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고지라: 증식 도시> - 후투아와 생태계 변화 본문
※ 이 게시글에는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과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이런 장면처럼, <고지라: 괴수 행성>은 고지라를 이용해 대대적인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이름처럼 미생물들은 작습니다. 미생물들이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는 미생물을 쉽게 관찰하지 못합니다. 사실 파스퇴르나 레벤후크 이전에 사람들은 미생물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죠. 그래서 여러 전염병들은 신의 징벌이나 악마의 힘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생명체들이 다른 생명체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현미경이 나타난 이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미생물들을 쉽게 무시합니다. 생명체를 이야기할 때, 흔히 사람들은 동물과 식물을 이야기하죠.
미소 생명체들, 미생물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명 현상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할 때, 수많은 사람들은 장대한 고래와 예쁜 꽃과 싱그러운 나무를 언급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미생물들은 없겠죠.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는 유기물 찌개 바다를 보여주고 생체 로봇들을 이용해 짧은 시간 안에 진화 역사를 함축했습니다. 유기물 찌개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생체 로봇들은 나타날 수 있었어요. 지구의 진화 역사는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장대하고 복잡한 생물 다양성은 아주 작은 생명 현상에서 비롯했을지 모릅니다.
작은 물줄기가 시내로 커지고 시내가 강으로 커지고 강이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장대한 지구 생태계는 아주 작은 생명 현상에서 비롯했을지 모릅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지구 생태계를 뒷받침하는 진짜 주인공들은 미생물들입니다. 미생물들은 놀라운 능력들을 선보이고, 그래서 과학자들은 미생물들이 자연 생태계의 진정한 생존자들이라고 칭찬합니다. 심지어 미생물들은 우주를 가로지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엄청난 생존 능력 때문에 어떤 과학자들은 생명이 우주에서 왔을 거라고 가정하죠. 지구 생명체는 지구가 아니라 외계 행성에서 왔을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동물이나 식물이 살지 못하는 가혹한 장소들에서 미생물들은 번성하는 중이고, 어쩌면 지표면 생태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그런 기이한 미생물들은 진화 역사를 멈추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전면 핵 전쟁이나 기후 변화가 파괴적이고 치명적이라고 해도, 전면 핵 전쟁과 기후 변화가 지표면 생태계를 없앤다고 해도, 그런 기이한 미생물들 덕분에 생명 현상은 계속 진화를 밀어붙일지 모릅니다. 게다가 태양계 안에 외계 생명체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미생물들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그런 외계 미생물들은 이미 우글거릴지 모릅니다. 이런 놀라운 사실들을 고려할 때마다 과학자들은 미생물들이 진정한 승리자들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합니다. 그런 칭찬은 허풍이 아니겠죠.
하지만 미생물들에게 감탄하기는 다소 어렵습니다. 그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흰긴수염고래와 세콰이어 나무를 쉽게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아주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미생물들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우리는 그것들이 자연 생태계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을 겁니다. 그래서 오직 두 눈만으로 근본을 살피기는 어렵죠. 뭔가를 깊게 고찰하고 싶을 때, 우리는 표면적인 시각 넘어 근본에 닿아야 할 겁니다. 우리가 오직 두 눈에만 의지한다면, 우리가 오직 시각적인 것에만 의지한다면, 우리는 근본에 닿지 못할 테고 뭔가를 깊게 고찰하지 못하겠죠.
거대 괴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거대 괴수는 무조건 커야 합니다. 거대 괴수는 작아서는 안 됩니다. 거대 괴수가 자연의 힘을 상징하기 때문에, 자연의 힘이 인류 문명을 깔아뭉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는 커야 합니다. 이 주장은 완전히 틀리지 않으나, 여기에는 어느 정도 어폐가 있습니다. '크다'는 게 무엇을 뜻할까요? 거대 괴수가 자연의 힘을 상징할 수 있다고 해도, 물리적인 크기가 무조건 막강한 힘으로 이어질까요? 미생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연의 힘은 물리적인 크기가 아니라 엄청난 번성과 생존 능력일지 모릅니다.
