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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진화 시뮬레이션 <니치>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진화 시뮬레이션 <니치>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

OneTiger 2019. 3. 1. 23:00

[진화 시뮬레이션 <니치>는 다양한 유전 형질들을 조합하고 기이한 생물 다양성을 늘립니다.]



비디오 게임 <니치>는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쉘터 2>처럼, 어떤 게임은 야생 동물이 되고 광대한 자연을 떠돕니다. <어스텅>처럼, 어떤 게임은 먹이 그물망을 조절합니다. <벤처 아크틱>처럼, 어떤 게임은 아예 기후와 지형을 조절합니다. <다마고치>처럼, 어떤 게임은 단순하게 생명체 하나를 키웁니다. <크리쳐>처럼, 어떤 게임은 좀 더 복잡하게 인공 생명체를 키웁니다. 1997년 <에볼루션>처럼, 어떤 게임은 생명체들이 진화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진화는 생물 다양성을 늘리는 동력원이고, 그래서 여러 비디오 게임들은 진화 과정에 주목합니다. <에볼루션>을 비롯해 <심라이프>, <임파서블 크리쳐스>, <스포어> 같은 게임들은 유전 형질들을 다양하게 결합하고 새로운 생명체들을 만듭니다. 레고 블록들을 조립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유전 형질들을 조립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 있죠. <니치> 역시 진화 과정에 주목합니다. <니치>를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어떤 동물을 조종합니다. 동물은 야생을 떠돌고 먹이를 먹거나 다른 동물과 만나거나 짝궁을 찾습니다.



두 짝궁이 교미한 이후, 당연히 암컷은 후손을 낳습니다. 두 짝궁은 후손에게 유전 형질들을 물려줍니다. 여기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유전 형질들을 조합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유전 형질들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야 합니다. 그렇게 후손은 태어나고, 후손은 성장하고 또 다시 교미하고 또 다시 후손을 낳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시 유전 형질들을 조합할 수 있죠.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거나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유전 형질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흠, 이건 자연 선택이 아닙니다. 이건 게임 플레이어 선택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의 의지가 되고, 진화 과정에 개입하고, 생물 다양성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생명체들로 자연 환경을 채울 수 있죠. 여러 난관들이 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마음대로 유전 형질들을 조합하지 못합니다. 생명체는 자연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생존하기 위한 유전 형질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생명체들을 조절할 수 있으나, 신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생명체들을 채우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시도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이 자연을 채우고 번성할 때,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겁니다.



<니치>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는 진화 이론을 새롭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게임을 정말 재미있게 플레이했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종의 기원>을 열심히 읽을지 모릅니다. 뭔가를 좋아할 때, 인간은 그것을 자세히 알기 원합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인간은 그 사람의 세계관과 취향과 성장 배경과 (무엇보다) 이상형을 알고 싶어합니다. "와, 저 남자는 무슨 음식을 좋아할까? 저 남자는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음악을 듣고, 어디를 여행할까? 무엇보다 저 남자는 무슨 여자를 좋아할까? 저 남자가 나를 좋아할까? 나는 저 남자를 좀 더 알아보고 싶어." 짝사랑에 빠졌을 때, 좋아하는 남학생을 바라보는 동안, 이렇게 여학생은 고민할 겁니다.


