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왜 모스라가 거대 나방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 본문
[모스라는 거대 나방 형태입니다. 왜 모스라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나방 형태가 되어야 할까요?]
커다란 나방이나 신기한 나방을 봤을 때 종종 거대 괴수 팬들은 그게 모스라라고 농담합니다. 모스라가 거대 나방 괴수이기 때문에 거대 괴수 팬들은 신기한 나방이 모스라라고 농담하죠. 이건 그저 썰렁한 농담에 불과하나, 이런 농담에는 아주 중요한 골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왜 모스라가 나방, 동물일까요. 왜 모스라가 동물 형태일까요. 왜 모스라가 돌덩이나 액체나 기계가 아니라 동물 형태일까요. 모스라와 동물 형태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을까요? 영화 제작진이 모스라를 나방 형태, 동물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만약 모스라가 거대 나방이 아니라 아주 거대한 바위 거인이나 물의 정령이나 기계 로봇이었다면, 모스라가 풍기는 느낌이 달라졌을까요? 왜 거대 괴수는 거인이나 정령이나 기계가 아니라 거대한 동물이 되어야 할까요? 중세 유럽 판타지처럼, 거대한 악마가 도시를 파괴한다면, 그런 장면이 모스라와 다른 느낌을 풍길까요? 60m짜리 바위 거인이나 물의 정령이나 기계 로봇이나 악마가 도시를 파괴한다면, 그런 장면이 모스라와 다른 느낌을 풍길까요? 그런 장면이 모스라와 다른 느낌을 풍기지 않는다면, 60m짜리 바위 거인과 물의 정령과 기계 로봇과 악마는 모스라와 동등한 위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위 거인과 물의 정령과 기계 로봇과 악마가 모스라와 다른 느낌을 풍긴다고 생각할 겁니다. 바위 거인과 물의 정령과 기계 로봇과 악마는 모스라와 동등한 위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과 모스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합니다. 모스라는 나방 형태, 동물 형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왜 모스라가 동물 형태가 되어야 할까요? 모스라가 무슨 영역에 속했을까요? 사실 겉모습이 나방이라고 해도, 모스라는 진짜 나방이 아닙니다. 아무리 모스라가 알에서 태어나고, 애벌레와 번데기와 탈피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모스라는 진짜 나방이 아닙니다.
진짜 나방은 비늘 가루들을 이용해 열선을 막지 못합니다. 진짜 나방은 더듬이에서 광선을 쏘지 못합니다. 진짜 나방은 초음속으로 날아다니거나 날개 바람으로 사물을 날려버리지 못합니다. 모스라가 나방이라고 해도, 그건 그저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미가 나방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스라가 쿠몽가를 때려잡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게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쿠몽가가 거대 거미임에도, 사람들은 당연히 모스라가 쿠몽가를 이길 거라고 기대할 겁니다. 모스라처럼 강력한 거대 괴수는 고작 쿠몽가 따위에게 지지 않겠죠. 이런 사례처럼, 나방 형태는 그저 겉모습에 불과해요. 나방 형태임에도, 모스라는 진짜 나방이 아니죠.
모스라가 진짜 나방이 아니라면, 왜 모스라가 나방 형태가 되어야 할까요? 모스라가 60m짜리 바위 거인이나 기계 로봇이나 악마가 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울트라맨처럼, 모스라가 60m짜리 인간 형태라면? 만약 모스라가 아주 아름다운 60m짜리 거인이 된다면, 그런 거인이 도시를 돌아다니거나 다른 괴수와 싸운다면, 그런 장면은 나방 형태와 다른 느낌을 풍길 겁니다. 모스라와 울트라맨은 똑같이 악당 괴수들을 물리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스라와 울트라맨이 동등한 위상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모스라와 울트라맨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했습니다.
