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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얼마나 거대 괴수는 거대해야 하는가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얼마나 거대 괴수는 거대해야 하는가

OneTiger 2019. 2. 9. 21:00

[선사 시대 상어는 정말 거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문자 그대로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언더 워터>와 <메갈로돈>은 모두 상어 이야기입니다. 양쪽 모두 상어가 사람을 공격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소재, 분위기, 연출, 액션은 서로 대조적입니다. <언더 워터>는 상어가 고립된 서퍼를 공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언더 워터>는 자주 상어를 보여주지 않고, 과장된 액션을 자제하고, 긴장과 공포를 강조합니다. 고립과 고독과 공포와 싸우는 주연 배우의 연기는 드라마를 이끕니다. 이야기 규모는 별로 크지 않으나, 섬찟한 긴장은 관객들을 압도할 겁니다. 반면, 거대한 상어 메갈로돈이 나오는 영화로서 <메갈로돈>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메갈로돈>은 엄청난 제작 비용을 쏟아부었고 당연히 폭넓은 관객 계층을 노립니다. <메갈로돈>은 거대한 상어를 강조하느라 애쓰고, 과장된 액션들을 남발하고, 신나고 통쾌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제이슨 스타뎀이 강렬하게 눈빛을 쏜다고 해도, 관객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관객들은 당장 제이슨 스타뎀이 메갈로돈과 싸우기 바라겠죠. 소재, 분위기, 연출, 액션에서 <언더 워터>는 영화 <죠스>에 가까우나, <메갈로돈>은 <죠스>와 거리가 멉니다.

 

 

<메갈로돈>은 <킹콩>과 가깝고 어쩌면 <고지라>와 어느 정도 가까울지 모릅니다. 고지라와 달리, 메갈로돈은 열선을 뿜거나 어뢰를 씹어먹지 못합니다. 고지라와 달리, 한때 메갈로돈은 실존했고 지구 바다를 돌아다녔습니다. 음, 어쩌면 여전히 메갈로돈은 살아있을지 모르고, 고지라보다 메갈로돈은 훨씬 현실적인 소재입니다. 적어도 자연사 박물관에서 사람들은 메갈로돈 화석을 구경할 수 있죠. 하지만 규모를 강조하기 때문에 <메갈로돈>은 <죠스>보다 <고지라>와 가깝습니다. <고지라>처럼, <메갈로돈>은 아주 거대한 야생 동물이 사람들을 압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메갈로돈>이 <고지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메갈로돈>은 <킹콩>과 어깨를 나란히 걸칠 수 있을 겁니다. 양쪽 모두 10m를 넘어가는 거대 야수가 인간들을 공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킹콩>처럼 <메갈로돈>은 거대 괴수 이야기가 될 수 있겠죠. 관객들은 아무렇지 않게 <메갈로돈>이 거대 괴수 이야기라고 생각할 겁니다. 상어가 나온다고 해도, <언더 워터>는 거대 괴수 이야기가 되지 못할 겁니다. <언더 워터>에 나오는 상어와 <메갈로돈>에 나오는 상어는 서로 다릅니다. 메갈로돈에게 몇 m짜리 상어는 고작 어린 아이에 불과하겠죠. <죠스>는 꽤나 커다란 백상아리를 보여주나, 이런 백상아리 역시 영화 속의 메갈로돈에게 함부로 까불지 못하겠죠.

 

 

어떤 관객들은 영화가 메갈로돈을 너무 과장했다고 지적할 겁니다. 블록버스터라는 명성을 뽐내기 위해 <메갈로돈>은 고대 상어를 너무 과장한 것 같습니다. 과장된 크기처럼, <메갈로돈>은 모든 연출을 과장합니다. 여기에 진지함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언더 워터>와 달리, <메갈로돈>은 과장된 액션들을 늘어놓습니다. <언더 워터>에서 주인공 서퍼는 액션 영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공 서퍼는 힘겹게 탈출하는 생존자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서퍼는 정말 안쓰럽고 처절하게 고생합니다.