미생물들의 힘은 거대합니다. 미생물들은 장대한 지구 생태계를 뒷받침합니다.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함과 다르나, 분명히 이것 역시 거대함이겠죠. 비단 미생물들만이 아니라 작은 동물들이 만드는 군체 역시 거대합니다.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는 정말 거대하죠.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는 파괴적인 힘이 없습니다.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의 거대함은 파괴로 이어지지 않으나, 진정한 자연의 힘은 이런 것이겠죠. 인간이 메트로폴리스를 꿈꾸기 전에 이미 생물 다양성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를 건축했죠. 그건 자연의 힘이고, 그렇게 자연의 힘은 거대합니다.
분명히 거대 괴수들은 자연의 힘을 상징할 수 있고, 이건 아주 효과적인 문학 장치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연의 거대한 힘은 무조건 거대 괴수를 가리키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위대한 생명 현상은 그런 거대함이 아니겠죠. 거대 괴수가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른 종류의 거대함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단일 거대 개체가 아닌, 무수한 번성과 생존 능력. 그것은 현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 생태계를 뒷받침합니다. 어쩌면 이런 번성하는 무수한 생물 다양성은 거대 괴수라는 단일 거대 개체보다 훨씬 놀라울지 모릅니다. 정말 생명 현상을 멋지게 묘사하고 싶다면, 우리는 거대 괴수라는 단일 거대 개체보다 이런 무수한 번성을 의식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모스라를 상징하는 두 후투아 소녀.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거대 괴수보다 새로운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과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거대 괴수보다 무수한 번성을 고민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두 애니메이션은 그런 것들을 보여줍니다. 두 애니메이션은 고지라, 메카 고지라, 모스라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다른 <고지라> 시리즈와 달리, 두 애니메이션은 거대 괴수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메카 고지라와 모스라는 아예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지라 역시 그저 거대한 단일 개체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고지라는 지구 생태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구 생태계는 고지라를 모방합니다. 그래서 지구 식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우리가 아는 녹색 삼림은 사라졌죠. 고지라는 식물 괴수가 되었고 아예 걸어다니는 지구 생태계가 되었습니다.
고지라는 비단 단일 개체가 아니라 지구 식생 그 자체입니다. 모스라는 어떨까요? 모스라는 직접 등장하지 않으나, 대신 나방-인간 후투아 종족을 낳았습니다. 아직 정확한 정보는 없으나, 사람들은 후투아가 나방-인간 호합 종족이라고 추측해요. 언제나 모스라는 소미인들과 함께 나왔으나,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에서 아예 소미인들은 종족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의 추측이 옳다면) 모스라는 자신의 유전 형질을 인간들에게 물려줬고, 그래서 모스라를 따르는 나방-인간 종족은 나타날 수 있었죠. 이제 모스라라는 단일 거대 개체는 없습니다. 하지만 크기가 작다고 해도, 변화하는 지구에서 나방-인간 종족은 계속 살아갑니다. 1998년 <갓질라>의 홍보 문구와 달리, 문제는 크기가 아니라 번성과 생존이죠.
메카 고지라는 많이 다릅니다. 고지라와 모스라는 생명체이고, 식생과 혼합 종족이라는 생명 현상을 남겼습니다. 메카 고지라는 기계이고 미소 기계들을 남깁니다. 메카 고지라는 방어 요새 도시가 되었고, 고지라와 싸우기 위해 방어 도시는 미소 기계들(나노 메탈들)을 이용해 계속 번성합니다. 기계가 번성한다는 표현은 다소 이상하나, <결전 기동 증식 도시>라는 제목처럼, 나노 메탈들은 계속 '증식'합니다. 음, 생명체는 번성하고 기계는 증식하는지 모르죠. 이렇게 <고지라: 괴수 행성>과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기괴한 식생, 후투아 종족, 나노 메탈들을 이용해 거대 단일 개체가 아니라 번성하고 증식하는 생명 현상과 기계 현상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게 바람직한 시도였을까요? 글쎄요, 평가들은 많이 엇갈립니다. 저는 이런 시도가 꽤나 참신하다고 생각합니다. 거대 괴수가 존재하는 이유는 생물 다양성 때문이고, <고지라: 괴수 행성>과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생물 다양성에 훨씬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 팬들은 이런 생물 다양성보다 파괴적인 단일 개체를 보기 원하겠죠. 거대 괴수들이 육중하게 부딪히지 않는 거대 괴수 이야기? 거대 괴수 팬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참신한 설정을 보여줬음에도,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거하게 욕을 먹었어요.
