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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모두 예쁜 말들>과 <국경을 넘어>, 베헤모스와 고지라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모두 예쁜 말들>과 <국경을 넘어>, 베헤모스와 고지라

OneTiger 2018. 9. 14. 20:43

[이른바 <국경> 3부작은 인간과 말과 늑대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말과 달리, 늑대는 야생이죠.]



코맥 매카시가 쓴 소설 <모두 예쁜 말들>은 미국 서부 소설입니다. 이건 카우보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서부 소설이죠. 하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 존 그래디 콜은 카우보이가 아니라 호스보이라고 불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존 그래디 콜이 말들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소설 제목이 '모두 예쁜 말들'인 까닭은 존 그래디가 말들에 죽고 못 사는 성격이기 때문일 겁니다. 소설 첫머리에서 존 그래디는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립니다. 존은 말에게서 육중하고 옹골차게 움직이는 근육들과 뜨겁고 벌떡거리는 심장을 느낍니다. 코맥 매카시는 존이 말을 사랑하는 이유가 인간을 사랑하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작가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소설의 주인공 시점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존 그래디 콜은 말을 사랑할지언정 다른 동물들에게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같습니다. 분명히 존 그래디는 닭이나 돼지, 소, 코요테, 늑대, 여우, 솔개 등을 자주 만나겠으나, 그런 동물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존은 그저 말들에게 관심을 쏟을 뿐이고, 말들을 돌보며 살아갈 뿐입니다. 왜 자신이 오직 말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지 존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요.



<모두 예쁜 말들>은 이른바 '국경 3부작'에 속합니다. <모두 예쁜 말들>은 시리즈의 첫째 이야기죠. 속편 <국경을 넘어>에서 주인공은 빌리 파헴이라는 소년으로 바뀝니다. 빌리 파헴은 말에게 별로 관심이 없으나, 대신 늑대에게 이끌립니다. 빌리는 밤중에 몰래 집 밖으로 나가고 늑대 무리를 바라봅니다. 빌리는 늑대 무리에게서 야성과 뭔지 모를 감성을 느끼죠. 빌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나, 아무에게도 자신이 늑대 무리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나중에 빌리는 덫에 사로잡힌 늑대를 만납니다. 빌리는 고민하죠. 늑대를 죽일 것인가? 이 늑대는 송아지를 잡아먹었고, 계속 가축들을 습격할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늑대를 죽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빌리는 늑대를 머나먼 야생에 풀어주기 원하고, 그래서 늑대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갑니다. 그러는 동안 빌리와 늑대는 온갖 소동들을 겪습니다. 심지어 몇몇 사람은 늑대를 보고 놀라 자빠집니다. 당연히 서부 목장 사람들에게 늑대는 악마 같은 야수일 겁니다. 하지만 빌리는 늑대와 기나긴 여정을 함께 하지 못합니다. <국경을 넘어>는 상당히 긴 소설이나, 늑대가 등장하는 분량은 비교적 짧아요. 늑대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죠.



<모두 예쁜 말들>과 <국경을 넘어>를 잇는 셋째 이야기는 <평원의 도시들>입니다. '국경 3부작'에서 <평원의 도시들>은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죠. 대미를 장식하는 소설로서 <평원의 도시들>에는 존 그래디 콜과 빌리 파헴이 함께 등장합니다. 소설의 초점은 주로 존 그래디에게 쏠립니다. 존 그래디는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나, 빌리 파헴은 그저 존 그래디를 보조할 뿐입니다. 아울러 존 그래디는 여전히 말들을 돌보는 반면, 빌리 파헴은 늑대에게서 관심을 끊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빌리가 늑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싶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늑대는 야생에서 살아갑니다. 늑대 무리를 보고 싶다면, 빌리는 야생으로 떠나야 합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 같은 야생 연구원이 되지 않는다면, 빌리는 사냥꾼이 되야 할 겁니다. 빌리에게는 그런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빌리는 그저 목장에서 일할 뿐입니다.


존 그래디는 다릅니다. 목장에서 말은 필수적인 동물이고, 존 그래디는 계속 여러 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카우보이들은 말을 타고 소들을 치거나 말들을 경매하거나 구입하거나 말들을 교배할 수 있죠. 목장에서 말을 다루는 지식은 아주 유용한 지식이고, 목장 주인은 존 그래디를 유용한 노동자로 대하죠. 존과 빌리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그런 차이점들 중 하나는 두 청년이 각자 초식성 가축과 야생 육식동물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기울였다는 사실입니다. 존 그래디는 말들을 돌볼 수 있으나, 빌리는 함부로 늑대를 만나지 못해요.



