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별을 먹는 자>와 새로운 생태계, 새로운 문명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별을 먹는 자>와 새로운 생태계, 새로운 문명

OneTiger 2018. 11. 10. 10:03

※ 이 게시글에는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의 치명적인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후투아 종족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생태계에 적응하는 에코 페미니즘을 상징할지 모릅니다.]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천은 인류세라는 용어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인류가 지구 환경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파울 크뤼천은 홀로세의 특정 부분이 인류세라고 규정했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인류세라는 개념에 동의하나, 그들은 어느 순간이 인류세의 시작인지 아직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파울 크뤼천은 산업 혁명이 인류세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실 19세기와 20세기와 21세기 초반에 가장 지배적인 경제 현상은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환경 오염들을 일으켰고, 따라서 산업 혁명은 인류세의 시작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산업 혁명이 인류세의 시작이 된다면, 인류세라는 용어는 바뀌어야 할 겁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아프리카와 동남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람들은 수탈을 당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가난한 임금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했습니다. 19세기에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오직 일부 소수 사람들만 혜택을 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세라는 용어는 성립하지 못합니다. 그건 수탈을 당한 원주민들을 차별하는 인종 차별적인 용어죠. 파울 크뤼천은 인종 차별을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결과적으로 인류세는 인종 차별이 됩니다.



따라서 인류세라는 용어는 '자본세'가 되어야 할 겁니다. 한편으로 어떤 과학자들은 1954년이 자본세의 시작이라고 간주합니다. 전략 병기 실험은 인공 방사성 탄소를 늘렸고, 1954년은 전략 병기 실험을 대표할 수 있는 연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1954년이 자본세의 시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아직 공식 학설이 되지 못했으나, 거대 괴수 팬들에게 1954년은 꽤나 의미가 있는 연도일 겁니다. 영화 <고지라>는 1954년 영화입니다. 게다가 <고지라>는 전략 병기 실험과 핵 공포를 상징할 수 있죠. 핵 공포를 상징하는 영화로서 <고지라>는 가장 유명할 겁니다. <고지라>는 자본세와 함께 태어난 영화이고 동시에 자본세를 가장 잘 상징할 수 있는 영화일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지라>는 그저 본격적인 슈트 액션 괴수 영화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지라>는 자본세와 함께 나타났고 자본세를 상징하는 영화가 됩니다. 토호와 거대 괴수 팬들이 이런 엄청난 무게와 상징을 고려한 적이 있을까요? 사실 거대 괴수 팬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은 <고지라>가 환경 오염을 묘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략 병기 실험 때문에 고지라는 일본에 상륙했고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자본세를 규정하는 것처럼, 이건 환경 오염을 가리킬 수 있죠. 숱한 <고지라> 시리즈가 나오는 동안, <고지라> 시리즈는 이런 상징을 잊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런 상징을 잊지 않았다고 해도, <고지라> 시리즈는 이걸 깊게 고민한 적이 없습니다. 최근 2014년 <고지라>와 <신 고지라> 같은 영화들 역시 이걸 깊게 고민하지 않았죠. 2014년 <고지라>는 압도적인 자연의 힘을 보여줬고 그건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이 영화에서 누군가가 비극적인 자본세를 읽는다면, 그건 지나친 해석이 아니겠죠.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는 인류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문제 제기만이 있고 대안이 없죠. 2014년 <고지라>는 어떻게 인류 문명이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말하지 않아요.


<신 고지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신 고지라>는 대안을 마련하기보다 일본 관료 제도를 집중적으로 묘사합니다. <신 고지라>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은 어떻게 일본 관료 제도가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일본 관료 제도에 깊이 빠져듭니다. 이런 방법은 관료 제도를 관객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을지 모릅니다. <신 고지라>는 관료 제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나, 관료 제도 이외에 다른 것들은 제대로 나오지 않아요. 결국 최선은 관료 제도죠. 여기에는 민중들이 없습니다. 정부는 모든 것을 처리하고 민중들은 공기와 같습니다. 이 영화 속에는 오직 관료, 관료, 관료, 그리고 관료뿐입니다.



2014년 <고지라>와 <신 고지라> 이외에 다른 <고지라> 시리즈들 역시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고지라> 시리즈는 60년에 이르는 역사를 자랑하고 숱한 영화들을 내놓았으나, 대안 사회를 보여주는 영화들은 거의 없어요. <고지라> 시리즈는 어떻게 인류 문명이 바뀔 수 있는지 말하지 않아요. <고지라> 시리즈는 그저 자본주의 문명이 막대한 환경 오염들을 일으켰다고 말할 뿐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대안 역시 있어야 할 겁니다. <고지라> 시리즈는 그저 문제를 제기할 뿐이고 대안을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60년에 이르렀음에도, <고지라> 시리즈는 대안을 말하지 않아요.