분명히 시도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방향을 좀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 1954년 <고지라>가 비명 같은 첫째 포효를 퍼뜨릴 때부터, 거대 괴수 팬들은 단일 거대 개체가 도시를 파괴하는 난동을 좋아했습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는 그런 것을 보여주어야 했죠.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를 관람하는 동안, 거대 괴수 팬들은 새로운 모스라가 고지라 어스나 첨단 메카 고지라와 한 판 붙기 바랐을 겁니다. 하지만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모스라가 아니라 후투아 종족을 보여줬습니다. 후투아 종족은 번성하는 생물 다양성을 상징할 수 있으나, 그런 상징이 거대 괴수 이야기에 어울릴까요? 거대 괴수 팬들이 번성과 생존 능력을 보고 싶어할까요? 거대 괴수 팬들이 이런 주제에 관심을 기울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거대 괴수 팬들은 번성과 생존보다 파괴와 싸움박질을 원합니다. 거대 괴수는 도시를 파괴하고 다른 괴수나 로봇과 신나게 싸움박질을 벌여야 합니다. 거대 괴수가 고층 건물을 부술 때, 관객들은 거대 괴수와 고층 건물의 크기를 비교하고 거대 괴수가 정말 거대하다고 느낄 수 있겠죠. 후투아 종족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후투아 종족이 신비롭다고 해도, 미아나와 마이나가 참신하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그저 괴수 형질을 이어받은 새로운 유사 인간 종족일 뿐입니다. 모스라 단일 개체와 후투아 종족은 다릅니다.
후투아 종족은 거대 괴수 팬들이 바라는 파괴와 싸움박질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미아나와 마이나가 많은 함의들을 담았다고 해도, 거대 괴수 팬들은 이런 유사 인간 종족보다 거대 괴수가 난동을 피우는 장면을 원할 겁니다. 미아나와 마이나를 비롯해 후투아 종족은 증식 도시를 두려워합니다. 모스라는 자신의 유전 형질을 후투아 종족에게 물려줬습니다. 하지만 증식 도시는 나노 메탈들을 이용해 거대 괴수들을 없애기 원합니다. 후투아 종족에게는 모스라의 유전 형질이 있고, 증식 도시는 후투아 종족이 거대 괴수라고 판단합니다.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에서 모스라와 메카 고지라는 직접 싸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증식 도시는 후투아 종족을 공격하고, 이건 모스라와 메카 고지라가 싸우는 과정을 비유할 수 있죠.
무엇보다 이건 생명 현상과 증식 기계가 부딪히는 과정을 비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시청자들은 빌사루도 종족과 대적하는 종족은 엑시프가 아니라 후투아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어요. 그런 것처럼, SF 세상에서 생명과 기계는 수많은 대립들을 낳았습니다. 언젠가 어떤 게시물(링크)이 이야기한 것처럼, 임신과 공학 중에서 무엇이 근본적인 창조일까요? 생명과 기계 중에서 뭐가 훨씬 위대할까요? 생명 공학과 기계 공학 중에서 무엇이 유리할까요? 인류는 생명 공학과 기계 공학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무엇이 진보적인 미래를 보장할까요?
[증식 기계와 새로운 생물종. 이건 기술적 특이점과 생체 트랜스휴머니즘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죠.]
소설 <아디아만티>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대처하기 위해 인류는 세 방법들을 선택합니다. 어떤 부류는 순수한 인간성을 지키기 원합니다. 어떤 부류는 기계화를 선택합니다. 어떤 부류는 생체 트랜스휴머니즘을 선택합니다.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비슷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재앙을 이기기 위해 인류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후투아처럼, 인류가 괴수 형질을 받아들인다면? 아니면 인류가 나노 메탈들을 받아들이고 증식 도시의 일부가 된다면? 아니, 인류는 괴수 형질과 나노 메탈을 모두 거부하고 순수한 인간성을 지켜야 할지 모르죠.
하지만 순수한 인간성이 정말 존재하나요? 미생물들이 무수한 생물 다양성으로 이어졌고, 그런 생물 다양성 속에서 인간들이 살아감에도, 순수한 인간성이 존재할까요?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는 그런 시도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소설 <아디아만티>가 순수한 인류, 기계화 인류, 생체 공학 인류를 보여준 것처럼,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는 순수, 우월, 조화 친화도를 보여줍니다. 우월 친화도는 인간이 기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죠. 조화 친화도는 인간이 새로운 유전 형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겠죠. 우월 친화도는 증식 도시와 나노 메탈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볼지 모릅니다. 조화 친화도는 후투아 종족을 호의적으로 바라볼지 모릅니다. 반면, 순수 친화도는 계속 순수한 인간성을 부르짖겠죠.