일반적으로 동물은 문명 내부에 존재하는 요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치, 법률, 경제, 산업, 문화, 종교 등을 모두 고려한다고 해도, 동물은 문명 내부에 존재하지 않아요. 문명은 인간들의 것이고, 문명 안에서 동물에게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공평하게 문명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문명은 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에게 봉사하는 피지배 계급의 것입니다. 주인에게 굴종하지 않는 노예, 영주에게 반박하는 소작농, 자본가에게 저항하는 노동자, 강대국에게 덤벼드는 원주민은 문명에서 쫓겨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과 문명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연과 문명은 쉽게 나뉘지 않습니다. 원시 공동체의 주민들은 문명인일까요, 야만인일까요. 다국적 기업들이 열대 밀림을 불태울 때, 오직 야생 동물들만 죽지 않습니다. 원주민들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습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 사람들이 도시를 확장했을 때, 오직 늑대나 퓨마나 곰만 죽지 않았습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역시 학살을 당했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연과 문명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동물은 문명 안에서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회학에서 환경 사회학이 막둥이인 이유 역시 비슷해요. 사회학자들이 자연 환경과 문명을 함께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흔히 우리는 문명(도시)과 야생(숲)이 대립한다고 간주합니다.]



야생 동물들과 달리, 문명 안에서 가축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문명은 적극적으로 가축들을 키웁니다. 가축이 인간에게 굴종하기 때문입니다. 가축은 그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가축은 인간들을 위해 살아갑니다. 흠, 어쩌면 누군가는 가축이 인간에게 굴종하기 때문에 머릿수를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실 야생 동물들은 멸종 위기에 몰리곤 하나, 가축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이 번성한다면, 가축 역시 머릿수를 늘릴 수 있습니다. 이는 유리한 생존 전략일지 모릅니다. 비록 우리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간다고 해도 인류 문명이 멸망하지 않는다면, 가축들은 멸종하지 않겠죠. 작물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옥수수가 인류를 길들였다고 말합니다. 옥수수가 인류를 길들였기 때문에 인류와 함께 옥수수는 멸종하지 않습니다.


뭐, 어떤 사람들은 이게 엉뚱한 이론이라고 말할지 모르겠군요. 중요한 것은 작물과 가축이 인류 문명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후반 이후, 말은 더 이상 유용한 가축이 아니나, 적어도 '국경 3부작'에서 말들은 유용한 가축입니다. 소설 속에서 여러 목장 주인들은 목장 사업이 끝물에 접어들었다고 말하나, 적어도 말을 좋아하는 카우보이가 활약할 여지들은 많았죠. 존 그래디는 말을 돌보고 말을 타고 달립니다. 말을 타고 신나게 달리는 장면에서 존 그래디는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가축이라고 해도, 말과 닭은 다르죠. 인간은 말을 타고 조종할 수 있으나, 닭을 조종하지 못합니다. 사실 인간은 조종하기 위해 닭을 키우지 않죠.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인류 역사에서 말이라는 가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말이 수송 수단이 아니라 다른 용도의 가축이었다면? 존 그래디가 말을 타고 신나게 달리지 못했다면? 과연 존 그래디가 말을 좋아했을까요? 말이 아예 가축이 아니었다면, 존 그래디가 말을 좋아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존은 닭이나 돼지나 소에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적어도 존 그래디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닭이나 돼지나 소를 좋아하지 않죠. 다른 야생 동물들 역시 존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고요.


따라서 말이 탈것이 아니거나 가축이 아니라면, 존은 말을 좋아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흠, 그런 가능성이 크죠. 어쩌면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존 그래디는 말을 좋아했을지 모릅니다. 존 그래디가 다른 동물들에게 관심이 없는 까닭은 그것들을 타고 다니지 못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말을 탄다는 행위는 그렇게 쾌감과 자유가 넘치는 행위입니다. 내 마음대로 이 커다란 동물을 조종할 수 있다는 감성. 이 커다란 동물이 내 말을 따른다는 감성. 어쩌면 누군가는 그걸 자동차를 운전하는 쾌감에 비유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말과 자동차는 다르죠. 말은 살아있고, 그래서 쾌감은 훨씬 커질 수 있어요.