 

반면, <메갈로돈>에서 주인공 잠수부는 액션 영웅입니다. 관객들은 제이슨 스타뎀이 안쓰럽고 처절하게 고생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을 테고, <메갈로돈>은 그런 예상을 빗나가지 않습니다. 두 상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 영화는 서로 다르게 소재를 연출합니다. 이건 작은 상어가 과장된 액션에 어울리지 않거나 무조건 메갈로돈이 과장된 액션으로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2014년 <고지라>는 100m짜리 거대 괴수를 보여주나, 과장된 액션들은 거의 없습니다. 2014년 <고지라>는 블록버스터 영화이나, 놀랍게도 이 영화는 과장된 액션들을 자제합니다.

 

 

심지어 많은 관객들은 <고지라>에 싸움박질이 너무 부족하다고 불평했죠. 관객들은 공항 장면이 너무 심한 절단 신공(?)이라고 불평했습니다. 거대 괴수가 무조건 과장된 액션으로 이어질 이유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거대한 상어를 연출하기 위해 <메갈로돈>은 막대한 제작 비용을 쏟았습니다. 막대한 수익을 위해 <메갈로돈>은 진중한 드라마보다 과장된 액션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백상아리는 이런 과장된 액션에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일반적인 백상아리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6m짜리 백상아리는 탐사선을 덮치고 뒤집고 부수지 못하죠.

 

거대 괴수가 무조건 과장된 액션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양쪽에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습니다. 영화 <죠스>에서 경찰 서장이 "Gonna need a bigger boat."라고 말한 것처럼, 탐사선이 훨씬 컸다면, 백상아리는 배를 부수지 못했을 겁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어떤 꼬마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이 boat가 아니라 ship을 탔다면, 6m짜리 백상아리는 ship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메갈로돈은 ship을 공격할 수 있죠. <언더 워터>와 <메갈로돈>은 해양 육식동물이 인간을 공격한다고 똑같이 이야기하나, <메갈로돈>과 달리, <언더 워터>는 거대 괴수 이야기가 아니겠죠.

 

 

[(어른) 메갈로돈과 (아기) 모스라는 똑같이 거대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거대 괴수가 거대해야 할까요?]

 

 

이렇게 괴수를 논의할 때, 사람들은 크기를 중시합니다. 크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괴수 이야기에서 크기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문제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괴수가 커야 할까요? 메갈로돈과 모스라는 모두 괴수입니다. 하지만 크기는 서로 대조적입니다. 어떻게 15m짜리 메갈로돈과 60m짜리 모스라가 똑같이 괴수가 될 수 있죠? 영문 위키피디아는 <메갈로돈>이 괴수 이야기(카이주 필름)라고 말합니다. 위키피디아에게는 어느 정도 신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위키피디아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위키피디아는 <메갈로돈>이 괴수 이야기라고 규정했습니다.

 

만약 <메갈로돈>이 괴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허먼 멜빌이 쓴 <백경>이나 2015년 영화 <하트 오브 더 씨> 역시 괴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요? <메갈로돈>과 <하트 오브 더 씨>는 모두 거대한 바다 야수(메갈로돈과 향유 고래)가 선박을 부수고 사람들을 습격한다고 말합니다. 메갈로돈이 괴수가 된다면, 향유 고래 역시 괴수가 될 수 있을까요? 영화 <메갈로돈>은 소설 <메그>에 기반합니다. 스티브 앨튼이 쓴 <메그>는 문학이고, 이건 괴수 문학입니다. <메그>가 괴수 문학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잃어버린 세계>와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쥬라기 공원>과 로버트 소여가 쓴 <멸종> 역시 괴수 문학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메그>와 <잃어버린 세계>와 <쥬라기 공원>과 <멸종>은 모두 선사 시대의 거대한 야수들이 사람들을 습격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괴수 문학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문 위키피디아는 <잃어버린 세계>와 <쥬라기 공원>과 <멸종>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메그>와 <쥬라기 공원>이 똑같이 괴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에도, 영문 위키피디아의 카이주 항목에는 <쥬라기 공원>이 없습니다. 영화 목록과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을 아주 길게 늘어놓음에도, 영문 위키피디아는 괴수 문학 목록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이게 제대로 된 설명일까요?