모스라는 거대 괴수이고, 울트라맨은 거대 초인 영웅이죠. 성향과 속성이 비슷하다고 해도, 거대 괴수와 거대 초인 영웅은 서로 다른 영역입니다. 거대 초인 영웅 울트라맨은 거대 나방 괴수 모스라가 풍기는 느낌을 똑같이 풍기지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느낌일까요? 왜 울트라맨이 모스라와 똑같은 느낌을 풍기지 못할까요? 신기한 나방을 봤을 때, 거대 괴수 팬들은 그게 모스라라고 농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 팬들은 그게 울트라맨이라고 농담하지 못할 겁니다. 흔히 우리는 겉모습보다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겉모습은 그저 포장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이런 격언이 모스라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거대 나방이라는 겉모습이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거대 나방이라는 겉모습이 알맹이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었을까요? 진짜 나방은 방어막처럼 비늘 가루들을 뿌리지 못하고 초음속으로 날지 못합니다. 모스라는 진짜 나방이 아니고, 모스라가 구태여 나방 형태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알록달록하고 예쁜 거대 초인 영웅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런 초인 영웅은 모스라와 비슷하게 활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쪽이 비슷하게 활약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예쁜 거대 초인 영웅과 예쁜 거대 나방 괴수가 똑같은 영역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토호가 예쁜 거대 초인 영웅을 만들고 그게 모스라라고 우긴다면, 수많은 사람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리거나 반박할 겁니다. 심지어 거대 괴수를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토호가 이상하다고 여기겠죠. "어라? 이게 무슨 거대 괴수야? 거대 괴수는 동물 형태가 되어야 해." 거대 초인 영웅은 동물 형태와 거리가 멀죠. 아무리 고지라와 제트 재규어가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도, 사람들은 제트 재규어가 괴수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울트라맨이 그런 것처럼, 제트 재규어는 거대 초인 영웅이죠. 모스라와 고지라와 에렉킹과 고모라처럼, 괴수는 동물 형태가 되어야 해요.
물론 사람들은 갈탄 대왕과 발탄 성인이 괴수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갈탄 대왕과 발탄 성인이 동물 형태가 아님에도, 양쪽이 거대 인간에 가까움에도, 사람들은 갈탄 대왕과 발탄 성인을 거대 괴수라는 영역으로 밀어넣죠. 모스라와 고지라와 에렉킹과 고모라와 달리, 갈탄 대왕과 발탄 성인이 인간 형태임에도, 모스라와 갈탄 대왕은 똑같이 괴수가 됩니다. 이건 꽤나 이상한 분류 방법입니다. 왜 모스라가 동물(나방) 형태이고 갈탄 대왕이 인간 형태임에도, 양쪽이 똑같이 거대 괴수가 되어야 할까요. 만약 모스라와 갈탄 대왕이 똑같이 거대 괴수가 된다면, 울트라맨 역시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갈탄 대왕을 거대 괴수라고 부른다고 해도, 사람들은 울트라맨을 거대 괴수 영역에 집어넣지 않을 겁니다. 이것 역시 이상하죠. 왜 갈탄 대왕과 울트라맨이 똑같이 인간 형태임에도, 갈탄 대왕이 거대 괴수가 되고, 울트라맨이 거대 초인 영웅이 되어야 할까요? 갈탄 대왕과 발탄 성인 역시 거대 초인 악당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메피라스 성인 역시 거대 괴수가 아니라 거대 초인 악당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갈탄 대왕과 발탄 성인과 메피라스 성인은 그저 거대한 외계인들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왜 모스라처럼, 이런 것들이 거대 괴수가 되어야 하나요?
[자연 복원을 상징하는 소녀는 '거대 나방' 형질을 이어받았습니다. 왜 다른 형태가 아니라 거대 나방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고지라가 환경 오염을 상징하고 모스라가 자연 복원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왜 고지라가 환경 오염을 상징할 수 있고 울트라맨이 그렇지 못할까요? 자연 복원을 상징하는 모스라가 무조건 동물 형태가 되어야 하나요? 물의 정령이 자연 복원을 상징하지 못할까요? 만약 모스라가 거대 나방이 아니라 물의 정령이었다면, 물의 정령이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물의 정령을 거대 괴수 영역으로 집어넣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우리는 거대 괴수라는 용어를 혼란스럽게 사용하는 중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아무데나 거대 괴수라는 용어를 붙이죠.
