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옥타비아 버틀러 (41)
SF 생태주의
"내가 쓰는 소설들은 언제나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재미있다, 잘 읽힌다는 독자들의 코멘트는 나에게 최고의 찬사였다. 문학적 성취나 평론가들의 호평은 내 알 바 아니었다." 창작 서적 에서 이렇게 이재익 작가는 말합니다. 이재익 작가는 자신이 언제나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쓴다고 말합니다. 재미있다는 반응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이재익 작가는 자신에게 예술을 위한 예술, 문학적인 성취 따위가 절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여기에 동의할지 모릅니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재미가 최고이고 다른 것들이 절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작가 지망생들은 재미를 위해 다른..
솔로몬 노섭이 쓴 은 문학입니다. 년은 언어로 이루어진 책이고, 노예 제도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을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종종 사람들은 문학과 소설이 동의어라고 생각합니다. 조지 엘리엇(메리 에반스)이 쓴 는 문학이고 동시에 소설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쓴 은 문학이고 소설입니다. 업튼 싱클레이어가 쓴 은 문학이고 소설입니다. 처럼,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은 끔찍한 노예 제도를 생생하게 묘사했고, 역시 문학이고 소설입니다. 그래서 이 문학이고 동시에 소설이 될 수 있나요? 비평가들이 어떤 문학을 소설이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소설은 허구입니다. 소..
소설 에는 아라키스 행성이 있습니다. 아라키스 행성에는 사막 원주민 프레멘들이 있습니다. 프레멘들은 샤이-훌루드라는 창조자를 숭배합니다. 문제는 샤이-훌루드가 비단 신앙 대상만 아니라 거대한 모래 벌레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프레멘에게 샤이-훌루드는 신앙 대상 창조자를 가리키고 동시에 거대한 모래 벌레를 가리킵니다. 프레멘이 샤이-훌루드라고 말할 때, 이건 신앙 대상을 가리키거나 모래 벌레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프레멘이 경건하게 특정한 목소리로 샤이-훌루드라고 말한다면, 이건 모래 벌레보다 신앙 대상 창조자를 가리킬 겁니다. 샤이-훌루드라는 단어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해도, 프레멘은 경건하고 특정한 목소리로 샤이-훌루드가 창조자라고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 프레멘이 목청을 가다듬..
"주인님이 은둔을 끝내신다면, 저는 주인님과 침팬지를 짝지을 수 있어요." 영화 에서 이렇게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말합니다. 초반부에서 브루스 웨인은 은둔하는 중이었습니다. 에서 조커가 너무 배트맨을 괴롭혔기 때문에,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활동을 그만두고 은둔하는 중이었습니다.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브루스 웨인이 다시 배트맨이 되기 원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도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은둔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가기 원합니다. 어느 날 브루스 웨인은 어떤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고, 마침내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은둔을 끝낼 거라고 예상합니다. 알프레드는 약간 비아냥거리며 브루스를 바깥 세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브루스와 침팬지를 짝지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사에서 침팬지는 모욕과 조롱에 가깝습니다. 인간처럼..
[여자는 자신이 살아있는 행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행성은 자신이 어머니(여자)라고 자각합니다.] 반다나 싱이 쓴 단편 소설 에서 소설 주인공 아내는 정말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이 행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행성은 '살아있는 행성'입니다. 어쩌면 소설 제목은 가 되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행성과 죽은 행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이언스 픽션에게 이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행성이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어있는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유일하게 지구가 살아있는 행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양계 안에서 살아있는 행성은 오직 지구뿐입니다. 어쩌면 화성이나 유로파 바다에는 미생물 생태계가 있을지 모르나, 아직 과학자들은 생명 현상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른 외계 행성..
[SF 작가는 외계 버섯 생태계를 직접 겪지 못합니다. 작가가 외계 버섯 생태계를 상상하지 말아야 하나요?] 는 소설 창작 안내 서적입니다. 에서 작가 김탁환은 어떻게 작가가 소설을 쓰는지 소개합니다. 김탁환은 소설 창작 과정을 크게 네 부분들로 나눕니다. 첫째 부분에서 김탁환은 소설과 이야기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소설을 쓰기 전에, 작가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느껴야 합니다. 둘째 부분에서 작가는 본격적으로 판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자료들을 모르고, 답사를 떠나고, 초고를 준비합니다. 둘째 부분에서 작가는 아직 소설을 제대로 쓰지 않으나, 본격적인 소설 쓰기처럼 이런 준비 과정은 중요합니다. 준비 과정이 어긋난다면, 작가는 돌이키지 못하는 강을 건널지 모릅니다. 심지어 작가는 소설을 통째로 고치거..
"인간의, 인간에 관한, 인간에 대한 SF는 없다." 예전에 이렇게 alt.SF 웹진은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2014년 8월 기사에서 alt.SF 웹진은 '결국 사이언스 픽션 역시 보편적인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주장에 크게 반박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사이언스 픽션이 자랑하는 정수를 버립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개인과 개인 수준을 넘어 인간 사회, 인류라는 종,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지성, 아니면 우주 그 자체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장르입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오직 보편적인 인간들만 이야기한다면, 이건 망원경으로 샬레를 들여다보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자랑하는 재미는 심지어 마지막 한 방울조차 SF 요소에 들었습니다. 이렇게 alt.SF 웹진은 주장하고 보편적인 인..
"난 남자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하게 된 것을 사랑할 뿐이야." "그건 사랑이 아니라 관성이지." 소설책 뒷표지에서 박문영이 쓴 은 위와 같은 대화를 보여줍니다. 소설 에서 남자들은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남자에게 기반하는 가부장 문화 역시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자신이 잘났다고 사방을 향해 꽥꽥 소리지르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집에서 여자들이 살림을 맡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군대에서 자신들이 고생한다고 나불거리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여자들을 추행하거나 폭행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약한 사람들을 헐뜯고 낄낄거리지 못합니다. 더 이상 남자들은 아무것이나 ..
[산소를 뿜는 조류들.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은 생태계가 스스로 화학 질서를 구축한다고 묘사합니다.] 비디오 게임 은 우주 생존을 이야기합니다. 게임 제목이 붉은 글씨로 Not을 강조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산소 '미'포함입니다. 우주에서 인간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인간이 우주 개척 기지를 짓는다고 해도, 여기에는 산소가 없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복제 개체들을 이용해 우주 개척 기지를 짓고, 생명체들을 키우고, 산소를 공급하고, 전력을 생산하고, 식량들을 얻고, 질병을 관리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나 복잡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우주 개척 기지를 확장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엄청난 과제들을 맡아야 할 겁니다. 은 여유 시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계속 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소설 는 시간 여행 연애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소설 속에서 두 연인의 연애는 주된 분량을 차지합니다. 재미있게도 종종 두 연인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남자가 시간 여행자이고 다양한 시간대들을 들락거리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를 만났을 때, 여자는 남자를 알아봤으나, 남자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시간대가 (상대적으로) 과거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상대적으로) 미래에서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남자는 여자가 누구인지 압니다. 남자가 고정적인 시간대를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남자는 계속 여자의 여러 시간대들에 간섭하고,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두 연인은 연애를 즐깁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꽤나 골치가 아픈 상황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꽤나 두근거리고 설렙니다. 아직..