 지식들을 배울 수 있죠. 게다가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는 탐험 대원들이 많습니다. 페이소는 소심하나 열정적인 힐러(?)이고 종종 용기는 소심함을 이깁니다. 콰지는 온갖 바다 미신들을 주워섬기고 해적 컨셉을 추구합니다. 사실 콰지는 애꾸눈이 아닙니다. 안대는 그저 해적 흉내에 불과하죠.
게다가 명색이 부관임에도 콰지는 탐험대를 조율하지 않습니다. 왜 바나클 같은 훌륭한 대장이 콰지 같은 민폐 덩어리(?)를 부관으로 대우하는지, 그건 좀 이상하죠. 하지만 콰지는 가장 개성적인 등장인물입니다. 콰지가 없다면, 옥토넛 탐험대에는 활기가 없겠죠. 트윅은 이른바 공돌이, 아니, 공순이입니다. 트윅은 정비 담당 기술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술자가 남자라고 생각하나, 트윅은 여자입니다. 여자임에도 트윅은 당당하게 정비 담당 기술자가 되었죠. 그래서 어떤 시청자는 트윅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시청자는 활기찬 콰지를 좋아할 테고, 어떤 시청자는 열정적인 힐러 페이소를 좋아하겠죠.
일반적인 생태학 서적들과 달리, 이렇게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이상적인 등장인물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태학 지식을 다룬다고 해도,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생태학 서적들보다 문학에 가깝습니다.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는 시나리오가 있고, 시나리오는 문학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안, 시청자들은 생태학 서적이 아니라 문학을 즐깁니다.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는 등장인물들이 있고, 시청자들은 등장인물들의 시점들로 해양 생태계를 바라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에는 이런 시점들이 없죠. 새로운 해양 동물을 만났을 때, 탐험 대원들은 서로 다르게 반응합니다.
바나클 대장은 침착하게 관찰하고, 콰지는 바다 괴수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고, 페이소는 심약한 마음을 가다듬고, 튜닙은 기절합니다. 대시는 사진을 찍기 원할 테고, 셸링턴은 해양 동물을 자세히 연구하기 원하겠죠. 흠, 트윅은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트윅은 기술 담당이고 동물들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죠.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여러 시점들을 제시하고, 그래서 새로운 해양 동물이 나타났을 때, 시청자들은 여러 시점들을 이용해 해양 동물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건 문학으로서 <바다 탐험대 옥토넛>이 드러내는 장점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이런 장점을 선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논리를 비단 <옥토넛>만 아니라 SF 소설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옥토넛>이 자연 다큐멘터리가 아닌 것처럼, SF 소설들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바다 탐험대 옥토넛>을 시청할 때, 시청자들은 새로운 해양 동물과 함께 등장인물들에게 주목합니다. <바다 탐험대 옥토넛>을 시청할 때, 시청자들은 그저 새로운 해양 동물을 만나기 원하지 않습니다. 시청자들은 옥토넛 대원들이 반응하는 모습들을 보고 싶어합니다. 만약 어떤 시청자가 페이소를 좋아한다면, 그 시청자는 페이소에게 더욱 주목하겠죠. 새로운 해양 동물이 나타났을 때, 페이소는 두려움에 떨지 모릅니다. 하지만 페이소 옆에서 바나클 대장이 용기를 북돋거나 콰지가 신나게 활개친다면, 페이소는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겠죠. 페이소가 용기를 내고 심지어 용감하게 그 해양 동물을 치료할 때, 시청자는 만족할 겁니다. 시청자는 페이소를 통해 새로운 해양 동물에게 접근할 테고 생태학 지식을 받아들이겠죠.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소설들이 오직 자연 과학들만을 이야기한다면, 왜 우리가 구태여 SF 소설들을 읽어야 할까요? 상상 과학 때문에? 하지만 인공 지능 철학 서적들이나 기후 변화 서적들이나 미래학 서적들 역시 상상 과학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실 SF 소설들에 준하는 미래학 서적들은 넘쳐납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독자들이 구태여 SF 소설들을 찾는 이유는 SF 소설들이 문학이기 때문일 겁니다. SF 소설들에는 등장인물들이 있고, 배경들이 있고, 사건들이 있죠. SF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을 이용해 상상 과학을 바라보고 싶어합니다.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서 바나클 대장을 비롯해 옥토넛 탐험 대원들은 수단입니다. 그들은 생태학 지식들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죠. 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들은 개성적인 수단입니다. 그들에게는 개성(캐릭터)들이 있죠. 그들은 캐릭터들입니다. 바나클 대장부터 튜닙까지, 그들은 캐릭터들입니다. 시청자들이 캐릭터들에게 몰입할 수 있기 때문에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자연 다큐멘터리와 다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와 달리, 캐릭터들을 형상하기 위해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시청자들은 캐릭터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찾을 수 있죠.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찾는다면, 시청자들은 애니메이션에 훨씬 몰입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이상적인 캐릭터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캐릭터에게 호감을 느낀다면, 시청자들은 캐릭터들을 이용해 해양 생태계를 바라볼 수 있겠죠. 다행히 옥토넛 대원들은 꽤나 호감을 주는 등장인물들이고, 시청자들이 이상형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시청자들은 옥토넛 대원들과 함께 해저를 탐사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영상 중심적인 애니메이션으로서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등장인물들(과 각종 동물들)을 꽤나 귀엽게 그립니다. (가끔 그런 묘사는 과도한 미화로 이어집니다.)