모스라와 갈탄 대왕이 함께 거대 괴수가 되는 상황에서 거대 괴수라는 용어를 제대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오히려 그런 정의는 훨씬 많은 혼란들을 부를 수 있겠죠. 어떤 현상을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싶다면, 우리는 오직 가시적인 표면만을 훑어봐서는 안 될 겁니다. 그건 올바른 접근이 아니겠죠. 어떤 현상이 비롯한 기원을 되짚을 때, 우리는 현상을 훨씬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거대 괴수라는 용어를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싶다면, 우리는 기원을 되짚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거대 괴수들은 사이언스 픽션 영역에 속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난 19세기 유럽을 살펴야 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모스라 같은 거대 괴수와 19세기 유럽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아무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간주할 겁니다. 메리 셸리, 쥘 베른, 허버트 웰즈가 모스라 및 울트라맨과 무슨 관계를 맺겠습니까. 하지만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나타났을 때, 이미 SF 소설들은 거대 괴수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령, 허버트 웰즈는 바닷속에서 거대한 두족류 촉수 괴수가 사람들을 납치한다고 썼습니다. 이런 소설은 얼마든지 거대 괴수 영역에 들어갈 수 있겠죠. 쥘 베른 역시 크라켄 이야기와 공룡 이야기에 끌렸고 바다 파충류가 싸우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지구 속 여행>에서 그런 장면은 정말 거대 괴수 느낌을 물씬 풍깁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아예 유럽 탐험대가 거대한 공룡들을 찾아나선다고 썼습니다. 소설 <잃어버린 세계>는 본격적인 공룡 이야기입니다. 19세기~20세기 초반 SF 소설들은 비일상적인 거대 야수들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거대 괴수 이야기는 출발했습니다. 물론 중세 사람들 역시 드래곤을 상상할 수 있었으나, 드래곤은 신화와 전설과 미신에 속합니다. 반면, 두족류 괴수와 공룡과 거대 파충류들은 (상상) 과학에 속하죠. 드래곤과 엘라스모사우루스가 똑같이 거대 파충류라고 해도, 드래곤과 엘라스모사우루스는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합니다. 그래서 드래곤은 정령과 어울릴 수 있으나, 엘라스모사우루스는 그렇지 못합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까지, 유럽 사람들은 세상이 신에서 비롯했다고 여겼습니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고, 따라서 비일상적이고 거대한 존재를 상상한다고 해도, 유럽 사람들은 신에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령과 악마처럼 드래곤은 신화와 전설과 미신에 속하죠. 19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은 신에게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둡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세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신화는 더 이상 우주와 자연과 세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진화 이론은 종교와 신화에 엄청난 타격을 미쳤습니다. 이제 유럽 사람들은 과학을 이용해 세상을 들여다보기 원합니다. 비일상적이고 거대한 존재를 상상한다고 해도, 유럽 사람들은 신화보다 과학을 이용합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SF 소설들은 과학을 이용해 비일상적이고 거대한 존재를 상상했습니다. 따라서 SF 소설들은 공룡과 거대 파충류들과 다른 거대 야수들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거대한 공룡들은 지구 위를 쿵쿵거리며 돌아다녔고, 거대한 공룡들은 괴수 이야기에 안성맞춤이죠. 신화와 종교 없이, SF 소설들은 공룡을 이용해 거대 괴수 이야기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건 21세기 초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거대한 공룡은 (상상) 과학적인 거대 괴수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소재입니다. 그래서 고지라를 비롯해 숱한 거대 괴수들은 공룡과 비슷하죠.
공룡은 동물입니다. 공룡은 자연 생태계에 속한 동물입니다. 공룡은 생물 다양성과 진화 역사에서 비롯한 동물입니다.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면, SF 소설들은 공룡을 말하지 못할 겁니다. 공룡을 말하지 못한다면, SF 소설들은 쉽게 거대 괴수 이야기를 펼치지 못하겠죠. 설사 공룡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거대 괴수 이야기를 펼칠 때, SF 소설들은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거대 괴수는 신에게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는 지옥에서 올라오지 않습니다. 계몽주의는 그런 사고 방식을 거부합니다. 19세기 근대적인 진보는 신화와 종교와 지옥을 거부합니다.