 

정말 영화 <메갈로돈>은 괴수 이야기가 되고, 소설 <메그>는 괴수 이야기가 되지 못할까요? 왜 영화가 괴수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괴수 이야기가 되지 못할까요? 왜 우리가 괴수 이야기를 괴수 이야기라고 부를까요? 1933년 영화 <킹콩>은 거대 괴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1954년 <고지라>가 흥행하기 전까지, <킹콩>은 본격적인 괴수 이야기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고지라> 덕분에 사람들은 괴수 장르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킹콩>은 '후천적으로' 괴수 장르에 들어갔습니다. 괴수 이야기는 창작물(픽션)입니다. 창작물을 분류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까요?

 

 

문학 비평가들은 "예술이 예술인 이유는 예술가가 그게 예술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술가가 그게 예술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예술은 예술이 됩니다. 하지만 누가 그 예술가를 예술가라고 인정했을까요? 예술가가 예술을 인정하기 전에 누가 예술가를 예술가라고 인정했을까요? 또 다른 예술가? 누가 그 예술가(또 다른 예술가)를 예술가라고 인정했을까요? 예술 평론가? 왜 예술 평론가는 예술 평론가가 되었나요? 예술 없이 예술 평론가가 나타날 수 있나요?

 

"이건 예술이야. 그리고 나는 예술 평론가야." 이 세상에 예술 평론가가 나타나는 순간, 이렇게 예술 평론가가 외쳤을까요? 무슨 근거로 예술 평론가는 예술품이 예술이 된다고 규정했을까요? 누가 예술 평론가의 권한을 인정했죠? 부족장이나 제사장? 수많은 민중들? 예술과 예술가와 예술 평론가 중에서 뭐가 우선일까요? 뭐가 가장 먼저 나타났을까요? 예술이 예술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예술 평론가가 나타났을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예술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걸 평가하기 위해 예술 평론가가 나타났을까요? 누군가가 예술품을 만들었다면, 누가 그게 예술품인지 규정할 수 있나요?

 

 

이렇게 예술과 문학과 장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문학이 있기 때문에 문학 평론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평론가는 문학을 평론해야 하고, 따라서 문학 평론가보다 문학은 우선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최초에 누가 문학을 문학이라고 규정했을까요? 정말 문학 평론가보다 문학이 우선할까요? 브라이언 올디스처럼 SF 평론가들은 메리 셸리가 최초의 SF 작가라고 말합니다. 축하해요, 메리 셸리. 유구한 인류 문명에서 당신은 최초의 SF 작가입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우왕, 나는 SF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최초의 SF 작가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두 눈을 감을 때까지 메리 셸리는 본격적인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습니다. 메리 셸리는 19세기 사람이고, 19세기에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용어는 있었으나, 19세기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본격적으로 정립하지 않았습니다. 허버트 웰즈와 쥘 베른은 대표적인 19세기 SF 작가입니다. 하지만 허버트 웰즈와 쥘 베른은 사이언티픽 로망스 작가라고 불립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20세기 용어입니다. 브라이언 올디스는 20세기 사람입니다. 심지어 휴고 건즈백조차 'scientifiction'이라는 용어를 말했죠. SF 평론가들이 SF 장르를 규정했기 때문에 메리 셸리는 '후천적으로' 최초의 SF 작가가 되었습니다. 후천적이라는 단어와 최초라는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으나, 모순적이게도 메리 셸리는 후천적으로 최초의 SF 작가가 되었습니다. 자, 정말 문학 평론가보다 문학이 우선할까요?

 

 

[향유 고래가 거대 괴수가 될 수 있나요? 누가 향유 고래를 거대 괴수 소속에서 내쫓을 수 있을까요?]

 

 

이건 우리가 함부로 예술과 문학과 장르를 규정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예술과 문학과 장르가 고정적이지 않고 선천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술과 문학과 장르를 후천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고, 괴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괴수 이야기는 사회적인 파생물입니다. 그 자체로서 메갈로돈은 거대 괴수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화 제작자들과 관객들과 평론가들이 논의했고 합의했고 토론했기 때문에 메갈로돈은 거대 괴수가 됩니다. 선사 시대 바다에서 메갈로돈들이 헤엄쳤을 때, 고대 지구에서 거대 괴수라는 개념은 없었습니다.