물론 생태학 지식들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옥토넛 탐험 대원들은 제한적인 캐릭터들입니다. 여러 문학들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성장하거나 변하거나 타락합니다. 그들은 좀 더 훌륭하게 성장하거나 가치관을 바꾸거나 사악하게 타락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등장인물들은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에게는 특정한 목적들이 있습니다. 그런 특정한 목적들에 도달하거나 도달하지 못했을 때, 이야기는 끝납니다. 하지만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이런 전개 방법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옥토넛 탐험 대원들은 성장하거나 변하거나 타락하지 않습니다. 탐험 대원들은 가치관을 크게 바꾸지 않아요. 언제나 페이소는 소심하고, 언제나 콰지는 신나게 바다 전설들을 주워섬깁니다.
바나클 대장처럼 페이소가 씩씩해질 수 있을까요? 콰지가 사악하게 타락할 수 있을까요? 대시와 셸링턴이 연애하고 결혼하고 옥토포드를 떠날 수 있을까요? 바나클과 트윅이 싸우고 영원히 결별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은 아주 어려울지 모르죠. 옥토넛 탐험 대원들이 생태학 지식들을 전달해야 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캐릭터들은 제한적이죠. 심지어 옥토넛 탐험 대원들에게는 특정한 목표가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저 해양 생태계를 조사할 뿐입니다. 따라서 <바다 탐험대 옥토넛>이 갑자기 종영해야 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숱한 연재 소설 작가들을 보세요. 연재 소설을 빨리 종결하거나 이야기를 빨리 끝내야 할 때, 연재 소설 작가들은 갈등 관계들을 수습하느라 고역들을 치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사는 T-1000이 됩니다. 빠른 종결을 위해 터미네이터처럼 서사는 등장인물들을 해치우고 갈등 관계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죠. 심지어 서사는 승천하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 있어요. 서사는 기계 암살자에서 기계 신이 될 수 있죠. 이런 문학들과 달리,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는 아무 갈등 관계가 없습니다. 언제든 이게 끝난다고 해도, 그건 어색하지 않겠죠.
캐릭터들이 제한적인 대신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서 해양 생태학 지식은 캐릭터들과 대등한 위상이 됩니다. 사실 해양 생태학 지식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게는 존재할 이유가 없겠죠. 이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들)은 근본적으로 문학입니다. 아무리 옥토넛 탐험대가 온갖 해양 생태계들을 조사한다고 해도, 이 애니메이션은 자연 다큐멘터리가 되지 못할 겁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들과 달리,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허구입니다. 이건 픽션이죠. 아무리 이 애니메이션이 고증을 지킨다고 해도,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자연 다큐멘터리에 절대 수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다 탐험대 옥토넛>이라는 문학 속에서 해양 생태학 지식은 꽤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요. 이 애니메이션은 일반적인 소설, 만화, 연극, 영화보다 과학 학습 만화에 가깝습니다. 이건 <바다 탐험대 옥토넛>과 다른 문학들이 드러내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겠죠.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캐릭터들이 제한적인' 애니메이션이 재미있지 않다고 평가할지 모릅니다. 생태학 지식들이 캐릭터들을 제한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재미를 선사할 수 있습니다.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장대하고 신비하고 아름답습니다. 각종 해양 생태계 풍경들은 아주 황홀합니다. 아이들이 시청하는 애니메이션임에도, 가끔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어지간한 비경 탐험 소설들에 준하는 설렘을 드러냅니다.
지식, 탐사, 연구, 관찰, 미지와의 조우는 재미가 될 수 있습니다. 자연 다큐멘터리 서적들을 읽을 때,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관람할 때, 우리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에 좀 더 깊게 다가갈 수 있고, 그런 탐사는 커다란 경이가 됩니다. 우리와 다른 존재들, 우리와 다르고 살아있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구경하는 행위는 그것 자체로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우리와 다른 것을 만날 때, 그것이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놀랄 수 있고, 그런 놀라움은 긍정적인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만날 때, 게다가 그것이 살아있을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요.
이름처럼 생물 다양성은 수많은 다양성들을 보여주고, 생물 다양성을 접할 때, 우리는 훨씬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겠죠. 현실 속의 생물 다양성은 그 어떤 마법보다 놀라울지 모릅니다. 만약 이런 다양성이 우리를 해친다면, 이런 다양성은 무조건 커다란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겠죠. 다양한 세균들과 다양한 기생충들이 무조건 기쁨으로 이어지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계몽주의와 근대적인 진보를 거쳤습니다. 우리는 진보를 꿈꿀 수 있어요. 우리는 생물 다양성을 유리하게 이용하거나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태학을 연구하고 생태학을 유리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물 다양성을 무조건 적대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이건 재미입니다. 이건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재미입니다. 해양 생물 다양성은 <바다 탐험대 옥토넛>이 드러내는 가장 커다란 재미일 겁니다. 그런 해양 생물 다양성을 친숙하게 제시하기 위해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캐릭터들을 이용합니다. 비록 캐릭터들이 제한적이라고 해도,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얼마든지 재미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재미는 모든 시청자에게 골고루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겁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제한적인 캐릭터들을 아쉬워할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생태학 지식들이 줄어들고 캐릭터들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바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생물 다양성을 바라보는 재미와 즐거움과 감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등장인물들이 사소하고 치졸한 갈등 관계에 휘말리지 않기 때문에, 그것 대신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다른 애니메이션들보다 <바다 탐험대 옥토넛>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사실 세계적인 문학부터 트랜디 로맨스 웹툰까지, 수많은 창작물들이 다루는 여러 갈등 관계들은 별로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광신적인 관념에서 비롯할 뿐이죠. 따라서 그런 광신에 매달린 여유가 있다면, 그것보다 생물 다양성에게 감동하는 편이 나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