<니치>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가 아주 재미있다고 느낀다면, 여학생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진화 이론을 찾아보기 원할지 모릅니다. 이건 생태계 게임이 선사하는 교육 효과가 되겠죠. 어쩌면 게임 플레이어는 유전 공학을 새롭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니치>를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유전자 가위가 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유전 형질들을 짜맞출 수 있죠. 유전 공학 역시 여러 유전 형질들을 짜맞출 수 있습니다. <니치>에서 유전 형질들을 짜맞출 때, 이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유전 공학 역시 마찬가지겠죠. 유전 공학이 옳을까요? 유전 공학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니치>는 재미있는 게임입니다. 하지만 유전 공학은 게임이 아니고 현실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니치>와 유전 공학을 서로 연결할 수 있을까요? 양쪽 모두 유전 형질들을 조합하기 때문에, <니치>와 유전 공학 사이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니치>는 바이오펑크가 아닙니다. 유전 공학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니치>보다 바이오펑크 소설들은 훨씬 나을 겁니다. <니치>보다 <인간 종말 리포트> 같은 (마가렛 앳우드가 SF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이오펑크 소설은 유전 공학이 문제라고 훨씬 진지하게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니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평소에 게임 플레이어가 유전 공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해도, <니치>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는 유전 공학에 관심을 기울일지 모릅니다. 이런 '계몽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사실 과학 계몽 때문에 중국 정부는 SF 소설들을 후원하죠. 휴고 건즈백은 사이언티픽션들이 과학 지식들을 계몽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국내 SF 문학 수상 대회 역시 이런 계몽 사례들에 기반합니다. SF 작가들은 이런 현상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계몽 도구가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계몽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전부가 아니죠. 문학은 도구가 될 수 있으나, 누군가가 문학에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이 있다고 취급한다면, 그건 오류가 될 겁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양쪽을 서로 연결할 수 있을 겁니다. 양쪽 모두 유전 형질들을 이야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계몽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이언스 픽션은 재미있는 도구가 되거나 로망스러운 도구가 되거나 무서운 도구가 될 수 있죠. 바이오펑크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비단 자연 과학 지식만이 아니라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성들을 보기 원할 겁니다. 생태계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그래픽을 감상하거나 유전 형질들을 실험하거나 낯선 자연을 만나는 호기심을 바랄 겁니다. <니치>는 계몽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게임을 재미있게 플레이한다면, 사람들은 <종의 기원>이 훨씬 친숙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물론 <종의 기원>은 늘어지는 책입니다. <자본론>보다 쉽다고 해도, 분명히 <종의 기원>은 19세기 유럽 학술 서적입니다. 하지만 <니치> 덕분에 게임 플레이어가 진화 이론에 흥미를 느낀다면, <종의 기원>을 읽기 위한 진입 장벽은 낮아질 수 있겠죠.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가 <종의 기원>을 친숙하게 여긴다고 해도, <니치>의 목적은 과학 계몽이 아닙니다. <니치>는 진화 이론 논문이 아니고 비디오 게임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미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무엇이 재미인가?"라고 물을 수 있으나, 분명히 재미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과학 계몽은 전부가 아닙니다. 과학 계몽을 원한다면,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리사 랜들이나 닐 타이슨을 찾아야 할 겁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계몽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서 클라크처럼, SF 그랜드 마스터들 역시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 계몽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아서 클라크는 하드 SF 독자들이 미래학을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하드 SF 독자들이 미래학을 논의할 수 있을까요? 하드 SF 소설들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하드 SF 소설들은 문학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목적은 미래 예측이 아닙니다. 하드 SF 작가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 논문이나 미래학 서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한편으로 아서 클라크처럼, 어떤 하드 SF 작가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어느 정도 미래학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서 클라크는 인공 위성 같은 과학 기술에 어느 정도 이바지했습니다. 아서 클라크 본인은 이걸 알고, SF 소설을 쓸 때, 아서 클라크는 이걸 의식합니다. 몇몇 소설 후기에서 아서 클라크는 자신이 얼마나 현실 속의 우주 탐사와 소설 속의 우주 탐사를 고민했는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드 SF 작가가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하드 SF 소설은 미래학 서적이 아니라 문학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우연히) 맞출 수 있으나, 그건 전부가 아니고 진짜 목적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계몽 도구가 될 수 있으나, 그건 전부가 아니겠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해' 많은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읽습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들이 미래를 진지하게 상상한다고 해도,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초인 영웅, 사이언스 판타지, 스팀펑크, 뉴웨이브, 타임 슬립, 뉴 위어드, 우주적 공포, 고전적인 비경 탐험, 거대 괴수 역시 SF 울타리 안에 들어가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고 싶다면, SF 독자들은 이런 하위 장르들을 외면해야 합니다. 게다가 <프랑켄슈타인>이나 <해저 2만리>처럼 고전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더 이상 미래를 예측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문학 평론가들이 <프랑켄슈타인>을 재해석한다고 해도, <프랑켄슈타인>은 그저 구닥다리 바이오펑크에 불과합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해' 독자들은 <프랑켄슈타인>을 읽지 않겠죠. 하드 SF 소설들을 쓸 때, 분명히 SF 작가들은 미래를 고민하고 미래학 서적들을 참고할 겁니다. 아서 클라크나 피터 왓츠처럼, 심지어 SF 작가들은 과학자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계몽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고 오해하는 순간, 독자는 사이언스 픽션이 선사하는 다른 미덕들을 잃을 겁니다. <니치> 같은 게임 역시 마찬가지죠. <니치>는 진화 이론 계몽 도구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재미있는 샌드박스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진화 이론 계몽 도구와 재미있는 샌드박스는 모두 <니치>를 구성합니다. <니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니치>에는 수많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그것들 중에서 하나가 전부라고 말하지 못하겠죠. <니치>에게는 과학 계몽이라는 잠재력이 있으나, <니치>는 과학 계몽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니치>와 <종의 기원>과 유전자 가위가 서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해도, <니치>는 그저 계기에 불과합니다. <니치>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는 얼마든지 다른 비디오 게임들을 플레이하고 <종의 기원>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니치>와 <종의 기원>과 유전자 가위가 서로 이어진다면, 그건 게임 플레이어의 선택일 겁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니치>를 그저 재미있는 샌드박스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 있고,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니치>와 다른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과 <종의 기원>을 서로 연결할 수 있겠죠. 심지어 <니치>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는 바이오펑크 소설들에 푹 빠질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니치>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스팀 게임 플랫폼이 <니치>를 공개했다고 해도, 아무도 <니치>를 플레이하지 않는다면, <니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겁니다. 다른 많은 창작물들처럼, 게임 플레이어가 선택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니치>에는 가치가 있죠.