진화 이론을 주장하는 자연 철학자들은 마법이 아니라 생물 다양성을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서 다양한 생명체들을 만드는 마법이 있다면, 그 마법은 생물 다양성일 겁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거대 괴수를 사고할 때, 인간은 신화와 종교가 아니라 자연 과학, 생물학과 생태학을 고려해야 합니다. 공룡이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에 속한 것처럼, 거대 괴수는 생물 다양성에 속해야 합니다. 19세기 SF 작가들은 생물 다양성이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연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짐작했을 겁니다.
19세기~20세기 초반 사이언스 픽션들이 신비한 야생 동물들과 거대 야수들을 이야기했을 때, 그것들은 비경 탐험에서 비롯했습니다. 쥘 베른, 허버트 웰즈, 아서 코난 도일이 신비한 야생 동물들과 거대 야수들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비경 탐험들을 썼습니다. 거대 오징어를 이야기하는 <해저 2만리>, 커다란 심해 갑각류를 보여주는 <마라코트 심해>, 미지의 날짐승을 묘사하는 <아부 천문대에서>는 모두 비경 탐험에 속하죠. 소설 <빛의 세계>와 영화 <아바타>과 게임 <서브노티카>처럼, 21세기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비경과 거대 야생 동물을 쉽게 연결합니다. 이렇게 비경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들은 신비한 야생 동물, 괴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20세기 초반 SF 작가들이 비경을 이야기했을 때, 비경은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였습니다. 유럽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이런 식민지들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 SF 작가들 역시 비경을 이야기할 수 있었죠. 사실 진화 이론을 정리한 찰스 다윈과 알프레드 월레스 역시 비경 탐험가입니다. 자연 생태계, 진화 이론, 생물 다양성은 이런 비경 탐험,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했어요. 합리적인 계몽주의는 진화 이론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디딤돌이 아니었죠. SF 팬들이 거대 괴수와 신비한 야생 동물과 기이한 생태계를 떠들고 싶다면, SF 팬들은 식민지 지배를 의식해야 할 겁니다. 참혹하고 비열하고 폭력적인 식민지 지배는 진화 이론과 괴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자연 생태계 탐험은 괴수 이야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괴수는 자연 생태계에 속합니다.]
거대 괴수는 생물 다양성에 속해야 합니다. 거대 괴수를 이야기할 때, 사이언스 픽션은 생물 다양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공룡과 대왕 오징어처럼, 생물 다양성에 속한 거대한 존재는 괴수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인과 정령과 기계 로봇과 악마는 거대 괴수가 되지 못합니다. 거인과 정령과 기계 로봇과 악마는 생물 다양성에 속하지 않습니다. 공룡과 대왕 오징어는 괴수가 될 수 있으나, 거인과 정령과 기계 로봇과 악마는 그렇지 못합니다. 누가 거인을 봤습니까? 누가 정령이 진화한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누가 악마가 생물 다양성에 속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공룡과 대왕 오징어와 각종 거대 야수들이 생물 다양성에 속했다고 논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논증을 상상 과학으로 이끈다면, 우리는 다양한 거대 괴수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인간이 자연 생태계에 뭔가 영향을 미쳤을 때, 인간이 진화 역사가 숨긴 비밀을 들췄을 때, 인간이 또 다른 생물 다양성을 발견했을 때, 그런 상상력들은 거대 괴수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SF 작가들은 그런 상상력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처럼, 어떤 SF 작가들은 공룡을 정말 사랑하죠. 윌리엄 스타우트가 그린 <공룡: 그 매혹적인 세계> 서문에서 레이 브래드버리는 자랑스럽게 외칩니다. "공룡! 공룡이요! 저는 선사 시대의 야수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은 공룡 소설들을 썼고, 이런 소설들은 거대 괴수 영화로 이어집니다. <심해에서 올라온 괴물>은 그런 괴수 영화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따라서 인간과 거대 괴수가 만날 때, 그런 만남은 생물 다양성을 떠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생물 다양성을 장대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자랑하는 가장 커다란 장점들 중에서 하나일 겁니다. 