이건 <고지라> 시리즈에게 대안을 이야기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작물이 문제를 묘사한다고 해도, 창작물에게는 무조건 대안을 이야기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겠죠. 비단 창작물만 아니라 논설 역시 대안 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논설자가 대안 없이 어떤 문제를 제기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대안이 없다고 비판한다면, 그건 우물에 독을 뿌리는 오류가 되겠죠.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거기에 대안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문제 제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고지라> 시리즈는 60년에 이르렀습니다. <고지라>는 가장 유명하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괴수 시리즈입니다. 이런 시리즈에 대안 사회가 없다면, 그건 다소 아쉬운 상황일 겁니다.



다행히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그런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다른 <고지라> 시리즈와 달리, <괴수 행성> 시리즈는 고지라가 이미 지구를 장악했다고 설정합니다. 지구에서 고지라는 걸어다니는 생태계가 되었고, 지구 생태계는 고지라를 모방합니다. 인류는 지구를 되찾고 싶어하나, 고지라를 쓰러뜨리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류 문명은 과거, 거대 괴수들이 나타나기 이전의 자본주의로 절대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프리퀄 소설 <괴수 묵시록>에서 어떤 원주민 소녀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문명은 종말을 고했고, 인류 생존자들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릅니다.


지구에서 고지라가 장악하지 못한 두 요소는 증식 도시와 후투아 종족입니다. 증식 도시는 메카 고지라에게 기반했고 나노 메탈들을 이용해 고지라(를 비롯해 거대 괴수들)을 적대합니다. 나노 메탈들은 고지라를 공격할 수 있으나, 이게 전세계로 퍼진다면, 나노 메탈들은 그레이 구가 될 수 있겠죠. 인류 생존자들은 그레이 구, 기계화 지구를 두려워해요. 후투아 종족은 모스라의 유전 형질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종족이고 고지라 생태계 속에서 목숨들을 연명합니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그들의 문명은 별로 찬란하지 않습니다. 후투아 종족은 그저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불과하죠. 하지만 분명히 고지라 생태계 속에서 그들은 살아가는 중입니다.



인류 생존자들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인류가 계속 우주선 방랑 생활을 이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인류가 그레이 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인류가 파괴적인 기도라를 떠받들어야 할까요? 훨씬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방법이 있을까요? <괴수 행성> 시리즈는 후투아 종족이 대안 사회라고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모스라>와 <고지라> 시리즈가 그런 것처럼,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 모스라와 후투아 종족은 생태, 복원, 치유를 상징하고, 인류는 그런 경로로 나가야 할지 모릅니다. 후투아 종족은 제3세계 자연, 소녀(여자), 복원을 가리킬 수 있고, 그건 파괴적인 자본주의 문명을 대신하고 생태계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겠죠.


이런 관점에서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 진짜 주인공 괴수는 고지라가 아니라 모스라인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보다 인류 문명 경로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괴수 행성> 시리즈는 후투아 종족 같은 대안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죠. 물론 자본주의 문명과 후투아 종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꽤나 얄팍합니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인류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낭만적으로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르네 바르자벨이 <대재난>을 쓴 것처럼, 이건 꽤나 안일한 주장이죠. 우리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낭만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서는 안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괴수 행성> 시리즈는 대안 사회를 보여줬습니다. 다른 <고지라> 시리즈와 달리, <괴수 행성> 시리즈는 뚜렷한 대안을 제시했죠. <괴수 행성> 시리즈 덕분에 마침내 <고지라> 시리즈는 문제 제기를 넘어 대안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그 대안 사회가 낭만적이고 피상적이라고 해도, 이건 어느 정도 커다란 수확일지 모릅니다. 뭐, 솔직히 대중 문화에서 이런 낭만적이고 피상적인 시선들은 적지 않죠. 여전히 수많은 시선들은 르네 바르자벨이 쓴 <대재난>과 비슷합니다. <괴수 행성> 시리즈가 대안 사회를 보여준다고 해도, 여기에는 논리적이고 근본적인 성찰이 없죠. 제3세계 자연, 소녀(여자), 복원은 에코 페미니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별을 먹는 자>가 에코 페미니즘을 진지하게 상정했을까요.


그런 것을 찾고 싶다면, 사람들은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 같은 소설을 읽어야 할 겁니다. 에코 페미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별을 먹는 자>는 감히 <홍수>에게 들이대지 못하겠죠. 그건 상당히 아쉬운 상황이나, 후투아 종족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어쩌면 나중에 <고지라> 시리즈는 이런 대안 사회를 좀 더 탐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괴수 행성>은 독보적인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건 많은 호평들을 받을 수 있겠죠. 문제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동안 <괴수 행성> 시리즈는 괴수 싸움에 소홀했습니다. 사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괴수 싸움에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거대 괴수 팬들은 <괴수 행성> 시리즈에 신나게 욕설들을 퍼붓는 중이죠.