저는 시점을 서부 소설에서 SF 소설로 옮기겠습니다. 현실 속에서 인류는 소나 말이나 코끼리나 낙타를 탈 뿐이나, SF 소설 속에서 인류는 훨씬 더 다양한 동물들을 탈 수 있습니다. SF 소설은 인식과 시야를 확장하기에 좋죠. 상상 속의 동물들에 비해 말이나 낙타나 코끼리는 시시한 탈것입니다. 100m에 이르는 외계 절지류 괴수는 어떨까요. 소설 <듄>에서 폴 아트레이드는 아주 거대한 모래벌레를 소환합니다. 그건 전설에 남을 것처럼 거대한 괴수였죠. 진동 막대기를 이용해 모래벌레를 소환한 이후, 폴은 두 갈고리를 이용해 모래벌레에 올라탑니다.


마침내 폴은 모래벌레를 조종했고, 기뻐서 신나게 춤추고 싶어했습니다. 폴은 그런 거대한 동물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고 느꼈죠. 가끔 사막 행성의 원주민들은 모래벌레 위에서 재주를 부리거나 기뻐서 춤추고, 그 탓에 비참한 사고를 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폴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써야 했어요. 어쩌면 존 그래디 콜 역시 그런 쾌감을 누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결정적인 근거는 없으나, 저는 존 그래디가 그런 쾌감을 중시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존은 다른 동물들에게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겠죠. 타고 다니는 쾌감이 없기 때문에. 어릿광대도 아니고, 닭을 타고 다니지 못할 노릇 아닙니까.



말과 닭은 다릅니다. 닭은 우리에게 조종할 수 있다는 쾌감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닭은 탑승 용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말과 늑대는 다릅니다. 늑대는 문명 바깥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더욱 확대한다면, 우리는 거대 생체 병기를 이야기할 수 있겠죠. 생체 병기는 로망입니다. 거대 생체 병기는 더욱 로망입니다. 왜 그럴까요? 괴수가 로망이기 때문에 거대 생체 병기가 자동적으로 로망이 될까요? 스콧 웨스터펠드가 쓴 소설 <레비아탄> 시리즈에 등장하는 레비아탄이나 베헤모스는 분명히 거대 괴수입니다. 그래서 레비아탄이나 베헤모스에게서 로망이 넘치는 걸까요? 어쩌면 누군가는 거대한 생명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레비아탄이나 베헤모스에게서 로망을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들이 인간에게 복종하고 인간이 그것들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로망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존 그래디 콜이 닭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인간들이 아주 거대한 개조 나무를 키울 수 있다고 해도, 인간들은 생명체를 조종한다는 욕구를 충족하지 못할 겁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아요. 인간들은 개조 나무를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으나, 조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베헤모스 같은 거대 괴수를 조종할 수 있죠. 인간들은 베헤모스 같은 거대 괴수를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죠. 그런 행위는 인간이 거대한 생명체를 정복했다는 쾌감을 선사할지 모릅니다.



[선박을 휘감고 침몰시키는 크라켄. 인간은 병기로서 거대 바다 괴수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문단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동차를 조종하는 행위 역시 뭔가를 조종한다는 쾌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대 로봇을 조종하는 행위 역시 쾌감이 되거나 정복 욕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대 로봇을 조종하는 것과 거대 괴수를 조종하는 것은 서로 다를 겁니다. 코맥 매카시가 <모두 예쁜 말들>에서 묘사한 것처럼 거대 괴수에게는 옹골찬 근육들이 있고 뜨겁고 벌떡거리는 심장이 있습니다. 거대 괴수는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거대 로봇은 그렇지 않아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말을 타는 것은 다릅니다. 거대 로봇을 조종하는 것과 거대 괴수를 조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건 거대 괴수가 거대 로봇보다 더 로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로망에서 우열을 가릴 수 있겠어요. 하지만 거대 괴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것을 정복하는 감성은 죽은 것을 정복하는 감성과 다릅니다. 살아있는 것을 정복할 때, 쾌감이 훨씬 커지지 않을까요. 뭐,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느끼든, 거대 생체 병기는 살아있는 강력한 것을 길들인다는 쾌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건 너무 강렬할 쾌감일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를 통제한다는 것.