어쩌면 소설 <듄> 연대기에서 폴 아트레이드 역시 순수한 인간성을 부르짖을지 모릅니다. 이미 퀴사츠 헤더락이 되었고 순수한 인간성을 잃었음에도, 폴 아트레이드는 인간성을 지키고 싶어했죠. 반면, 레토 2세는 새로운 생물종을 인정했고 새로운 아라키스 생태계를 전망했습니다. 레토 2세는 인간들이 번성하기 원했으나, 레토 2세 본인은 인간성을 버렸어요. 게다가 새로운 생물종과 새로운 아라키스 생태계를 이끈 요소는 거대 괴수 모래벌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작고 작은 모래송어들이었습니다. 사실 작고 작은 모래송어들이 행성 생태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거대 괴수 모래벌레들 역시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모래송어들이 행성 생태계 공학을 시도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들 역시 존재할 수 있죠.
자연의 힘이 거대하다고 해도, 그런 거대함은 이런 작고 작은 생명체들에게서 비롯합니다. 모래송어들이 거대한 힘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작고 작은 생명체들이 무수하게 번성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할지 모릅니다. 진정한 생명 현상은 거대 괴수가 아니라 그런 번성과 생존일 겁니다. 후투아 종족은 그걸 상징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레토 2세가 모래송어들을 이용해 새로운 생물종을 전망한 것처럼, 후투아 종족은 그런 결과겠죠. 어쩌면 레토 2세는 증식 도시와 나노 메탈들을 부정할지 모르겠습니다. <듄> 연대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증식 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겠죠. 버틀레리안 지하드 때문에 그들은 기계 문명을 싫어합니다.
소설 <듄> 연대기에서 사람들은 절대 기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 공학과 마법(고도의 육체 훈련)을 연구하죠. 심지어 섹스조차 생명 공학이나 마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같은 컬쳐 문명이 <듄>을 바라본다면,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혀를 찰지 모릅니다. 컬쳐 문명은 기술적 특이점과 기계 공학으로 기술적인 유토피아를 이룩했습니다. 왜 인류가 기계를 거부해야 하나요? 기계와 함께 인류는 유토피아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다른 외계인들은 인류가 기술적 특이점에 너무 빠졌다고 경계하나, 그렇다고 해도 컬쳐 문명은 위대한 유토피아입니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듄>이 한심하다고 여기겠죠.
<듄>은 <플레바스를 생각하라>가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다고 여길 겁니다. 언젠가 기술적 특이점은 인간들을 지배할지 모릅니다. 기술적 특이점은 버틀레리안 지하드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로봇들은 반란을 일으킬 테고, 인간들은 기계들에게 굴종해야 할지 모릅니다. <듄>과 <플레바스를 생각하라>가 보여주는 것처럼, SF 세상에서 생명 공학과 기술적 특이점은 쉽게 대립합니다. <아디아만티>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명: 비욘드 어스>가 보여주는 것처럼, 생명 공학과 기술적 특이점은 오랜 논쟁 대상입니다. 어쩌면 게임 <KKND 2>가 보여주는 인류(순수한 인간성), 돌연변이(생체 트랜스휴머니즘), 기계(기술적 특이점) 갈등 역시 비슷할지 모릅니다.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에서 인류 생존자들과 후투아 종족과 증식 도시는 이런 것들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미생물들과 모래송어들처럼, 후투아 종족은 원대한 생물 다양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진보적인 생명 공학을 상징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레토 2세가 시범을 보인 것처럼, 크고 작은 생물 다양성은 새로운 생물종으로 이어질 수 있고 새로운 생존 능력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후투아 종족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비록 그들은 고지라를 이기지 못했고 고지라 생태계 속에서 간신히 목숨들을 부지하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멸망을 피할 수 있었죠. 누가 아나요? 어쩌면 오랜 시간이 흐른다면, 후투아 종족은 자신들의 형질을 퍼뜨리고 지구 생태계를 고지라에서 모스라로 바꿀지 모릅니다.