[생태학 SF들은 다양한 생태계들을 보여줍니다. <니치> 역시 그럴 수 있어요. (Artwork by Kayla Harren)]



만약 <니치>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가 <종의 기원>과 <인간 종말 리포트>를 읽는다면, <니치>는 생물 다양성과 바이오펑크 소설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겁니다. <니치>는 샌드박스 게임이고, <인간 종말 리포트>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바이오펑크 소설입니다. 양쪽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니치>와 <종의 기원>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나, <인간 종말 리포트>는 <니치>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니치>는 유전 형질들을 조합할 수 있고, <인간 종말 리포트>는 유전자 조작 동물들을 연이어 보여줍니다. 양쪽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고, 게임 플레이어는 이걸 의식할 수 있겠죠.


게임 플레이어가 <니치>와 <인간 종말 리포트>를 연결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다른 SF 소설들과 <니치>를 연결할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이상한 생명체들이 번성하고 진화하는' SF 설정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설정들은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이미 허버트 웰즈는 인간이 생명체들을 뜯어 고칠 수 있다고 썼고, 20세기 이후, 생태학 SF 소설들은 온갖 상상력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제프 밴더미어 소설들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겠죠. SF 독자들은 소설 <프래그먼트>가 문학이 아니라 그저 문학을 빙자한 설정집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나, (오히려 설정집에 가깝기 때문에) <프래그먼트>는 생태학 SF가 얼마나 진화 이론을 다양하게 활용하는지 보여줍니다.



SF 출판계에서 <프래그먼트> 같은 생태학 SF 소설들은 드물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런 소재는 많은 인기들을 끕니다. <니치>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가 이런 설정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숱한 생태학 SF 소설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니치>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니, <니치>가 정말 사이언스 픽션이 아닐까요? <니치>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할까요? <에볼루션>을 비롯해 <심라이프>, <임파서블 크리쳐스>, <스포어> 같은 게임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임파서블 크리쳐스>는 바이오펑크입니다. <스포어>는 생명체가 진화하고 우주 문명을 이룩한다고 말합니다. <스포어> 역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겠죠.