생명체를 통제하고 조종하고 정복하고 싶다면, 인간은 그 생명체를 문명 안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늑대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으나, 가축 말은 인간에게 복종합니다. 늑대와 말처럼, 우리는 베헤모스와 야생적인 거대 괴수를 대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사례로서 고지라가 어떨까요. 고지라는 베헤모스와 대조되는 좋은 사례가 되겠죠. 고지라와 베헤모스는 똑같이 거대 괴수입니다. 하지만 양쪽은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은 고지라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애쓴다고 해도, 고지라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인간이 뭐라고 원하든, 고지라는 자유롭게 행동할 겁니다.


어쩌면 인간은 고지라를 유인하거나 자극하거나 기만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조종과 명령이 아니죠. 고지라는 문명 바깥에 존재하고, 늑대가 문명과 적대하는 것처럼, 고지라는 문명을 적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존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류가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인류는 고지라를 비롯해 거대 괴수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베헤모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 <베헤모스>에서 영국 해군은 얼마든지 베헤모스에게 명령을 내리고 독일 순양 전함을 침몰시킬 수 있습니다. 인류는 베헤모스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베헤모스가 징그럽고 야생적인 촉수 괴수라고 해도, 베헤모스는 인류 문명에 속했습니다.



인간들은 베헤모스와 공존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명령할 뿐입니다. 심지어 영국 해군은 오스만 해군에게 베헤모스를 빌려주려고 계획했습니다. 베헤모스는 거래가 가능한 대상입니다. 인간들은 거대한 생명체를 조종하고 파괴적인 능력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그건 상당한 쾌감이 되겠죠. 베헤모스에게는 그런 쾌감이 있습니다. 베헤모스는 가축입니다. 이건 아주 거대한 군사용 가축입니다. 반면, 고지라에게는 그런 쾌감이 없습니다. 고지라는 야생 동물입니다. 이건 아주 거대한 야생 동물입니다.


똑같이 거대 괴수라고 해도, 이렇게 고지라와 베헤모스는 달라요. 존 그래디가 말을 타고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영국 해군은 베헤모스를 조종하고 쾌감을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빌리 파헴이 늑대와 계속 여행하지 못한 것처럼, 목장 사람들이 늑대를 쫓아내는 것처럼, 고지라는 문명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만약 목장 사람들이 늑대와 어울리고 싶다면, 목장 사람들은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류 역시 거대 괴수와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고지라와 베헤모스가 똑같이 순양 전함을 침몰시킨다고 해도, 양쪽은 서로 다른 느낌을 풍길 겁니다. 영국 수병들은 독일 순양 전함이 침몰하는 장면에서 쾌감을 느낄지 모르죠. 베헤모스가 영국 문명의 가축이기 때문에.



하지만 고지라가 순양 전함을 침몰시킨다고 해도, 사람들은 쾌감을 느끼지 못하겠죠. 순양 전함이 어느 국가 해군 소속이든, 사람들은 쾌감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고지라가 미국 순양 전함을 침몰시킨다고 해도, 미국과 적대적인 러시아 사람들이 그걸 좋아하겠어요? 나중에 고지라는 러시아 함대를 수장시킬지 모릅니다. 고지라는 어떤 인류 문명에 속하지 않았고,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2014년 <고지라>에서 거대 괴수들을 유인하기 위해 사람들은 뻘짓들을 벌이죠. 이 영화는 자연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뻘짓들을 벌이는 인간 군상을 보여줍니다.


사실 영화 분위기가 장중하기 때문에 쉽게 눈치채기가 힘드나, 사람들은 연이어 뻘짓들을 벌입니다. 심지어 세리자와 박사처럼 핵심 주제를 이야기하는 등장인물조차 뻘짓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어쩌면 <고지라: 괴수왕>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무리하게 라돈이나 킹기도라를 자극하거나 유인하거나 기만할지 몰라요. 그건 엄청난 재앙을 부를지 모르죠. 문명이 자연을 함부로 다루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과 문명이 부딪히거나 뒤섞일 때, 이걸 가장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학문 분야는 환경 사회학일 겁니다.



[이것 역시 강인한 거대 괴수이나, 인간은 이걸 통제하지 못하고 정복 욕구를 느끼지 못하겠죠.]