사실 저는 아직 <별을 먹는 자>를 시청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몇몇 내용 누설을 들었을 뿐입니다. 아직 넷플릭스가 <별을 먹는 자>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몇몇 내용 누설을 이용해 저는 <괴수 행성> 시리즈를 평가했습니다. 언제 넷플릭스가 <별을 먹는 자>를 보여줄지 아무도 모르겠죠. 만약 나중에 제가 직접 <별을 먹는 자>를 관람한다면, 나중에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호평과는 달리, <별을 먹는 자>는 완전히 엉망진창일지 모르죠. <별을 먹는 자>는 <대재난>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피상적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괴수 행성> 시리즈가 제시한 설정, 특히, 고지라 생태계와 후투아 종족은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이 거대 괴수보다 생태적인 상상력을 좋아한다면, 사람들은 <괴수 행성> 시리즈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지라 이야기이기 때문에 <괴수 행성> 시리즈는 거대 괴수를 부차적으로 밀어내지 말아야 했을 겁니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너무 무리했는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좀 더 조심스럽게, 거대 괴수 이야기에 알맞은 내용을 시도했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이건 고지라 이야기입니다. 고지라 이야기에서 거대 괴수가 부차적이라면, 거대 괴수 팬들은 그걸 용서하지 않겠죠.



하지만 만약 거대 괴수 싸움박질이 많이 나왔다면, 대안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약해졌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거대 괴수 싸움박질에 관심을 기울이고 대안 사회 따위를 고려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여전히 많은 거대 괴수 팬들은 2014년 <고지라>와 <콩: 해골섬>에서 등장인물들이 그저 병풍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2014년 <고지라>는 핵 발전이 위험하다고 경고했고 <콩: 해골섬>은 베트남 침략과 파생적인 폭력을 이야기했으나, 많은 거대 괴수 팬들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거대 괴수 싸움박질만을 보기 원할 뿐입니다. <콩: 해골섬>이 거대한 자연과 베트남 침략과 방어적인 폭력을 상징한다고 해도, 거대 괴수 팬들은 그걸 논의하지 않아요.


어쩌면 이건 거대 괴수 장르를 가로막는 요인일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 장르가 오직 거대한 싸움박질에만 치중해야 할까요? 어떤 이야기는 싸움박질에 치중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는 다른 주제에 치중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콩: 해골섬>처럼, 거대 괴수가 의미심장한 상징을 담았다고 해도, 많은 거대 괴수 팬들은 오직 싸움박질만 떠들 뿐이죠. 그래서 <괴수 행성> 시리즈는 훨씬 많은 욕설들을 들어먹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괴수 행성> 시리즈에는 그것보다 훨씬 좋은 가치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모스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고지라 및 기도라와 싸웠다면, 그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죠. 프리퀄 소설 <프로젝트 메카 고지라>에서 모스라는 정말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비록 그건 비늘 가루들을 이용한 방어적인 전투였으나, 모스라는 거의 대등하게 고지라와 맞섰습니다. 프리퀄 소설에서 모스라는 거의 유일하게 고지라와 대등하게 맞섰죠. 모스라 팬들은 이 소설에게 감탄할지 모릅니다. 다른 <고지라> 시리즈 역시 모스라를 많이 보여줬으나, 이 소설에서 모스라는 정말 수호 천사가 되었습니다. 고지라가 다른 거대 괴수들을 휩쓰는 상황에서 모스라는 유일하게 남아메리카 열대 우림을 지킬 수 있었죠. 만약 <별을 먹는 자>가 이런 전투를 보여줬다면, 거대 괴수 팬들은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전투가 나온다고 해도, 모스라가 본격적으로 고지라 및 기도라와 맞섰다고 해도, 결국 거대 괴수 팬들은 싸움박질에 관심을 기울이겠죠. 모스라 및 후투아 종족이 보여주는 새로운 생태계와 새로운 문명은 관심을 끌지 못하겠죠. 어떤 거대 괴수 팬들은 후투아 종족이 그저 병풍에 불과하다고 간주하겠죠.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우리는 거대 괴수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도시 파괴와 육중한 싸움박질이 좋다면, 구태여 거대 괴수 이야기를 고집할 이유는 없겠죠. 거대 로봇들과 보행 전차들 역시 얼마든지 도시 파괴와 육중한 싸움박질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는 '놀라운 생명체'이고, 따라서 우리는 생명 현상과 생물 다양성과 자연 생태계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