<심라이프>와 <니치>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을까요? <심라이프>는 생명체들이 다양하게 진화한다고 상상합니다. (문학보다 설정집에 가까운) <프래그먼트>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다면, <심라이프> 역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프래그먼트>는 사이언스 픽션이고, <심라이프> 역시 사이언스 픽션이 될 겁니다. <심라이프>처럼, <니치> 역시 생명체들이 다양하게 진화한다고 상상합니다. 따라서 <니치>는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죠. 흔히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우주 전쟁이나 인공 지능이나 외계인을 말한다고 생각하나, <니치>는 생태학 SF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니치>가 사이언스 픽션인지 물을 겁니다. 분명히 <니치>는 <스타 워즈>나 <2001 우주 대장정> 같은 사이언스 픽션들과 다릅니다. <니치>에는 외계인과 우주선과 인공 지능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미래 메트로폴리스와 첨단 기계 장치와 궤도 정거장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니치>가 그저 샌드박스 게임에 불과하다고 말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뭘까요? 아무도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완전하게 정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황을 표현합니다.


계몽주의, 과학 기술, 진화 이론, 물리 공학, 민중 혁명은 근대적인 진보에 속합니다. 창작물이 이런 것들을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황을 표현할 때, 그건 사이언스 픽션이 됩니다. <스타 워즈>는 다양한 과학 기술들을 이용해 우주 구축함, 광검, 드로이드를 보여줍니다. 우주 구축함, 광검, 드로이드는 비일상적인 것들입니다. 현실 속에서 누가 광검을 휘두를 수 있습니까? 애니메이션 속에서 샤크 티가 날렵하게 광검을 휘두를 때, 시청자는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격차를 느낄 수 있고, <스타 워즈>는 사이언스 픽션이 됩니다. 그래서 <스타 워즈>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영화 <반지 원정대>가 개봉했을 때, 인터넷 만화 작가 스노우캣은 <스타 워즈>와 <반지 원정대>가 비슷하다고 그렸습니다. <스타 워즈>와 <반지 전쟁>은 모두 신화적인 서사시입니다. 그래서 양쪽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지 전쟁>에는 근대적인 진보가 없습니다. <스타 워즈>에서 사람들은 의회를 구성하고 의원들을 뽑습니다. 하지만 <반지 전쟁>에는 봉건 영주가 존재하고, 봉건 영주는 보통 선거 권리 따위를 절대 인정하지 않겠죠. 민중들이 "우리는 우리의 대표를 직접 뽑고 싶다!"라고 외칠 때, 봉건 영주는 군대를 보내고 민중들을 억압할 겁니다.


아니, 그 전에 <반지 전쟁>에서 민중들은 보통 선거 권리를 아예 의식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 현명한 간달프조차 보통 선거 권리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간달프는 국왕 통치를 인정합니다. 물론 <반지 전쟁>에서 혈통은 정말 마법을 부릴 수 있습니다. 아라곤은 왕의 후손이고, 보통 사람들과 달리, 아라곤은 팔란티르 수정 구슬을 다룰 수 있죠. 그래서 <반지 전쟁>은 보통 선거 권리가 아니라 혈통 계승을 인정합니다. 근대적인 진보는 이걸 인정하지 않죠. 근대적인 진보 사상과 <반지 전쟁>은 서로 충돌합니다. 그래서 <반지 전쟁>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샤크 티의 광검과 달리, 아라곤의 나르실 장검은 기계 장치가 아니죠.



[샤크 티와 푸른 광검과 포스와 미래 도시는 근대적인 진보이고 비일상적인 요소들입니다.]