만약 우리가 거대 괴수를 이용해 환경 사회학적인 주제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저는 고지라가 베헤모스보다 훨씬 환경 사회학과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환경 사회학은 인류 사회와 자연 환경이 어울리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고지라>에서 인류는 고지라와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따라서 고지라는 자연 환경을 대변할 수 있습니다. <베헤모스>는 다릅니다. 이 소설에는 자연 환경이 없습니다. 베헤모스는 영국 해군에 속했고 인류 문명에 속했습니다. 영국 해군은 베헤모스와 공존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아요. 그들은 베헤모스를 조종하는 방법을 배우죠. 그래서 베헤모스는 자연을 대변하지 못하겠죠. 우리가 자연 환경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나요? 우리가 자연 환경을 '조종'할 수 있나요?


물론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과학 기술이 아주 발달한다면, 우리는 자연 환경을 조종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런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그저 국지적인 영향을 미칠 뿐입니다. 심지어 강대국들이 전면 핵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전략 무기들은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동물상과 식물상이 대부분 자연 생태계를 차지한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훨씬 거대합니다. 생물 다양성과 생물량을 따진다면, 우리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동물상과 식물상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두 통제하거나 살상하지 못합니다. 인류는 지구 생태계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지구 생태계를 조종하지 못합니다. 인류는 그저 어느 정도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인류는 자연 환경을 공존하는 대상으로 바라봐야 할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연 환경을 너무 높이 띄우거나 너무 얕잡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죠.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에서 밸 플럼우드가 지적하는 것처럼, 심지어 일부 생태 사회주의자들조차 자연 환경을 인간이 장악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환경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조종이나 명령이나 장악보다 '공존'이라는 단어를 주시해야 할 겁니다. '공존'이라는 단어는 베헤모스보다 고지라에게 훨씬 어울리고요. 우리는 가축과 공존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포장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저 가축을 부려먹을 뿐입니다. 반려견 같은 용어는 망상입니다. 우리는 절대 개들을 반려하지 않습니다. 개들이 인간들과 동등한 위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사실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는 '자연 환경과의 공존'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소재입니다. 자연 환경은 다소 추상적인 대상입니다. 우리는 자연 환경이 거대하다고 생각하나, 그것을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합니다. 생태적인 지식이나 감성이 부족하다면, 사람들은 자연 환경이 막연한 대상이라고 느낄 겁니다. 반면,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는 거대한 실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고지라는 자연의 힘이 응집된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 환경과의 공존을 이야기한다면, 고지라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블로그 역시 계속 고지라를 떠드는 중이고요.


뭐, 그런 이유 이외에 근본적으로 거대 괴수는 로망이나, 거대 괴수가 로망이 되는 이유 역시 그게 자연의 힘이 응집된 상징이기 때문일 겁니다. 현실 속의 인류가 계속 무기들을 개발한다고 해도 거대 생체 병기는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병사들이 거대 생체 병기를 타고 다니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전장을 차지하는 주역들은 전차들이나 전함들이나 전투기들이겠죠. 하지만 만약 인류가 거대 생체 병기를 만든다면, 어떤 사람들은 거대 생체 병기에서 새로운 쾌감을 발견할지 모르죠. 그건 <모두 예쁜 말들>에서 존 그래디 콜이 느낀 그런 쾌감일 겁니다.



음, 어떤 사람들은 '생명체를 조종하는 쾌감'이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쾌감은 존재합니다. 종종 말이나 코끼리를 타는 사람들은 자신의 엉덩이 아래에서 육중한 동물이 움직인다는 사실, 자신이 육중한 동물을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낍니다. 호랑이처럼 사나운 야수를 길들였을 때, 동물 조련사들 역시 비슷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전반적인 현상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일반적인 권력 욕구 역시 그런 것일지 모르죠. 인간 역시 생명체이고, 인간을 복종시키고 인간을 조종하는 권력은 정복 욕구를 충족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거대 생체 병기를 조종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그런 쾌감을 느낄 겁니다. 뭐, 이런 주장이 옳지 않다고 해도, 어쩌면 베헤모스 같은 거대 생체 병기는 환경 사회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 모르죠. 영국 해군은 베헤모스를 길들였어요. 이런 관점으로 자연 환경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인간이 자연을 길들인다고 오해할지 모르죠. 저는 우리가 이런 시각을 베헤모스 같은 거대 생체 병기와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환경 사회학 관점에서 베헤모스와 고지라는 서로 대립할지 모릅니다.



[위풍당당한 자연의 힘. 세리자와 박사가 말한 것처럼, 인류는 자연을 통제하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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