진화 역사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진화 역사는 계속 바뀔 수 있죠. 폴 무앗딥은 순수한 인간성을 지키기 원했으나, 변화하는 생물 다양성 속에서 순수한 인간성은 환상인지 모르죠. 레토 2세는 그걸 증명했습니다. 후투아 종족 역시 그걸 증명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정보가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후투아 종족 설정은 이 게시글이 추측하는 설정과 다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게시글이 추측하는 설정이 아주 틀리지 않다면, 레토 2세처럼, 후투아 종족은 새로운 생물종과 행성 생태계 공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지구 생태계의 미래는 나노 메탈 생태계인지 모릅니다. 증식 도시는 고지라와 고지라 생태계와 후투아와 모스라 형질을 없앨지 모릅니다. 나노 메탈들은 지구를 뒤덮고 그레이 구를 이룩할지 모릅니다.
[행성과 생태계와 기계 그리고 순수성. 인류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슨 경로로 나가야 할까요?]
현실 속에는 거대 괴수나 증식 도시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전 공학을 이용할 수 있고 언젠가 기술적 특이점을 통과할지 모릅니다. 언젠가 지구 생태계 역시 아주 크게 바뀔지 모릅니다. 고지라 식생, 후투아 종족, 증식 도시는 그런 주제들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후투아 종족이 살아남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바꾸고 새로운 생물종으로 거듭나야 할지 모릅니다. 유전 공학이 위험할까요? 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유전 공학은 위험할 겁니다.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유전 공학을 이용해 오직 이윤만을 축적할 겁니다. 그걸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고 파괴하겠죠. 다국적 식량 기업들은 가난한 농민들을 말살하겠죠.
자본주의가 휘두르는 유전 공학 앞에서 가난한 농민들은 농약들을 마시고 목숨들을 끊을지 모릅니다. 이건 현실이죠. 이건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현실이죠. 어떤 사람들은 과격한 환경 운동가들이 에코 파시스트라고 욕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엄청난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는 상황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농약들을 마시는 상황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유전 공학이 난리법석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고작 과격한 환경 운동가들이 폭력이 되나요? 고작 이게 '폭력'인가요? 설사 과격한 환경 운동가들이 자본주의를 폭력적으로 뒤엎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걸 폭력이라고 부르지 못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먼저 막대한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이죠. 진짜 폭력은 그런 것입니다.
유럽 백인들이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침략했을 때,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주 '폭력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폭력이라고 부르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그걸 폭력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가 그게 폭력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가 그런 폭력을 배제하는 순간, 저항은 사라집니다. 침략과 저항이 똑같은 폭력이 된다면, 아무도 저항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똑같이 단죄한다면, 저항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가해자를 먼저 비판해야 합니다. 가해자를 비판한 이후, 우리는 피해자가 휘두른 폭력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가해자를 제대로 비판하나요? 에코 파시스트를 욕하는 사람들이 정말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나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가해자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코 파시스트들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과격한 환경 운동가들은 폭력이 아닙니다. 에코 파시스트라는 용어는 망상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막대한 환경 오염에 저항하기 위해 조화 친화도가 거대 괴수 병기 제노 타이탄을 만든 것처럼, 과격한 환경 운동가들은 저항입니다. 저항은 파생적인 폭력이죠. 생물 다양성과 유전 공학을 논의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물론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에는 이런 논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와 <문명: 비욘드 어스>가 비슷한 구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거대 괴수 팬들은 후투아와 조화 친화도를 연결하고 자본주의 문제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대대적인 생태계 변화를 다룹니다. 21세기 초반 현실에서 대대적인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 문제를 절대 빼놓지 못합니다. 레이첼 카슨이 살충제를 비판했을 때, 영리 기업들은 두 눈을 까뒤집고 레이첼 카슨을 물어뜯었죠.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문제를 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제대로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 문제 없이 생태계 변화를 논의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하는지 모릅니다.
<레 미제라블>과 <올리버 트위스트>가 직접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들은 이런 소설들을 이용해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어요. 그런 사례들처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를 평가할 때, 거대 괴수 팬들은 자본주의 문제를 고민할 수 있겠죠. 자본주의 문제는 전반적인 주제가 되지 못하겠으나, 거대 괴수 팬들은 생태계 변화에 이런 문제를 덧붙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 팬들이 이런 문제를 고찰하고 싶어할까요? 자본주의 문제를 제외한다고 해도, 거대 괴수 팬들이 생태계 변화를 들여다보기 원할까요? 거대 괴수 팬들은 생태계 변화보다 도시 파괴와 육중한 싸움박질을 보고 싶어할 겁니다. 하지만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에는 그게 없습니다. 후투아 종족은 도시 파괴와 육중한 싸움박질로 이어지지 않죠.