생명 현상이 발현하는 고대 지구, 현대 인류가 살아가는 신생대, 미래 생태계와 외계 생태계까지, 사이언스 픽션은 장대하게 생물 다양성과 진화 이론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숱한 문학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이언스 픽션은 장대한 생물 다양성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이외에 무슨 소설, 무슨 영화, 무슨 게임이 고대, 현대, 미래, 외계 생태계를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를 비평할 때, <겨울서점> 채널의 북튜버 김겨울님은 동물을 이야기하는 사이언스 픽션이 별로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동물을 이야기하는 사이언스 픽션들이 별로 없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거의 유일하게' 장대한 생물 다양성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 복제와 심해 괴수와 외계 야수를 이야기하지 못할 겁니다. 정말 동물을 이야기하는 사이언스 픽션들이 별로 없나요? 소설 <와인드업 걸>에 나오는 거대 개조 코끼리가 기계 덩어리일까요? 소설 <멸종>에 나오는 공룡들이 깡통들일까요? 왜 소설 <홍수>가 생물 다양성을 표지 그림에 집어넣었을까요? 소설 <시리우스>는 개조 동물이 아니라 인공 지능을 이야기하나요? 왜 소설 <야생종>에서 안얀우가 표범과 돌고래로 변신할까요?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의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동물로 보이지 않나요? 레이 브래드버리가 공룡이 아니라 고철을 좋아했을까요? 왜 소설 <2312>가 인공 생태계와 지구 자연 환경과 수많은 생물종들로 마무리를 지었을까요? 소설 <스타타이드 라이징>에 나오는 신종 돌고래들이 뭡니까?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이 한가한 낚시 소설인가요? 소설 <소년과 개>에서 블러드가 장식입니까? 아무리 얄팍하다고 해도, 소설 <개미의 날>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책들을 많이 읽은 북튜버 역시 얼마든지 헛갈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이건 등장인물의 이름을 틀리거나 줄거리를 잘못 기억하거나 내용을 잊어버리는 실수가 아니에요. 겨울님은 SF 장르가 품은 가치, 장대한 생물 다양성을 보여주는 가치를 무시했어요. 동물을 이야기하는 사이언스 픽션들이 별로 없다면, 여기 <SF 생태주의> 블로그는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하하, 겨울님 덕분에 여기는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건 꽤나 시원섭섭(?)한 상황일지 모릅니다. 솔직히 여기 <SF 생태주의> 이외에 국내에서 생태적인 상상력과 생태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담론들이 있을까요. 그런 담론들이 있다고 해도, 비중은 별로 크지 않을지 모릅니다.
영화 <심해에서 올라온 괴물>이 증명하는 것처럼, 그 어떤 장르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생물 다양성을 신나게 떠들 수 있습니다. 영화 <심해에서 올라온 괴물>은 영화 <고지라>로 이어집니다. 영화 <고지라> 역시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를 이야기하죠. 현대 문명은 전략 병기를 실험했고, 그건 자연 생태계를 교란했습니다. 그래서 거대 괴수 고지라는 일본 도시에 상륙했고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거대 괴수가 자연 생태계에 속했기 때문에, 거대 괴수를 불러내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생태계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자연 생태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쉽게 환경 보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가 나타나는 이유는 현대 문명이 자연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거대 괴수를 자극하고 싶지 않다면, 현대 문명은 부정적인 영향을 줄여야 합니다.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이런 것들을 이야기했다고 해도, 그건 전형적인 공식이 되지 않았죠. 19세기 SF 소설들 속에서 거대 괴수들은 아직 정체성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했습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들은 한창 발달하는 중이었고 고지라 같은 초자연적인 괴수로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비단 거대 괴수만 아니라 다른 SF 소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마침내 거대 괴수들은 기지개를 끝냈습니다. 이제 그것들은 본격적으로 놀라운 이야기들을 펼치기 시작해요.