 

인류 사회가 나타난 이후, 19세기에 SF 장르가 나타난 이후, 특수 촬영 영화들이 나타난 이후, 사람들이 메갈로돈을 거대 괴수라고 합의했기 때문에, 메갈로돈은 거대 괴수가 됩니다. 거대 괴수는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을 초월하는 선천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건 인위적인 개념이죠. 고지라는 괴수왕입니다. 1954년 영화 <고지라>가 나타난 이후, 카이주라는 개념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지라가 괴수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고지라가 괴수왕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고지라는 괴수왕입니다. 고지라는 허구입니다. 이 세상에 괴수왕이라는 실질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왕관을 씌우지 않는다면, 고지라는 괴수왕이 되지 못하겠죠.

 

 

사람들이 <고지라>를 인상적으로 관람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고지라>가 대단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고지라는 괴수왕이 될 수 있었죠. 혼다 이시로가 <고지라>를 촬영했다고 해도, 토호가 필름을 잃어버리고 영원히 <고지라>를 개봉하지 못했다면, 아무도 고지라가 괴수왕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관객들과 평론가들이 영화를 관람했기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과 관객들과 평론가들이 맺은 사회적인 합의 속에서 고지라는 괴수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괴수 이야기를 규정할 때, 사람들은 논의하고 합의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이런 논의와 합의와 토론 속에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괴수 이야기는 만들어집니다.

 

어쩌면 200년이나 300년 이후, 괴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장르가 될지 모릅니다. 300년 이후, 괴수 이야기는 훨씬 폭넓은 장르가 될지 모릅니다. 두 눈을 감기 전까지, 메리 셸리는 자신이 SF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SF 평론가들이 이런 작가에게, 자신이 SF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작가에게 SF 작가라는 칭호를 '후천적으로' 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심판의 날에 메리 셸리가 살아난다면, 메리 셸리는 SF 평론가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발할지 모릅니다. "아놔, 이게 뭐야! 나는 SF 작가 따위가 되고 싶지 않아!" 예술과 문학과 장르는 인위적이고, 괴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괴수 이야기는 그냥 나타나지 않습니다. 괴수 이야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괴수 이야기는 어떤 고정적이고 선천적이고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괴수 이야기는 사회적인 파생물이고, 사회적인 구조와 관계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괴수의 크기 역시 사회적인 파생물입니다. 얼마나 거대 괴수가 커야 할까요? 크기가 몇 m를 넘을 때, 그 동물이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을까요? 5m? 10m? 50m? 100m? 괴수의 크기가 사회적인 파생물이라면,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거대 괴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규정하고 싶다면, 사람들은 토론하고 합의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괴수의 크기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구태여 거대 괴수 따위를 합의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거대 괴수 팬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거대 괴수의 크기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핵 발전소나 기후 변화나 미세 쓰레기 문제와 다릅니다. 솔직히 사람들은 핵 발전소나 기후 변화나 미세 쓰레기 문제조차 제대로 논의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평등하게 핵 발전소 문제를 논의할 수 있나요? 경찰들이 시골 할머니들을 대표하는 주민을 감옥에 집어넣는 사회에서 사회적인 합의가 존재할 수 있나요? 가난한 미혼모가 아이들과 함께 자살하는 사회에서 사회적인 합의가 존재할 수 있나요? 먹고 살기 위해 여자들이 사창가를 들락거려야 하는 사회에서 사회적인 합의가 존재할 수 있나요? 이런 사회에 합의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건 웃기지 않은 헛소리일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합의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거대 괴수의 크기를 규정하느라 시간을 소비하지 않겠죠. 세상이 훨씬 평등해진다고 해도, 거대 괴수의 크기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고, 메갈로돈과 모스라는 함께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언더 워터>에 나오는 상어와 2007년 영화 <로그>에 나오는 바다 악어가 괴수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이게 틀린 주장일까요? 누가 이게 틀렸다고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소설 <유년기의 끝>처럼, 언젠가 인류가 정신 공동체가 된다면, 글쎄요, 그때 다들 거대 괴수가 몇 m를 넘어야 하는지 합의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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