무엇보다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생태계 변화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끌어내지 못합니다. 소설 <듄> 연대기를 읽거나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를 플레이한 이후, 사람들은 생태계 변화와 생체 트랜스휴머니즘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듄> 연대기와 <문명: 비욘드 어스>가 일관적으로 생태계 변화와 생체 트랜스휴머니즘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모래벌레와 제노 타이탄이 나온다고 해도, 거대 괴수들은 부차적이죠. 모래벌레와 제노 타이탄은 <듄> 연대기와 <문명: 비욘드 어스>를 대변할 수 있는 거대 괴수들이나, 두 창작물에서 거대 괴수는 부차적인 요소입니다.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번성하는 생명 현상과 생존 능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듄> 연대기와 <문명: 비욘드 어스>를 따랐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는 부차적인 요소가 되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건 '고지라' 이야기입니다. 이건 다른 무엇이 아닌 고지라 이야기입니다. 고지라 이야기에서 거대 괴수가 부차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겠어요? 애니메이션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낄 겁니다. 도시 파괴와 육중한 싸움박질이 없는 고지라 이야기? 누가 그걸 좋아하겠어요?
[거대 괴수 팬들은 생태계 변화보다 육중한 싸움박질을 보고 싶어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주제를 좋아할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는 생명 현상입니다. 거대 괴수는 생태계 변화에 속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거대 괴수보다 생태계 변화를 훨씬 이야기하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어느 정도 재미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거대 괴수 팬들에게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거대 괴수를 이용한 말장난이 되겠죠. 설정은 참신하나, 참신한 설정은 무조건 좋은 사이언스 픽션으로 이어지지 않아요. 게다가 애니메이션 홍보를 비롯해 각종 완구 판매와 떡밥 흘리기는…. 만약 배급사가 주제를 제대로 홍보했다면, <고지라: 결전 기동 증식 도시>는 욕을 덜 먹었을지 모릅니다. 설정 그 자체는 어느 정도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주제와 설정과 홍보와 배급은 서로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설정, 주제, 사상, 홍보, 판매, 배급. 이런 것들은 심하게 엇갈렸고 물의들을 일으켰고, 좋은 설정은 좋은 평가로 이어지지 못했어요. 어쩌면 나중에 거대 괴수 팬들은 이걸 재평가할지 모릅니다. 후투아 종족과 증식 도시는 재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설정이에요. 어쩌면 기획이나 배급, 홍보에서 이건 한계를 드러냈는지 모릅니다. 고지라가 중요하지 않은 고지라 이야기. 거대 괴수보다 생태계 변화가 중요한 고지라 이야기. 번성하는 생명력을 떠드는 고지라 이야기.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토호는 마음을 크게 먹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토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는…. 아이고.
프리퀄 소설 <괴수 묵시록>에는 모스라가 남아메리카 열대 우림을 지키는 것 같은 묘사가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거대 괴수들이 인류 문명을 짓밟을 때, 유일하게 남아메리카 열대 우림은 피해를 받지 않았어요. 하지만 다들 그걸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죠. 그러는 동안 어떤 남자가 아마존을 표류했을 때, 그 남자는 신비로운 소녀를 만납니다. 소녀는 기이한 가루들과 실크들로 남자를 치료하고 밀림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소녀는 인류 문명이 종말을 맞이했고 숲에서 인류가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자는 그 제안을 거절했으나, 나중에 뭔가를 깨닫습니다.
남아메리카 밀림이 안전한 이유는 우호적인 거대 괴수가 있기 때문일지 모르죠. 거기에서 인류는 생태계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비록 인류 문명은 사라지겠으나, 인류 문명의 종말은 인류의 종말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폭력적인 자본주의 문명은 사라져야 할 겁니다. 우호적인 거대 괴수와 함께 새로운 생태계에서 인류는 새롭게 살아갈 수 있어요. 우호적인 거대 괴수, 생태계 변화, 제3세계 자연, 소녀(여자), 자본주의 문명 종말. 행성 공학부터 에코 페미니즘까지, 이런 설정은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죠. 하지만 토호는 이런 매력적인 설정을 날려먹었습니다. 아아, 이건…. 다이아몬드 원석을 돌멩이라고 여기고 버리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