영화 <고지라> 이후, 거대 괴수들은 전형적인 공식들을 마련했습니다. 거대 괴수는 현대 문명이 물리치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거대 야수들이 되었습니다. 거대 괴수는 도시를 짓밟고, 현대 병기들을 씹어먹고, 다른 거대 괴수들과 싸워야 합니다. 무지막지한 파괴, 싸움, 폭력은 거대 괴수들을 상징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전형적인 공식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점차 거대 괴수 이야기는 다양한 방면들로 확장합니다. 점차 거대 괴수 이야기는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와 멀어집니다.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는 여전히 거대 괴수들을 생성하는 중요한 원인이나, 무지막지한 파괴와 싸움과 폭력은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를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이제 생물 다양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진화 역사는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거대하고 폭력적인 뭔가가 도시를 파괴한다면, 거대 괴수 이야기는 성립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는 생물 다양성보다 파괴와 싸움에 치중하기 시작합니다. 영화 <고지라> 시리즈 역시 더 이상 환경 오염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들이 도시를 파괴하고 서로 싸운다면, 환경 오염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는 생물 다양성 이야기가 아니라 도시를 파괴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 현상이 아니라 도시 파괴입니다.
[거대 괴수 장르를 비롯해 사이언스 픽션들은 장대한 생물 다양성을 살필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거대 괴수 이야기는 SF 영역에서 벗어납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가 도시 파괴를 보여준다면, 그게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거대 괴수 팬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대한 파괴와 재난과 폭력입니다. 모스라는 아주 유명한 거대 괴수입니다. 하지만 모스라는 SF 영역에 들어가지 않죠. 고지라와 가메라와 달리, 모스라는 판타지 거대 괴수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거대 괴수 이야기가 SF 영역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모스라는 여전히 SF 흔적들을 간직했습니다. <모스라> 시리즈에서 방사선 오염이나 자본주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죠.
그래서 모스라는 쉽게 <고지라> 시리즈에 편입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모스라는 아예 SF 영역에 눌러앉았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모스라는 완전히 SF 거대 괴수가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스라가 SF 거대 괴수가 된다고 해도, 그게 중요할까요? 거대 괴수 팬들이 구태여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를 구분할까요? 그들이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를 구분하기 원할까요? 거대 괴수 이야기가 오직 파괴에만 치중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 팬들은 더 이상 장르에 연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장르와 주제와 소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는 무조건 도시 파괴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시선을 살짝 돌린다면, 우리는 여전히 거대 괴수 이야기가 생물 다양성에 속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영화 <고지라>는 수많은 괴수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고지라>로 직접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SF 세상에는 거대 괴수를 이야기하는 수많은 갈래들이 있습니다. <고지라>는 그저 그런 갈래들 중에서 하나일 뿐입니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가 보여주는 것처럼, 거대 괴수 이야기는 여전히 생물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고지라>와 별로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게임은 <듄>과 <붉은 화성> 같은 SF 소설들과 훨씬 가깝죠. <문명: 비욘드 어스>는 행성 공학과 생태계 변화와 트랜스휴머니즘을 논의하고, <듄>과 <붉은 화성>은 이런 주제들을 논의하는 대표적인 SF 소설들입니다. 분명히 <고지라>를 비롯해 거대 괴수 영화들은 중요한 공식들을 마련했으나, 그런 공식들은 거대 괴수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에는 그런 공식들 이외에 다른 많은 소재들이 있죠. 우리가 거대 괴수를 폭넓게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리는 많은 소재들을 골고루 살필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도시를 파괴하는 장면은 거대 괴수 이야기를 대표하지 못합니다. 그건 그저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고지라> 시리즈를 비롯해 거대 괴수들은 열심히 도시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도시를 파괴하는 거대한 존재는 괴수 영역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갈탄 대왕과 발탄 성인과 메피라스 성인 역시 거대 괴수 영역에 속할 수 있죠. 갈탄 대왕은 생물 다양성을 강조하지 않으나, 도시를 파괴하는 거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지라처럼 갈탄 대왕은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죠. 울트라맨은 다릅니다. 울트라맨은 도시를 파괴하지 않아요. 도시를 파괴한다고 해도, 울트라맨의 주된 목적은 그게 아닙니다. 다른 괴수들과 싸우는 동안, 울트라맨은 어쩌지 못하고 도시를 파괴합니다. 울트라맨은 의도적으로 도시를 파괴하지 않고, 따라서 울트라맨은 거대 괴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도시 파괴라는 기준에서 갈탄 대왕은 거대 괴수가 되고 울트라맨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기준(도시 파괴)이 너무 주관적이라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를 판별하는 기준으로서 도시 파괴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속 수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도시를 파괴해야 한다고 간주하겠죠. 그런 사람들은 파괴 없는 괴수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겠죠. 설사 모스라처럼 평화적인 괴수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무조건 도시를 파괴해야 한다고 간주할 겁니다.