<니치> 역시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비일상적인 격차를 만듭니다. <니치>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있습니다. 이런 동물들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에는 호랑이와 늑대와 여우와 곰을 뒤섞고 검치를 달고 어둠 속을 꿰뚫어보고 추위를 견디고 수중 호흡하고 지능적인 동물이 없습니다. 유전 공학 기술은 이런 동물을 만들 수 있으나, 이런 유전자 조작 동물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니치>를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비일상적인 동물을 낳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동물이 태어날까요? 대답은 진화 이론입니다. 생명체가 진화하기 때문에, 두 짝궁 동물은 유전 형질들을 조합할 수 있고, 후손은 비일상적인 동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니치>는 진화 이론(근대적인 진보)을 이용해 새로운 동물(비일상적인 격차)을 만듭니다. 당연히 <니치>는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모로 박사의 섬>이나 <인간 종말 리포트>처럼, <니치>는 바이오펑크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모로 박사의 섬>과 <인간 종말 리포트>와 <니치>는 유전 형질들이 바뀔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모로 박사의 섬>과 <인간 종말 리포트>는 유전 공학과 인종 차별과 억압적인 사회를 비판합니다. <니치>에는 이런 비판이 없죠. <니치>는 인류 사회를 배제하고 오직 자연 생태계만 묘사합니다. 따라서 <니치>는 바이오펑크가 되지 못할 겁니다. <니치>가 바이오펑크라고 해도, <니치>는 <인간 종말 리포트> 같은 바이오펑크가 아니겠죠.



1990년 비디오 게임 <드래곤 로드>는 <니치>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드래곤 로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드래곤 알을 조합하고 키울 수 있습니다. 드래곤 알에 여러 형질들을 집어넣을 때, <드래곤 로드>는 중세 유럽 판타지보다 바이오펑크에 가깝습니다. 스팀펑크가 중세 판타지와 결합할 수 있는 것처럼, <드래곤 로드>는 바이오펑크가 중세 판타지와 합칠 수 있다고 보여줍니다. 하지만 <니치>는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으나, <드래곤 로드>는 그렇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바이오펑크 분위기를 느낀다고 해도, <드래곤 로드>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 기반합니다.


이 게임에서 근대적인 진보는 오직 드래곤 알 조합뿐이고, 드래곤 알 조합조차 유전 공학보다 중세 연금술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게임 플레이어는 <드래곤 로드>와 <니치>를 모두 재미있게 플레이할지 모릅니다. 양쪽 모두 새로운 생명체들을 조합합니다. 하지만 <니치>와 달리, <드래곤 로드>는 진보적인 분위기를 많이 풍기지 않고, 게임 플레이어는 <드래곤 로드>를 <종의 기원>이나 <인간 종말 리포트>와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드래곤 로드>를 <종의 기원>과 연결하고 싶다고 해도, <드래곤 로드>보다 <니치>는 훨씬 나은 선택일 겁니다.



<니치> 같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온갖 동물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조합들을 시도할 수 있고, 자연 생태계는 다양한 동물들로 가득할 겁니다. 이 동물은 저 동물과 다르고, 저 동물은 또 다른 동물과 다르고, 또 다른 동물은 이 동물과 다를 겁니다. 그렇게 생물 다양성은 늘어나겠죠. 생물 다양성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유는 이런 다양함 때문일 겁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다릅니다. 인간은 꿀벌과 참나무와 팽이 버섯과 장수 거북과 수마트라 호랑이와 갑오징어와 물총새와 다르죠.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다양한 생명체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훨씬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갑오징어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 뼈대가 있고, 사지가 있고, 머리카락이 있고, 젖가슴이 있다는 사실을 훨씬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생물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훨씬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니치>를 비롯해 생태학 SF들은 생물 다양성에 멋진 상상의 날개를 답니다. 그래서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멋지죠. 안타깝게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이런 아름답고 신비로운 다양성을 짓밟습니다. <니치>를 플레이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가 자본주의 문제를 인식한다면, 현실 속의 생물 다양성 역시 풍성해질 수 있겠죠.



※ 소설 <본 Borne> 이미지 출처: Kayla Harren 홈페이지 (http://www.kaylaharren.com/personal-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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