만약 거대 괴수 이야기에서 거대 괴수가 도시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그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겁니다. 가령,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죠. <괴수 행성> 시리즈에는 도시를 파괴하는 괴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고지라가 강력하다고 해도, 고지라는 도시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이미 고지라가 파괴할 수 있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죠. 다른 <고지라> 시리즈와 달리, <괴수 행성> 시리즈는 <듄> 같은 행성 공학과 트랜스휴머니즘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듄>에서 모래벌레가 스파이스 채취기를 삼킨다고 해도, 그런 파괴는 주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처럼,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 고지라가 인간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그런 파괴는 주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지라가 도시를 파괴하지 않는 고지라 이야기…. 당연히 거대 괴수 팬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겠죠. 고지라가 도시를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이미 <괴수 행성> 시리즈에는 미운 털이 박혔을 겁니다.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기 때문에, <괴수 행성> 시리즈가 또 다른 단점들을 드러낼 때마다, 거대 괴수 팬들은 그런 단점들을 사정없이 까겠죠. <괴수 행성> 시리즈가 여러 단점들을 드러냈다고 해도, 고지라가 도시를 신나게 파괴했다면, 거대 괴수 팬들은 여러 단점들을 감쌌을 겁니다. 하지만 <괴수 행성> 시리즈는 그런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어요.
거대 괴수 팬들은 괴수가 도시를 파괴하기 원하고, 그래서 그들은 <괴수 행성> 시리즈를 혹평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파괴와 싸움이죠. 파괴와 싸움이 없는 <괴수 행성> 시리즈는 혹평들을 듣습니다. 하지만 이건 거대 괴수 이야기를 너무 좁은 틀 안에 가두는 혹평일지 모릅니다. 왜 <고지라> 시리즈가 무조건 파괴와 싸움으로 이어져야 할까요? <고지라> 시리즈는 얼마든지 다른 방면들로 뻗을 수 있을 겁니다. 거대 괴수는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에서 비롯했습니다. 모스라가 나방 형태인 이유는 거대 괴수들이 야수들이기 때문입니다. 야수들은 자연 생태계에 속했고, 모스라 역시 자연 생태계에 속한 형태가 되어야 했습니다. 겉모습이 그저 나방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런 겉모습을 통해 모스라는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할 때, 거대 괴수를 이용해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죠.
다른 <고지라> 시리즈보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생태계 변화와 진화 역사를 원대하게 고찰합니다. 게다가 <괴수 행성> 시리즈는 후투아 종족을 이용해 식민지 지배를 회고할 수 있어요. 거대 괴수 이야기는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했고, 따라서 거대 괴수 이야기가 식민지 지배를 비판한다면, 거기에는 가치가 없지 않을 겁니다. 이건 다른 <고지라> 시리즈가 드러내지 못하는, <괴수 행성> 시리즈의 고유한 장점입니다. 이런 장점 덕분에 <괴수 행성> 시리즈는 혹평이 아니라 호평을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이건 <괴수 행성> 시리즈가 자연과 문명을 근본적으로 고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편파적이고 얄팍한 시선을 드러냅니다. 거대 괴수 장르는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을 비판하고 생태 사회주의적인 시각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그렇지 못했고 그저 낭만적인 자연관("자연으로 돌아가자.")을 추구할 뿐이죠. 그렇다고 해도 <괴수 행성> 시리즈는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줬을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가 자연 생태계에 속했다면, 거대 괴수 이야기는 생태계 변화를 고민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